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호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2 가지⑨] 선행 

  

우리의 현주소


대부분의 사람들―비그리스도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인까지도―은 ‘선행’을 기독 신앙과 연관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묘사할 때도 “저 사람은 참 믿음이 좋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교회에의 소속은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 결정이 되고, 교회는 그 정체성을 단연코 ‘믿음’의 공동체 됨에서 찾는다.

한편으로 이와 같은 현상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것이다. 기독 신앙은 그 근본이 ‘신앙’인지라 이처럼 믿음이 강조되어 마땅하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믿음’만큼 중요한 인식 활동이 어디 있겠으며,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종교 개혁자들의 구호에도 반영되어 있다시피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있게 해 주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독 신앙의 화단에서 선행의 꽃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은 비극이요 위험의 징조이다. 왜냐하면 신앙인을 신앙인답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거룩한 삶이요, 성화(聖化)의 모습이요, 선행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비록 구원이 믿음에서부터 출발하고 구원의 전 과정 내내 믿음의 역할을 배제할 수 없지만, 그 믿음은 결국 선한 행실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믿음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흔히 목격되는 이러한 선행 희귀 증상은 심지어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조차 그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 개인과 공동체 내에 선행이 결여되어 있음을 발견하기란 별로 힘든 일이 아니다. 사회적 선행―장학금 기탁, 입양, 소외층에 대한 봉사, 환경 보호 등―의 대부분은 비종교인이나 타종교인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의 일상적 만남, 대화, 사회적 교류에서 거만하고 독선적이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특히 지도자들)이 선행은커녕 세상의 범죄와 범법 행위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선행 실종의 이유


왜 이토록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선행의 실종을 연출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기독 신앙이 착한 행실과는 담을 쌓은 것으로 부각되어야 했을까? 아마도 세 가지 맞물린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신앙 전통상의 이유이다. 한국교회는 언젠가부터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이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과 모범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것이 혹자의 주장처럼 한국교회의 발전 초창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서양 선교사들 가운데 일부의 신앙적 특징 때문이건, 아니면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의 암울하고 혼란스런 사회 분위기로 인해 기독 신앙이 신비주의화한 때문이건, 또 아니면 우리 민족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무교적 성향 때문이건, 어쨌든 교회는 거룩한 삶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그리스도인들 또한 높은 윤리적 수준을 체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이 요구된다고 주장하면 이것은 은혜에 역행하는 도덕주의(moralism)나 율법주의(legalism)의 징표로 곡해하곤 했다.

둘째, 구원의 단계(혹은 면모)와 관련한 신학적 이유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보통 구원은 칭의(justification) → 성화(sanctification) → 영화(glorification)의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을 한다. 이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은 주로 칭의와 성화 사이의 관계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그 그리스도인에게 전가(轉嫁)하시는 사법적(judicial) 행위이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 은택이지 우리 편에서의 무슨 기여―선한 행실이든 그 무엇이든―때문에 획득된 바는 아니다. 칭의는 우리가 최초로 신앙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것으로서,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이로서는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발생한 사건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성화의 경우는 좀 다르다. 성화는 칭의 이후 영화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전 과정과 연관되는 사항으로서, 그리스도인 편에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실제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일이다. 따라서 칭의의 경우에는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이 하등의 기여를 할 수 없지만, 성화와 관련해서는 그리스도인의 끊임 없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물론 이 때 그리스도인이 기울이는 노력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어쨌든 그런 노력은 그리스도인 자신의 노력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에 기초해 이 두 가지 항목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관계가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 규명하는 일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 역사상에는 몇 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패턴이 등장했다. 우선, 칭의 없는 (혹은 칭의를 약화시킨) 성화 강조의 패턴이 있었다. 이것은 복음의 속죄적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윤리적 의지와 삶만을 강조할 때 등장할 수 있다. 19세기 독일의 신학 풍조가 그랬고, 오늘날 기독 신앙을 또 하나의 윤리 수양으로 간주하는 민족주의적 양심가들이 그렇고, 또 70년대 초 한국 교회의 도덕주의적 분위기가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고 볼 수 있다.

또 칭의와 성화를 혼합해서 가르치는 패턴이 주로 로마 가톨릭 내에 크게 성행하고 있다. 이러한 혼동은 칭의의 법적 성격을 흐리게 하고 또 독특한 형태의 공로주의(meritorialism)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주의가 요구된다.

