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 그림에서 르네상스가 추구했던 정확한 인체의 비례를 무시하고 그리스도가 당한 고난의 의미를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인물들을 과장해서 묘사하였다. 이를테면 중심부의 가장 크게 그린 그리스도나, 십자가 밑에서 향유 항아리를 옆에 두고서 애타게 절규하는 작게 그려진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 등이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고통이 화면 전체에 흉측하고도 소름 끼치는 모습으로 뒤덮고 있는데, 몸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마지막까지 힘주어 굳어있는 손의 형상과, 일그러진 얼굴과 새하얗게 변해버린 입술, 머리에 꽂혀있는 가시관, 그리고 뒤틀리고 메마른 주님의 온몸에 박혀 있는 가시와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검붉은 피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치르신 ‘대속(代贖)’이라는 의미의 중심에 와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 그림에서 성 요한이 받치고 있는 평온한 자태의 마리아와, 성찬배에다 피를 쏟고 있는 구세주의 상징인 어린 양, 그리고 세례 요한 옆에 써넣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한복음 3 : 30).”는 글을 통하여, 마치 이 엄청난 사건이 지닌 ‘대속의 진리’를 격한 어조로 설파하고 있는듯하다. 이렇듯 그가 이 그림에서 성공적으로 나타낸 “순간과 영원의 결합, 실재와 상징의 결합이야말로 그뤼네발트의 <십자가 책형>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경이로움이요 장관인 것이다.”*
이 작품에서 느끼는 숭고함은, 우선 그의 뛰어난 미술적 재능이 하나님께 대한 그의 겸손하고 신실한 믿음에 전적으로 복종하였던 결과로 보여지며, 그래서 당대에서보다 오히려 후대에 더욱 빛을 발하며 많은 이들에게 감화를 준다. 나 역시 이 그림 앞에서 내게 다가오신 주님의 숨결을 개인적으로 강렬하게 체험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실로 한 그림이 이토록 그리스도의 대속의 놀라운 권능을 훌륭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함과 동시에, 나의 왜소함과 무기력함에 부끄러움을 느꼈었다.
우리 일행을 태운 차가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꼴마르를 떠나면서 하늘과 맞닿아 있는 낮은 언덕길에 말없이 그리고 조용히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들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며, 너무도 보잘것없는 인생, 그리고 형언할 수 없도록 놀라운 자연의 경이와 예술을 통한 위로와 영혼의 정화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그 찬란한 대비 사이에서, 나는 이슬 젖은 찬양을 몰래 혼자서 올리고 있었다. 세례 요한의 말을 되새기면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H.W. 잰슨 & A.F. 잰슨, 『서양 미술사』, 최기득 역(미진사, 2001),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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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에게 큰 영향을 미친 그림.
특히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요한의 집게손가락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
그 영상에는 설교자의 전통적인 소명이 포착되어 있으며 그것을 보면 인간에게 주어진 특권 중 설교자가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찰스 웨슬리
"내가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헐떡이며라도 그분의 이름을 말할 수만 있다면 행복하리라.
그 분을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라. 그리고 죽음 속에서도 외치라.
'보라, 어린 양을 보라!'고."
그러나 설교자의 역할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다루지 않기 위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설교자-세례요한-가 헤롯의 지하감옥에서 목이 베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의미에서 그 분을 증거하는 것은 모든 제자의 특권이다. 통계 자료를 보면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가장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수단은 그 분을 발견한 다른 사람에 대해 간증하는 것이라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복음 전도에 대한 나일즈(D. T. Niles)의 고전적 정의 곧 '한 거지가 다른 거지에게 어디에 가면 빵이 있는지 말해 주는 것'에 대한 모델이 되는 것이다.
BST 시리즈 요한복음 강해(IVP) p. 129-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