북 리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서평

L i v i n g R e m i n d e r 2016. 8. 3. 18:04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게르하르트 베어 저 | 안티쿠스

도서관에서 우연히 대출하게 된 간략한 에크하르트 연구서이다.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가는데 있어서 영성 혹은 신비의 역할이 궁금하던차였다.
책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에크하르트는 이성과 학문과 담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스콜라철학을 깊이 연구했고,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2번 교수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몇 가지 대조되는 단어들이 눈에 띄었다. 행위와 존재, 학문적 스승과 삶의 스승, 명상의 길과 활동의 길, 성서해석에서 역사적 비평과 '오늘 그리고 여기'이다. 헨리 나우웬이나 유진 피터슨에게 강조되는 오늘 그리고 여기의 사상은 신비주의적 연장선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버리고 떠나 있음은 이 책에서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로, 에크하르트의 저작과 사상에 중요한 개념임을 알 수 있었다. 가난, 겸손, 자유와 연결되는 개념이다. 특히 가난에 대한 언급에서 신을 위해 산다는 생각, 모든 앎에 대한 것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심오한 사상이기에 더 깊이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 10점
게르하르트 베어 지음, 이부현 옮김/안티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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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신비주의자가 만약 완전히 침묵할 수 없다면,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언어를 찾아야 할 것이다. 곧 비유적 언어, 상징적 언어, 대담하게 비교하는 언어, 모순을 가진 언어(역설),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부정의 언어등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신비적 경험을 한 사람은 역설적 언표 방식을 사용한다. 역설적 표현 방식은 "신은 비-인식 가운데서 더욱더 적절하게 인식될 수 있다."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로 다소 이해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신을 찾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분을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라고 에크하르트가 말할 때도 그렇다... "우리는 모든 사물에서 신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의 심정은 마음속에, 그리고 온갖 노력 속에, 그리고 사랑 속에 신을 항상 현재하도록 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18-19

이러한 인식은 단지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것이 아니라, "심정에" 깃드는 것이다. 곧 인격의 중심부에 그리고 인간의 본질 깊숙이 자리하는 것이다. 인간 전체가 그러한 경험과 인식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인간 전체가 신비적 사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에 비한다면, 바르게 자리 잡고, 참되게 머무르기 위한 지식에 지나지 않는 신학은 별 볼일 없게 된다. 신약성서는 완전한 "버림" 또는 그리스도를 따름에 있어 사고방식의 전환을 위한 전제를 "방향전환", 곧 전 존재를 갖고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라 한다. 20

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자는 단지 외적 방식으로만 교회 공동체에 귀속되는 것 또는 그리스도교적 사명을 오직 역사적으로 제약된 사태로, 관습이 된 사태로 그리고 말과 글과 전례로 굳어진 사태로 여기는 것 등에 만족하지 않는다. 신비주의자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오늘 자각하고 그곳에서부터 삶을 영위하는 실존적 신앙인이다. 20

"비록 이 양 측면이 서로 접점을 갖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중적 노선으로 독일 신비주의는 전개된다. 한편으로는 철학적 신비주의(사변적으로 사유하는 신비주의)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배신비주의(사랑하고 실천하는 신비주의)이다. 33

"우리는 성스러움을 행위 위에 기초 지우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우리는 성스러움을 존재 위에 기초 지워야 한다. 왜냐하면 활동이 우리를 성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활동을 성스럽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 "인간은 모든 것에서 신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신을 현재하는 분으로 마음 속에 갖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투쟁 속에서도 사랑 속에서도 그러해야 한다. 당신이 교회나 기도실에 있을 때, 당신이 신에게 얼마나 향하고 있는지 주목해 보라. 그리고 이 마음을 군중 가운데로, 불안정 가운데로, 또한 고르지 못한 날들에게로 똑같이 가져가라." 48-49

우리가 본 것과 같이 에크하르트의 활동은 대학 생활과 실천적 사목자, 곧 사람을 인도하는 생활 사이를 오가면서 전개된다. 55

"바로 이러한 점에서 에크하르트는 신학자이면서 철학자였다. 그에게서 가르치는 이론가(학문의 스승 Lesemeister)의 역할과 그리스도교적 경건성을 실천하는 사람(삶의 스승 Lebenmeister)의 역할을 분리할 수 없듯이 그에게서 "신비주의자"이면서 스콜라철학자라는 이러한 이중성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73

"텅빈 마음이란 바로 어떤 것에 의해서도 동요하지 않고, 어떤 것에도 묶여 있지 않은 그러한 마음이다. 텅 빈 마음이란 바로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것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묶이지 않는 마음이다. 텅 빈 마음이란 결코 자신의 것을 바라보지 않는 마음이다. 텅 빈 마음이란 신의 가장 사랑스런 뜻에 온전히 침잠하는 것이며, 자신의 것에서 벗어난 마음이다. 사람은 이런 마음 가운ㄷ에서 자신의 힘과 자신의 능력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행위라 하더라도 결코 수행할 수 없을 것이다." 92

외적 내적으로 수행되는 그냥 놓아두고 있음Lassen의 유익성을 에크하르트는 동일한 맥락에서 거듭 강조한다. 그는 의지를 버리라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의지와 자기 자신을 그냥 놓아두고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을 실제로 버리고 그냥 놓아두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이 자유롭게 소요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게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93