그런가 하면 첫 유형과 반대로 성화 없이 칭의에만 집착하는 패턴 또한 발전하기도 한다. 교회 역사적으로 보면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불건전한 경향의 경건주의자들, 청교도들 가운데 일부에게서 발견되는 소위 율법 폐기론(antinomianism)이 바로 이런 패턴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 현재 한국 개신교 신자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패턴은 이 세 가지 가운데 마지막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모든 죄가 용서 받았으며 천국 가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개판을 친다’ 하더라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는 식의 ‘싸구려 은혜주의 증상’(cheap-grace syndrome)이 영적 질병처럼 번져 있다. 그러니 어찌 이 가운데에서 성화의 삶, 선행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셋째, 성경 해석상의 이유 또한 선행 실종에 일조하고 있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성경 해석상의 이유’란 그릇된 성경 해석법의 채택이나 어떤 해석학적 원리의 오용과 같은 거창한 사안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어떤 특정한 성경 구절과 관련하여 문맥을 무시하고 그 해석과 적용에 있어 한쪽 경향으로 치달은 사례를 지적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성경 공부와 관련하여 70년대 이후 각종 대학생 선교 단체의 도움을 직․간접적으로 받아 왔다. 우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교재들이 선교 단체들의 것이었고, QT․제자 훈련․그룹 성경 공부 등을 목회에 접목시킬 때 대부분 선교 단체에서 사용하던 교재들에 의존하곤 했다. 이것은 성구 암송, 개인전도 시 비신자의 질문에 성경적으로 답변하기 등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이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가 엡 2:8~9이었다.


엡 2:8~9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상기 구절은 우리의 행위가 구원을 얻는 데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다는 진리를 간명히 표현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가르침이 논리적 비약을 동반해 “우리의 행위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위와 상극이다”는 식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만일 성경을 가르치거나 공부하는 이들이 엡 2:8~9를 2:10과만 연계시켰던들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선한 일들)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상기 구절에서는 분명 구원이 선행과 모종의 연관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비록 우리의 행위가 칭의에는 기여하지 못하지만―엡 2:8~9이 가르치고 있듯―선행은 분명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의 지향 목표가 된다는 것이다.

구원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토록 선행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성경으로부터 찾지 못하고 그저 엡 2:8~9의 내용에만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에, 한국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선행을 발견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선행의 중요성과 의의


그렇다면 선행(선한 행실 혹은 실행)은 왜 중요한가? 선행이 기독 신앙과 관련하여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 여섯 가지 항목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선행(혹은 행함)은 그리스도인의 덕목을 온전케 하고 그 진정성을 입증한다.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상에서 보여 주는 그리스도인의 여러 덕목들―믿음, 사랑, 지혜―은 행함이나 선행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고 그 덕목의 특징이 드러난다.


둘째, 선한 일의 구현은 그리스도인 상호 간의 간구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골 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살후 2: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히 13: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를 위해 간구할 때나 다른 이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 그는 필시 상대방과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요한 사안을 제목으로 삼을 것이다.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의 간구 내용을 보든지(골 1:10; 살후 2:17; 히 13:21), 히브리서 기자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 내용을 보든지 (히 13:18) 그 가운데 ‘선한 일’이 등장한다는 것은, 선행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항목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선행은 구원 받은 성도의 마땅한 책임이요 당연한 귀결이다.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선한 일들)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딤전 2:9~10  9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 3:8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계 19:7~8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그리스도인이 선행에 따라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구원을 받고 난 이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선행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넷째, 선행/행실은 지도자의 필수적 자질 가운데 하나이다.


딤전 4:14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딛 2:7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선한 행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증거라면 그들을 인도하고 모범이 되어야 하는 지도자들에게야 얼마나 더 그렇겠는가?


다섯째, 성경 교훈의 궁극적 목표는 그 내용의 실행에 있다.


시 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딤후 3:16~17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약 1:22, 25  22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25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성경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궁극적 목표는 그 교훈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실행함으로써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 데 있다.


여섯째, 선행은 비신자들에게 신앙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하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주1)]이라.

벧전 3:1~2  1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은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에게 올바른 행실이 있을 때 비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마 5:16; 벧전 2:12), 자신들의 사실 무근한 비방을 그치게 되며 (벧전 2:15), 심지어는 구원을 받는 경우까지 생기게 된다 (벧전 3:1~2).


필자는 지금까지 선행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해서 갖는 여섯 가지 의의 ― (i) 그리스도인의 덕목을 온전케 함, (ii) 그리스도인 상호 간의 간구 제목이 됨, (iii) 구원 받은 이들의 마땅한 책임, (iv) 지도자의 필수적 자질, (v) 성경의 궁극적 목표, (vi) 비신자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 ― 를 한 항목씩 정리해 보았다.


선행의 내용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선행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선행의 내용을 소개함에 있어서 필자는 교육적 효과를 위해 세 분야―(i) 하나님과의 관계, (ii) 그리스도인끼리의 관계, (iii) 세상과의 관계(-주2)―로 대별하고자 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선행이 두 분야 (혹은 세 분야)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i)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선행의 내용.


