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약자와의 관계를 조준하는 말씀


암8:1-14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4절)


하나님께서는 '여름 과일 한 광주리(카이쯔)'를 보이시며 '끝(케쯔)'을 말씀하신다. 절대 다시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가난한 자를 삼키고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날에 큰 고통과 애통이 땅에 가득하게 될 것이며,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로 모두 쓰러질 것이다.


식언하지 않으시고, 뜻을 돌이키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종종 이상하게도 심판을 말씀한 이후에 하나님께 백성들이 부르짖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셨다. 그런데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말씀하신다. 그야말로 끝장이다. 우리는 용서와 긍휼이 없으면 안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심판의 이유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착취와 이익을 위한 부정 때문이다. 속이는 저울, 부당한 임금, 먹지 못할 음식 판매이다. 제사와 예물이 심판의 근거가 아니다. 일상과 삶이 문제다. 일상 속에서 어려운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런 문맥 속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새롭게 이해된다. 본문을 쪼개는 말씀, 성실한 묵상과 연구에 따른 말씀, 진실한 말씀과 같은 텍스트와의 관계가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일상에서의 삶의 방식이, 즉 일상 속에서 약자와의 관계에 초점이 있다. 즉 이런 잘못을 조명하고 죄를 지적하며 회개하게 하는데 정조준 된 말씀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내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가? 일상 속에서 약자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설교를 전했을 때의 시선과 반응이 부담스럽다. 두렵다. 이런 모습의 내가 부끄럽다. 본문은 나의 설교가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쓰러뜨리데 가까움을 지적한다. 아모스라는 리트머스지는 나의 메세지가 목마름에 갈증을 더하는 소금물이라고 결과를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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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 예배를 심어라

암5:18-27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24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을 자신들이 구원받고 대적들이 심판받는 날로 당연시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은 당황스러운 날이다. 자신들의 죄가 심판받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심판이 사랑과 공의를 잃어버린 예배 때문이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끌려가게 하신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위험성을 지적하신다. 그러다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황당할 수 밖에 없는 것과 꼭 같다. 하나님을, 구원을, 심판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자. 구원과 은혜가 자동적으로 주어지리라, 심판이 응당 피해가리라 여기지 말자. 그러다가 황당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 황당한 심판이 주어지는 이유는 제사와 삶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 제사드리고 제물을 드리고 십일조를 드려도, 그 삶에 공의와 정의가 없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역겨워하신다. 무너진 삶, 공의와 정의를 회복해야 한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라'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 말씀에 적용하면 이렇다. 일상 속에 예배를 심어라.

이것은 묵상에도 적용된다. 묵상과 삶이 일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실 것이다. 일상 속에 묵상을 심어야 한다. 말씀묵상으로 만족할 수 없다. 여기에 안주하면 안 된다. 말씀실천이 살 길이다. 그것이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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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오심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때이다. 홍수 때에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일상적인 일들을 하고 있었으나 급작스런 멸망을 경험하였듯이 예수님의 오심도 그러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오심을 깨어서 준비한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주인이 맡긴 일을 주인이 올 때 잘하고 있는 종이다. 맡겨진 일에 대한 신실성과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보든 안보든 그 일을 해야할 것이고, 주인이 올 때까지 해야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오심을 깨어 준비한다는 것은 맡겨진 사명을 신실하게 마지막까지 감당하는 것이다. 나에게 주신 목회의 사명 신실하게 끝까지 감당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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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만 인식하였는데 비해, 베드로는 예수님을 올바로 인식하고 고백하였다.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베드로는 아직도 부족하고 연약한 상태였지만 지금의 이 고백은 진정성이 있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번화하고 로마황제의 도시라는 배경을 생각할 때도 이 고백은 믿음의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한 나의 고백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주가 되시고 그리스도가 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면 나의 삶은 어떠해야겠는가?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해 삶을 드리고 그분을 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오늘 하루 순교의 현장이 아니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자리에서 나는 어떻게 내 삶을 드릴 수 있을까? 주어진 일에 주님께 하듯 섬기고,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이다. 마음 뿐이었던 전화심방을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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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은 표적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와 태도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요나의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인데 이것은 표적 중의 표적이다.
   물론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냥 허무한 죽음으로 보여졌겠지만..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표적 중의 표적이 나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주는 것이 멈치지 않고
   더 믿음 가운데 굳건히 서 나가기를 원한다.

2.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 원하나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아보인다.
하루하루 주어진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뭔가 하나님의 뜻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은 뭔가 일상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어야 할까?
특별하고, 모험을 하고, 결단을 내리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적이고, 반복적이며, 계속 이어가고,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일도 나의 자리에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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