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조에 보내면서 조금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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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메가처치 논박(Against Mega Church)02-B:시장자본주의 논리에 잠식당한 교회
by 신광은 & 박삼종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크리스천들만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기업'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린 아이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박사라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비지니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델센의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는 동화가 아니라 실화다. 오늘날 교회는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오늘날 교회는 신약시대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1층에 장로교, 2층에 감리교, 3층에 침례교, 그리고 지하는 나이트클럽... 백화점 바겐세일과 같은 총동원 전도, 교인 뺏기 경쟁, 집짓기 경쟁... 도대체 어디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할 것이며, 도대체 어디서 로마 제국을 굴복시킨 신약교회와 초대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교회는 벌거벗었다. 이 사실을 남들은 다 아는데 교회만 모른다.
교회가 벌거벗은 모습 중 하나는 오늘날 교회가 자본주의의 질서에 편입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앞 글에서 논의한 대중의 출현, 도시화, 테크놀로지의 발전, 시장의 발생 등과 같은 세속적인 현상들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현상의 결과로 교회가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종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자본주의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메가 처치는 교회 안에 자본주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다. 메가 처치는 교회의 자본주의화가 낳은 열매다. 여기서 잠깐 교회 안에서 작동 중인 자본주의의 논리를 분석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자.
1) 고객의 탄생
고객이 탄생했다. 시장 상황에서 오늘날 구도자들은 고객으로 존재한다. 고객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구도자는 자신들의 삶을 전적으로 새롭게 바꿀 생명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은 다만 일용품으로서의 종교에 관심이 있다. 일용품 종교란 무엇인가? 파스칼이 말한 대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지옥의 불행을 피할 수 있는 ‘보험증서’를 말한다. 또 일용품 종교란 한 주간의 긴장된 삶을 잠시 이완시켜 줄 ‘기분전환’을 말하며, 바라는 바를 ‘빌 대상’을 말하며, 자신감으로 충전시켜 줄 ‘격려자’를 말하며, 자신의 삶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자기 성찰’을 말한다. 그리고 마음이 동하면 몇 푼의 헌금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제 사업’을 말한다. 오늘날 구도자는 이곳 저곳 교회를 전전하며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일용품 종교를 구매하고 다닌다. 고객이 탄생한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교회에 고객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 고객이 출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피터 버거식으로 말하자면, 과거에 신앙은 운명적인 것이었다. 초대 교회는 교회 입문에 참된 제자도의 열매를 요구했기에, 또 중세 교회는 기독교 제국의 지배력을 행사했기에 선택권은 교인이 아니라 교회에게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신앙이란 처음에는 지역별로, 더 나아가 도시, 개인별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물론 이 시발(始發)은 교회의 분열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신교냐, 구교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시 신교는 독일 루터란이냐, 프랑스 위그노냐, 영국 성공회냐, 화란 개혁주의냐, 스코틀랜드 장로교냐, 재침례교냐, 그냥 침례교냐, 퀘이커냐...등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 채 사람들은 보다 자유로운 선택권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신대륙으로의 이주를 촉발시켰다.
때문에 미국은 처음부터 자유의 나라였으며, 그리하여 선택의 나라였다. 수정헌법 1조는 미국이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임을 명시하고 있다. 미국에서 모든 교단이나 교파들은 철저한 자유 경쟁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은 교회나 교단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점점 더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유럽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신앙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 혹은 ‘사상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자유권은 하늘이 부여한 인권 중 가장 중요한 권리로 정당화되었다. 유럽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신생국가 미국은 새로운 하나님, 곧 ‘자유의 여신’을 숭배하기에 이른다.
