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오류가 있는 문장을 수정했습니다.
------------------------------------------------------------------------------------------------------------------
제 6편: 혁명 vs 부흥
by 신광은(침례신학대학 PH.D과정)
“Again 1907!”
지금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열병의 이름이다. 최근에 누가 “부흥의 조짐이 오고 있다”고 했다는데.. 글쎄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할 것 같다. 십 수년 전부터 북치고 징 울리던 심령부흥회와는 사뭇 다른 종류의 부흥을 말하는 이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점차 ‘부흥’이 한국 교회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확실히 ‘부흥(Revival)’은 최근 10년 간 한국 교회의 가장 큰 화두다. 그리고 올해 2007년, 한국 교회의 부흥 ‘갈망’ 운동은 그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 부흥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주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사 불이 섶을 사름같이, 불이 물을 끓임같이 행하시고, 주께서 이 땅을 고치시는 크고 기이한 역사를 뉘라서 싫다하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부흥이 있기 위해서, 챨스 피니가 말했던 것처럼 부흥을 열망하며, 또 우리가 가진 수단들을 정당하게 활용하는 의무를 다하자고 할 때 어찌 이를 거부하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것이 있다. 과연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부흥인가? 그리고 부흥이 필요하다면 어떤 부흥이 필요한 것인가?
두 가지 부흥 운동 : 심리학적 부흥 운동과 기술적 부흥 운동
참으로 부흥 열풍이다. 여기 저기서 부흥에 대해 말하고, 기도하고, 기다린다. 말들도 많고 색깔도 다양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부흥 운동은 큼지막하게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심리학적 부흥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적 부흥운동이다. 심리학적 부흥운동이라 함은 부흥이 인간의 내면에서 시작한다고 보고 내면의 변화를 강조하는 시도라고 하겠다. 이들 입장 중에는 초대교회나 청교도, 대각성 운동시절, 혹은 1907년과 같은 초기 한국 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역사주의적 부흥운동도 있겠고, 열정과 헌신의 회복을 강조하는 감성주의적 부흥운동도 있을 테고,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로 물들기 전의 의심 없는 믿음으로 기적과 표적을 맛보았던 신앙을 회복하자는 은사주의적 부흥운동도 있겠고, 믿음은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며 믿음과 행위 간의 통합을 강조하는 제자도적 부흥운동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공통된 견해는 오늘날의 문제를 본래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본래의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부흥은 ‘회복’과 동의어인 것처럼 보인다.
기술적 부흥운동은 오늘날 교회가 당면한 문제의 원인을 비합리성과 비효율성으로 보려 한다. 또한 교회와 세상, 복음과 문화의 관련성이 끊어진 것을 심각한 문제로 여긴다. “교회가 일상 생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불신자들의 질타를 교회가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린&빌 하이벨스,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 104) 이러한 입장에 있는 이들은 복음의 본질과 상관없는 교회의 전통과 인습을 공격한다. 그리고 현대인의 언어와 문화에 적합한 방식으로 전도하고 설교하고 목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릭 워렌이나 빌 하이벨스는 이 운동의 대표 주자가 아닐까 싶다. 이들의 주장을 따라 교회는 CCM, 영상 등 다양한 매체, 테크놀로지, 방법론을 수용하고 있다. 또한 보다 미래지향적인 목회, 교회 내의 재정과 행정의 투명성, 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교회 운영 등을 위해 노력한다. 아마도 이들에게 있어서 부흥이란 ‘개혁 & 갱신’인 모양이다.
혁명이냐, 부흥이냐?