대하 19:3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이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


여호사밧은 우상을 제거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는데, 선견자 예후는 이를 가리켜 “선한 일”이라고 말한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미가에게 가르쳐 준 선한 것은 세 가지 항목―공의를 행함, 인자를 사랑함,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백성들에 대한 조치와 연관이 되기 때문에 (ii) 그리스도인끼리의 관계 및 (iii) 세상과의 관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항목인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확실히 (i) 하나님과의 관계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막 14:6, 8  6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 8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이 여인은 예수께 향유 붓는 일을 통해 그의 장사를 예비했다는 의미에서 선행을 한 것이다.


이상의 교훈을 정리해 보면 ①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만을 찾음, ②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함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선행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주3)


(ii) 그리스도인끼리의 관계에 있어서 선행의 내용.


느 13:14  내 하나님이여!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느헤미야는 성전 내에 레위인 지급용 십일조 및 제사장들 할당 분의 거제물 보관소를 재확보했고(느 13:8~9), 이런 물품의 충실하고 공정한 분배를 위해 직분자를 세웠다 (느 13:10~13). 바로 이렇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힘쓴 것을 “선한 일”이라 불렀다.


시 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형제끼리 연합하고 함께 하는 일 또한 선한 행실이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행 가운데에는 공의를 행하는 것과 인자(곧 긍휼)를 사랑함도 포함이 된다.


행 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번역하면 도드가라. 선행과 구제라는 일이 심히 많더니


다비다는 살아생전 구제하는 일을 힘썼는데 그것이 곧 선행으로 되어 있다.


고후 8:20~21  20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21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와 아가야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한 것 (롬 15:25~26)을 가리켜 “선한 일”이라고 말한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역시 위와 같이 연보를 가리키는 말이다.


딤전 3: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디모데 당시의 교회는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지도자가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회피하기가 일쑤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고난을 각오하고 감독이 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선한 일”이었던 것이다.


딤전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디모데가 사역할 당시에는 참과부를 경대하기 위해 그들의 자격 조건을 명시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녀 양육, 나그네 대접, 성도들의 발 씻김, 환난 당한 자들의 구제, 모든 선한 일을 좇음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이 가운데 “성도들의 발을 씻기는 것”은 확실히 (ii) 그리스도인끼리 관계에 있어서의 선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그네 대접”과 “환난 당한 자들의 구제”의 경우에는 좀 복잡하다. 만일 이 나그네와 환난 당한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ii)에 해당되는 선행이 될 것이고, 이런 활동의 대상이 비신자라면 이것은 (iii) 세상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의 선행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그리스도인 사이에 서로 나눠 주는 것 또한 선행의 내용으로 나타나 있다.


지금까지의 교훈을 정리해 보면 ① 공동체를 회복하고 세우기 위한 노력, ② 형제와의 연합, ③ 공의를 행함, ④ 인자를 사랑함, ⑤ 구제와 나눔, ⑥ 나그네 대접, ⑦ 성도들의 발을 씻김, ⑧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함 등이 그리스도인끼리의 관계에 있어서 선행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iii)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선행의 내용.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사회생활에서 공의를 행하는 것과 인자(긍휼)를 사랑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이 나타내야 할 선행이다.


롬 13:3, 6  3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 6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정부에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엡 6:5~8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초대 교회에는 노예 신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비록 그들의 상전들이 믿지 않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마치 주께 하듯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섬겨야 하는데, 바로 이것을 가리켜 “선을 행함”이라고 설명한다.


딤전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는 자라야 할 것이요


가정에서 자녀를 제대로 양육하는 것,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선한 일이다.


딤전 6:17~18  17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속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부한 자들은 자신의 부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라 말한다.


딛 3:1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위정자에 대한 순복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주4)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사라가 남편에게 복종한 것 또한 선행의 하나로 나타나 있다.


이상의 교훈을 정리해 보면 ① 공의를 행함, ② 인자를 사랑함, ③ 세금 납부, ④ 믿지 않는 상급자에게 순종함, ⑤ 올바른 자녀 양육, ⑥ 나그네 대접, ⑦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함, ⑧ 부자의 공유 정신, ⑨ 위정자에 대한 순복, ⑩ 남편에 대한 복종 등이 세상에서의 선행 내용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필자는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야 할 선행을 그 내용에 있어서 살펴보았다. 이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i) 하나님과 관계에서의 선행.

   ①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만을 찾음.

   ②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함.

(ii) 그리스도인 끼리에 있어서의 선행.