자유권, 곧 자유로운 선택권은 19-20세기를 지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것은 대중의 지위 향상과 관계가 있다. 19-20세기에 시민권의 확대를 위한 지속적인 투쟁이 있었으며, 이와 함께 민주주의는 꾸준히 발전하였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은 동등한 참정권, 특히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래서 이제 대중은 ‘표밭’이 되었다. 대중에게 권력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은 또한 각 개인을 ‘소비주체’로 승격시켰다.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곧 돈이 모인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이제 숫자는 힘이 되었다. 강력한 힘을 소유하게 된 대중은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숫자의 힘’을 주장하게 되었다. 대중은 여론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대중 독재가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대중은 교회의 최고 고객이 되었다.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교회의 분열이 자유를 확대했고, 자유의 확대는 다시 교회의 분열을 더욱 촉진시켰다. 마음에 안 맞으면 그냥 갈라서 버렸다. 교회의 분열은 분파주의와 이단의 폭발을 초래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신종 이단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밀러라이트, 몰몬교, 안식교, 크리스천 사이언스, 여호와 증인 등.. 피터 버거의 말대로 바야흐로 ‘이단의 시대’다. 하지만 누가 이들을 막을쏘냐? 무슨 권리로 신앙의 자유권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같은 현상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 6.25를 전후하여 교회를 가르는 붐이 일어났다. 조금만 의견불일치가 생기면 그냥 찢어버렸다. 신사참배 문제로 장로교에서 고신파가 떨어져 나갔다. WCC 가입 문제로 통합과 합동이 나뉘고, 합동은 다시 교단의 전횡에 반대하여 개혁교단이 떨어져나갔다.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로 기독교 장로회가 예수교 장로회로부터 또 떨어져 나갔다. ‘예수’와 ‘그리스도’가 갈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행이 되었다. 감리교도 기감과 예감이, 성결교도 기성과 예성이 갈라졌고, 침례교는 이단 때문이기는 하지만 역시 기침에서 예침이 떨어져 나왔다. 순복음 교회도 갈라졌다. 교회 분리는 이단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황국주, 박태선, 문선명, 나운몽 등에 의해 수많은 이단들이 만들어졌으며, 이것은 지금도 구원파, 안산홍, 신천지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교회의 분리가 교회의 성장을 낳았다는 것이다. 교회가 갈라지면 맨 먼저 신학교를 세우고, 목회자들을 양산하여 내보내면, 목회자들은 목숨을 걸고 교회를 세우고 사역을 하니 교회가 성장할 밖에.. 1960-70년대 유래가 없는 엄청난 한국 교회의 부흥은 그리스도의 몸을 갈가리 찢어 얻은 댓가였다.
그러나 교회의 핵분열로 말미암는 신학교의 난립과 목회자의 대량양산은 점차 교단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교단이 개교회에 일일이 책임 있는 지원을 해주지 못하게 된 것과도 연관이 있고, 또 교단 하나를 갈라 세우는 것이 밥 먹는 것만큼이나 쉬우니 그만큼 교단의 치리 권능이 약화된 것과도 연관이 있으며, 교회들이 점점 더 치열한 생존 경쟁을 겪게 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완벽한 시장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교단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이제 교회는 순전히 시장 상황 한 복판에 ‘개교회’로 내동댕이쳐지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의 ‘개교회주의’의 모습이다. 바야흐로 교회의 무한분열의 종착점에 도달한 것이다.
교회의 이러한 무한분열은 고객에게 그만큼 넓은 선택의 폭을 제공하게 되었다. 교단이나 교파, 신학이나 전통은 아무래도 좋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의 자유인가? 이 얼마나 풍성한 선택의 기회인가? 사실 이러한 선택의 폭은 기독교 안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전 종교에게로 확장되고 있다. 모든 교회와 교파, 그리고 모든 사상과 종교는 종교 시장에 자신들의 특성화된 상품을 내밀며 고객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시장 상황은 신학이나 전통은 부차적인 것이 되게 만든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판매와 구매다! 신교나 구교, 그리고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사상과 종교는 이러한 시장 상황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믿는다는 것은 마치 백화점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교회의 메시지도 심각하게 변화하게 되었다. 오르띠즈 목사의 말에 의하면, 현대 교회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예수님을 믿어보지 않으시겠어요?”라는 호객 행위로 뒤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변질된 메시지는 성서나 초대교회의 메시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초대교회는 믿고 싶다고 해도 절대로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격한 심사와 기나긴 예비자 교육을 통과하지 않고서 신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천박한 복음주의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며 면죄부를 남발하고 있다. 천박한 복음주의에서 구원은 자동으로 전제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구도자의 선택 뿐이란다. 고객의 선택은 곧 구원 자체란다. 맙소사! 현대 교회에서 더 이상 그리스도는 왕이 아니다. 고객이 왕이다. 현대의 구도자는 물에 빠져 ‘살려달라’ 절규하는 자가 아니라, 거드름을 피우며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는 쇼핑객이며 구매자다.
