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지도자상의 재조명-예수님의 이름으로
헨리 나웬
들머리
내친구 머레이 맥도넬(Murray McDonnell)이 토론토 근처에 있는 데이브레이크 공동체(Daybreak Community)로 나를 찾아와서는, 워싱톤 D.C.에 있는 인류 발전 연구소(Center forHuman Development) 15주년 기념행사때 나더러 21세기 있어서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하여 기꺼이 강연을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최근 나는 정신장애자들을 위한 라슈 공동체들(Larche Communities) 가운데 하나인 데이브레이크에서만 성직자로서 혼신의 힘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인류발전연구소 소장으로서 이 연구소의 발전을 위해 온갖 정력과 시간을 바치고 있는 머레이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이 연구소의 설립자인 드와이어(Father U. Dwyer)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적. 영적 완전을 추구하는 성직자들과 목회자들을 돕는데 그가 그토록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깊은 경의를 표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마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그 초청강연의 연사로 가겠다고 말한 후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가올 세기의 기독교 지도자상을 진지하게 전망해보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청중들이 성직자로서 동료 성직자들과 함께 사역에 깊이 열중하고 있는 분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더더욱 그러했다. 날이면 날마다 성직의 미래와 교회에서의 목회를 생각 하고 있는 그들에게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성직자들 가운데 앞으로 어떤 상황으로 변화될 것인지를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금세기도 마감하기 전에 어떻게 나 자신을 예견하겠는가에 대해서도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어 라고 말하면 할수록 내가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합류한 이래 그들이 전개한 사역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로 옮겨보고 싶은 간절한 바램도 없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수년 동안 나는 목회에 대한 강의를 했었다. 지금은 학자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정신장애자들과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돕는 소위 성직자로서의 길을 걸어오면서 내 자 신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목회를 위해 준비된 삶을 살아온 젊은 사람들에게 20년 동안이나 강의를 해온 내가지금은 매일매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사역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생각하며, 이런 생각들은 매일매일 나의 언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나는 또한 내일이나, 다음 주나, 내년 혹은 다가올 세기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 대하여 나 스스로 정직하게 돌아보면 볼수록 내 속에 계시면서 나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와 훨씬 쉽게 교통할 수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은 현재의 하나님(God of the present) 이시며, 미래를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까지도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사람 들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충분하다 (마6:34)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지금까지 데이브레이크에서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아오면서 아주 진하게 느껴온 것들을 기록 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 자신의 경험과 식견 중에서 어떤 것이 아주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있는 성직자들과 봉사자 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인지 구별하려고 애를 썼다. 현재의 사역은 바로 그 결과이다.
그러나 이 들머리의 의견을 마무리 짓기에 앞서 이 소책자를 읽는 독자들에게 미리 밝혀두어야 할 것은 워싱톤 D.C에 나 혼자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강연을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결코 혼자서 말씀을 증거 하러 다니도록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분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 그런데 나와함께 가고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현재 나의 삶이 참으로 장애자들을 위한 삶이라면 왜 나와 함께 여행을 하고, 나의 사역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이 그들 중에 한 사람도 없다 는 말인가 몇차례의 의논 끝에 데이브레이크 공동체는 빌 뷰렌(Bill V. Buren)을 나와 함께 가도록 결정했다. 내가 데이브레이크에 온 이래 빌과 나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장애자들 가운데 그는 말과 손짓 몸짓으로 의사표현을 가장 잘 하였다. 우리의 우정이 싹트기 시작할 때부터 그는 성직자로서 해야하는 나의 일에 진정한 관심을 보여주었으며, 내가 봉사하는 동안에 나를 거들어 주겠다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 어느날 그는 나에게 세례를 받지도 않았다고 실토하면서 교인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말했다. 그래서 나는 세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구(敎區)의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라고 권유했다. 그는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지역 교구 모임에 신실하게 참여했다. 비록 모임이 지루하고, 때로는 복잡다기한 각양각색의 토론이 그의 정신적인 능력으로는 감당하기에 버거웠지만, 그는 그 공동체에 속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용납과 사랑을 느꼈다. 그는 많은 것을 받아들였으며, 반대로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많은 것을 베풀기도 하였다. 세례와 견신례 및 부활절 전야제 때 처음으로 가진 성찬식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위대한 전환점 이 되었다. 비록 그의 능력상 많은 언어로 의사를 표현 하는 데는 제한을 받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몸으로 깊이 느끼고 있었으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았다.
간혹 나는 빌에게 세례와 견신례를 받은 사람은 새로운 소명을 갖게되며, 그 소명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 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빌은 나의 말을 아주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내가 성직자와 목 회자들에게 강의하려 워싱톤 D.C.에 갈 때 함께 가자고 부탁했을 때 그는 그것을 나의 사역에 동참하자는 권유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 일을 함께 하는 것이지요 라고 그는 우리가 떠나기 전 날 몇번이나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 동 역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워싱톤에 가고 있습니다 라고 나는 계속하여 말해 주었다.
빌은 이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신경이 무척 예민해 있는 동안에, 빌은 그의 일에 놀라운 확신을 보였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빌이 나와 함께하는 이 첫번 여행 이 그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반면, 빌은 처음부터 내내 나를 돕기 위해 간다 는 확신에 가득 차있었다. 나는 나중에야 그가 나보다 많이 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토론토에서 비행기에 발을 들여놓을 때에도 빌은 나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우리는 이일을 함께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그러자 나는 그럼요. 빌, 그렇고 말구요 라고 말해 주었다.
이 책에서 나는 워싱톤에서 강연한 내용을 먼저 밝힌 후에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왜 빌의 참석이 나의 강연보다 훨씬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여는글
다가오는 21세기의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한 강연 요청은 나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만일 사람들이 바로 다음 달에 대하여 묻는다 해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할것인데, 내가 어찌 다가오는 세기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숱한 내적갈등을 겪은 후에 나는 가능한 한 나 자신에게 정직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스스로 반문 했다. 너는 요즘 어떤 결정을 내리고 있으며, 그 결정들은 네가 미래에 대해 느끼는 방향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 아무튼 나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며, 내가 안팎의 새로운 곳으로 가는 그 길(방향)이 거대한 움직임 가운데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며 나는 그 중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믿어야만 했다.
20년 후 학계(學界)에서 목회심리학, 목회신학, 기독교영성학(基督敎靈性學) 교수로서 나는 깊은 내적 위협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내가 50세에 들어서고 내 나이가 두 배나 되었음에도 나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때, 나는 이런 단순한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내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예수님께도 더 가까이 나아갔는가 성직 25년을 맞으면서 나는 기도생활도 형편없이 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는 다소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뜨거운 논쟁점들에 온통 정력을 쏟고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내가 훌륭하게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들 말했지만, 내 마음 은밀한 곳에서는 나의 성공은 내 영혼을 위험한 수렁 속으로 몰아놓 고 있다 라고 나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반문하기 시작했다. 깊이 묵상하며 드리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의 생활과, 고독감 그리고 아주 절박하게 보이는 일에 항상 변화무쌍하게 말려드는 것은 성령을 점점 외면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하고. 내가 그것을 분명하게 알기란 아주 아려운 일이었다. 비록 농담으로는 그러했을지언정 나는 지옥과 같은 상태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았음에도, 어느날 나는 나 자신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으며, 전소(burn out:신경쇠약) 란 말은 영적인 죽음을 쉽게 풀이한 심리학 용어임을 깨달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살던 가운데 나는 계속하여 기도하였다.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는 내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는지 나에게 보여주소서. 나는 당신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저 이에 대하여 분명하고 확신한 것을 보여주시길 바랄 뿐이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다. 정신장애자들을 위한 라슈공동체의 설립자 진 바니어(Jean Vanier)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저 심령이 가난한 자들 가운데 가서 그들과 함께 살아라. 그러면 그들이 너를 치유 해줄 것이다 라고 말씀하였다. 이 부르심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했기 때에 나는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하바드대학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겨갔다. 즉 세계를 지배해 보고 싶었던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곳에서 말도 거의 못하거나 전혀할 수 없는 사람들, 기껏해야 우리 사회의 요구의 가장자리에서 맴돌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 즉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것은 아주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과정중에 있다. 20년이 지나 내가 가고 싶었던 곳에 가며 선택한 것에 대하여 토론하는 자유함을 얻은 후에도 말이 거의 필요 없는 엄격하고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필요로 하는, 영육(靈肉)이 상한 사람들과의 소박하고 감춰진 삶이 그 즉시 영적인 전소(burn out)의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라슈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면서 나는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하여 강연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말들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로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도전들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정신장애자들과 함께 살아온 나의 삶의 모습을 몇가지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여러분들이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하여 방향감각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에, 그들이 새로운 방향 제시를 할 수 있는 몇가지 암시를 할 것이라고 바라마지 않는다.
나의 의견을 여러분과 나눔에 있어 나는 복음서의 두 가지 사건-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 받으신 사건(마4:1~11)과 내 양을 먹이라 면서 베드로를 부르신 사건(요21:15~19)을 기조(基調)에 깔아두고자 한다.
1. 현실과의 타협에서 기도로 유혹: 현실과 타협하라
정신장애자들과 한 집에서 살게 되면서 첫번째 나를 강타한 사건은, 내가 했던 많은 유익한 일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그들이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요인으로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어떤 것도 인용할 수 없었고, 또한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학교에 다닌 적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20년 동안이나 노틀담, 예일, 하바드 등지에서 보낸 것은 나에 대한 중요한 소개가 되지 못했다.
그동안 내게 있어서는 중요시 되었던 전반적인 내 경험들조차도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저녁 식사를 하던 중에 내가 한 보조원에게 고기를 몇 점 집어주었더니, 장애자 중에 하나가 그에게 고기를 주지 마시오. 그는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는 장로 교인 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과거에는 매우 실제적이라고 입증되었던 그 어떤 기술들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도 정말 불안의 원천이 되었다. 나는 그 순간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인식되었는가에 전적으로 좌우되며, 인정과 거부, 포옹과 타 격, 웃음과 눈물에 노출되어 있는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쩌면 마치 내가 나의 삶을 처음부터 아주 다시 출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관계, 연줄, 명예 등은 더 이상 중요시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여지껏 나의 새 생활의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진정한 주체성을 재발견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깨어지고 상하고 철저히 겸손한 사람들은 내 속에 내재(內在)한 현실 타협적인 자아-어떤 일은 보여주고, 증명하고, 내세울 수 있는 자아-를 내버리게 하였다. 또한 그들은 나에게 어떤 일의 성취 여부에 관계 없이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열려진 완전히 약점 투성이 인 꾸밈없는 자아를 갖도록 만들었다.
내가 이 모든 사실을 말하는 것은,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현실에 철저히 비타협적이고, 또한 이 세상에서 약점 투성이인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 놓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고 깊게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방법이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로서 또한 에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가 전해야만 하는 아주 귀중한 메시지는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하거나 성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 가운데 구속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인생살이의 진짜 원천은 바로 그 사랑이라는 것을 선포하도록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첫번째 받은 유혹은 현실과 타협하라는 것으로 돌을 빵으로 바꿔보라는거였다. 아, 나도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얼마나 소원했던가 나는 영양실조와 수질오염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가 죽어가는 페루의 리마(Lima) 변두리 지역에 있는 신흥 도시들을 두루 다녀보면서, 길거리에 쫙 깔려있는 먼지투성이의 돌에게 신비한 마술을 부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수천개의 돌 가운데 어느 것을 집어 들든지 크로사왕(초승달 모양의 롤 빵), 커피케익(아침에 먹는 과자빵)이나 아주 멋드러진 건포도롤빵으로 변화되고, 또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두 손을 컵 모양으로 오므려 저수지의 썩은 물들을 받아내면 그것이 맛있는 우유로 변해 즐거이 마시게 되는 신비한 은사를 받았다면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고 도와주도록 목회자와 성직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닐까 또한 우리가 그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켰다고 그들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았는가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며, 가난한 사람들의 고 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우리는 부름받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었다. 하지만 그분은 돌을 빵으로 변화시키는 그런 지극히 현실 타협적인 행동을 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라는 요구를 (시험을) 받았을 때, 말씀 선포 라는 자신의 사역을 고수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이 사역을 감당하면서 겪은 가장 큰 고통은 소위 자존심이 깎여 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늘날 많은 성직자와 목회자들은 점점 자신들이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아주 바쁘게 보내지만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노력은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들은 교회 출석하는 교인의 숫자가 점점 감소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으며, 심리학자들이나 정신과 의사들, 결혼 상담가들과 의사들이 자기들보다 더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을 자주 보기도 한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현실은 그들의 뜻을 따르고 그 뜻에 매력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목사나 신부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들처럼 되고자 하는 것은 더 이상 생명을 바칠 만큼 고귀한 가치가 깃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 안에 칭찬의 소리는 거의 없고, 비판의 소리만 가득차 있는데 어떤 상태이든 의기소침해지지 않고 그런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헌신할 수 있겠는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속적인 사회의 사람들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살 수 있어. 하나님도 필요없고 교회도 목사도 필요없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단 말이야. 만일 우리가 그 렇지 못하다면, 우리 스스로를 관리하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한다. 이 문제는 믿음 부족이 아니라 능력 부족이 다. 만일 네가 병들었다면, 유능한 의사가 필요하고, 네가 헐벗고 굶주린다면 유능한 정치인이 필요한 것이다,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면 유능한 엔지니어가 필요한 것이며, 전쟁이 터진다면 유능한 협상자가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 교회, 목회자들이 수세기 동안 무능력의 골을 메워왔지만 오늘날은 그 골이 다른 방법으로 메워지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 영적인 대답이 필요없다. 이런 세속화의 풍토 속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점점 더 현실적이 되지 못하고 외곽으로 밀려나는 것을 느끼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은 이래도 계속 성직에 남아있어야 할 것인가 하고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간혹 그 들 가운데서는 보다 나은 적성을 계발시켜 성직을 떠나기도 하며,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적절한 헌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강연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이다. 우리 시대에 이룩된 모든 위대한 성취 아래에는 절망의 심연의 도사리고 있다. 능률과 통제는 우리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바램인 반면에 고독감, 격리감, 우정과 친밀성의 결핍, 관계성의파괴, 권태감, 공허감, 억압감, 자신을 무용지물로 깊이 자학하는 감정 등은 세상에서 성공한 수백만 사람들의 가슴마다 꽉꽉 채워져 있다.