모든 부흥운동은 복음의 영향력이 증대되기를 갈망한다. 베드로의 때처럼, 조나단 에드워즈의 시절처럼 복음이 불신자와 신자들의 심령 속에 파고들어가기 실제적인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도무지 그러한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많은 부흥운동가들은 복음(text)이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엘룰은 상황(context)이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교회가 문제이기 앞서 세상이 문제라는 것이다. 교회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변화하는 상황에 휩쓸린 것은 교회의 전적인 잘못이다. 어쨌든 엘룰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의 중요성을 말하려 한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인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서 엘룰은 오늘날 복음을 들어야 하는 청중들은 돼지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인간이라야 복음을 듣고 책임 있게 반응할 것인데, 복음을 듣는 이가 인간이 아니라 돼지니 어떻게 반응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엘룰의 문제 의식이다. 현대인을 돼지라고 부르는 것은 엘룰 뿐만 아니다. 허버트 마르쿠제는 현대인을 ‘일차원적 인간’이라고 했고, 로버트 라이시는 ‘부유한 노예’라고 했다. 이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오늘날 인간성이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룰에 의하면 현대의 직장인들은 로마 시대의 노예들보다 훨씬 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노동 시간의 면에서 보자면 현대인들의 노동 시간도 훨씬 짧고, 강도도 많이 약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노동의 속도와 밀도다. 현대인들은 근무가 시작된 순간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원칙상 단 1분 1초도 다른 행동과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쉴 새 없는 감시와 실적 평가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현대인은 자신을 노동하는 기계로 철저하게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신체적 영역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영역에까지 미친다. 그래야 진짜 기계가 되기 때문이다. 여가 시간에도 노동은 끝나지 않는다. 끊임없는 자기 개발, 부단한 학습과 연구, 심지어 자신의 성격과 인격개조까지 서슴지 않음으로써 지속되는 노동의 압력에 적응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로버트 라이시의 말처럼 기술 사회에 적응하는 화려한 적응자가 되든지 아니면, 질주하는 황소의 발굽아래 짓이겨지는 낙오자가 되던지 둘 중 하나다. 다른 모든 선택의 가능성, 곧 자유는 없다. 그래서 현대인을 노예라 하는 것이다.
고대의 노예와는 다르게 현대의 노예는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왜냐하면 고대 노예의 주인은 눈에 보였지만 현대 노예의 주인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구조와 시스템 속에서 노예 주인은 증발되고 없다. 합리성이라고 이름 붙여진 거대한 사회질서와 구조,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주인이다. 생활비를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일하지 않고 먹으려는 놈팽이들에게 내려지는 무서운 저주, 직장생활은 의무일 뿐만 아니라 신성한 권리라는 이데올로기 등.. 이 모든 것들은 너무도 당연해 보이고 합리적이어서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새로운 지배 형태다.(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1장) 또한 현대의 노예는 자신의 지위에 불평하기는 커녕 도리어 만족스러워하고 뿌듯해 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엄성, 자유, 가치 등.. 현대인들은 이런 것들을 포기하는 대신 상품과 물질로 보상받기 때문이다. 잔디 깔린 전원주택, 미끈하게 잘 빠진 최신형 자가용, 홈 씨어터,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기업 간부 직함 등..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바랄 것이 없다. 현대의 노예들은 고대의 노예들과는 달리 자신의 노예 신분에 대해서 불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보상품 때문에 불평한다. 무제한의 권력욕과 소유욕에 완전히 사로잡혀 인간이기를 포기한 현대인, 이것이 돼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변화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현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 엘룰의 주장이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교회는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하나는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는 것은 내 책임이니 나는 그저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리라’하는 태도다. 이것은 무책임하고 무식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태도다. 또 다른 태도는 복음을 돼지가 먹기 좋은 쥐엄 열매로 바꿔 주는 태도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화의 지름길이다. 엘룰은 묻는다. “도대체 왜 불신자들에게 다가가려 하는가?”(The Humiliation of The Word, 202) 주님은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복음전도에 대한 열망은 참으로 가상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돼지에게 던져준 진주가 찢겨지고 상하여지는 꼴을 목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엘룰은 복음전도에 선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혁명이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모든 사람들로 이 복음의 말씀을 진정으로 들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즉 경제적, 지적, 심리적 및 육체적으로 인간적인 수준을 회복하도록 애쓰는 것이다.”(「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149) 다른 말로 돼지를 먼저 인간으로 되돌려 놓고 난 다음에라야 비로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수준이 최소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위의 책) 그리고 이것을 엘룰은 혁명이라 한다. 곧 혁명은 돼지를 인간으로 바꾸어 복음에 반응하게끔 하는 일종의 예비적 조건이다. 엘룰에게 있어서 혁명은 부흥의 예비적 조건이면서, 결국 혁명이 곧 부흥이다.
