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_구약/룻기2015. 12. 19. 14:33

마땅한 것을 넘어서기

룻1:1-14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14절)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지독한 상실과 슬픔을 경험한다. 약속을 붙들지 않고 양식을 쫓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나오미에게, 그녀를 포함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저들을 돌보시고 양식을 허락하신다. 상실과 슬픔에서 채움과 기쁨으로의 반전은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에 가능하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인생의 운동장이다. 놀이터이다. 넘어지고 깨지고 다쳐도 그 안에서 우리는 자라고 성숙한다.

오르바와 룻은 떠나라는 권면에도 다시한번 시어머니 나오미를 붙든다. 그러나 나오미의 간곡한 부탁에 오르바는 시어머니를 떠난다. 오르바는 그정도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마땅한 일을 했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이후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에비해 룻은 나오미를 붙좇는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주연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헤세드는 마땅히 할 바를 넘어서는 것이다. 한계와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과 헌신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지게 한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붙좇자. 그 은혜와 사랑을 끈질기게 붙잡고 따라가리라. 이 정도면 됐다는 생각에 만족하지 않겠다. 내 할만큼 했다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헤세드를 붙좇을 때 나도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에 한 몫을 차지할 것이다. 하나님이 감독이신 하나님 나라 영화 엔딩 크레딧에 내 이름이 추가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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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욥기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고난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 스스로가 큰 고난을 겪어본 일이 없다고 생각이 된 터에 여러 글을 통해서 나의 묵상은 상당히 개념적이고 추상적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최근 총리후보자의 발언으로 이슈가 된 고난을 통과한 공동체의 운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개념정리가 필요하겠다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중 페북을 통해 한 분이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글을 보고 검색하던 중 블로그에서 발견하게 된 글이다.

전체 내용이 중요하지만 눈에 들어온 문장들을 파란색으로 표시해본다.

읽고 나서 느끼게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과 고난을 이해할 수 있으며, 삶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과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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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yijaeju/220035070879

고난과 하나님의 전능 리뷰


기독교 신학의 최우선 과제는 부조리한 고통과 악의 문제에 직면하여 기독교화 된 형이상학이나 형이상학화된 신학을 구성하는 것에 있지 않으며, 형이상학적 질문의 방향을 따라 악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해명이나 형이상학을 통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을 해체시켜 그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고통의 희생자들이 그들의 고통을 더 크게 부르짖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전능과 고난의 극복 (정리)

전능하신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대한 그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힘을 행사하며 자신의 고유한 힘을 사랑 안에서 드러낸다.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드러나며 하나님의 전능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스스로 참여하는 사랑의 전능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사랑의 하나님이며, 타자를 위해 스스로를 고난 속에 던져 놓는 하나님의 사랑은 전능하다.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서 하나님의 전능과 사랑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약하기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기에 고난에 참여하며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인간과 피조세계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며, 이를 자신의 고난으로 짊어짐으로써 사랑의 힘을 드러낸다. 이 역사의 질곡 속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무력함을 통해서 힘들의 갈등을 품고 극복하는, 하나님의 고유한 아가페의 힘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전능이야말로 고난당하는 자가 고통의 현실 속에 주저앉지 않고 고통의 틈새로 비춰오는 새로운 현실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고통에 참여할 뿐 아니라 고통당하는 인간 자신을 끌어안고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의 아픔에 동참함으로써 불가능을 넘어서는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며, 이러한 사랑의 전능 안에서 고난당하는 자가 고통을 딛고 일어설 힘의 원천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 안에서 나의 고난에 함께하신다면, 나는 고난 중에 결코 홀로 버려진 존재가 아니다. 나의 슬픔과 아픔이 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다. 이 사실은 나를 해방시켜 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연대할 힘을 제공한다. 하나님은 피조물과의 자유로운 사귐을 위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전능을 포기하는 전능을 보이시며 사랑을 자신의 고유한 본성으로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 고난 속으로 들어오시며, 고난가운데서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의 창조적 구원적 힘에 대한 신앙은 고난의 흔적을 몸에 지니면서 그럼에도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삶과 용기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신앙은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12:10) 이는 하나님의 전능을 통해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짊어질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고난과 신학

고통의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더 이상 악의 본질과 원인을 형이상학적으로 물을 것이 아니라, 고통의 극복과 그것의 가능성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감 으로써 율법적, 종교적으로 이해되었던 인과적 연결고리를 해체해버렸다. 또한 그는 고통의 종교적 원인을 밝히려고 하기보다는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그를 치유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은 세계의 원인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다가오셨다.

우리는 고통과 악의 문제를 직면하여 기존의 형이상학적 신학과는 정반대로 미래적 가능성으로 하나님을 묻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때 미래적 가능성으로 희망되는 하나님의 힘은 현재의 모든 파괴적인 것을 극복하는 힘, 사망에서 생명의 충만으로 창조하는 힘이다. 고통의 현실 속에 있는 자에게는 이 하나님은 여전히 힘없는 존재로 경험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무력함을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경험한다면, 함께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미래적 힘의 선취로 이해한다면, 고통당하는 자는 현실의 부조리에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 희망에 하나님과 동참하게 될 것이다. 이 자는 고통과 악의 파멸적인 힘에 짓눌린 삶의 암흑 속에서도 일어설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시적 무력함과 가능적 전능을 연결시켜 주는 메타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현실의 틈새를 꿰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가능적 미래의 빛에서만 우리는 전능한 하나님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힘은 현실 속에서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 받는 사랑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사랑은 미래적 가능성 안에서 고난당하는 자를 일으키실 창조와 구원의 힘으로 희망된다.

