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예수님의 화 선언. '겉은 깨끗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겉으로는 거룩하고 경건한 체 하지만 내면은 욕심과 죄로 가득한 이중성을 지적하신다. 이런 이중성을 버리고 내면의 거룩하지 못함을 꾸미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도 좋다. 그러나 내면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 최상이다. 내면의 욕심과 죄를 버리고 거룩하게 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묵상과 기도가 가장 좋은 훈련의 방법이 될 것 같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조상들과 같지 않게 자신들은 선지자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나 실상은 참된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죽일 궁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참 어리석고 미련하다 하나 과연 우리는 어떠한가? 지금 이 시대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신다면 나는 그분을 거역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는가? 지금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다면 어떤 일들을 감당하실까? 나 자신의 위치와 기득권과 안정감에 연연하지 않아야 주님이 하실 만한 일들을 반대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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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내에서 한 지체가 죄를 범하면 처음에는 한 사람이, 그 다음에는 두 세 사람이, 그 다음에는 교회 전체가 권고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한 사람을 정죄하려는 위험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누가 죄를 지으면 먼저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거나 함께 그 사람을 씹는 경향이 많다. 사실 한 사람을 직면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죄를 지으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 우리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죄를 직면하게 하고 회개하려고 하는 것이 올바른 공동체의 모습이다.
 일흔 번씩 일곱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은 490번 용서하라는 의미보다는 그만큼 온전하게 끝까지 용서하라는 의미로 본인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큰 용서를 받은 존재이며,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주 고백하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 고백을 할 때마다 마음의 찔림이 있다. 나를 힘들게 하기에 더 이상 미워하지 않으려 세워놓은 마음의 벽까지도 허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도 나를 용서하신 그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그동안 쌓여진 마음의 벽을 또 허무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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