혁명세력, ‘X’
혁명 하니까 데모나 폭동, 쿠데타 같은 것을 생각할른지 모르겠다. 그러나 엘룰이 혁명이라고 한 의미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혁명에 대한 일반적 오해는 혁명(revolution)을 반란(revolt)과 혼돈하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과 반란은 비슷하면서도 굉장히 많이 다르다. 반란은 파괴를 초래한다면, 혁명은 파괴하고 반드시 재건한다. 반란은 절망의 분출인 반면, 혁명은 비전에 이끌린다. 또 반란이 천년왕국으로 도약하려는 탈역사성을 가진 반면, 혁명은 철저히 역사적이다.(Autopsy of Revolution, 1장)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다. 혁명에 대한 또 한 가지 오해는 공산혁명과 혁명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혁명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혁명이라는 용어의 남용으로 인해 혁명이 본래 가졌던 심각한, 비극적인, 충격적 의미를 많이 상실해 버렸으며, 특히 좌파계열에서 혁명을 좌파의 전유물인 것처럼 사용하는 통에 혁명의 본의가 많이 변질되었다. 엘룰은 위기에 빠진 현대 문명과 인간성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서의 혁명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혁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회만이 진정한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엘룰에 의하면 기독교는 모든 권력을 모든 방향에서 뒤엎는다. 전복하는 힘, 뒤엎는 능력이 기독교에 있다. 초기 한국 기독교도 그런 전복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전택부는 한국 기독교 초기에 “예수의 복음이 한 동네에 들어가는 날이면 그 동네는 결단이 나고” 말았는데, 이런 기이한 기독교의 마술적 힘(?) 때문에 크리스찬을 예수 ‘쟁이,’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예수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전택부, 「토박이 신앙산맥 I」, 28) 옳다. 기독교가 기독교다워진다면 언제라도 이러한 혁명적 능력이 다시 가능해질 것이다.
예수께서 돈궤를 엎으시듯 기독교는 맘몬을 뒤엎는다. 초대교회가 로마질서를 거부하듯 기독교는 정치권력을 뒤엎는다. 선지자들이 우상숭배를 정죄하듯 기독교는 모든 종교를 뒤엎는다. 또한 기독교는 도덕과 윤리적 질서도 뒤엎고, 문화마저 전복한다. 기독교란 이 세상의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것으로서 종교 냄새가 물씬나는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너무도 특이하고, 이질적이고, 혁명적인 것, 정의할 수 없는 ‘X’이다.(「뒤틀려진 기독교」, 1장) 초대 교회 한국 기독교는 X로서, 한국 사회에 충분히 혁명적이었다. 원산지방 초대교인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읽고, 열심히 전도하자는 3대 원칙과 함께 3대 사업을 책정했는데, 이 사업의 내용이 놀랍다. 첫째 부녀자들에게 국문을 배워주기, 둘째 가묘와 신주를 부숴 버리기, 셋째 상투 자르기 등이었는데 이 세 가지 사업은 실로 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전택부, 「토박이 신앙산맥 I」, 191) 그리고 이것이 바로 X의 힘이다. 바로 이 X가 혁명세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뒤틀려진 기독교
혁명 없이 이 세상은 가망이 없고, 교회 없이 진정한 혁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회는 혁명성을 잃어버렸다. 수구와 보수의 선두주자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엘룰은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최초의 혁명적 역량을 점차로 상실해 갔는지를 추척하고 있다. 기독교 계시가 철학으로 변질되면서 최초의 타락이 시작되었다. 콘스탄틴에게 권력을 분여받은 후 기독교는 심각하게 변질되기 시작했으며 교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부와 권력이 더욱 기독교를 변질시켰다. 대중들이 교회로 몰려오자 성서의 제자도의 요구는 하향조정되었으며, 점차 기독교의 혁명성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기독교는 민간신앙도 흡수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를 감동시킬 만한 근사한 종교로, 그리고 훌륭한 도덕체계로 타락하게 되었다. 