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신대원 사경회에서 이재철 목사님께서 설교하신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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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용품(수의, 관)이 될 것인가 생명용품이 될 것인가?
우리의 삶은 미래의 역사의 지평에 영향을 미친다.
미래는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라 창조의 대상이다.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는 생명용품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첫째,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나오미, 오르바, 룻 모두 죽음의 고통을 겪었다.
이집트의 대형 피라밋, 모로코의 아름다운 타지마할 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쓰레기 같은 묘 모두의 본질은 죽음이다.(대형교회의 목회, 아름다운 교회, 빈민같은 목회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골고다(굴골토, 갈바, 해골) 위의 십자가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셈하심을 당한다.
둘째, 끊임없이 자기비움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않으면 안된다.
나오미는 종으로 쓰며 편하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려했다.
보아스 또한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무름의 의무를 다했다.
소리란 공기의 진동으로 나의 욕망과 더러운 감정을 비우지 않으면 나를 비우지 않으면 천사의 말이라도 공기를 진동시키다가 2-3초 있다가 사라진다.
나를 비울 때만 생명이신 성령께서 나를 도구삼아 공기의 진동이 사라진 뒤에도 그 말씀 위에 사람들의 심령 속에 못 같이 박히어 역사하신다.
비우지 않으면 고이기만 하면 썩는다는 생명의 법칙
셋째, 마라(고통)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나오미는 그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고통이 나오미(기쁨)으로 성화될 수 있었다.
선지동산에서 학점을 이수한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는 사명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마라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생을 바르게 이해한자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C. S. 루이스는 엄지 손가락의 상부관절을 움직이지 못해서 공작하지 못하는 아픔을 느꼈지만 그래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마라야 말로 우리 인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호등이다.
넷째, 나의 가정을 바르게 일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룻이 나온 이야기는 혁명속에서, 뜨거운 시위대열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결손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가까운 식구에서 사명자로 살지 못하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선교와 봉사의 사명자로 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가정이 바로 내리사랑이 시작되는 곳이고 그 내리사랑을 행하는 자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나오미가 먼저 사랑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음을 통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래서 가정에서 내리사랑을 연습하고 체질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용서하지 못하는 젊은 선교사에 대한 목사님의 충고.
‘매사를 결정할 때 아내와 상의하지 않고 동역하지 않은 것, 평생의 동반자가 아니라 수하사람으로 보았을 때 당신 같은 남자와 살 때에 누구를 통해 아내는 위로를 받겠는가? 누가 아내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목회자라면 하나님이 믿고 맡긴 아내를 바르게 사랑하지 못했음을 회개하고 무릎꿇고 용서를 빌기 바란다.’
하나니의 사랑이 그 부부를 통해 그 가족과 사역에 쏟아지지 않겠는가?
다섯째,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미래로 향해야 한다.
미래를 바라보지 않는자에게는 미래가 창조되지 않는다.
이 때의 미래란 자기의 욕망의 대체가 아니다.
모세는 애굽의 재화를 버리고 동포와 함께 함.
아므람과 요게벳은 바로의 명을 어기고 아이를 숨김. 무슨 믿음이었나? 아브라함을 통해 주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약속.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분의 의해 빚어질 역사의 지평을 바라보는 것이다.
끊임없이 역사의 지평을 통해 미래를 볼 때에 정도를 걸을 수 있다. 사소한 목회적 야망 때문에 정도에서 벗어나면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역사의 지평이 허물어졌듯이 어렵더라도 정도를 걸으면 역사의 지평이 새롭게 될 수 있다.
나는 비천하다 할지라도 나를 통해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그럴 때 작은 일에 충실할 수 있다. 가장 작은 일 속에 가장 위대한 일이 있다는 것. 룻의 삶
역사의 지평을 보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계획하든 그 일이 이루어지는 때를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죽은 이후에도 역사의 지평이 이루어질 줄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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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용품(수의, 관)이 될 것인가 생명용품이 될 것인가?