기독교 신학은 신의 존재와 행위 속에서 진지하게 고난의 현실을 목도하며,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며, 동시에 새롭게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는 자리로 인식한다.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기독교 신앙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적 참여를 통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고난의 의미를 해석하는 분이 아니라 고난을 극복하게 하시며, 파괴적인 고난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고통과 악에 짓눌려 닫혀버린 삶의 철문을 파쇄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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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

가족은 이 땅에서 가장 친밀하며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예수님보다 이들을 더 사랑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 말씀하신다. 예수님께 최고의 사랑과 우선순위를 두기 원하신다. 주님은 질투가 많은 분, 인륜을 거스리게 하는 분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가족을 차분히 들여다보면 어떠한가. 가족 안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갈등을 일으키는지 모른다. 이 지점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까워질 수 있다는 본회퍼의 말이 떠오른다. 예수님께 온전한 사랑을 드릴 때 가족들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자. 그것이야말로 가족을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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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_구약2011. 11. 7. 23:30
시편 37편 4절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라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보통 인격적인 대상을 기뻐한다는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을 기뻐한다는 것이 잘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만나는 것을 기뻐한다든가 함께 하는 것을 기뻐한다는 표현이 쉽게 이해된다.사람들 중에 애인이나 친구가 바로 그러한 존재들이다.
결국 하나님을 애인으로 친구로 삼아야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좋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즐겁게 된다.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실 것이다.

또한 우리는 보통 어떤 것을 하는 것을 기뻐한다. 또한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한다. 이것을 생각해볼 때 하나님을 소원하고 있고 원하고 있어야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결국 하나님을 기뻐하는 일과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반복되는 말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는 것이다. 세상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 하나님이 하신 일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기쁨을 누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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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받아주시고 예수님께 오게 하시면서 천국은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18장 3절에서 이미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거기서는 어린아이의 어떤 특성이 언급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어린아이 자체를 받아주시고 용납하셨다. 독일성서공회 해설에 의하면 어린아이들도 공동체에 함께 속하므로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며 진지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고 나온다. 함께 사는 나의 자녀들도 받아주고 진지하게 대해주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오늘 하루 가까이 있는 나의 자녀들부터 용납하고 사랑으로 대해주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질문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과 이웃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것과 온전함을 같게 생각하셨다. 마찬가지로 독일성서공회 해설에(마5:24)는 온전함이란 "히브리어에서 무엇에 마음을 다 바치는 것, 분열되지 않은 마음으로 무엇을 하는 것 또는 어떤 일을 완전하게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온전함이란 흠잡힐 데 없이 완벽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전적으로' 개방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 하루 온전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개방할 수 있을까? 마음, 시간, 돈, 관심, 사랑을 개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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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다. 다른 이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하나로만 인식하였는데 비해, 베드로는 예수님을 올바로 인식하고 고백하였다.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십자가 사건에서 드러나듯이 베드로는 아직도 부족하고 연약한 상태였지만 지금의 이 고백은 진정성이 있었다. 가이사랴 빌립보는 번화하고 로마황제의 도시라는 배경을 생각할 때도 이 고백은 믿음의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한 나의 고백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주가 되시고 그리스도가 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면 나의 삶은 어떠해야겠는가?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드로처럼 주님을 위해 삶을 드리고 그분을 전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오늘 하루 순교의 현장이 아니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자리에서 나는 어떻게 내 삶을 드릴 수 있을까? 주어진 일에 주님께 하듯 섬기고,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겨야 할 것이다. 마음 뿐이었던 전화심방을 실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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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결실로 이어진다. 좋은 밭이 아닌 다른 밭들도 듣고 잠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깨닫는(understand) 수준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깨달음. '사물의 본질이나 이치 따위를 생각하거나 궁리하여 알게 되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과 뜻을 깨달아 알게 될 때 삶이 변하여지고 열매맺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2. 하나님 나라는 관용과 기다림의 나라이다. 그러나 때가 되면 가차없는 심판이 주어지게 된다.
알곡과 가라지의 차이는 무엇일까? 주인이 기대한 것, 주인에게 필요한 존재, 열매..
하나님이 기대하고 하나님께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 오늘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성도들을 깊이 사랑하고 섬기는 것, 말씀을 깨닫기 위해 전심전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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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13:18-30
1. 길가, 흙이 얕은 돌발, 가시떨기, 좋은 땅
이 중에 나는 어떤 밭인가? 말씀을 받고 나서 열매를 맺고 있는가?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통해 성령의 열매가 내 삶에 맺혀야 한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더 사랑하고, 더 기뻐하며, 더 오래참고, 더 절제하는 오늘 하루가 되기를..

2. 천국의 비밀을 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허락되었다.
교만하고 거부하는, 마음이 닫힌 바리새인들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역시 마음의 자세와 태도가 중요함을 볼 수 있다.
무엇보다 천국의 비밀은 예수님의 가르침이자 예수님이다.
이것은 선지자들과 의인이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놀랍고 기쁜 일인가?
이 비밀을 온전히 맛볼 때 나의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것을 사려할 것이고, 그것을 온전히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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