엘리스(B. E. Ellis)의 소설 제로 이하(Less Than Zero) 는 그 당시 부와 성공과 대중적인 인기 및 권력의 뒷면에 숨겨진 도덕성과 영적 기근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극적으로 또 단선적으로 LA거부(巨富) 및 예능인들의10대 자녀들의 성생활, 마약 복용, 폭력 등을 묘사했다. 이런 타락의 모든 이면에는 너무도 분명하게 이런 부르짖음이 들려오고 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 없습니까 진정으로 나를 돌보아 줄 사람 없습니까 나를 위해 집에 머물러 있어 주기를 원하는 사람 없습니까 내가 절제할 수 없었을 때, 내가 울고 싶을 때 나와 함께 있어 주기를 원하는 사람 없습니까 나를 붙들어 주고, 심어줄 사람 없습니까 우리가 표면 상 자신이 넘치는 사회를 보고 있을 때, 비현실적(현실과 비타협적)이란 느낌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널리 퍼 져 있다. 낙태를 할 때 발달된 의학기술과 점증하는 비극적인 요소는 우리 사회에서 정신장애자의 수를 급격히 감소시킬지는 모른다. 하지만 벌써부터 분명한 것은 이렇게 될 때 어느 곳에서도 치유할 대책 조차도 없는 철저한 영적. 도덕적 장애의 고통을 가진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기독교 지도자의 필요성이 보다 분명해진다. 앞으로는 세상 풍조와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는 사람이 기독교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화려한 성공의 밑거름이 된 고통과도 연계성 을 가질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자기의 성역에서 증거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다.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양을 치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이렇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그리고 또 세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이 질문이 우리에게 현실과 타협하지 말 것과,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감을 동시에 부여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질문을 모든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으로 서 받아 들여야 한다.
예수님을 바라보자. 세상은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그분의 사 랑의 메시지는 권력과 능률과 통제를 추구하는 세상에 의해거 부당했다. 하지만 그분은 영광의 형체에 상처를 지니시고 볼 눈이 있고, 들을 귀 있으며 또한 이해할 마음이 있는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거부 당하고, 오해 받고, 상처 입은 이 예수님은 단순히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하는 데만 관심을 쏟으신 그분이 유일하게 하신 질문이 바로 네가 날 사랑하느냐 이다.
이 질문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를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내고 있느냐 네가 어떤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느냐 의 차원이 아니라 네가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을 나누고 있느냐 의 차원이다. 아마도 이 질문을 다르게 표현하면 너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 로 적용시켜 볼 수 있다. 고독과 절망 속에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 즉 용서하고 돌아보며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아주 많이 필요로 한다. 그 마음은 의심이 없으며, 원한도 없고, 분개하는 마음도 없을 뿐더러 미워하는 기미도 전혀 없다. 그 마음은 오직 사랑을 주기 원하며, 또한 그 응답으로 사랑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위로와 소망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신뢰하기를 매우 거부하는 모습과 인간의 심각한 고통을 목도함으로써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마음이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는 예수로 성육신하신, 즉 육신의 마음 을 가지신 하나님의 마음을 참으로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최상의 사랑-이시며, 매순간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공포, 격리, 절망 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철저하게, 매우 구체적으로 선포하고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아주 단순하고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떠한 조건이나 제한없이 자기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 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이다 (요일4:19)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부모님과 스승, 배우자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받는 확신, 애정, 인정, 격려, 지지 등은 종종의 심과 좌절, 분노, 원망 등을 남겨주는 소위 두번째 사랑이다. 우리모두는 이 두번째 사랑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깨어지기 쉽고, 덧없는 것인지 알고 있다. 이런 사랑을 숱하게 표현하는 뒷면에는 거부, 취소, 학대, 공갈, 폭 행뿐만 아니라 오히려 증오의 가능성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많은 영화와 연극은 인간관계의 모호성과 양면 가치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 두번째 사랑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심하게 느껴지지 않는 우정, 결혼, 공동체는 없다.
종종의 우리 일상 생활에서 유쾌한 감정 뒷면에는 소위 포기, 배신, 거부, 단절, 손실 등으로 일컫는 숱한 결함들이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이 모든 것은 두번째 사랑의 어두운 측면이며 우리의 가슴 속에서 결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어두움을 드러내고 있다.
두번째 사랑은 첫번째 사랑의 깨어진 모습일 뿐이다. 첫번째 사랑은 아무런 어두운 빛도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좋은 소식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의 실체로서 성육신을 하신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 그분은 큰 소리로 이렇게 부르신다. 누구든 지 목마른 사람은 나에게로 오라 나를 믿는 사람은 와서 마셔라 (요7:3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마11:28~29).
그 마음 속에서 네가 날 사랑하느냐란 말이 나왔다.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과 예수임을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곧 참 마음(the heart)을 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어느 곳을 가든지 치유, 화해, 새로운 삶과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는 일 등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현실과 타협하며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은 마침내 사라져 버릴 것이며, 오직 하 나의 소원은 온 인류가 우리의 이웃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두려워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을 만드시고, 어머니의 태에서 우리를 베 짜듯 이 지으셨습니다 (시편139:13을 보라).
훈련: 묵상기도
현실과 타협하여 적당히 살아보려는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을 아는 지식 안에 안전하게 거 하려면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신비주의자란 자신을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어떤 중심점이 있다면, 그것은 네가 날 사랑하느냐 네가 날 사랑하느냐 네가 날 사랑하느냐 고 계속하여 물으시는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는 훈련일 것이다. 그 훈련이란 묵상기도를 말한다. 묵상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긴급한 문제만을 좇아다니게 되는 것과 하나님의 마음이나 자신의 마음에 대해 무감각해 지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비록 길거리에 있을 때에나 이리 저리 옮겨다닐 때나, 간혹 폭력과 전쟁 소리에 휩싸인다해도 묵상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 우리가 벌써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과, 벌써 안전하게 거할 처소를 찾았 다는 것과, 벌써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증거들이 그렇지 않다고 계속하여 주장한다 고 하여도, 우리는 묵상기도를 통하여 그같은 사실들을 신뢰할 수 있다.
미래의 성직자와 목회자들은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거나 훈련을 잘 받았다든가 동료들을 도우려는 간절한 열망과 그 시대의 불붙는 논쟁들에 대하여 창조적인 대응책을 제시할 능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모든 것이 아주 가치있고 귀중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기독교 지도자의 마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중심 질문은, 미래의 지도자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존전에 거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합니까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고자 합니까 하나님의 그 끝없는 인자하심을 맛보고자합니까 이다.
신학(theology) 의 원래 의미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연합(union with God in prayer)이다. 오늘날 신학은 많은 다른 분야들과 병존하는 하나의 학문 영역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신학자들은 자주 기도하기가 퍽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신학의 신비한 면을 개선하여, 하나님을 충심으로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모든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모든 충고가 제시되어지고, 모든 방법들이 개발되도록 하는 것은 절대 필요한 일이다. 최근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주요 논쟁점들 이를테면 교황권, 여성의 안수 문제, 신부의 결혼, 동성애, 산아제한, 낙태, 안락사 등의 문제들은 일차적으로 도덕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이다. 그 도덕적인 수준을 놓고 서로 다른 파벌들이 옳거니 그르거니 하고 투쟁한다. 하지만 그 투쟁은 간혹 모든 인간 관계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없어질 수 있다.
우측-날개(우익), 세력, 보수주의, 자유주의, 좌측-날개(좌익) 같은 말들은 사람들의 입장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 되어 왔다. 그리고 많은 토론들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영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정 치적인 투쟁으로 전개돼 온 것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의 불붙는 논쟁점들에 대하여 박식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단순히 기독교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도력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속적이고 친밀한 관계에 깊이 뿌리를 박 고 있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의 언어와 충고와 지침의 원천이 되어야 함을 알아둘 필요가있다. 묵상기도 훈련을 통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랑의 목소리를 반복하여 듣는 법을 배워야 하며,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그 사랑 속에서 찾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불붙는 논쟁점들을 다룰 때 하나님과 깊은 개인적인 관계가 배제된다면 너무도 쉽게 불화가 발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우리의 자의식은 주어진 주제에 대하여 우리의 의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삶의 원천을 하나님과 개인적인 아름다운 관계로 견고하게 뿌리를 내릴 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며, 고정관념 없이도 확신할 수 있다. 또한 불쾌하지 않게 기꺼이 대항할 수 있고, 물러빠지지 않고도 온화하고 또한 용서할 수 있으며, 교활하지 않은 진정한 증거를 할 수 있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은 진정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하며, 도덕적인 것에서 신비적인 것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2. 대중의 스타 에서 성직자로 유혹: 극적으로 해보라
이제는 내가 하바드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겨올 때 일어났던 또 다른 경험들을 말하고자 한다. 그 경험이란 성직의 공유이다. 나는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또한 그렇게 받은 교육으로 말미암아 내 자신이 성직이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일 이라고 믿었다. 나는 훈련을 아주 잘 받아야 했고, 학교에서 요구하는 모양을 잘 갖추어야 했다.
그리고 6년 간의 훈련과 자질형성 과정 이후, 나는 설교, 성례 인도, 상담, 교구 관리등을 잘 할 수 있게 되어야 했다. 나는 스스로 길을 걸으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 도와줄 모든 필요한 것들을 꽉꽉 채운 아주 묵직한 배냥을 짊어지고 머나먼 도보 여행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물음에는 답이 있었고, 문제에는 해법이 있었으며, 고통에는 그에 합당한 약이 있었다.
어느 문제가 닥쳐오든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수년 후에 나는 그러한 인식들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기본적인 나의 개인주의적 성직관은 변하지 않는다. 교수가 되었을 때 나는 오직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데서 큰위로를 얻었다. 나 스스로 주제와 방법을 선정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들까지도 내 마음대로 골라서 가르쳤다. 내가 하는 일의 방법에 있어서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업을 끝낸 다음에는 그럴 듯하다고 여겨지는 일은 무엇이든지 완전히 내 마음대로 하였다. 결국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개인적인 삶을 개인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라슈공동체로 갔을 때 내속에 있는 이런 개인주의는 급진적으로 변화되었다. 그곳에서 장애자들과 더불어 신실하게 살아보려는 숱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했다. 내가 성직자라는 사실이 개인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이 되어주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매시간 나의 행방을 알기 원했으며, 매순간에 대해 나는 책임을 져야 했다. 한 사람이 나의 수행자로서 지명되었고, 작은 모임이 하나 만들어져서 내가 어떤 초대는 받아들이고 어떤 초대는 거절해야 하는지를 간여하였다. 나와 함께 살던 장애자들이 내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은 오늘밤 당신은 집 에 있습니까 였다. 한번은 나와 함께 살던 장애자 가운데 트레버(Trevor)에게 안녕 이란 말 한 마디도 없이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내가 도착지에서 받은 첫번째 전화는 트레버가 눈물겹게 말하는소리였다. 헨리, 왜 당신 은 우리 곁은 떠났단 말입니까 우리는 정말 당신이 보고 싶어요. 제발 어서 돌아와 주세요. 이 공동체에서 상처받은 사람들과 살아오면서, 나는 내 인생의 대부분이 높다란 탑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이은 가느다란 선을 타고 다니면서 언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질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항상 다른 사람들의 박수갈채만 고대하는 줄타기 곡예사로서의 삶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두번째 유혹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를 스타로 열렬하게 환호해 줄만한 어떤 일을 극적으로 해보라는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그러면 천사를 이 손으로 너를 붙들어서 네 발이 돌에 부딪 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의 곡예사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분은 자신을 스스로 증거해 보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활활타는 석탄 위를 걷지도, 불을 삼키지도 않으셨고, 자기가 한 말이 상당히 권위가 있어 사자가 척척 움직여 줄 것이란 것을 증거해 보이기 위해 사자의 입속에 손을 집어넣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이렇 게 말씀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당신이 오늘날의 교회를 바라보면, 목회자와 성직자들 사이에서 개인주의가 유행하는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들 가운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자랑할 만큼 다재다능한 솜씨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일단 아무 것이라도 보여줄게 있다면 그것을 자기 혼자만 하여야 할 일들이라고 느끼고 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끌어들일만한 능력도 갖고 있지 않으며,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도없으며, 아름다운 예배의 식을 창조할 재주를 갖고 있지도 않으며, 또한 바라는 대로 젊은이나 어른들에게 인기를 누리고 있지도 않고, 기대 하는 대로 성도들이 필요에 따라 반응할 수도 없는, 소위 실패한 줄타기 곡예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은 아직도 관념상으로는 그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잘 해낼 수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경쟁 사회에서 너무도 분명한 스타의식과 개인적 영웅주의는 교회에서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일을 혼자 하려드 는 소위 자수성가형의 사람들에게는 지배적인 모습이 너무도 강하다.
과제: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에게 네가 날 사랑하느냐고 세번이나 물으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선교의 과제를 주셨다. 우리 의 문화 통념상 이에 대하여 마치 베드로가 지금 영웅적인 전도자로 파견된 것처럼 아주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알아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목양(牧羊)에 대해서 말씀하실 적에 그분은 우리에게 순한 양떼를 돌보는 용감 하고 외로운 목자를 상기시키고자 하신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목양이 더불어 함께 나누는 것이며 또한 공동체험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셨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막6:7). 우리는 둘씩 짝지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계속하여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혼자서 복음을 증거할 수 없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복음을 선포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혜가 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 (마18:19~20). 여러분은 이미 오래 전에 혼자 여행하는 것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현격한 차이가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계속하여 깨닫는 것은 나 혼자 있을 때 예수님을 진실로 신뢰하는 것이 무지무지하게 어렵다는 것이다. 나와 함께 기도할 형제 자매가 필요하며, 또한 가까이에서 영적인 과제를 함께 이야기할 형제 자매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도전이 되고,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순수하도록 유지시켜 줄 형제 자매가필요하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것은 치유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며,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며,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우리 가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선포할 때 이 사실을 아주 분명히 알 수 있다. 참으로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는 언제든지 우리가 우리들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간 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인식시킬 수 있다.
