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금의 기독교를 보라. ‘자아를 긍정하라’,‘자아를 계발하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정글의 논리를 부추긴다. 그걸 보면 슬픔이 치솟는다.”

2008년 6월 26일 <중앙일보> 21면, “기독교서적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면 ‘자아 긍정’,‘자아 계발’서적이 붐이다”라는 기자의 질문에 <십자가>의 저자 김응국 편집장이 한 말이다. <십자가>는 규장출판사 직원들의 경험에 관해 쓴 책으로 “규장과 갓피플에 임한 강력한 성령 체험”을 소개하면서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갓피플의 영성 서적 판매 1위이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을 받고 회개를 했다는 글을 온라인에 올리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왠지 불편하다는 반응도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복음과상황> 책 편집위원들이 모여서 <십자가>를 읽고, 그들이 불편한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김병규, 이원석, 정모세, 정지영 편집위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십자가> 나는 이렇게 읽었다

정모세 한마디로, 뜨겁지만 새롭지는 않다. 저자는 진정으로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만이 참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또 한국교회가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잘 요약해서 보여준다. 그러면서 기존의 한국교회 문제, 자기 계발류의 책들, 부와 번영에 대한 복음 대신 진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대중적 차원에서 주장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기존에 흔히 제시되었던, ‘원류로 돌아가자’라는 흐름 속에 있는 책이다.

김병규 이 책은 독창적인 신학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간증집도 아니다. 규장 출판사와 기독교 인터넷 기업 갓피플의 경험을 책으로 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집이라고 하기도 조금 어렵겠다. <하늘의 언어>를 출판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규장과 갓피플에서 경험한 것을 궁금해 했기 때문에 이 책을 낸 것 같다.

이원석 <십자가>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이나 평양 대부흥을 하나의 모델로 삼고 그 사건의 재현을 기대하는 부흥사의 메시지 같다. 청교도의 대중화 버전이라고 할까. 또 전형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처럼―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고 하는―십자가의 복음이 개인 윤리적으로 환원되고, 사회 구조적 맥락은 결여되어 있다. 회사와 관련해서도 개별적인 업무 수행과 관련한 회개의 항목은 있어도, 회사를 지속시키는 자본주의의 작동과 관련한 거시적 맥락과 관련한 고민의 흔적은 없다. 그저 일반 부흥 집회 메시지로 써도 될법하다.

정지영 이 책의 논지는 분명하다. 저자는 ‘십자가의 복음이 있던 자리에 부(富)와 번영의 복음이 자리하게 되었다. 교회에서 아첨하는 소리에 너무나 친숙하다. 그런 복음이 만연한 현대교회에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아야 하는데 십자가 없이 구원받은 사람이 많다’고 말하며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자세로 살게 되는지를 신랄하게 책망한다. 물론 긍정적인 방향을 위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십자가’를 상업적으로 홍보했다?

이원석 책의 전달 방식은 중요한 논의거리이다. 이 책의 홍보부터 이야기하자.

정모세 규장은 트렌드를 잘 만든다. 이전에 <하늘의 언어> 등으로 ‘성령’(방언)이라는 독서 트렌드를 만들고 논의를 활성화시켰던 것처럼 이번에는 ‘회개’(컨버전) 시리즈와 함께 <십자가>를 매우 자극적인 광고 문구를 이용해 ‘컨버전’ 트렌드를 세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병규 이 책은 규장과 갓피플의 체험을 효과적으로 홍보해서 초장부터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러한 전달 방식과 홍보 때문에 그 경험의 진실성이 오히려 약화된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자신들의 경험을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정지영 <십자가>는 한마디로 ‘규장스럽다’라는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책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저자의 주장에 밑거름 역할을 했을 책 제목, 예를 들어 월터 챈트리의 <부러진 십자가>라든가 책 내용, 저자의 신학과의 관계를 찾아볼 수 없는 무의미한 저자의 나열 등 앞으로 무슨 책을 출판할지 사전 광고하는 것을 보면 저자의 메시지는 몰라도 책 출간에 담긴 진정성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즉 메시지의 진정성을 담보로 책을 홍보하겠다는 마케팅 전략밖에 보이질 않아 무척 불편했다.

이원석 ‘저희 죄악을 공개 자복합니다’라고 해서 머리말을 살펴보니 사원들의 고백 내용을 그대로 수록해놓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세속의 상담가도 상담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 것이 기본 윤리이다. 사주(社主)인 CEO야 상관없겠지만, 사원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실명은 아니라도) 자복 사항이 이렇게 공개되어야 하는가. 이 직장에 다닌다는 것이 죄라면 죄겠다. 또 이 책에는 전병욱 목사의 설교 스타일이 엿보인다. 제목과 본문에서 계속 명령조로 말하고 있는 게 그렇다. 이 설교는 나에게는 일종의 종교적 폭력으로 느껴진다. 또 저자는 토저, 로이드 존스, 보스 등을 언급한다. 그런데 이 책에는 토저의 예언자적 깊이도, 로이드 존스의 우주적 전망도, 보스의 구속사적 시야도,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다.

