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거룩한 삶. 예배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사건이자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놀라운 자리. 회개와 속죄와 감사와 헌신의 자리. 두려움과 눈물과 찬송과 탄성의 자리.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고귀함을 발견하게 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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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부분이다.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고 또 저주하며 맹세하기까지 한다. 예수님을 자신의 안녕이나 유익과 배치될 때에는 부인하며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는 것은 나의 삶에서도 종종 일어나지 않는가? 예수님은 나의 안녕과 유익을 위해서 돌아가셨기에 나도 예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마땅하다.
 닭이 울자 베드로는 자신이 부인했다는 것을 깨닫고 통곡하였다. 눈물을 흘리기는 했으나 여전히 예수님께 가지 못했고, 그 이후에도 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전한 회개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그래도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고 뉘우치는 모습이 있다는 점에서는 유다와 다르다고 보여진다. 회개는 기회이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큰 잘못일지라도 예수님은 찾아오시고 회복시켜주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회개하는 것이 중요하다. 삶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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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내에서 한 지체가 죄를 범하면 처음에는 한 사람이, 그 다음에는 두 세 사람이, 그 다음에는 교회 전체가 권고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한 사람을 정죄하려는 위험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누가 죄를 지으면 먼저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거나 함께 그 사람을 씹는 경향이 많다. 사실 한 사람을 직면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죄를 지으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 우리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죄를 직면하게 하고 회개하려고 하는 것이 올바른 공동체의 모습이다.
 일흔 번씩 일곱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은 490번 용서하라는 의미보다는 그만큼 온전하게 끝까지 용서하라는 의미로 본인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큰 용서를 받은 존재이며,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주 고백하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 고백을 할 때마다 마음의 찔림이 있다. 나를 힘들게 하기에 더 이상 미워하지 않으려 세워놓은 마음의 벽까지도 허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도 나를 용서하신 그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그동안 쌓여진 마음의 벽을 또 허무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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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1:16-30]
기적이 회개와 믿음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마음이 어떠한가가 중요하다. 스스로 지혜있다하고 슬기롭다 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겸손한 마음, 즉 배우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복음이 나타난다. 하나님 앞에서 내 경험과 느낌과 생각이 이렇다 말하기보다 흰도화지를 준비하여 배우고 채워가는 하루가 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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