지난날 나는 수없이 많은 여행을 하면서, 전도도 하고 명상의 시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대학 졸업식 같은 데에 서 기조연설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항상 혼자 떠났었다. 하지만 라슈공동체에 들어간 지금은 내가 어디에 강연을 가려고 할 때면, 공동체에서는 언제든지 꼭 한 사람의 수행자를 딸려 보낸다. 내가 빌과 함께 여기에 있는 것은 우 리가 공동체 안에서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사역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견고한 비젼의 표현이기도 하다. 빌과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띠로 묶어주시고 또 우리가 함께 길을 걷는 동안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을 계시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우리의 공동체에 의해 여러분에게 보내졌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목양이란 더불어 함께 체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경험이다.
예수님께서는 목양하는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양들을 위해내 생명을 바친다 (요10:14~15). 예수님께서 좋은 목자이신 것처럼 그분 또한 우리가 좋은 목자되길 원하신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분의 양을 먹이고 돌보라고 하실 적에, 위탁자의 문제들을 알고 양을 돌보는 전문직업인 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거나 알려진, 혹은 돌보고 있거나 돌보아야 할, 용서하거나 용서받아야 할, 사랑하거나 사랑받아야 할 상처받기 쉬운 형제. 자매들을 보살피길 원하셨다. 우리는 훌륭한 지도자란 지도받는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젖어있다. 의 학,정신치료 그리고 사회사업은 오직 일방적인 봉사의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봉사를 하는 사람과 봉사를 받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 역할은 상호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자기와 개인적인 깊은 관계도 맺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바칠 수 있단 말인가 자기의 삶을 바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과 의심,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용기와 공포 등이 다른 사람들이 생명의 주님과 더 가까와져가는데 유용하게 쓰이도록 내어놓 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치유자도 아니고, 화해자도 아니며, 삶의 증여자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돌보아 준 만큼 누군가가 우리를 돌보아 주어야 할 죄 많은 사람이며, 깨어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이다. 목양에서 신비스러운 일은 택함 받은 우리가 행하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이르는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목양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함께 거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자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거나 사랑하지 못한다면 목양 자체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종교 적인 권력 이란 교활한 모습으로 갑자기 변해버리거나,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특징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능률적이고 통제적인 세계는 에수님께서 목양하시던 방법으로 목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모델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소위 돕는 직업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철저히 세속화되었고, 그 관계성도 역할의 혼동으로 말미암아 나약하고 위험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도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지도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Greenleaf)가 사용한 말처럼 종이며 지도 자 이다. 즉 지도자들도 상처받기 쉬운 종이며 사람들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사람 들을 필요로 한다.
미래의 교회가 요구하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지도자의 모델은 모름지기 세상의 권력 잔치 에 모델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의 육체를 기꺼이 내어놓은 섬기는 지도자,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훈련: 고백과 용서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미래의 지도자가 개인적인 영웅주의의 유혹을 극복하려면 어떤 훈련이 필요합니까 나는 고백과 용서의 훈련이라고 제안하고 싶다. 미래의 지도자들이 깊은 묵상기도에 잠기는 신비주의자여야 하는 만큼 또한 그들은 상한 심령을 주님 앞에 내놓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들이 섬기는(목양하는)사람들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한다.
고백과 용서는 죄 많은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나는 목회자와 성직자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가장 적은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고해성사도 공동체가 갖고 있는 이러한 취약성을 그대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다. 각종 죄악들이 고백되어지고, 종교적인 언어로 용서가 말해지지만, 예수님의 존전에서 체험할 수 있는 화해나 치유가 일어나는 진정한 만남은 참으로 힘든다. 거기엔 두려움과 거리감과 일반화된 되풀이가 많고, 진정한 경청과 상담과 해결은 별로 없으니 진정한 의미의 고해성사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목회자와 성직자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의 죄와 결점들을 숨기고 멀리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나 위로를 구해야 한다면 어떻게 스스로 성도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목자가 양들을 알지 못하고 깊이 사랑하지 못할 때, 어떻게 양들이 그 목자를 돌보거나 그들이 성직을 신실하게 지켜나갈 수 있도록 힘이 돼 줄 수 있겠는가 나는 성직자와 목회자들이 정서적 고독과 애정과 친밀감에의 깊은 욕구로 괴로와하며 때때로 성도들의 면전에서 뿌리깊은 죄책감과 부끄러움 등을 겪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놀라지 않는다. 종종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공상이 무엇인지, 내가 공부한답시고 혼자 앉아있을 때에 내 마음은 어떤 모습으로 방황하고 있었는지를 성도들이 안다면 어떻게 하나 평생 헌신적으로 일해온 지도자들도 아주 쉽게 노골적인 세속정욕에 넘어지기 쉽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육신의 진리를 삶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서로분리하고 있으며, 또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나 익명의 장소에서는 자신들의 필요를 아예 무시해버리거나 아니면 욕구대로 다 충족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내적 세계와 자신이 전하는 복음 사이에는 점점 심한 분열이 생겨나는 이원적인 현상을 경험한다. 즉 영혼이 영적으로 되어갈 때도, 육신 생활은 정욕적으로 되 어가는 것을 경험한다. 성직자와 목회자들이 그들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머리속으로는 꼭 전해야 할 가치있는 이상으로서 복음에 관계된 것을 구상하지만, 육체는 감정과 정욕을 추구하며 큰 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여지없이 앙갚음을 해온다. 기독교 지도자들은성육신의 삶을 살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즉 오직 그들 자신의 몸 뿐만 아니라 공동체라는 전체의 몸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고백과 용서는 정확히 말하면 도피적 영성과 정욕을 피할 수 있게 해주고 진정한 성육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훈련이다. 고백을 통하여 그들은 정욕의 어두운 세력을 몰아내고 공동체의 빛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된다. 용서를 통하여 그들은 의심이 가셔지고, 원한이 지워져 버리고, 또한 영육 간에 새로운 통합이 가능해 진다.
아마도 이것은 아주 비현실적인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AA(Alcoholicy Anony maus-알콜중독 방지회)나 ACA(Adult Children of Alcoholics-알콜 중독자 자녀들을 위한 모임)같은 치유 공동체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훈련이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다. 성직자와 목회자를 포함한 많고 많은 크리스챤들은 성육신에 대한 깊은 의미를 각자 섬기는 교회에서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AA와 ACA의 12단계 훈련 속에서나 치유를 추구하는 고백하는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치유가 실재(實在)한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성육신의 깊은 의미를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분명하게 말해서 목회자나 성직자들이 스스로의 죄나 실패를 강단이나 매일매일의 사역에서 다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건전하지 못한 것이며 또한 분별없는 것으로서, 섬기는 지도자의 모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목회자와 성직자들도 그들의 공동체에 완헌한 회전으로 부름 받았고,공동체에 함께 책임을 지며, 공동체로부터 애정과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고, 상처 입은 자아를 포함한 그들의 전존재로서 사역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성직자와 목회자들 가운데 특별히 고통으로 번민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사역을 하는 분들은 자신을 위해서도 참으로 안정된 공간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그들도 그들들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속으로 인도해 줄 사람들과 함께 자기의 깊은 고통과 고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다행이도 라슈공동체에서 그런 공간을 확보했으며, 그곳은 종종 나의 감추어진 고통에 관심을 가져주는 동료들과 나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점잖은 충고와 사랑의 격려를 해주는 친구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고 있다. 모든 성직자와 목회자들은 자신을 위해서 그런 안전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
3. 지배하는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유혹:권력을 잡아라
이제는 하바드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긴 것과 관련된 세번째 나의 경험을 말해보기로 하겠다. 지배자의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위치변경 된 사실은 너무도 분명했다. 이전에 나는 나이를 먹어가고 점점 성숙해감에 따라 내가 점차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었다. 사실 나는 해가 더해갈수록 자신있게 살아왔다. 나는 어떤 것이라도 깨닫을 수 있고, 또 그것을 표현할 능력도, 들을 능력도 있다고 느꼈다. 자제력도 날로 더해갔다.
그러나 정신장애자들과 그 조력자들을 돕기 위해 라슈공동체에 들어왔을 때, 모든 통제력은 풍지박산이 되어버렸다. 나는 매시간마다, 매일같이 매달동안 깜짝 놀랄만한 사건의 연속임을 깨달았다. 간혹 그 사건들은 내가 거의 예기치 못한 것들이었다. 빌은 내 설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그것이 찬성이든 반대이든)을 굳이 예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말하지도 않았다. 나의 논리적인 생각은 더 이상 논리적인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종종 내 말이나 행동이 그들의 삶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눈치였고, 또 그것을 내게 말해 주었다. 나의 실제 감정과 기분은 미화(美化)된 언어나 설득적인 주장들에 더 이상 가려져 있을 수 없었다. 지적인 능력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마음-사랑하는 마음이든, 분한 마음이든, 갈급한 마음이든-을 직접적이고 원색적으로 표현한 다. 나와 함께 살게된 그들은 나의 지도력의 정도가 아직도 복잡한 상황, 혼란스러운 감정, 분한 마음을 억제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을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인식시켜 주었다.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 아래 서 내가 안정을 찾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입을 다물고, 규칙을 지키고, 나의 말을 들으며, 내가 한 말을 믿으라고 압박감을 주며 말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지도 한 다는 것은 많은 경우에 지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는 신비함에 점점 눈 떠가고 있다. 나는 새로운 것을 무궁무진하게 많이 배우고 있다. 꼭 고통과 상한 심령들과의 괴로운 싸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은사와 은혜에 대해서도 그들은 그 어떤 학교에서도 내가 결코 배워본 적이 없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과 관심과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또한 나에게 그 어느 누구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슬픔과 소요, 공포와 무관심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은 간혹 내가 실망과 절망 속에 빠져있을 때, 나에게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을 펀뜻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번째 유혹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유혹이다. 내가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영광을 너에게 주마 라고 마귀가 예수님께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프랑스, 독일, 화란,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가에 대한 핵심적인 이유를 나 자신에게 자문자답해 볼 때 면 권력(power) 이란 말이 내 마음 속에 쉽게 떠오른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말은 예수님-신적 능력을 스스로 버리시고 자신을 비워 우리와 같이 낮아지신-의 이름으로 한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온갖 권력-정치. 군사. 경제. 도덕. 영적 권력-의 유혹에 끊임없이 굴복해 왔다는 것이다. 권력 이 복음 전파의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라는 유혹은 실로 가장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권력이 하나님과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기만 한다면 권력을 쥐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애기를 줄곧 들어왔고, 이제 우리 자신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론적인 배경 아래 십자군이 일어났으며, 종교재판소들이 설립되었고, 인디언들은 노예가 되었다. 또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가 굉장히 선호를 받게 되었으며, 감독의 저택과, 현란한 대성전과 화려한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양심에 있어서도 숱한 도덕적인 조작이 자행되었다. 사실 11세기의 교회 대분열, 16세기의 종교개혁, 20세기의 세속화 바람 등과 같은 교회사의 위기들 굽이굽이에는 정작 가난하고 권력 없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돼야 할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권력 놀음이라는 것이 그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 고 있다.
권력에 대한 유혹을 그토록 당연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권력은 다루기 힘든 사랑의 문제를 쉽게 대치해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하나님이 되는 것이 훨씬 쉬워 보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히 쉽게 보이는 법이며, 삶을 사랑하는 것보다 삶을 소유하는 것이 물론 쉬워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신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고. 우리는 이렇게 요구한다. 주님의 나라에서 우리를 오른쪽과 왼쪽에 다 앉혀 주시렵니까 (마20:21).
뱀이 너희가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혀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될 것 (창3:5)이라고 말한 이래, 우리는 줄곧 사랑 대신에 권력을 대치해 보라는 유혹을 받아왔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골고다언덕까지 가장 괴로운 유혹을 받으며 사셨다. 길고도 고통스러운 교회사의 역사는 사랑보다는 권력 을, 십자가의 희생보다는 지배력의 구사를, 섬기기보다는 지도자가 되기를 선택하도록 유혹받은 사람들의 역사이다. 이런 유혹에 끝까지 저항하여,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참성도라도 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친밀한 관계가 부재한 곳에 권력의 유혹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건강하 고 친밀한 관계를 어떻게 맺어가는지를 모른 채 그저 힘과 권력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신앙의 거성들 은 사랑을 줄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도전: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지금 우리는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가에 대해 세번씩이나 물으시고 그에게 세번의 같은 명령을 하신 뒤에 주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노라.
네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네 옷을 차려입고
네가 원하는 곳에 마음대로 다녔으나, 네가 늙으면
너는 팔을 벌리고
다른 사람이 네 옷을 입혀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 (요21:18).