전적으로 이질적인 X는 사회학적 한 세력으로서 종교가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종교가 되어버린 오늘날 현대 기독교는 영향력과 권력에 중독되어 있다. 인간적인 영광과 세상을 소유하고픈 허기짐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한국 교회에 불어닥치고 있는 부흥 운동이 이러한 허기짐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어떻게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가? 이것은 부흥 운동이 대중 집회를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금새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이다. 엘룰에 의하면 대중 집회는 일종의 이미지다. 초청강사와 그의 메시지가 아무리 탁월하더라도 실상 그것은 배경음향에 불과하다.(The Humiliation of The Word, 202) 집회의 주인공은 ‘집회 자체’다. 수 천, 수 만 명이 운집해 있는 스펙타클.. 이것이 사실 대중 집회의 주인공이다. 아무리 이곳에 많은 수가 모이고, 그럴듯한 프로그램이 기획되고, 훌륭한 장비와 장치들이 행사를 돕는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성육신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심으로 진리를 드러내셨던 그리스도와 그의 X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혁명이 대안이다! 혁명이 없다면 지금 우리의 문명은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혁명할 것인가? 그는 조직을 구성하고, 당을 결성하고,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집회를 통해 사람들을 일으키는 형태의 혁명 운동에 반대한다. 그 모든 행동주의는 철저히 기술적이어서, 기술 사회에 더욱 편입될 뿐이다. 또 그는 축제를 벌이자는 식의 혁명 운동에 반대한다. 성(sex)의 무차별적 개방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비합리적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로 도피하는 것도 진정한 혁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엘룰이 말하는 혁명은 단순히 제도에 일탈하는 것이나 반란과 폭동을 일으키는 것과도 다른 혁명이다. 그러한 대안들은 결코 현 시대의 문명의 구조를 뿌리까지 뒤엎지 못한다.(Autopsy of Revolution, 5장)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혁명은 문명의 토대를 바꾸는 세상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혁명이다. 그렇다면 그 혁명은 어떻게 창출되는가?
첫째는 깨달음을 통해서다. 엘룰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깨달음, 곧 각성이다. 거짓을 걷어내고, 진실에 눈을 뜨는 것! 여기서부터 혁명은 시작된다는 것이다. 엘룰은 항상 인식을 강조하며, 따라서 이성과 지성의 역할을 중요시한다. 혁명이란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각성이 축적됨으로써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Autopsy of Revolution, 284) 오늘날 선전은 근거없고 비합리적인 신화들을 유포하여 우리 시대의 끔찍한 실상을 보지 못하도록 환상과 망상을 창조하였다. 그 거짓을 걷어내는 작업이 먼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지성인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위해서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기독교 계시다. 세상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세상 밖에서 세상을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성서는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의 작품이요, 따라서 성서는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타자적 관점을 제공해 준다. 곧 성서에서 세상과 우리를 평가할 수 있는 외적 준거점(referent point)을 찾을 수 있은 것이다.(「우리시대의 모습」, 140) 따라서 혁명은 ‘오직 성서’에서 시작된다.
