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_구약/룻기2015. 12. 20. 14:41

함께 돌아가자

룻1:15-22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18절)

나오미는 룻에게 자신을 따르지 말라고 강권했지만 룻은 계속해서 따른다. 그녀는 말한다. 나도 가고, 나도 머물겠습니다. 나도 어머니의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나도 어머니가 죽는 곳에서 죽겠습니다. 나도, 나도, 나도. '함께'의 정신이다. 상대의 일을 나의 일로, 상대방의 삶을 나의 삶으로 품는 마음이다. 혼자여야 가볍고, 혼자일 때 자유롭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함께함에 회복이 있고, 함께 있을 때 살 수 있다.

나오미는 룻과 함께 베들레헴에 돌아온다.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하나님께서 괴롭게 하셨다고 말한다. 풍족하게 나갔다가 텅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 고백한다. 그 고생과 슬픔이야 무엇으로 위로할 수 있으랴. 그러나 이렇게 볼 때 비게 된 것이 은혜다. 돌아오게 되었으니 말이다. 여기서 탕자를 본다. 풍족하게 나갔다가 다 잃고 굶주릴 때 아버지 집을 생각한 그사람 말이다. 텅 빔과 가난함이 하나님께 돌아오게 한다. '상처가 나를 구원한다.'

힘들다. 어렵다. 슬프다. 답답하다. 내 모습이, 환경이, 주변 사람이, 이 땅이, 나의 미래가 그렇다. 그러니 함께 있자. 어려울수록 서로를 붙들자. 함께 있되 이 상한 심령을 가지고 돌아가자. 하나님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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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 예배를 심어라

암5:18-27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24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을 자신들이 구원받고 대적들이 심판받는 날로 당연시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은 당황스러운 날이다. 자신들의 죄가 심판받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심판이 사랑과 공의를 잃어버린 예배 때문이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끌려가게 하신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위험성을 지적하신다. 그러다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황당할 수 밖에 없는 것과 꼭 같다. 하나님을, 구원을, 심판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자. 구원과 은혜가 자동적으로 주어지리라, 심판이 응당 피해가리라 여기지 말자. 그러다가 황당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 황당한 심판이 주어지는 이유는 제사와 삶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 제사드리고 제물을 드리고 십일조를 드려도, 그 삶에 공의와 정의가 없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역겨워하신다. 무너진 삶, 공의와 정의를 회복해야 한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라'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 말씀에 적용하면 이렇다. 일상 속에 예배를 심어라.

이것은 묵상에도 적용된다. 묵상과 삶이 일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실 것이다. 일상 속에 묵상을 심어야 한다. 말씀묵상으로 만족할 수 없다. 여기에 안주하면 안 된다. 말씀실천이 살 길이다. 그것이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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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복음을 은혜로 받고 값없이 구원을 받았다. 그런데 이것을 전하고 나누고 사역하면서 어느새 내 마음에는 댓가를 바라고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조금 힘들게 공부하고 조금 힘들게 사역했다는 경험을 되뇌이며 보상을 바라는 마음을 정당화했던 것 같다. 또한 이러저러하게 주님을 섬기고 있으니 내 미래는 안정되어야하고 나는 영향력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은혜롭지 못한 마음으로 하는 사역에 어찌 은혜가 깃들것인가? 은혜로 받았으니, 은혜로 섬기고, 은혜만을 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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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다. 먼저 제자들을 시켜서 나귀를 가져오게 하신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는 모습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하셨다.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말씀을 성취하는 삶이다. 오늘 하루 나의 삶도 말씀을 이루는 삶, 말씀을 성취하는 삶이 되기를 원한다. 특별히 주어진 시간을 잘 사용하기를 원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무리가 호산나 외쳤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이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중에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예수님을 잘 알지못하면서 호산나라고 외친 것이다. 호산나는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이라고 알고 있는데 과연 어떤 의미로의 구원을 외쳤던 것일지.. 단지 군중의 열광에 다들 편승했던 것일지.. 예수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고, 그분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알아야 할 것이다. 열광과 환호가 아닌 묵묵한 십자가로의 순종만이 기억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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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자 청년이 돌아간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냐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부의 위험성을 지적하신다. 물질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닐 것이나 그것의 지배를 받는다면 하나님 나라는 요원할 수 밖에 없다. 부자는 부자대로 가난한 자는 가난한 대로 물질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일 터. 청부나 청빈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사역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는다.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좇았는데 무엇을 얻겠느냐고 질문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보좌에 앉아 심판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버린 것의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하겠다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먼저 된 자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다고 하셨다. 제자로써 희생하고 헌신한 것에 대한 보상을 말씀하신다. 보상을 위해 버린다는 것이 마음 편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원한 보상을 위해 현재의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 말씀은 의미심장한 구절로써 지금 포기하고 헌신했을지라도 결과는 어떻게 될지 모르니 마지막까지 온전히 주님을 따르라는 경계의 말씀으로 들린다. 장로가 천국가서 짜장면 먹을 때 목사는 짜장면 배달한다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는데.. 오늘 하루도 주님의 제자로써 포기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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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 나라는 '전력으로 투신할 가치가 있다. 그 밖에 달리 얻는 길은 없다.'(독일성서공회해설) 하나님 나라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사는' 것이다.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드려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 드리지 못한다면 하나님 나라는 요원한 것이다. 나는 다 드리고 있는가? 요새 내가 드리지 못하는 영역은 어떤 영역인가? 시간사용 가운데도 하나님께 다 드려지는 일이 있기를 원한다.

2.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하신다.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을 봐왔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이전의 경험과 편견이 지금에 영향을 미쳐 예수님의 구원과 능력으로부터 소외를 당하였다. 나도 그렇지 아니한가? 나의 이전의 경험 때문에 편견 때문에 지금 여기에 임하시는 예수님의 구원과 능력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 그것들을 깨트리시고 새롭게 하셔서 오늘도 주님의 능력을 지금 여기서 맛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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