이 말씀은 내가 하바드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겨가도록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말씀은 기독교 지도자상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으며, 우리를 권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예수님의 겸손한 길을 따르게 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남에게 신세를 지고 살면서 네가 가고 싶은 길은 걸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네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네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걸을수 있고, 네 운명을 통 제할 수도 있다 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성숙에 있어서 전혀 다른 비젼을 갖고 계셨다. 성장하여서는 가고싶지 않은 곳으로 인도되어져도 기꺼이가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드로가 양을 치는 목자로서의 임무를 부여 받은 이후 예수님께서는 즉시 베드로에게 섬기는 지도자는 잘 알려지지도 않고, 달갑지도 않으며, 고통스러운 곳으로 인도되어진다는 엄연한 진리를 던져 주셨다. 기독교 지도자의 깊은 이 세상에 쫙 깔린 위로 향하는 길 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끝나는 아래로 향하는 길이다. 이 말은 좀 병적이고 자기학대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하여 예 라고 대답한다. 예수님의 아래로 향하는 길은 하나님의 기쁨과 평화의 길로서, 이 기쁨과 평화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특성을 다루려고 한다. 그것은 권세와 통제의 지도력이 아니라 섬기려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속에 분명히 담긴 무력(Powerlessness)과 겸손 의 지도력을 말한다. 그렇다고 기독교 지도자가 복잡다기한 주변 환경에 단순히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심리적으로 나약한 지도 자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권력이란 사랑을 위해서 버리는 것이라는 따위의 지도자상을 말하는 것 도 아니다. 진정한 영적인 지도자상을 말하는 것이다. 영적인 생활 속에서 무력과 겸손은 아무런 줏대도 없는 사람 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 결정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사람을 일컫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예수님이 그들을 어디로 이끄시든지 기꺼이 따를 준비된 사람들이며,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또한 삶이 풍성해진다는 것을 항상 믿는 사람들이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철저하게 가난해져야 할 필요가 있으며 마가복음 6장 8절에 여행하는데 필요한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아라. 식량이나 가방이나 돈도 가지지 말고 신발만 신고 여분의 옷도 껴입지 말아라 는 말씀처럼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여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가난해지는 것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단 하나 가난은 우리로 하여금 인도 받는 자가 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참 인도자상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돕는 사람들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에 귀를 기울일 줄 알게 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참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풍요와 부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올바로 분별할 수 없게 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시험과 함정에 빠지고, 사람을 파멸시키는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망에 떨어집니다. (딤전6:9). 만일미래에 희망이 있는 어떤 교회를 꼽으라면 바로 지도자들이 기꺼이 인도를 받는 자리에 서려고 하는 가난한 교회라고 할 것이다.
훈련: 신학적인 조명
그러면 이렇듯 팔을 벌리고(요21:18)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훈련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나는 부지런한 신학적인 조명 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마치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에 연결시켜 주고, 고백과 용서가 우리의 사역을 공동체로 연결시켜주는 것처럼 부지런한 신학적인 조명은 우리가 어디로 인도 받아야 할지를 엄밀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목회자와 성직자는 거의 없다. 그들 중 대부분이 거쳐온 교육의 풍토는 신학보다는 행동과학 (심리학. 사회학 등)이 지배하는 풍토이다.
오늘날 기독교 많은 지도자들이 제기하는 질문들을 성경적 용어로 포장된 심리학적 사회학적 질문들이다. 에수님의 마음으로 가득찬 진정한 신학적인 사고를 실제 사역 속에서 찾아보기가 퍽 어렵다는 말이다. 믿을 수 있는 신학적인 조명이 없다면, 미래의 지도자들은 심리학자, 사회학자, 사회사업가의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능력있는 사람, 일을 쉽게 하는 사람, 사표(師表), 부모의 상징, 좋은 후견인이나 선배 등등으로 생각할 것이며 그것은 곧 그들이 일상생활의 스트레스 해소를 돕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지도자상과는 거의 무관하다. 왜냐하면 기독교 지도자들을 인류를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 나게 하고 영생의 문을 열어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일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지도자 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과 공동체와 나라와 세계의 일상 사건들이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삶에 더욱 더 민감해지도록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식견이 있어야 하며,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 역사를 운행해 가시는가를 매 순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과제는 자기들이 처한 시대의 아픔과 고난을 해결하는데 조그만 기여라도 해야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즉 황량한 땅에서 자유로운 새땅으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선포하는 데에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개인적인 분쟁 가족들의 갈등, 국가의 재난, 국제적인 긴장과 더불어 하나님의 실재(實在)에 대한 분명한 믿음 등을 답변해야 할 힘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들은 모든 형태의 운명론, 패배주의, 우연론 혹은 통계학이 우리에게 진리라고 제시하면서 미혹하는 자연방생론 등에 대하여는 반드시 아니오 라고 대답하여야 한다. 그들은 또 인생이 순전히 선과 악과 행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모든 형태의 절망에 대해서도 반드시 아니오라고 대답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들은 고통과 절망과 죽음 등의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할 때 그들을 체념이나 금욕적인 무관심에 빠뜨리려고 하는 그 어떤 감상적인 시도에 대해서도 반드시 아니오 라고 대답하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세속적인 세계를 향하여 또한 그들은 만유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써 인간 역사의 가장미세한 사건도 카이로스 (Kairos) -그리스도의 마음속으로 우리를 깊숙히 인도해주는 기회-가 되도록 해왔다는 사실을 분명한 목소리로 선포해야 한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학자가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또한 기도와 연구와 치밀한 분석 등을 통 해 훈련받은 사람들로서 그들의 시대에 혼탁스럽게 보이는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성스러운 부분을 확실히 밝혀낼 수 있어야 한다.
신학적인 조명은 매일매일 예수님의 마음으로 고통스럽거나 기쁨에 찬 현실을 조명해보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 써 온화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사람들의 의식 속에다 심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종종 가려 져 있어서 발견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일은 매우 어려운 훈련이다. 세상의 잡다한 소리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드럽고, 온화하며, 사랑스러운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한다. 기독교 지도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런 음성 을 들으며 평안과 위로를 얻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나는 이 지도자상이 신학적인 지도자상을 요구한다고 확신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각종 신학교에서도 많은-아주 많은-일들이 일어나야만 한다. 신학교는 시대의 징후를 진정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요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꼭 지적(知的)인 훈련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 훈련은 전인(全人)-몸과 생각과 마음-을 포함하는 깊은 영적 편성체계여야 한다. 신학교들이 얼마나 세속화 되어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반밖에 모르고 있다.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비운 채 종의 형체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은 이미 많은 신학교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경쟁적이고 야망적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철저히 배치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정도의 영적 편성체계가 추구되어 지고, 실현되어 진다면, 다가오는 세기의 교회는 큰 희망이 있다.
마 무 리
이제 요약하겠다. 하바드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겨 가면서 나는 기독교 지도자가 현실과 타협하고자 하는 욕망과 대 중의 스타가 되고자 하는 욕망 및 권력을 쥐고자하는 욕망에의해 얼마나 무서운 악영향을 받아왔는가에 대한 나의 사고를 새로운 방법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너무도 자주 나는 현실과의 타협, 대중적인 인기, 권력이 효과적인 목회의 한 요소으로 취급되는 것을 너무도 자주 보아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유혹이라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신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목자로 파송시켜 주시며, 또한 이제는 팔을 벌려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감을 당하는 삶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현실과 타협하는 생활에의 관심에서 탈피하여 기도하는 생활로,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하는 자세에서 탈피하여 공동체적이고 서로 협조하는 사역으로, 권력 위에 형성된 리더쉽에서 탈피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엄밀한 인식 위에 형성된 지도력으로 변화될것을 요구하신다.
라슈공동체의 사람들은 나에게 새로운 길들을 보여 주고 있다. 내가 그런 것들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곤 한다. 아주 유용한 것으로 증명된 옛날 양식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에 대 하여 생각해 볼 때, 정작 내게 그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은 내가 배울 것이라고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바로 그 사람들임을 분명히 보게 된다. 내가 지금 새 생활에서 배우고 있는 것들이 꼭 내게 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도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말해온 것이 전혀 새로운 내용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전통적인 이런 기독교 지도자관(指導者觀)이 바로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관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며 또 기도한다.
나는 낮은 데로 임하는 삶을 선택한, 팔을 벌리고 사는 지도자상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기도하는 지도자, 상처 입기 쉬운 지도자, 사람을 신뢰하는 지도자를 말한다. 이런 지도자상이 다가오는 세기를 맞이하는 여러분들의 마음 을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으로 충만케 하기를 기원한다.
닫 는 글
이것을 글로 쓰는 것과 워싱턴 D. C. 에서 실천에 옮기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빌과 내가 워싱톤 공항에 도착하여 크리스탈 시티의 공항 주변 포도맥강(Potomac River)과 같은 쪽에 현대의 모든 것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고층 유리 건물로 된 클라덴던 호텔(Clarenden Hotel)로 갔다. 빌과 나는 그 호텔의 번쩍번쩍하는 풍취에 강한 잎상을 받았다. 우리에게는 둘 다 각각 2인용 침대와 목욕실과 많은 수건과 유선 TV가 있는 널찍한 방이 주어졌다. 빌의 방 탁자 위에는 과일과 포도주병이 가득한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빌은 그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는 TV를 보는 데 아주 익숙해 있기 때문에, 커다란 침대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서는 리모콘으로 모든 채녈을 맞춰보았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는 시간이 너무나 빨리 다가왔다. 금빛 초상과 조그만 분수들로 장식된 한 무도회장에서 맛있는 부페로 만찬을 끝낸 후에, 빈센트 드와이어(Vincent Dwyer)는 나를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함께 한다는 것 의 의미를 몰랐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니라 빌과 함께 왔기 때문에 무척 기쁘다 는 말로 먼저 서두에 꺼냈다. 그리고는 내가 직접 쓴 육필(肉筆)원고를 꺼내어 연설(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빌이 자리에서 일어나 칸막이 벽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오더니 내 뒤편 오른쪽에 꿋꿋이 서는 것을 보았다.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가 나보다 훨씬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연설문을 한장씩 읽어낼 때마다, 그는 내 연설문을 한장씩 떼어내어 곁에 있는 조그만 탁자 위에다 차곡차곡 옮겨주었다. 나는 그가 이렇게 도와주는데 대하여 굉장히 편안한 기분을 갖게 되었으며 또한 동역자로서의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빌은 이에 대해 보다 뜨거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소위 현실과 타협해 보라 는 유혹으로서 돌을 빵으로 변화시켜 보라는 예수님이 받은 유혹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내 말을 막으면서 모든 사람이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나는 그 말을 이전에 들은 적이 있단 말입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내 연설을 듣고 있 는 모든 성직자와 목회자들이 그가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과 나의 사상에 아주 익숙해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알기를 원했다. 그것은 또한 내 연설 내용에서 청중들이 믿어주기를 바라는 것만큼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에게 되새겨주었다. 무도회장에서 빌이 이렇게 사이에 끼어듦으로써 보다 밝고, 편안하고, 쾌활한 분위기가 연출 되었다. 그렇게 빌은 긴장상태를 누그러뜨려 평상시의 소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해주었던 것이 연설을 계속하면서 나는 점점 더 우리가 진정으로 함께 동역을 이루고 있다고 느꼈으며, 또한 그것을 좋게 받아들였다.
내가 두번째 파트에서 나와 함께 살던 장애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당신은 오늘밤 집에 있을 겁니까 였다는 대목을 읽자 빌은 또다시 참견을 하였다. 그건 맞습니다. 그 말은 존 스멜춰(John Smeltger)가 항상 묻는 말입니다. 그의 말속에는 또 다시 안심시키는 그 무엇이 들어있었다. 빌은 존 스멜춰와 꽤 여러 해 동안 한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빌은 단순히 사람들이 자기 친구 스멜춰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마치 청중을 우리 앞으로 끌어들이기라도 하듯이 그들을 친밀한 우리의 일상 생활 가운데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내가 연설문을 다 읽은 후에, 참석자들이 각자 나름대로 감사를 표할 때 빌은 나에게 말했다. 헨리, 이제 내가 말 좀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얼른 걱정부터 되었다. 어쩌지 저 친구가 횡설수설하여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도 모를텐데 하지만 그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얘기를 할 것 같은 느낌을 가지면서도 나는 청중들에게 여러분들, 조금만 더 앉아 계시겠습니까 빌이 여러분들에게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라고말하였다. 빌은 마이크 앞으로 가서 아주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 해나갔다. 지난번 헨리가 보스톤에 갈 적에는 존 스멜춰를 데리고 가더니 이번에는 나를 데리고 이렇게 워싱톤에 왔습니다. 나는 여기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있는 것이 무척 기쁩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을 끝내자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그에게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우리가 그 조그만 연단을 걸어나올 때, 빌은 헨리, 내 연설이 좋았습니까 라고 물었다. 아주 좋았어요.
당신이 말한 내용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기뻐했단 말입니다. 빌은 아주 좋아했다. 사람들이 건배를 그 와 하려 그에게 몰려들자 그는 이전보다 훨씬 마음이 열렸다. 각 사람을 돌면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날밤이 유쾌한지를 묻고는,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그가 겪은 모든 생활을 그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었다.
나는 한 시간 이상이나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를 알리기에 너무 열중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떠나기 전 식사시간에 빌은 커피잔을 손에 들고 테이블을 돌면서 전날 밤에 알게된 모든 사람 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가 이런 보통 자리가 아닌 데에서도 많은 친구를 사귀고, 마음 편히 지내는 걸 보면 서 내 마음은 더욱 상쾌했다.
우리가 다시 토론토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빌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 들고 다니는 단어 퍼즐책에서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헨리 이번 우리 여행이 좋았습니까 그러자 나는 그러믄요. 당신과 함께 다닌 이번 여행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빌은 나를 찬찬히 들여다 보더니 또 이렇게 말했다. 이일은 우리가 함께 한 일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순간 나에게 진정으로 깨달아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다. 두세 사 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 (마18:20). 지난날 나는 항상 혼자서 강의 하고, 설교 하 고, 강연 하고, 연설도 했다. 간혹 나는 내가 한 말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억될까를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가 말한 것들은 오래 기억되지 않더라도 나와 함께 했던 빌과 나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 게 되었다. 나는 우리를 함께 보내주시고 이번 여행 기간 동안 우리와 함께 해주신 예수님께 크리스탈 시티 클라렌 던호텔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임재해주시기를 진심으로 소원하며 기도했다.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나는 빌에게 말했다. 빌, 이번에 나와 동행해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여행이었으며 우리가 한 일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함께 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진심이었다.