2) 기업의 출현
고객의 탄생과 동시에 기업이 출현했다. 오늘날 교회는 고객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기업이다. 교회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스스로를 상품판매자로 변신시켜 왔다. 메가 처치는 교회가 자신을 기업, 곧 상품판매자로 변신시킨 결과다. 사람들은 말한다. ‘교회의 변신은 무죄!’라고. 어찌하여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교회의 이 기묘한 변신을 ‘무죄’라고 판결하는가?
교회는 언제부터 기업이 되기 시작했을까? 교회가 기업이 되기 시작한 시점은 교회들이 경쟁하면서부터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은 역시 교회의 분리로부터 시작하였다. 정리하면, 교회가 갈라지자 경쟁하게 되고, 경쟁이 시장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 시장의 관점에서 볼 때, 16세기 종교 개혁은 가톨릭의 시장 독점권을 박탈한 효과를 발생시켰다. 신교 진영와 구교 진영 간의 길고 지루한 전쟁 끝에 양측은 서로의 종교 시장을 넘보지 않기로 하는 베스트팔리아 조약을 맺는다. 이제 유럽은 신교 진영과 구교 진영으로 반토막 났다. 그리고 신교 진영은 다시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를 전후로 가톨릭 진영이 해외 선교에 열을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가톨릭 내부의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끈 예수회의 공헌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가톨릭 교회는 유럽에서 잃어버린 시장을 개신교가 미처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던 미개척지인 해외시장에서 되찾고자 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시장 질서가 수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시장 상황은 북미의 신대륙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시작을 알려왔다. 메이 플라워호가 뉴잉글랜드 플리머스항에 도착하기 전후로 유럽의 수많은 교회들이 신대륙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뉴암스테르담의 화란개혁교회, 델라웨어의 스웨덴 루터교, 롱 아일랜드와 뉴저지의 스코틀랜드 장로교, 버지니아지역의 성공회, 퀘벡지역의 가톨릭, 펜실베니아의 독일 경건주의 등등.. 초기에는 그런대로 각 교회, 교파 간의 지역주의(localism)가 잘 지켜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부흥운동, 독립전쟁의 혼란, 도시화, 서부 개척 등의 요인으로 지역주의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이는 국교가 없는 미국에서 모든 교회, 교파는 처음부터 자유 경쟁으로 자신들의 교세를 불려 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계속되는 거대한 이민의 물결은 고객의 증가와 시장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발생한 복음주의는 한편으로는 영혼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촉발된 것이지만, 동시에 여러 교파들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자신들 교세의 확대를 도모하고자 하는 동기에 의해서도 불꽃이 지펴졌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교회는 ‘고객’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교회사에서 북미 신대륙의 독특한 점은 그 땅이 처음부터 선교적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1,000년 가까이 국가교회를 통해서 유아세례를 시행해 왔던 유럽에서는 나면서부터 전부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선교나 복음 전도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기독교 국가다’는 식의 낭만화된 건국 신화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미국은 성인(成人)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세례/침례를 베풀어야 하는 선교적 상황의 국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적 상황은 여러 교회와 교파에게 큰 기회를 주었다. 그 기화란 곧 교세 확장과 발전의 기회였던 것이다. 다른 말로 미국은 선교 각축장이었다. 이러한 선교의 경쟁적 상황이 미국 특유의 실용주의와 결합되며 점차 교회는 ‘보다 효과적인 선교’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다.
효과적 선교에 대한 관심은 알미니안주의 신학의 산물이라는 통설과는 다르게, 칼빈주의나 알미니우스주의, 신교나 구교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모든 미국 교회와 종교의 공통된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효과적 선교에 대한 관심은 칼빈주의자인 죠지 휫필드의 노천 캠프 집회와 자유 설교의 전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알미니우스주의자인 찰스 피니의 ‘새로운 방법’으로 큰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피니의 이러한 방법론은 19세기 이후 교단과 교파, 신구교를 막론하고 모든 교회에서 표준적인 것으로 수용되어졌다. 찰스 피니 이후 19세기 말의 D. L. 무디, 20세기 초의 빌리 선데이, 그리고 20세기 중후반의 빌리 그래함, 21세기 릭 워렌, 빌 하이벨스 등은 이러한 효과적 선교와 전도의 새로운 방법에 대한 헌신자들의 계보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주의적 전통과 방법론은 오늘날 미국제 복음주의의 선교를 통해 전 세계 모든 교회로 퍼져나갔다.