우리의 삶은 미래의 역사의 지평에 영향을 미친다.
미래는 기다림의 대상이 아니라 창조의 대상이다.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는 생명용품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
첫째,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나오미, 오르바, 룻 모두 죽음의 고통을 겪었다.
이집트의 대형 피라밋, 모로코의 아름다운 타지마할 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쓰레기 같은 묘 모두의 본질은 죽음이다.(대형교회의 목회, 아름다운 교회, 빈민같은 목회라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골고다(굴골토, 갈바, 해골) 위의 십자가
우리 모두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서 셈하심을 당한다.
둘째, 끊임없이 자기비움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않으면 안된다.
나오미는 종으로 쓰며 편하게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들을 돌려보내려했다.
보아스 또한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무름의 의무를 다했다.
소리란 공기의 진동으로 나의 욕망과 더러운 감정을 비우지 않으면 나를 비우지 않으면 천사의 말이라도 공기를 진동시키다가 2-3초 있다가 사라진다.
나를 비울 때만 생명이신 성령께서 나를 도구삼아 공기의 진동이 사라진 뒤에도 그 말씀 위에 사람들의 심령 속에 못 같이 박히어 역사하신다.
비우지 않으면 고이기만 하면 썩는다는 생명의 법칙
셋째, 마라(고통)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나오미는 그 고통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 고통이 나오미(기쁨)으로 성화될 수 있었다.
선지동산에서 학점을 이수한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는 사명자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마라를 경험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생을 바르게 이해한자만이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C. S. 루이스는 엄지 손가락의 상부관절을 움직이지 못해서 공작하지 못하는 아픔을 느꼈지만 그래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다.
마라야 말로 우리 인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신호등이다.
넷째, 나의 가정을 바르게 일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룻이 나온 이야기는 혁명속에서, 뜨거운 시위대열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결손가정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가까운 식구에서 사명자로 살지 못하면서 지구 반대편에서 선교와 봉사의 사명자로 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가정이 바로 내리사랑이 시작되는 곳이고 그 내리사랑을 행하는 자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생명이 역사하기 때문이다. 나오미가 먼저 사랑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음을 통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
그래서 가정에서 내리사랑을 연습하고 체질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용서하지 못하는 젊은 선교사에 대한 목사님의 충고.
‘매사를 결정할 때 아내와 상의하지 않고 동역하지 않은 것, 평생의 동반자가 아니라 수하사람으로 보았을 때 당신 같은 남자와 살 때에 누구를 통해 아내는 위로를 받겠는가? 누가 아내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이 목회자라면 하나님이 믿고 맡긴 아내를 바르게 사랑하지 못했음을 회개하고 무릎꿇고 용서를 빌기 바란다.’
하나니의 사랑이 그 부부를 통해 그 가족과 사역에 쏟아지지 않겠는가?
다섯째,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시선을 미래로 향해야 한다.
미래를 바라보지 않는자에게는 미래가 창조되지 않는다.
이 때의 미래란 자기의 욕망의 대체가 아니다.
모세는 애굽의 재화를 버리고 동포와 함께 함.
아므람과 요게벳은 바로의 명을 어기고 아이를 숨김. 무슨 믿음이었나? 아브라함을 통해 주어진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약속.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 분의 의해 빚어질 역사의 지평을 바라보는 것이다.
끊임없이 역사의 지평을 통해 미래를 볼 때에 정도를 걸을 수 있다. 사소한 목회적 야망 때문에 정도에서 벗어나면 아브라함이 하갈을 통해 역사의 지평이 허물어졌듯이 어렵더라도 정도를 걸으면 역사의 지평이 새롭게 될 수 있다.
나는 비천하다 할지라도 나를 통해 역사의 지평을 새롭게 하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그럴 때 작은 일에 충실할 수 있다. 가장 작은 일 속에 가장 위대한 일이 있다는 것. 룻의 삶
역사의 지평을 보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계획하든 그 일이 이루어지는 때를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자기가 죽은 이후에도 역사의 지평이 이루어질 줄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