헨리 나웬
들머리
내친구 머레이 맥도넬(Murray McDonnell)이 토론토 근처에 있는 데이브레이크 공동체(Daybreak Community)로 나를 찾아와서는, 워싱톤 D.C.에 있는 인류 발전 연구소(Center forHuman Development) 15주년 기념행사때 나더러 21세기 있어서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하여 기꺼이 강연을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최근 나는 정신장애자들을 위한 라슈 공동체들(Larche Communities) 가운데 하나인 데이브레이크에서만 성직자로서 혼신의 힘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인류발전연구소 소장으로서 이 연구소의 발전을 위해 온갖 정력과 시간을 바치고 있는 머레이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이 연구소의 설립자인 드와이어(Father U. Dwyer)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적. 영적 완전을 추구하는 성직자들과 목회자들을 돕는데 그가 그토록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깊은 경의를 표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마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그 초청강연의 연사로 가겠다고 말한 후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가올 세기의 기독교 지도자상을 진지하게 전망해보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청중들이 성직자로서 동료 성직자들과 함께 사역에 깊이 열중하고 있는 분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더더욱 그러했다. 날이면 날마다 성직의 미래와 교회에서의 목회를 생각 하고 있는 그들에게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성직자들 가운데 앞으로 어떤 상황으로 변화될 것인지를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금세기도 마감하기 전에 어떻게 나 자신을 예견하겠는가에 대해서도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어 라고 말하면 할수록 내가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합류한 이래 그들이 전개한 사역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로 옮겨보고 싶은 간절한 바램도 없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수년 동안 나는 목회에 대한 강의를 했었다. 지금은 학자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정신장애자들과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돕는 소위 성직자로서의 길을 걸어오면서 내 자 신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목회를 위해 준비된 삶을 살아온 젊은 사람들에게 20년 동안이나 강의를 해온 내가지금은 매일매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사역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생각하며, 이런 생각들은 매일매일 나의 언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나는 또한 내일이나, 다음 주나, 내년 혹은 다가올 세기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 대하여 나 스스로 정직하게 돌아보면 볼수록 내 속에 계시면서 나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와 훨씬 쉽게 교통할 수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은 현재의 하나님(God of the present) 이시며, 미래를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까지도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사람 들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충분하다 (마6:34)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지금까지 데이브레이크에서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아오면서 아주 진하게 느껴온 것들을 기록 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 자신의 경험과 식견 중에서 어떤 것이 아주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있는 성직자들과 봉사자 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인지 구별하려고 애를 썼다. 현재의 사역은 바로 그 결과이다.
그러나 이 들머리의 의견을 마무리 짓기에 앞서 이 소책자를 읽는 독자들에게 미리 밝혀두어야 할 것은 워싱톤 D.C에 나 혼자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강연을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결코 혼자서 말씀을 증거 하러 다니도록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분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 그런데 나와함께 가고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현재 나의 삶이 참으로 장애자들을 위한 삶이라면 왜 나와 함께 여행을 하고, 나의 사역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이 그들 중에 한 사람도 없다 는 말인가 몇차례의 의논 끝에 데이브레이크 공동체는 빌 뷰렌(Bill V. Buren)을 나와 함께 가도록 결정했다. 내가 데이브레이크에 온 이래 빌과 나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장애자들 가운데 그는 말과 손짓 몸짓으로 의사표현을 가장 잘 하였다. 우리의 우정이 싹트기 시작할 때부터 그는 성직자로서 해야하는 나의 일에 진정한 관심을 보여주었으며, 내가 봉사하는 동안에 나를 거들어 주겠다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 어느날 그는 나에게 세례를 받지도 않았다고 실토하면서 교인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말했다. 그래서 나는 세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구(敎區)의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라고 권유했다. 그는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지역 교구 모임에 신실하게 참여했다. 비록 모임이 지루하고, 때로는 복잡다기한 각양각색의 토론이 그의 정신적인 능력으로는 감당하기에 버거웠지만, 그는 그 공동체에 속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용납과 사랑을 느꼈다. 그는 많은 것을 받아들였으며, 반대로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많은 것을 베풀기도 하였다. 세례와 견신례 및 부활절 전야제 때 처음으로 가진 성찬식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위대한 전환점 이 되었다. 비록 그의 능력상 많은 언어로 의사를 표현 하는 데는 제한을 받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몸으로 깊이 느끼고 있었으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았다.
간혹 나는 빌에게 세례와 견신례를 받은 사람은 새로운 소명을 갖게되며, 그 소명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 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빌은 나의 말을 아주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내가 성직자와 목 회자들에게 강의하려 워싱톤 D.C.에 갈 때 함께 가자고 부탁했을 때 그는 그것을 나의 사역에 동참하자는 권유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 일을 함께 하는 것이지요 라고 그는 우리가 떠나기 전 날 몇번이나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 동 역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워싱톤에 가고 있습니다 라고 나는 계속하여 말해 주었다.
빌은 이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신경이 무척 예민해 있는 동안에, 빌은 그의 일에 놀라운 확신을 보였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빌이 나와 함께하는 이 첫번 여행 이 그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반면, 빌은 처음부터 내내 나를 돕기 위해 간다 는 확신에 가득 차있었다. 나는 나중에야 그가 나보다 많이 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토론토에서 비행기에 발을 들여놓을 때에도 빌은 나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우리는 이일을 함께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그러자 나는 그럼요. 빌, 그렇고 말구요 라고 말해 주었다.
이 책에서 나는 워싱톤에서 강연한 내용을 먼저 밝힌 후에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왜 빌의 참석이 나의 강연보다 훨씬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여는글
다가오는 21세기의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한 강연 요청은 나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만일 사람들이 바로 다음 달에 대하여 묻는다 해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할것인데, 내가 어찌 다가오는 세기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숱한 내적갈등을 겪은 후에 나는 가능한 한 나 자신에게 정직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스스로 반문 했다. 너는 요즘 어떤 결정을 내리고 있으며, 그 결정들은 네가 미래에 대해 느끼는 방향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 아무튼 나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며, 내가 안팎의 새로운 곳으로 가는 그 길(방향)이 거대한 움직임 가운데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며 나는 그 중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믿어야만 했다.
20년 후 학계(學界)에서 목회심리학, 목회신학, 기독교영성학(基督敎靈性學) 교수로서 나는 깊은 내적 위협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내가 50세에 들어서고 내 나이가 두 배나 되었음에도 나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때, 나는 이런 단순한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내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예수님께도 더 가까이 나아갔는가 성직 25년을 맞으면서 나는 기도생활도 형편없이 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는 다소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뜨거운 논쟁점들에 온통 정력을 쏟고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내가 훌륭하게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들 말했지만, 내 마음 은밀한 곳에서는 나의 성공은 내 영혼을 위험한 수렁 속으로 몰아놓 고 있다 라고 나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반문하기 시작했다. 깊이 묵상하며 드리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의 생활과, 고독감 그리고 아주 절박하게 보이는 일에 항상 변화무쌍하게 말려드는 것은 성령을 점점 외면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하고. 내가 그것을 분명하게 알기란 아주 아려운 일이었다. 비록 농담으로는 그러했을지언정 나는 지옥과 같은 상태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았음에도, 어느날 나는 나 자신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으며, 전소(burn out:신경쇠약) 란 말은 영적인 죽음을 쉽게 풀이한 심리학 용어임을 깨달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살던 가운데 나는 계속하여 기도하였다.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는 내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는지 나에게 보여주소서. 나는 당신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저 이에 대하여 분명하고 확신한 것을 보여주시길 바랄 뿐이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다. 정신장애자들을 위한 라슈공동체의 설립자 진 바니어(Jean Vanier)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저 심령이 가난한 자들 가운데 가서 그들과 함께 살아라. 그러면 그들이 너를 치유 해줄 것이다 라고 말씀하였다. 이 부르심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했기 때에 나는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하바드대학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겨갔다. 즉 세계를 지배해 보고 싶었던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곳에서 말도 거의 못하거나 전혀할 수 없는 사람들, 기껏해야 우리 사회의 요구의 가장자리에서 맴돌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 즉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것은 아주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과정중에 있다. 20년이 지나 내가 가고 싶었던 곳에 가며 선택한 것에 대하여 토론하는 자유함을 얻은 후에도 말이 거의 필요 없는 엄격하고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필요로 하는, 영육(靈肉)이 상한 사람들과의 소박하고 감춰진 삶이 그 즉시 영적인 전소(burn out)의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라슈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면서 나는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하여 강연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말들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로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도전들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정신장애자들과 함께 살아온 나의 삶의 모습을 몇가지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여러분들이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하여 방향감각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에, 그들이 새로운 방향 제시를 할 수 있는 몇가지 암시를 할 것이라고 바라마지 않는다.
나의 의견을 여러분과 나눔에 있어 나는 복음서의 두 가지 사건-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 받으신 사건(마4:1~11)과 내 양을 먹이라 면서 베드로를 부르신 사건(요21:15~19)을 기조(基調)에 깔아두고자 한다.
1. 현실과의 타협에서 기도로 유혹: 현실과 타협하라
정신장애자들과 한 집에서 살게 되면서 첫번째 나를 강타한 사건은, 내가 했던 많은 유익한 일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그들이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요인으로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어떤 것도 인용할 수 없었고, 또한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학교에 다닌 적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20년 동안이나 노틀담, 예일, 하바드 등지에서 보낸 것은 나에 대한 중요한 소개가 되지 못했다.
그동안 내게 있어서는 중요시 되었던 전반적인 내 경험들조차도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저녁 식사를 하던 중에 내가 한 보조원에게 고기를 몇 점 집어주었더니, 장애자 중에 하나가 그에게 고기를 주지 마시오. 그는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는 장로 교인 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과거에는 매우 실제적이라고 입증되었던 그 어떤 기술들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도 정말 불안의 원천이 되었다. 나는 그 순간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인식되었는가에 전적으로 좌우되며, 인정과 거부, 포옹과 타 격, 웃음과 눈물에 노출되어 있는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쩌면 마치 내가 나의 삶을 처음부터 아주 다시 출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관계, 연줄, 명예 등은 더 이상 중요시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여지껏 나의 새 생활의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진정한 주체성을 재발견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깨어지고 상하고 철저히 겸손한 사람들은 내 속에 내재(內在)한 현실 타협적인 자아-어떤 일은 보여주고, 증명하고, 내세울 수 있는 자아-를 내버리게 하였다. 또한 그들은 나에게 어떤 일의 성취 여부에 관계 없이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열려진 완전히 약점 투성이 인 꾸밈없는 자아를 갖도록 만들었다.
내가 이 모든 사실을 말하는 것은,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현실에 철저히 비타협적이고, 또한 이 세상에서 약점 투성이인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 놓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고 깊게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방법이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로서 또한 에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가 전해야만 하는 아주 귀중한 메시지는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하거나 성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 가운데 구속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인생살이의 진짜 원천은 바로 그 사랑이라는 것을 선포하도록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첫번째 받은 유혹은 현실과 타협하라는 것으로 돌을 빵으로 바꿔보라는거였다. 아, 나도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얼마나 소원했던가 나는 영양실조와 수질오염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가 죽어가는 페루의 리마(Lima) 변두리 지역에 있는 신흥 도시들을 두루 다녀보면서, 길거리에 쫙 깔려있는 먼지투성이의 돌에게 신비한 마술을 부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수천개의 돌 가운데 어느 것을 집어 들든지 크로사왕(초승달 모양의 롤 빵), 커피케익(아침에 먹는 과자빵)이나 아주 멋드러진 건포도롤빵으로 변화되고, 또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두 손을 컵 모양으로 오므려 저수지의 썩은 물들을 받아내면 그것이 맛있는 우유로 변해 즐거이 마시게 되는 신비한 은사를 받았다면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고 도와주도록 목회자와 성직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닐까 또한 우리가 그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켰다고 그들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았는가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며, 가난한 사람들의 고 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우리는 부름받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었다. 하지만 그분은 돌을 빵으로 변화시키는 그런 지극히 현실 타협적인 행동을 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라는 요구를 (시험을) 받았을 때, 말씀 선포 라는 자신의 사역을 고수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이 사역을 감당하면서 겪은 가장 큰 고통은 소위 자존심이 깎여 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늘날 많은 성직자와 목회자들은 점점 자신들이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아주 바쁘게 보내지만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노력은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들은 교회 출석하는 교인의 숫자가 점점 감소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으며, 심리학자들이나 정신과 의사들, 결혼 상담가들과 의사들이 자기들보다 더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을 자주 보기도 한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현실은 그들의 뜻을 따르고 그 뜻에 매력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목사나 신부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들처럼 되고자 하는 것은 더 이상 생명을 바칠 만큼 고귀한 가치가 깃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 안에 칭찬의 소리는 거의 없고, 비판의 소리만 가득차 있는데 어떤 상태이든 의기소침해지지 않고 그런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헌신할 수 있겠는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속적인 사회의 사람들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살 수 있어. 하나님도 필요없고 교회도 목사도 필요없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단 말이야. 만일 우리가 그 렇지 못하다면, 우리 스스로를 관리하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한다. 이 문제는 믿음 부족이 아니라 능력 부족이 다. 만일 네가 병들었다면, 유능한 의사가 필요하고, 네가 헐벗고 굶주린다면 유능한 정치인이 필요한 것이다,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면 유능한 엔지니어가 필요한 것이며, 전쟁이 터진다면 유능한 협상자가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 교회, 목회자들이 수세기 동안 무능력의 골을 메워왔지만 오늘날은 그 골이 다른 방법으로 메워지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 영적인 대답이 필요없다. 이런 세속화의 풍토 속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점점 더 현실적이 되지 못하고 외곽으로 밀려나는 것을 느끼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은 이래도 계속 성직에 남아있어야 할 것인가 하고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간혹 그 들 가운데서는 보다 나은 적성을 계발시켜 성직을 떠나기도 하며,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적절한 헌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강연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이다. 우리 시대에 이룩된 모든 위대한 성취 아래에는 절망의 심연의 도사리고 있다. 능률과 통제는 우리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바램인 반면에 고독감, 격리감, 우정과 친밀성의 결핍, 관계성의파괴, 권태감, 공허감, 억압감, 자신을 무용지물로 깊이 자학하는 감정 등은 세상에서 성공한 수백만 사람들의 가슴마다 꽉꽉 채워져 있다.