두 번째는 거부다. 우리는 현 사회가 우리에게 당연시하게 만드는 것들, 또한 그 체제 속에 포함되도록 요구하는 것들에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합리성과 효율성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기술의 정신을 거부해야 한다. 성장이 곧 진보라고 말하는 생산주의에 대해서 거부해야 한다. 모든 개인의 개성을 억압하고 체제 속에 일방적으로 편입되기를 강요하는 국가주의에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공적 사적 영역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관리하는 관료사회와 조직화에 반대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거짓된 신화와 이데올로기, 그것을 유포하는 선전을 거부해야 하며, 뿌리깊은 시청각적, 이미지 중심의 사회를 거부해야 한다. 이 모든 거부는 단순히 거부를 위한 거부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가치를 공격하는 세상적인 구조와 악을 거부하자는 것이다. 또한 단순한 거부가 아니요, 공격이다. 또한 이러한 거부는 결코 피상적인 거부일 수 없다. 우리의 거부로 말미암아 모든 영역에서 효율성이 떨어지게 될 것이요, 생활 수준이 낮아질 것이며, 공공 사업이 광범위하게 감소하고, 또 대중 문화의 상당부분이 침식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각오해야 한다. 혁명은 자기 희생으로만 가능하다.(Autopsy of Revolution, 5장)
셋째로 신앙이다. 많은 사람들은 엘룰에게 행동을 원한다. 분명한 행동 강령과 정책들만 있으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순종하기를 강렬히 열망한다. 그래서 그들은 묻는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오?’ 그러나 엘룰은 그들에게 답한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 아니라 ‘존재’라고 말이다.(「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92) 원리, 정책, 규율, 행동 등..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지만 사실 엘룰은 바로 그것들과 싸우자고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 엘룰이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더러 ‘신자(believer)로 살라!’는 것이다. 행동이 아니라 삶으로 혁명해야 한다. 삶은 삶이되 신자로서의 삶, 곧 신앙의 삶으로 혁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신앙인은 본성상 혁명적이다. 신자는 그들의 구원 받은 신앙으로 이 세상을 초월한 존재다. 그들은 세상 왕국에 매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다만 이 땅에 할 일이 있어 보냄을 받은 천국의 스파이다. 이러한 신자의 정체성이 불가피하게 그를 혁명적 상황으로 내몬다. 따라서 만일 신자가 제대로 신자 되기만 하다면 기필코 혁명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엘룰은 신자에게 제대로 신자가 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믿노라 하면서도 안 믿는 것이 문제다. 그리하여 혁명은 ‘오직 믿음’으로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그가 「기도와 현대인」에서 제시하는 방법, 곧 기도(혹은 명상)이다. 신앙인은 기도한다. 기도란 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도는 불가능해졌거나 변질되었다. 기술사회에서 목사들은 이렇게 설교한다. “왜 신을 시험하지 않는가?”(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33)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기도해보라!는 것이다. 기술 사회의 기도는 점차 효과를 얻어내는 방법과 수단으로 변질된다. 기도는 기술이 아니라 신자의 삶의 표지다. 우리는 참으로 힘든 싸움으로 초대되었다. 싸움이 힘들고, 도저히 승리할 수 없을 것 같은 때에 우리는 기도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대충 가능한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전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인간적인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요, 그래서 은혜의 수단이다. 기도는 눈에 보이는 사실만 전부라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사실숭배를 거부하며, 보이지 않는 실재가 존재함을 단언하고, 우리들에게 주입하는 모든 거짓된 신화와 이데올로기를 걷어내며, 부단히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행위다. 우리들의 싸움이 아무리 고될 지라도 신자가 기도하는 순간 그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오직 기도’로 혁명은 가능하다.
마치는 글
2007년 오늘, 나는 참으로 부흥의 계절(Seasons of Revival)이 오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결코 기독교라는 이름의 한 종교가 성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기독교가 본래의 모습, 엘룰식으로 말하자면 혁명세력으로서의 X의 면모를 되찾는 것이다. 혁명세력으로서의 X가 회복될 때 현대 문명의 뿌리부터 뒤엎어지는 거대한 혁명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문명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혁명은 위기에 빠진 인간성을 건져내며, 벼랑 끝에 서 있는 문명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연후에라야 기독교 복음의 전파가 가능한 상황도 초래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혁명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필연적 요청이다. X의 혁명, 이것은 기독교와 교회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관심사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이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끝장이며 인간 문명 전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