     ① 공동체를 회복하고 세우기 위한 노력.

     ② 형제와의 연합.

     ③ 공의를 행함.

     ④ 인자를 사랑함.

     ⑤ 구제와 나눔.

     ⑥ 나그네 대접.

     ⑦ 성도들의 발을 씻김.

     ⑧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함.

 (iii) 세상 관계에서의 선행.

     ① 공의를 행함.

     ② 인자를 사랑함.

     ③ 세금 납부.

     ④ 믿지 않는 상급자에게 순종함.

     ⑤ 올바른 자녀 양육.

     ⑥ 나그네 대접.

     ⑦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함.

     ⑧ 부자의 공유 정신.

     ⑨ 위정자에 대한 순복.

     ⑩ 남편에 대한 복종.


우리 자신에 대한 점검

선행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서 얼마나 커다란 의의를 갖는지, 또 구체적으로 어떤 사항들이 선행의 내용인지 알고 났으면, 그 다음 마땅히 요구되는 바는 우리(나 개인 및 공동체)에게 눈길을 돌려 자신을 살피도록 해야 한다.


 (i) 자문의 필요성: 무엇보다도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 보아야 한다. “나의 삶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행이 어떤 방면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선한 일에 열심 내는 친백성으로 알려져 있는가?” “비신자들은 선행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ii) 마음에 되새길 바: 동시에 우리는 늘 다음과 같은 중요한 주장을 마음에 되새겨야 한다.“일단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신앙의 목표가 선행에 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의 삶에 선행이 전혀 없다면 그의 구원은 자기기만(self~deception)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주로 잘 ‘믿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은 동시에 ‘선행을 잘 하는’ 사람으로도 알려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수준은 로마 가톨릭보다도 다른 종교인들보다도 더 뛰어나야 한다.”


 (iii) 회개와 돌이킴: 물론 우리 가운데 누구도 이상의 질문에 대해 자신있게 “네!”라고 답할 수 없고, 이상의 주장이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깨닫고 허물투성이인 자신의 모습을 안타까워해야 한다. 그 때마다 우리의 연약함과 잘못된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십자가를 붙들며 용서를 받아야 한다. “주여! 당신의 보혈로 깨끗케 하소서! (요일 1:8)” “성령님이시여! 권능을 베푸소서! (행 1:8)” “주님이시여! 선행을 행함으로써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소원하옵나이다!” (골 1:10) 등의 회개 및 간구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용서를 받은 후 우리는 우리가 구원 받은 자임을 아는 즐거움 가운데 다시금 선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자기 성찰 → 회개 → 사죄 → 노력)을 반복하면서, 비록 우리가 매순간마다 연약함을 발견하지만, 우리의 삶을 전반적․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선행의 열매가 점점 풍성히 맺혀져야 하며 그런 면에서 진보와 발전이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iv) 자기 의(self-righteous)는 금물: 그러나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바는 우리에게 크고 작은 선행의 열매가 나타날 때에 그릇된 마음 자세가 배태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이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첫째, 우리가 크고 작은 선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그럴 능력을 주셨기 때문임을 인정해야 한다. 주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시면서 가르쳐 주신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이 된다.


마 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런 태도가 있을 때 우리는 교만과 자랑(신 8:11~14, 17; 고전 4:6~7; 약 4:14~16)에서 헤어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에 불과함을 늘 고백해야 한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런 고백이 계속될 때 불건전한 공로 의식(눅 18:11~12)을 퇴치할 수 있다.


셋째, 결국 선행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시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이러한 자기 부인의 자세가 바탕이 될 때 “오직 하나님만”의 원리(고전 3:6~7)가 일관성 있게 나타날 것이다.


기독 신앙과 선행―이 두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로 엮이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주1 원문에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어구가 들어 있으나 어떤 이유인지 개역판 한글 성경에는 이 어구가 빠져 있다.

주2 이스라엘은 신정 통치(theocracy) 형태의 사회였기 때문에 교회와 사회가 따로 구별되지 않았다. 따라서 언약 백성 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바는, 오늘날로 보자면 어느 정도 자기 민족이나 나라에서 이루어져야 할 바를 함의하고 있는 셈이다.

주3 막 14:6, 8에 등장하는 여인의 경우는 다시금 반복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선행의 예이기 때문에 제외시켰다.

주4 물론 정부나 위정자에 대한 순복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에 권세에 대해 항거해야 할 때도 있다 (행 4:19). 또 로마 제국을 짐승으로 상징한 것(계 13:1)도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권세라고 여겨야 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가 아니라면 정부나 위정자에 대한 순복은 하나님의 뜻이다 (롬 13:1~7).



송인규 교수 (합동신학대학원)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