엘리스(B. E. Ellis)의 소설 제로 이하(Less Than Zero) 는 그 당시 부와 성공과 대중적인 인기 및 권력의 뒷면에 숨겨진 도덕성과 영적 기근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극적으로 또 단선적으로 LA거부(巨富) 및 예능인들의10대 자녀들의 성생활, 마약 복용, 폭력 등을 묘사했다. 이런 타락의 모든 이면에는 너무도 분명하게 이런 부르짖음이 들려오고 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 없습니까 진정으로 나를 돌보아 줄 사람 없습니까 나를 위해 집에 머물러 있어 주기를 원하는 사람 없습니까 내가 절제할 수 없었을 때, 내가 울고 싶을 때 나와 함께 있어 주기를 원하는 사람 없습니까 나를 붙들어 주고, 심어줄 사람 없습니까 우리가 표면 상 자신이 넘치는 사회를 보고 있을 때, 비현실적(현실과 비타협적)이란 느낌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널리 퍼 져 있다. 낙태를 할 때 발달된 의학기술과 점증하는 비극적인 요소는 우리 사회에서 정신장애자의 수를 급격히 감소시킬지는 모른다. 하지만 벌써부터 분명한 것은 이렇게 될 때 어느 곳에서도 치유할 대책 조차도 없는 철저한 영적. 도덕적 장애의 고통을 가진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기독교 지도자의 필요성이 보다 분명해진다. 앞으로는 세상 풍조와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는 사람이 기독교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화려한 성공의 밑거름이 된 고통과도 연계성 을 가질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자기의 성역에서 증거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다.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양을 치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이렇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그리고 또 세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이 질문이 우리에게 현실과 타협하지 말 것과,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감을 동시에 부여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질문을 모든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으로 서 받아 들여야 한다.
예수님을 바라보자. 세상은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그분의 사 랑의 메시지는 권력과 능률과 통제를 추구하는 세상에 의해거 부당했다. 하지만 그분은 영광의 형체에 상처를 지니시고 볼 눈이 있고, 들을 귀 있으며 또한 이해할 마음이 있는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거부 당하고, 오해 받고, 상처 입은 이 예수님은 단순히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하는 데만 관심을 쏟으신 그분이 유일하게 하신 질문이 바로 네가 날 사랑하느냐 이다.
이 질문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를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내고 있느냐 네가 어떤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느냐 의 차원이 아니라 네가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을 나누고 있느냐 의 차원이다. 아마도 이 질문을 다르게 표현하면 너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 로 적용시켜 볼 수 있다. 고독과 절망 속에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 즉 용서하고 돌아보며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아주 많이 필요로 한다. 그 마음은 의심이 없으며, 원한도 없고, 분개하는 마음도 없을 뿐더러 미워하는 기미도 전혀 없다. 그 마음은 오직 사랑을 주기 원하며, 또한 그 응답으로 사랑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위로와 소망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신뢰하기를 매우 거부하는 모습과 인간의 심각한 고통을 목도함으로써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마음이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는 예수로 성육신하신, 즉 육신의 마음 을 가지신 하나님의 마음을 참으로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최상의 사랑-이시며, 매순간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공포, 격리, 절망 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철저하게, 매우 구체적으로 선포하고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아주 단순하고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떠한 조건이나 제한없이 자기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 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이다 (요일4:19)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부모님과 스승, 배우자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받는 확신, 애정, 인정, 격려, 지지 등은 종종의 심과 좌절, 분노, 원망 등을 남겨주는 소위 두번째 사랑이다. 우리모두는 이 두번째 사랑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깨어지기 쉽고, 덧없는 것인지 알고 있다. 이런 사랑을 숱하게 표현하는 뒷면에는 거부, 취소, 학대, 공갈, 폭 행뿐만 아니라 오히려 증오의 가능성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많은 영화와 연극은 인간관계의 모호성과 양면 가치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 두번째 사랑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심하게 느껴지지 않는 우정, 결혼, 공동체는 없다.
종종의 우리 일상 생활에서 유쾌한 감정 뒷면에는 소위 포기, 배신, 거부, 단절, 손실 등으로 일컫는 숱한 결함들이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이 모든 것은 두번째 사랑의 어두운 측면이며 우리의 가슴 속에서 결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어두움을 드러내고 있다.
두번째 사랑은 첫번째 사랑의 깨어진 모습일 뿐이다. 첫번째 사랑은 아무런 어두운 빛도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좋은 소식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의 실체로서 성육신을 하신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 그분은 큰 소리로 이렇게 부르신다. 누구든 지 목마른 사람은 나에게로 오라 나를 믿는 사람은 와서 마셔라 (요7:3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마11:28~29).
그 마음 속에서 네가 날 사랑하느냐란 말이 나왔다.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과 예수임을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곧 참 마음(the heart)을 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어느 곳을 가든지 치유, 화해, 새로운 삶과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는 일 등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현실과 타협하며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은 마침내 사라져 버릴 것이며, 오직 하 나의 소원은 온 인류가 우리의 이웃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두려워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을 만드시고, 어머니의 태에서 우리를 베 짜듯 이 지으셨습니다 (시편139:13을 보라).
훈련: 묵상기도
현실과 타협하여 적당히 살아보려는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을 아는 지식 안에 안전하게 거 하려면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신비주의자란 자신을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어떤 중심점이 있다면, 그것은 네가 날 사랑하느냐 네가 날 사랑하느냐 네가 날 사랑하느냐 고 계속하여 물으시는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는 훈련일 것이다. 그 훈련이란 묵상기도를 말한다. 묵상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긴급한 문제만을 좇아다니게 되는 것과 하나님의 마음이나 자신의 마음에 대해 무감각해 지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비록 길거리에 있을 때에나 이리 저리 옮겨다닐 때나, 간혹 폭력과 전쟁 소리에 휩싸인다해도 묵상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 우리가 벌써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과, 벌써 안전하게 거할 처소를 찾았 다는 것과, 벌써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증거들이 그렇지 않다고 계속하여 주장한다 고 하여도, 우리는 묵상기도를 통하여 그같은 사실들을 신뢰할 수 있다.
미래의 성직자와 목회자들은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거나 훈련을 잘 받았다든가 동료들을 도우려는 간절한 열망과 그 시대의 불붙는 논쟁들에 대하여 창조적인 대응책을 제시할 능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모든 것이 아주 가치있고 귀중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기독교 지도자의 마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중심 질문은, 미래의 지도자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존전에 거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합니까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고자 합니까 하나님의 그 끝없는 인자하심을 맛보고자합니까 이다.
신학(theology) 의 원래 의미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연합(union with God in prayer)이다. 오늘날 신학은 많은 다른 분야들과 병존하는 하나의 학문 영역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신학자들은 자주 기도하기가 퍽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신학의 신비한 면을 개선하여, 하나님을 충심으로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모든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모든 충고가 제시되어지고, 모든 방법들이 개발되도록 하는 것은 절대 필요한 일이다. 최근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주요 논쟁점들 이를테면 교황권, 여성의 안수 문제, 신부의 결혼, 동성애, 산아제한, 낙태, 안락사 등의 문제들은 일차적으로 도덕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이다. 그 도덕적인 수준을 놓고 서로 다른 파벌들이 옳거니 그르거니 하고 투쟁한다. 하지만 그 투쟁은 간혹 모든 인간 관계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없어질 수 있다.
우측-날개(우익), 세력, 보수주의, 자유주의, 좌측-날개(좌익) 같은 말들은 사람들의 입장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 되어 왔다. 그리고 많은 토론들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영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정 치적인 투쟁으로 전개돼 온 것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의 불붙는 논쟁점들에 대하여 박식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단순히 기독교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도력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속적이고 친밀한 관계에 깊이 뿌리를 박 고 있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의 언어와 충고와 지침의 원천이 되어야 함을 알아둘 필요가있다. 묵상기도 훈련을 통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랑의 목소리를 반복하여 듣는 법을 배워야 하며,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그 사랑 속에서 찾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불붙는 논쟁점들을 다룰 때 하나님과 깊은 개인적인 관계가 배제된다면 너무도 쉽게 불화가 발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우리의 자의식은 주어진 주제에 대하여 우리의 의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삶의 원천을 하나님과 개인적인 아름다운 관계로 견고하게 뿌리를 내릴 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며, 고정관념 없이도 확신할 수 있다. 또한 불쾌하지 않게 기꺼이 대항할 수 있고, 물러빠지지 않고도 온화하고 또한 용서할 수 있으며, 교활하지 않은 진정한 증거를 할 수 있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은 진정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하며, 도덕적인 것에서 신비적인 것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2. 대중의 스타 에서 성직자로 유혹: 극적으로 해보라
이제는 내가 하바드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겨올 때 일어났던 또 다른 경험들을 말하고자 한다. 그 경험이란 성직의 공유이다. 나는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또한 그렇게 받은 교육으로 말미암아 내 자신이 성직이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일 이라고 믿었다. 나는 훈련을 아주 잘 받아야 했고, 학교에서 요구하는 모양을 잘 갖추어야 했다.
그리고 6년 간의 훈련과 자질형성 과정 이후, 나는 설교, 성례 인도, 상담, 교구 관리등을 잘 할 수 있게 되어야 했다. 나는 스스로 길을 걸으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 도와줄 모든 필요한 것들을 꽉꽉 채운 아주 묵직한 배냥을 짊어지고 머나먼 도보 여행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물음에는 답이 있었고, 문제에는 해법이 있었으며, 고통에는 그에 합당한 약이 있었다.
어느 문제가 닥쳐오든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수년 후에 나는 그러한 인식들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기본적인 나의 개인주의적 성직관은 변하지 않는다. 교수가 되었을 때 나는 오직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데서 큰위로를 얻었다. 나 스스로 주제와 방법을 선정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들까지도 내 마음대로 골라서 가르쳤다. 내가 하는 일의 방법에 있어서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업을 끝낸 다음에는 그럴 듯하다고 여겨지는 일은 무엇이든지 완전히 내 마음대로 하였다. 결국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개인적인 삶을 개인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라슈공동체로 갔을 때 내속에 있는 이런 개인주의는 급진적으로 변화되었다. 그곳에서 장애자들과 더불어 신실하게 살아보려는 숱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했다. 내가 성직자라는 사실이 개인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이 되어주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매시간 나의 행방을 알기 원했으며, 매순간에 대해 나는 책임을 져야 했다. 한 사람이 나의 수행자로서 지명되었고, 작은 모임이 하나 만들어져서 내가 어떤 초대는 받아들이고 어떤 초대는 거절해야 하는지를 간여하였다. 나와 함께 살던 장애자들이 내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은 오늘밤 당신은 집 에 있습니까 였다. 한번은 나와 함께 살던 장애자 가운데 트레버(Trevor)에게 안녕 이란 말 한 마디도 없이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내가 도착지에서 받은 첫번째 전화는 트레버가 눈물겹게 말하는소리였다. 헨리, 왜 당신 은 우리 곁은 떠났단 말입니까 우리는 정말 당신이 보고 싶어요. 제발 어서 돌아와 주세요. 이 공동체에서 상처받은 사람들과 살아오면서, 나는 내 인생의 대부분이 높다란 탑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이은 가느다란 선을 타고 다니면서 언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질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항상 다른 사람들의 박수갈채만 고대하는 줄타기 곡예사로서의 삶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두번째 유혹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를 스타로 열렬하게 환호해 줄만한 어떤 일을 극적으로 해보라는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그러면 천사를 이 손으로 너를 붙들어서 네 발이 돌에 부딪 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의 곡예사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분은 자신을 스스로 증거해 보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활활타는 석탄 위를 걷지도, 불을 삼키지도 않으셨고, 자기가 한 말이 상당히 권위가 있어 사자가 척척 움직여 줄 것이란 것을 증거해 보이기 위해 사자의 입속에 손을 집어넣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이렇 게 말씀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당신이 오늘날의 교회를 바라보면, 목회자와 성직자들 사이에서 개인주의가 유행하는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들 가운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자랑할 만큼 다재다능한 솜씨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일단 아무 것이라도 보여줄게 있다면 그것을 자기 혼자만 하여야 할 일들이라고 느끼고 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끌어들일만한 능력도 갖고 있지 않으며,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도없으며, 아름다운 예배의 식을 창조할 재주를 갖고 있지도 않으며, 또한 바라는 대로 젊은이나 어른들에게 인기를 누리고 있지도 않고, 기대 하는 대로 성도들이 필요에 따라 반응할 수도 없는, 소위 실패한 줄타기 곡예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은 아직도 관념상으로는 그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잘 해낼 수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경쟁 사회에서 너무도 분명한 스타의식과 개인적 영웅주의는 교회에서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일을 혼자 하려드 는 소위 자수성가형의 사람들에게는 지배적인 모습이 너무도 강하다.
과제: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에게 네가 날 사랑하느냐고 세번이나 물으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선교의 과제를 주셨다. 우리 의 문화 통념상 이에 대하여 마치 베드로가 지금 영웅적인 전도자로 파견된 것처럼 아주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알아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목양(牧羊)에 대해서 말씀하실 적에 그분은 우리에게 순한 양떼를 돌보는 용감 하고 외로운 목자를 상기시키고자 하신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목양이 더불어 함께 나누는 것이며 또한 공동체험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셨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막6:7). 우리는 둘씩 짝지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계속하여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혼자서 복음을 증거할 수 없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복음을 선포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혜가 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 (마18:19~20). 여러분은 이미 오래 전에 혼자 여행하는 것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현격한 차이가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계속하여 깨닫는 것은 나 혼자 있을 때 예수님을 진실로 신뢰하는 것이 무지무지하게 어렵다는 것이다. 나와 함께 기도할 형제 자매가 필요하며, 또한 가까이에서 영적인 과제를 함께 이야기할 형제 자매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도전이 되고,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순수하도록 유지시켜 줄 형제 자매가필요하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것은 치유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며,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며,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우리 가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선포할 때 이 사실을 아주 분명히 알 수 있다. 참으로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는 언제든지 우리가 우리들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간 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인식시킬 수 있다.