효과적 선교에 대한 관심으로 고안되기 시작한 복음전도의 방법론은 교회를 급속도로 기업화시켰다. 복음주의자들의 효과에 대한 관심과 기업가들의 수익에 대한 관심은 점차 비슷한 것이 되어 갔다. 이미 1차 대각성 운동 때부터 거인주의, 곧 스타 시스템이 교회에 도입이 되었으며, 이 방법은 지금도 메가 처치의 가장 효과적인 교회 성장의 방법이다. 또 이 스타 시스템은 메가 처치라는 대기업(?)에 취업을 원하는 수많은 목회지망생들에게 지속적으로 허황된 야망을 부추기는 본보기로 자리 잡고 있다. 시장 상황 속에서 교회는 자본주의의 소비자 중심주의, 고객만족의 원칙을 충실히 받아들여 갖가지 신앙 상품들을 개발하여 고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물론 이 상품들은 그 컨텐츠가 얼마나 성서적이고 복음적인지 모른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상품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매일 매일 만들어 내고 있는 기발한 신앙 상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메가 처치는 그야말로 신앙 상품들로 즐비한 대형 할인마트다. 메가 처치의 성장 방법이나 경영 기법, 마케팅 기술, 선전 테크놀로지 등은 아무리 보아도 세속 기업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런 메가 처치가 소위 ‘건강한 교회’의 모델과 표준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메가 처치는 교회가 기업화된 최종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3) 자본과 시장의 논리
시장 상황 속에서 교회는 점점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종속하게 된다. 교회가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지배를 받고 있는 몇 가지 징후들만 살펴보자. 자본주의는 자본이 형성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는 경제시스템이다. 자본은 큰 돈(big money)이다. 쌓이지 않는 돈은 자본이 아니다. 돈이 계속 쌓여 일정량을 넘기면 자본이 된다. 바로 이 초기 자본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움직일 수 있게 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18세기까지 유럽에 거대한 자본이 축적하기 되었는데, 이렇게 잔뜩 축적된 자본이 산업혁명이라는 불꽃과 함께 웅장한 폭발음을 울리며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관차의 엔진을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기원이다.
축적된 초기 자본은 18세기 자본주의가 발생한 시점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 질서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모든 판매자와 기업에게도 초기 자본은 중요한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음식 솜씨만 좋다고 식당을 하는 시대는 지났다. 목 좋은 곳에 점포를 임대하고, 인테리어를 하고, 홍보를 할 정도의 최소한의 초기 자본이 없으면 장사를 할 수가 없다. 아이템만으로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반드시 초기 자본이 있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교회도 똑같은 원리에 지배를 받는다. 교회도 아이템과 자본,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한다.