따라서 에크하르트는 "당신이 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나가 되어라!"고 우리를 고무시킨다. 120

또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또 다른 중요한 통찰을 전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 인식과 신의 인식의 긴밀한 일치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영적 심리학(초인격적 심리학)을 새로운 빛으로 가져가도록 하는 하나의 통찰이다. "영혼이 신을 인식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영혼은 신에 대한 인식과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될 것이다." 122

설교자 에크하르트는 자신의 설교 주제의 공통분모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설교할 때 나는 언제나 첫째로 버리고 떠나 있음, 곧 인간은 자기 자신과 모든 사물로부터 떠나서 자유로워야 한다는 사실에 대하 말하려고 했다. 둘째로 인간은 또다시 단순한 선성, 곧 신 가운데로 되돌아가 그와 하나의 형상이 되어야 한다고 자주 말하고자 했다. 셋째로 인간은 신이 그 영혼 속에 불어넣어 준 위대한 고귀성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고 자주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사람이 놀라운 방식으로 신에 도달할 수 있음을 자주 말하고자 했다. 넷째로 신적 본성의 순수함에 대해 자주 말하고자 했다. 그리고 신적 본성에 자리 잡고 있는 그러한 광채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주 말하고자 했다." 124

"그 까닭에 여러분은 눈에 보이는 상인 겉모습을 벗어나서 형태가 없는 존재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의 정신적 위로는 아주 미세한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정신적 위로는 아주 미세한 종류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의 정신적 위로는 신체적 위로를 물리치는 사람 이외의 그 어떠한 사람에게도 결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130

에크하르트의 버리고 떠나 있음의 고귀성과 유익성에 대한 섬세한 이론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귀결을 갖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버리고 떠나 있음은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양심을 순수하게 하며, 심정에 불을 붙여 뜨겁게 하며, 정신을 일깨우며, 동경하는 것을 빠리 얻게 하며, 신을 인식하게 하며, 피조물로부터 벗어나게 해, 신과 하나 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는 보다 소박하고 생동감 있게 말하면, "당신들을 이러한 완전성으로 옮겨다 줄 수 있는 가장 빠른 동물이 바로 고통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최대의 비통함 가운데 서 있는 자 이외에 그 어느 누구도 더 이상 영원한 달콤함을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131

설교자는 단지 이곳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독자적인 성서의 자유로운 변형, 곧 성서의 자유로운 해석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이는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관심을 갖는 것은 보고된 자료의 역사적 지평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에게는 "지금 그리고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선권을 갖는다. 오늘의 인간의 영혼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결정적인 것이다. 그 때문에 복음서의 각각의 장과 절은 해석되어야 할 상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알레고리적인 성서 해석의 도상에서 이러한 지금과 여기가 보이고 체험될 것이다. 137

따라서 명상적인 마리아가 아니라, 마르타가 신비주의적 인간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탈아적인 "행복감, 종교적 고양의 달콤함"에 틀어박힌 인간이 아니라, 오히려 "성숙하고 확고한 덕과 걱정 없는 마음 가운데 모든 것에 방해 받지 않고" 세상 한가운데서 활동하는 인간이 신비주의적 인간의 전형인 것이다. 따라서 에크하르트의 의미에서 신비주의자의 길은 오직 명상의 길, 곧 안으로 향하는 길만으로 뻗쳐 있는 것이 아니며, 그 길의 절대적 귀결인 활동적 길, 곧 바깥 일로 향하는 길로 뻗어 나가야 한다. 세계 실현을 방치해서는 안된다. 마치 그것을 가치 없는 창조인 양 여겨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을 가치 없는 사람으로 치부해서도 안 된다.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청중들에게 활동적으로 그리스도를 따르기위한 충동을 제공하는 일이었다. 149

"많은 단순한 사람들은 신이 저기에 있고 자신들은 여기에 서 있는 것으로 신을 보아야 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과 나, 우리는 하나이다. 인식을 통해 나는 신을내 속으로 들어오게 하는 반면 사랑을 통해서 나는 신 안으로 들어선다." 162

빈번하게 사용되는 "버리고 떠나 있음"이라는 에크하르트의 용어가 바로 이러한 정신적인 것 그리고 정신적 가난에 상응하는 말마디이다. 168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도 진리를 위해서도 그리고 신을 위해서도 살지 않아야 한다.... 가난해지려는 사람은 그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진리를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신을 위해서도 살지 않는다는 것을 전적으로 모르는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더 나아가는 그는 아는 것 모두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그리하여 신이 자기 가운데 살고 있는지조차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느끼지 못해야 한다. 더 나아가 그는 자신 가운데 살고 있는 모든 앎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174

서양에서 특히 독일어 사용권역에서 수십 년 동안 강한 반신비주의적 입장이 확산되었다. 칼 바르트의 초기 변증신학의 입장에서 유래하여 슐라이어마허로 향하는 에밀 부르너의 기획 저서 '신비주의와 말씀'은 "신비주의냐 말씀이냐'는 두 개의 선택지를 내놓는다.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