지난날 나는 수없이 많은 여행을 하면서, 전도도 하고 명상의 시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대학 졸업식 같은 데에 서 기조연설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항상 혼자 떠났었다. 하지만 라슈공동체에 들어간 지금은 내가 어디에 강연을 가려고 할 때면, 공동체에서는 언제든지 꼭 한 사람의 수행자를 딸려 보낸다. 내가 빌과 함께 여기에 있는 것은 우 리가 공동체 안에서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사역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견고한 비젼의 표현이기도 하다. 빌과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띠로 묶어주시고 또 우리가 함께 길을 걷는 동안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을 계시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우리의 공동체에 의해 여러분에게 보내졌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목양이란 더불어 함께 체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경험이다.
예수님께서는 목양하는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양들을 위해내 생명을 바친다 (요10:14~15). 예수님께서 좋은 목자이신 것처럼 그분 또한 우리가 좋은 목자되길 원하신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분의 양을 먹이고 돌보라고 하실 적에, 위탁자의 문제들을 알고 양을 돌보는 전문직업인 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거나 알려진, 혹은 돌보고 있거나 돌보아야 할, 용서하거나 용서받아야 할, 사랑하거나 사랑받아야 할 상처받기 쉬운 형제. 자매들을 보살피길 원하셨다. 우리는 훌륭한 지도자란 지도받는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젖어있다. 의 학,정신치료 그리고 사회사업은 오직 일방적인 봉사의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봉사를 하는 사람과 봉사를 받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 역할은 상호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자기와 개인적인 깊은 관계도 맺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바칠 수 있단 말인가 자기의 삶을 바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과 의심,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용기와 공포 등이 다른 사람들이 생명의 주님과 더 가까와져가는데 유용하게 쓰이도록 내어놓 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치유자도 아니고, 화해자도 아니며, 삶의 증여자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돌보아 준 만큼 누군가가 우리를 돌보아 주어야 할 죄 많은 사람이며, 깨어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이다. 목양에서 신비스러운 일은 택함 받은 우리가 행하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이르는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목양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함께 거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자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거나 사랑하지 못한다면 목양 자체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종교 적인 권력 이란 교활한 모습으로 갑자기 변해버리거나,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특징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능률적이고 통제적인 세계는 에수님께서 목양하시던 방법으로 목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모델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소위 돕는 직업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철저히 세속화되었고, 그 관계성도 역할의 혼동으로 말미암아 나약하고 위험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도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지도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Greenleaf)가 사용한 말처럼 종이며 지도 자 이다. 즉 지도자들도 상처받기 쉬운 종이며 사람들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사람 들을 필요로 한다.
미래의 교회가 요구하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지도자의 모델은 모름지기 세상의 권력 잔치 에 모델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의 육체를 기꺼이 내어놓은 섬기는 지도자,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훈련: 고백과 용서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미래의 지도자가 개인적인 영웅주의의 유혹을 극복하려면 어떤 훈련이 필요합니까 나는 고백과 용서의 훈련이라고 제안하고 싶다. 미래의 지도자들이 깊은 묵상기도에 잠기는 신비주의자여야 하는 만큼 또한 그들은 상한 심령을 주님 앞에 내놓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들이 섬기는(목양하는)사람들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한다.
고백과 용서는 죄 많은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나는 목회자와 성직자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가장 적은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고해성사도 공동체가 갖고 있는 이러한 취약성을 그대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다. 각종 죄악들이 고백되어지고, 종교적인 언어로 용서가 말해지지만, 예수님의 존전에서 체험할 수 있는 화해나 치유가 일어나는 진정한 만남은 참으로 힘든다. 거기엔 두려움과 거리감과 일반화된 되풀이가 많고, 진정한 경청과 상담과 해결은 별로 없으니 진정한 의미의 고해성사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목회자와 성직자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의 죄와 결점들을 숨기고 멀리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나 위로를 구해야 한다면 어떻게 스스로 성도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목자가 양들을 알지 못하고 깊이 사랑하지 못할 때, 어떻게 양들이 그 목자를 돌보거나 그들이 성직을 신실하게 지켜나갈 수 있도록 힘이 돼 줄 수 있겠는가 나는 성직자와 목회자들이 정서적 고독과 애정과 친밀감에의 깊은 욕구로 괴로와하며 때때로 성도들의 면전에서 뿌리깊은 죄책감과 부끄러움 등을 겪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놀라지 않는다. 종종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공상이 무엇인지, 내가 공부한답시고 혼자 앉아있을 때에 내 마음은 어떤 모습으로 방황하고 있었는지를 성도들이 안다면 어떻게 하나 평생 헌신적으로 일해온 지도자들도 아주 쉽게 노골적인 세속정욕에 넘어지기 쉽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육신의 진리를 삶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서로분리하고 있으며, 또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나 익명의 장소에서는 자신들의 필요를 아예 무시해버리거나 아니면 욕구대로 다 충족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내적 세계와 자신이 전하는 복음 사이에는 점점 심한 분열이 생겨나는 이원적인 현상을 경험한다. 즉 영혼이 영적으로 되어갈 때도, 육신 생활은 정욕적으로 되 어가는 것을 경험한다. 성직자와 목회자들이 그들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머리속으로는 꼭 전해야 할 가치있는 이상으로서 복음에 관계된 것을 구상하지만, 육체는 감정과 정욕을 추구하며 큰 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여지없이 앙갚음을 해온다. 기독교 지도자들은성육신의 삶을 살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즉 오직 그들 자신의 몸 뿐만 아니라 공동체라는 전체의 몸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고백과 용서는 정확히 말하면 도피적 영성과 정욕을 피할 수 있게 해주고 진정한 성육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훈련이다. 고백을 통하여 그들은 정욕의 어두운 세력을 몰아내고 공동체의 빛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된다. 용서를 통하여 그들은 의심이 가셔지고, 원한이 지워져 버리고, 또한 영육 간에 새로운 통합이 가능해 진다.
아마도 이것은 아주 비현실적인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AA(Alcoholicy Anony maus-알콜중독 방지회)나 ACA(Adult Children of Alcoholics-알콜 중독자 자녀들을 위한 모임)같은 치유 공동체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훈련이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다. 성직자와 목회자를 포함한 많고 많은 크리스챤들은 성육신에 대한 깊은 의미를 각자 섬기는 교회에서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AA와 ACA의 12단계 훈련 속에서나 치유를 추구하는 고백하는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치유가 실재(實在)한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성육신의 깊은 의미를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분명하게 말해서 목회자나 성직자들이 스스로의 죄나 실패를 강단이나 매일매일의 사역에서 다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건전하지 못한 것이며 또한 분별없는 것으로서, 섬기는 지도자의 모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목회자와 성직자들도 그들의 공동체에 완헌한 회전으로 부름 받았고,공동체에 함께 책임을 지며, 공동체로부터 애정과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고, 상처 입은 자아를 포함한 그들의 전존재로서 사역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성직자와 목회자들 가운데 특별히 고통으로 번민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사역을 하는 분들은 자신을 위해서도 참으로 안정된 공간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그들도 그들들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속으로 인도해 줄 사람들과 함께 자기의 깊은 고통과 고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다행이도 라슈공동체에서 그런 공간을 확보했으며, 그곳은 종종 나의 감추어진 고통에 관심을 가져주는 동료들과 나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점잖은 충고와 사랑의 격려를 해주는 친구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고 있다. 모든 성직자와 목회자들은 자신을 위해서 그런 안전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
3. 지배하는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유혹:권력을 잡아라
이제는 하바드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긴 것과 관련된 세번째 나의 경험을 말해보기로 하겠다. 지배자의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위치변경 된 사실은 너무도 분명했다. 이전에 나는 나이를 먹어가고 점점 성숙해감에 따라 내가 점차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었다. 사실 나는 해가 더해갈수록 자신있게 살아왔다. 나는 어떤 것이라도 깨닫을 수 있고, 또 그것을 표현할 능력도, 들을 능력도 있다고 느꼈다. 자제력도 날로 더해갔다.
그러나 정신장애자들과 그 조력자들을 돕기 위해 라슈공동체에 들어왔을 때, 모든 통제력은 풍지박산이 되어버렸다. 나는 매시간마다, 매일같이 매달동안 깜짝 놀랄만한 사건의 연속임을 깨달았다. 간혹 그 사건들은 내가 거의 예기치 못한 것들이었다. 빌은 내 설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그것이 찬성이든 반대이든)을 굳이 예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말하지도 않았다. 나의 논리적인 생각은 더 이상 논리적인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종종 내 말이나 행동이 그들의 삶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눈치였고, 또 그것을 내게 말해 주었다. 나의 실제 감정과 기분은 미화(美化)된 언어나 설득적인 주장들에 더 이상 가려져 있을 수 없었다. 지적인 능력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마음-사랑하는 마음이든, 분한 마음이든, 갈급한 마음이든-을 직접적이고 원색적으로 표현한 다. 나와 함께 살게된 그들은 나의 지도력의 정도가 아직도 복잡한 상황, 혼란스러운 감정, 분한 마음을 억제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을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인식시켜 주었다.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 아래 서 내가 안정을 찾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입을 다물고, 규칙을 지키고, 나의 말을 들으며, 내가 한 말을 믿으라고 압박감을 주며 말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지도 한 다는 것은 많은 경우에 지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는 신비함에 점점 눈 떠가고 있다. 나는 새로운 것을 무궁무진하게 많이 배우고 있다. 꼭 고통과 상한 심령들과의 괴로운 싸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은사와 은혜에 대해서도 그들은 그 어떤 학교에서도 내가 결코 배워본 적이 없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과 관심과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또한 나에게 그 어느 누구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슬픔과 소요, 공포와 무관심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은 간혹 내가 실망과 절망 속에 빠져있을 때, 나에게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을 펀뜻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번째 유혹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유혹이다. 내가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영광을 너에게 주마 라고 마귀가 예수님께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프랑스, 독일, 화란,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가에 대한 핵심적인 이유를 나 자신에게 자문자답해 볼 때 면 권력(power) 이란 말이 내 마음 속에 쉽게 떠오른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말은 예수님-신적 능력을 스스로 버리시고 자신을 비워 우리와 같이 낮아지신-의 이름으로 한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온갖 권력-정치. 군사. 경제. 도덕. 영적 권력-의 유혹에 끊임없이 굴복해 왔다는 것이다. 권력 이 복음 전파의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라는 유혹은 실로 가장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권력이 하나님과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기만 한다면 권력을 쥐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애기를 줄곧 들어왔고, 이제 우리 자신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론적인 배경 아래 십자군이 일어났으며, 종교재판소들이 설립되었고, 인디언들은 노예가 되었다. 또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가 굉장히 선호를 받게 되었으며, 감독의 저택과, 현란한 대성전과 화려한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양심에 있어서도 숱한 도덕적인 조작이 자행되었다. 사실 11세기의 교회 대분열, 16세기의 종교개혁, 20세기의 세속화 바람 등과 같은 교회사의 위기들 굽이굽이에는 정작 가난하고 권력 없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돼야 할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권력 놀음이라는 것이 그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 고 있다.
권력에 대한 유혹을 그토록 당연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권력은 다루기 힘든 사랑의 문제를 쉽게 대치해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하나님이 되는 것이 훨씬 쉬워 보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히 쉽게 보이는 법이며, 삶을 사랑하는 것보다 삶을 소유하는 것이 물론 쉬워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신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고. 우리는 이렇게 요구한다. 주님의 나라에서 우리를 오른쪽과 왼쪽에 다 앉혀 주시렵니까 (마20:21).
뱀이 너희가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혀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될 것 (창3:5)이라고 말한 이래, 우리는 줄곧 사랑 대신에 권력을 대치해 보라는 유혹을 받아왔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골고다언덕까지 가장 괴로운 유혹을 받으며 사셨다. 길고도 고통스러운 교회사의 역사는 사랑보다는 권력 을, 십자가의 희생보다는 지배력의 구사를, 섬기기보다는 지도자가 되기를 선택하도록 유혹받은 사람들의 역사이다. 이런 유혹에 끝까지 저항하여,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참성도라도 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친밀한 관계가 부재한 곳에 권력의 유혹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건강하 고 친밀한 관계를 어떻게 맺어가는지를 모른 채 그저 힘과 권력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신앙의 거성들 은 사랑을 줄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도전: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지금 우리는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가에 대해 세번씩이나 물으시고 그에게 세번의 같은 명령을 하신 뒤에 주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노라.
네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네 옷을 차려입고
네가 원하는 곳에 마음대로 다녔으나, 네가 늙으면
너는 팔을 벌리고
다른 사람이 네 옷을 입혀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 (요21:18).