흔히들 요즘은 교회 개척이 잘 안 되는 시기라고 한다. 왜 그럴까? 그 실상인즉 목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 말씀에 대한 열정, 영혼을 향한 사랑, 인품과 도덕적 자질이 아무리 훌륭해도 종교 시장 진입에 필요한 초기 투자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으면 아예 교회 시장에서 도태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 아닌가? 같은 맛이라면 인테리어가 잘 된 식당을 찾는 것이 고객의 취향이듯, 오늘날 교회 고객들은 겉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교회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 취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어느 개인이나 어느 교회를 탓할 일이 아니다. 그저 현실일 뿐이다. 그래서 최소한 100명 정도의 교인(특히 직업이 번듯한 어른 성도는 필수), 예배당을 세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재정, 십자가나 의자, 강대상 같은 가구 및 집기, 씬디싸이저나 피아노, 드럼 같은 악기, 주일학교, 중고등부, 청년부, 성가대와 같은 기본적인 조직, 전도 및 양육 프로그램, 거기에 더하여 설교가 괜찮은 목사 등의 기본 아이템이 갖추어져야만 그 교회는 시장 상황에서 생존할 수가 있게 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일단 이런 식으로 개척을 하게 되면 교회는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지속적인 성장’이다. 이상하게도 자본주의는 멈추어 서 있을 수 없다. 꼭 자전거 같다. 그래서 앞으로 전진하든 아니면 넘어지든 둘 중 하나다. 자본의 힘으로 시작한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다. 계속 페달을 밟아야만 굴러간다. 어느 교회 목사가 한 말이다. “자고로 성도를 굴려야 교회가 잘 되는 법이여.” 그렇다. 목사는 끊임없이 일을 벌여서, 성도들을 굴려야 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조직의 간단한 생리일 뿐이다. 끊임없는 행사와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적당히 동력화시켜 주어야 조직에 활력이 생긴다는 것은 경영 리더십의 기초 중 기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 교인들은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침체’해 버린다. 이것이 시장질서 안에서의 교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피곤한 교회다. 교회력에 따른 절기뿐만 아니라 정기 심령 부흥회, 사경회, 총동원 전도주일, 바자회, 선교여행, 체육대회, 야유회, 특별새벽기도회 등이 끊임없이 계획되고 시행되어야 하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행사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성전(?) 건축’이라는 기묘한 이름의 프로젝트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점점 커져가는 예배당은 교회 성장의 가시적인 징표요,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훌륭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전건축 프로젝트는 개별 성도들의 여러 잡다한 요구와 불만들을 싸그리 청소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공통의 목표의식을 설정할 수 있다. 또 눈물겨운 헌신의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업에 현실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대단히 훌륭한 전략이다. 무엇보다 근사한 건물과 인테리어는 새신자 전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더불어 근사하고 쾌적한 공간과 감각적 인테리어, 최신식 장비까지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금상첨환가! 요즘 목회자들은 예수님보다 능력이 많은 모양이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하시면서 그토록 어렵게 허무신 성전을 단 돈 몇 푼으로 간단히 다시 세워버리니 말이다. 그것도 예루살렘에 한 채가 아니라, 수 백, 수 천 채의 성전이라니..
이른바 총동원 전도주일이라는 교회 성장 전략은 백화점 정기 바겐세일을 닮았다. 날짜가 정해지면, 그 다음은 교회 전체의 목표 인원수를 정하고, 교구별, 구역별, 개인별 목표 인원이 할당된다. 각 개인은 나눠준 용지에 후보자인 VIP명단을 기입하고 전도주일 당일까지 새벽마다 기도하며, 온갖 선물공세, 전화공세, 식사공세, 심지어 현금공세까지 제공하며 예배당으로 끌어 댕기는 행사를 소위 총동원 전도주일이라고 한다. 물론 전도주일 당일이 되면 교회는 축제의 날이다. 화려한 장식에 적당히 들뜬 분위기, 초특급 강사, 연예인 초청, 각종 영상과 특별 프로그램, CCM 가수, 파워풀한 복음 설교, 거기에 경품까지! 이것은 보험 세일즈나 백화점 바겐세일, 신천지 등 이단의 전도수법이 훌륭하게 버무려져 있는 퓨전 스타일의 복음주의다. 교회는 이처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동원하는 수법을 가리켜 ‘영혼 구령’이니 ‘지상 명령에 대한 순종’이니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이런 저런 변명으로 합리화하려고 해도, 영낙 없이 기업의 판매촉진 수법과 닮았으니 이 일을 어쩌랴!
정리하면 이렇다. 교회의 분리가 경쟁 구도를 만들었고, 경쟁 구도가 시장 상황을 초래했다. 물론 이러한 교회의 시장 상황은 대중의 출현, 도시화, 테크놀로지의 발전, 시장 자본주의의 탄생과 같이 때맞춰 조성된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들과 결합되어 더욱 큰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문제는 교회가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 대안적 공동체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교회는 마치 후천적으로 면역 결핍증에 걸린 AIDS 환자처럼 외부 환경의 독소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점차 본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장 상황에서 구도자들은 고객으로 변신했으며, 교회는 기업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러한 탈선의 종착역은 교회의 무한분열, 완전한 시장 상황의 도래, 자본주의 질서의 정착 등이다. 메가 처치는 교회의 이 탈선이 맺은 풍성한 열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