이 말씀은 내가 하바드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겨가도록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말씀은 기독교 지도자상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으며, 우리를 권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예수님의 겸손한 길을 따르게 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남에게 신세를 지고 살면서 네가 가고 싶은 길은 걸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네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네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걸을수 있고, 네 운명을 통 제할 수도 있다 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성숙에 있어서 전혀 다른 비젼을 갖고 계셨다. 성장하여서는 가고싶지 않은 곳으로 인도되어져도 기꺼이가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드로가 양을 치는 목자로서의 임무를 부여 받은 이후 예수님께서는 즉시 베드로에게 섬기는 지도자는 잘 알려지지도 않고, 달갑지도 않으며, 고통스러운 곳으로 인도되어진다는 엄연한 진리를 던져 주셨다. 기독교 지도자의 깊은 이 세상에 쫙 깔린 위로 향하는 길 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끝나는 아래로 향하는 길이다. 이 말은 좀 병적이고 자기학대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하여 예 라고 대답한다. 예수님의 아래로 향하는 길은 하나님의 기쁨과 평화의 길로서, 이 기쁨과 평화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특성을 다루려고 한다. 그것은 권세와 통제의 지도력이 아니라 섬기려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속에 분명히 담긴 무력(Powerlessness)과 겸손 의 지도력을 말한다. 그렇다고 기독교 지도자가 복잡다기한 주변 환경에 단순히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심리적으로 나약한 지도 자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권력이란 사랑을 위해서 버리는 것이라는 따위의 지도자상을 말하는 것 도 아니다. 진정한 영적인 지도자상을 말하는 것이다. 영적인 생활 속에서 무력과 겸손은 아무런 줏대도 없는 사람 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 결정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사람을 일컫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예수님이 그들을 어디로 이끄시든지 기꺼이 따를 준비된 사람들이며,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또한 삶이 풍성해진다는 것을 항상 믿는 사람들이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철저하게 가난해져야 할 필요가 있으며 마가복음 6장 8절에 여행하는데 필요한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아라. 식량이나 가방이나 돈도 가지지 말고 신발만 신고 여분의 옷도 껴입지 말아라 는 말씀처럼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여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가난해지는 것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단 하나 가난은 우리로 하여금 인도 받는 자가 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참 인도자상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돕는 사람들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에 귀를 기울일 줄 알게 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참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풍요와 부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올바로 분별할 수 없게 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시험과 함정에 빠지고, 사람을 파멸시키는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망에 떨어집니다. (딤전6:9). 만일미래에 희망이 있는 어떤 교회를 꼽으라면 바로 지도자들이 기꺼이 인도를 받는 자리에 서려고 하는 가난한 교회라고 할 것이다.
훈련: 신학적인 조명
그러면 이렇듯 팔을 벌리고(요21:18)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훈련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나는 부지런한 신학적인 조명 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마치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에 연결시켜 주고, 고백과 용서가 우리의 사역을 공동체로 연결시켜주는 것처럼 부지런한 신학적인 조명은 우리가 어디로 인도 받아야 할지를 엄밀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목회자와 성직자는 거의 없다. 그들 중 대부분이 거쳐온 교육의 풍토는 신학보다는 행동과학 (심리학. 사회학 등)이 지배하는 풍토이다.
오늘날 기독교 많은 지도자들이 제기하는 질문들을 성경적 용어로 포장된 심리학적 사회학적 질문들이다. 에수님의 마음으로 가득찬 진정한 신학적인 사고를 실제 사역 속에서 찾아보기가 퍽 어렵다는 말이다. 믿을 수 있는 신학적인 조명이 없다면, 미래의 지도자들은 심리학자, 사회학자, 사회사업가의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능력있는 사람, 일을 쉽게 하는 사람, 사표(師表), 부모의 상징, 좋은 후견인이나 선배 등등으로 생각할 것이며 그것은 곧 그들이 일상생활의 스트레스 해소를 돕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지도자상과는 거의 무관하다. 왜냐하면 기독교 지도자들을 인류를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 나게 하고 영생의 문을 열어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일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지도자 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과 공동체와 나라와 세계의 일상 사건들이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삶에 더욱 더 민감해지도록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식견이 있어야 하며,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 역사를 운행해 가시는가를 매 순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과제는 자기들이 처한 시대의 아픔과 고난을 해결하는데 조그만 기여라도 해야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즉 황량한 땅에서 자유로운 새땅으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선포하는 데에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개인적인 분쟁 가족들의 갈등, 국가의 재난, 국제적인 긴장과 더불어 하나님의 실재(實在)에 대한 분명한 믿음 등을 답변해야 할 힘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들은 모든 형태의 운명론, 패배주의, 우연론 혹은 통계학이 우리에게 진리라고 제시하면서 미혹하는 자연방생론 등에 대하여는 반드시 아니오 라고 대답하여야 한다. 그들은 또 인생이 순전히 선과 악과 행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모든 형태의 절망에 대해서도 반드시 아니오라고 대답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들은 고통과 절망과 죽음 등의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할 때 그들을 체념이나 금욕적인 무관심에 빠뜨리려고 하는 그 어떤 감상적인 시도에 대해서도 반드시 아니오 라고 대답하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세속적인 세계를 향하여 또한 그들은 만유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써 인간 역사의 가장미세한 사건도 카이로스 (Kairos) -그리스도의 마음속으로 우리를 깊숙히 인도해주는 기회-가 되도록 해왔다는 사실을 분명한 목소리로 선포해야 한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학자가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또한 기도와 연구와 치밀한 분석 등을 통 해 훈련받은 사람들로서 그들의 시대에 혼탁스럽게 보이는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성스러운 부분을 확실히 밝혀낼 수 있어야 한다.
신학적인 조명은 매일매일 예수님의 마음으로 고통스럽거나 기쁨에 찬 현실을 조명해보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 써 온화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사람들의 의식 속에다 심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종종 가려 져 있어서 발견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일은 매우 어려운 훈련이다. 세상의 잡다한 소리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드럽고, 온화하며, 사랑스러운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한다. 기독교 지도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런 음성 을 들으며 평안과 위로를 얻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나는 이 지도자상이 신학적인 지도자상을 요구한다고 확신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각종 신학교에서도 많은-아주 많은-일들이 일어나야만 한다. 신학교는 시대의 징후를 진정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요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꼭 지적(知的)인 훈련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 훈련은 전인(全人)-몸과 생각과 마음-을 포함하는 깊은 영적 편성체계여야 한다. 신학교들이 얼마나 세속화 되어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반밖에 모르고 있다.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비운 채 종의 형체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은 이미 많은 신학교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경쟁적이고 야망적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철저히 배치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정도의 영적 편성체계가 추구되어 지고, 실현되어 진다면, 다가오는 세기의 교회는 큰 희망이 있다.
마 무 리
이제 요약하겠다. 하바드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겨 가면서 나는 기독교 지도자가 현실과 타협하고자 하는 욕망과 대 중의 스타가 되고자 하는 욕망 및 권력을 쥐고자하는 욕망에의해 얼마나 무서운 악영향을 받아왔는가에 대한 나의 사고를 새로운 방법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너무도 자주 나는 현실과의 타협, 대중적인 인기, 권력이 효과적인 목회의 한 요소으로 취급되는 것을 너무도 자주 보아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유혹이라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신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목자로 파송시켜 주시며, 또한 이제는 팔을 벌려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감을 당하는 삶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현실과 타협하는 생활에의 관심에서 탈피하여 기도하는 생활로,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하는 자세에서 탈피하여 공동체적이고 서로 협조하는 사역으로, 권력 위에 형성된 리더쉽에서 탈피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엄밀한 인식 위에 형성된 지도력으로 변화될것을 요구하신다.
라슈공동체의 사람들은 나에게 새로운 길들을 보여 주고 있다. 내가 그런 것들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곤 한다. 아주 유용한 것으로 증명된 옛날 양식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에 대 하여 생각해 볼 때, 정작 내게 그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은 내가 배울 것이라고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바로 그 사람들임을 분명히 보게 된다. 내가 지금 새 생활에서 배우고 있는 것들이 꼭 내게 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도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말해온 것이 전혀 새로운 내용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전통적인 이런 기독교 지도자관(指導者觀)이 바로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관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며 또 기도한다.
나는 낮은 데로 임하는 삶을 선택한, 팔을 벌리고 사는 지도자상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기도하는 지도자, 상처 입기 쉬운 지도자, 사람을 신뢰하는 지도자를 말한다. 이런 지도자상이 다가오는 세기를 맞이하는 여러분들의 마음 을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으로 충만케 하기를 기원한다.
닫 는 글
이것을 글로 쓰는 것과 워싱턴 D. C. 에서 실천에 옮기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빌과 내가 워싱톤 공항에 도착하여 크리스탈 시티의 공항 주변 포도맥강(Potomac River)과 같은 쪽에 현대의 모든 것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고층 유리 건물로 된 클라덴던 호텔(Clarenden Hotel)로 갔다. 빌과 나는 그 호텔의 번쩍번쩍하는 풍취에 강한 잎상을 받았다. 우리에게는 둘 다 각각 2인용 침대와 목욕실과 많은 수건과 유선 TV가 있는 널찍한 방이 주어졌다. 빌의 방 탁자 위에는 과일과 포도주병이 가득한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빌은 그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는 TV를 보는 데 아주 익숙해 있기 때문에, 커다란 침대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서는 리모콘으로 모든 채녈을 맞춰보았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는 시간이 너무나 빨리 다가왔다. 금빛 초상과 조그만 분수들로 장식된 한 무도회장에서 맛있는 부페로 만찬을 끝낸 후에, 빈센트 드와이어(Vincent Dwyer)는 나를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함께 한다는 것 의 의미를 몰랐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니라 빌과 함께 왔기 때문에 무척 기쁘다 는 말로 먼저 서두에 꺼냈다. 그리고는 내가 직접 쓴 육필(肉筆)원고를 꺼내어 연설(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빌이 자리에서 일어나 칸막이 벽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오더니 내 뒤편 오른쪽에 꿋꿋이 서는 것을 보았다.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가 나보다 훨씬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연설문을 한장씩 읽어낼 때마다, 그는 내 연설문을 한장씩 떼어내어 곁에 있는 조그만 탁자 위에다 차곡차곡 옮겨주었다. 나는 그가 이렇게 도와주는데 대하여 굉장히 편안한 기분을 갖게 되었으며 또한 동역자로서의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빌은 이에 대해 보다 뜨거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소위 현실과 타협해 보라 는 유혹으로서 돌을 빵으로 변화시켜 보라는 예수님이 받은 유혹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내 말을 막으면서 모든 사람이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나는 그 말을 이전에 들은 적이 있단 말입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내 연설을 듣고 있 는 모든 성직자와 목회자들이 그가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과 나의 사상에 아주 익숙해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알기를 원했다. 그것은 또한 내 연설 내용에서 청중들이 믿어주기를 바라는 것만큼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에게 되새겨주었다. 무도회장에서 빌이 이렇게 사이에 끼어듦으로써 보다 밝고, 편안하고, 쾌활한 분위기가 연출 되었다. 그렇게 빌은 긴장상태를 누그러뜨려 평상시의 소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해주었던 것이 연설을 계속하면서 나는 점점 더 우리가 진정으로 함께 동역을 이루고 있다고 느꼈으며, 또한 그것을 좋게 받아들였다.
내가 두번째 파트에서 나와 함께 살던 장애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당신은 오늘밤 집에 있을 겁니까 였다는 대목을 읽자 빌은 또다시 참견을 하였다. 그건 맞습니다. 그 말은 존 스멜춰(John Smeltger)가 항상 묻는 말입니다. 그의 말속에는 또 다시 안심시키는 그 무엇이 들어있었다. 빌은 존 스멜춰와 꽤 여러 해 동안 한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빌은 단순히 사람들이 자기 친구 스멜춰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마치 청중을 우리 앞으로 끌어들이기라도 하듯이 그들을 친밀한 우리의 일상 생활 가운데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내가 연설문을 다 읽은 후에, 참석자들이 각자 나름대로 감사를 표할 때 빌은 나에게 말했다. 헨리, 이제 내가 말 좀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얼른 걱정부터 되었다. 어쩌지 저 친구가 횡설수설하여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도 모를텐데 하지만 그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얘기를 할 것 같은 느낌을 가지면서도 나는 청중들에게 여러분들, 조금만 더 앉아 계시겠습니까 빌이 여러분들에게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라고말하였다. 빌은 마이크 앞으로 가서 아주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 해나갔다. 지난번 헨리가 보스톤에 갈 적에는 존 스멜춰를 데리고 가더니 이번에는 나를 데리고 이렇게 워싱톤에 왔습니다. 나는 여기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있는 것이 무척 기쁩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을 끝내자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그에게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우리가 그 조그만 연단을 걸어나올 때, 빌은 헨리, 내 연설이 좋았습니까 라고 물었다. 아주 좋았어요.
당신이 말한 내용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기뻐했단 말입니다. 빌은 아주 좋아했다. 사람들이 건배를 그 와 하려 그에게 몰려들자 그는 이전보다 훨씬 마음이 열렸다. 각 사람을 돌면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날밤이 유쾌한지를 묻고는,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그가 겪은 모든 생활을 그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었다.
나는 한 시간 이상이나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를 알리기에 너무 열중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떠나기 전 식사시간에 빌은 커피잔을 손에 들고 테이블을 돌면서 전날 밤에 알게된 모든 사람 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가 이런 보통 자리가 아닌 데에서도 많은 친구를 사귀고, 마음 편히 지내는 걸 보면 서 내 마음은 더욱 상쾌했다.
우리가 다시 토론토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빌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 들고 다니는 단어 퍼즐책에서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헨리 이번 우리 여행이 좋았습니까 그러자 나는 그러믄요. 당신과 함께 다닌 이번 여행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빌은 나를 찬찬히 들여다 보더니 또 이렇게 말했다. 이일은 우리가 함께 한 일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순간 나에게 진정으로 깨달아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다. 두세 사 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 (마18:20). 지난날 나는 항상 혼자서 강의 하고, 설교 하 고, 강연 하고, 연설도 했다. 간혹 나는 내가 한 말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억될까를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가 말한 것들은 오래 기억되지 않더라도 나와 함께 했던 빌과 나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 게 되었다. 나는 우리를 함께 보내주시고 이번 여행 기간 동안 우리와 함께 해주신 예수님께 크리스탈 시티 클라렌 던호텔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임재해주시기를 진심으로 소원하며 기도했다.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나는 빌에게 말했다. 빌, 이번에 나와 동행해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여행이었으며 우리가 한 일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함께 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진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