김병규 규장에서 발간한 책 중 쉽게 읽히고 단순한 내용의 책들은 그 어조가 모두 비슷하다. 전병욱 목사나 김응국 목사뿐만 아니라 청교도적인 신앙 색채를 가진 분들에게도 이런 분위기를 느낀다. 이건 강한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박영선 목사는 좀더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저자는 자신이 칼을 빼들고 위에서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원석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은 확실하게 이해했다는 태도는 굉장히 위험하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좀 더 겸손해야 한다. 이런 식의 확신은 겸손보다 오만에 가깝다.

<십자가>에 담긴 한국교회의 ‘십자가’ 없는 ‘십자가 신학’

정지영 저자의 메시지는 그간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전해진 전형적인 메시지이다. 6,70년대 개신교의 감상적이고 피상적인 복음 이해를 현대적으로, 하지만 독설에 가까운 말로 뱉어낸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십자가 메시지를 전하는 저자가 부와 번영의 복음, 나 중심의 복음이 만연해 있는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나에게 굉장한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성찰이 배제된 십자가 신학을 대신한 공허하고 피상적이며, 감상적인 십자가 신학이 결국 나 중심의 복음, 부와 번영 신학을 교묘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교회에 파고들게 만들어 오늘 우리교회의 형편없는 실정을 만든 질 나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정모세 이 책은 한국교회가 기존에 상정하는 모범적 구원론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바로 속죄 중심적 구원론, 실존적 체험 중심적 구원론, 삶의 개인 윤리적 변화를 강조하는 구원론이 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기독교 구원의 한 부분이고, 한국 교회에 필요하기는 하지만, 바로 동일하게 그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모범적 구원론이 지닌 어떤 단점을 잘 보여준다.

정지영 십자가에 대한 저자의 신학도 무척 불편하다. 죄, 복음에 대한 이해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으로 해체되어 있다. 구원의 역사적 지평이 개인적인 실존에 함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도 자극적이고 원색적이며 나아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에는 십자가, 하나님이 없다. ‘나’ 복음이 잘못이라고 하면서도 ‘나’밖에 주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책에는 광대한 구속적 신학도 하나님나라의 깊이도 없다. 날 위해 죽은 예수님의 은혜에 감복해 눈물 흘리며 영적 결벽증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주장은 복음의 우주적인 지향점을 결국 자기 안에서 해체해 버리고 만다. 십자가의 의미와 구원의 역사적 지평은 사라지고 모두 나의 죄와 연관해서 해석하고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두려움을 조장한다. 달라스 윌라드는 이런 류의 신학을 ‘죄 관리 복음’이라고 날카롭게 비평한다. 이 책에는 신학의 공허함, 회개라는 의미의 공허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병규 한국교회가 말하는 십자가에는 정서적 슬픔 외에는 다른 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는 십자가도 아닌 십자가만 있는 것 같다. 저자가 편집장으로 남아있지 않고 저자로 나선 것 자체도 의심스럽다. 갓피플의 ‘마이북 다이어리’등을 보면 이 노선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발언을 많이 한다. 나는 그들과 신학적 이해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고, 그들이 보여준 모습들을 나 또한 보여주었기에 그들의 진심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진 배타적일 수 있는 위험성, 개혁 신학 혹은 개신교 신학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위험성이 거기 분명히 존재한다.

정모세 저자는 마태복음 4장 17절을 언급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하는데 정작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설명하지 않고 회개하라는 말만 한다. 본질상 회개라는 것은 그 임박한 하나님나라로 돌아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를 말하지만 정작 십자가가 하나님나라의 복음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나님나라 공동체로서의 교회나 그 새로운 질서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

‘나’를 넘어서는, ‘감정’을 넘어서는 ‘복음’을 말하자

이원석 저자는 예수가 나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도 아니고 굉장히 황당하다. 예수님의 위대한 구속 사건이 왜 이렇게 정서적으로 환원되어야 하나. 저자가 조나단 에드워드의 집회나 평양 대부흥을 모델로 삼고 있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왜 이런 류의 죄를 공개해야 하는 걸까. 이 모두가 복음이 아닌 상업 같다. 고객의 필요에 따라 상품을 파는 것이다. 김응국 목사의 회개 복음은 사실상 십자가를 상품으로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진정성이 있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상업주의, 자본주의에 깊이 젖어서 한국의 전통 기독교와 만난 위험한 작품이다.

정모세 그럼에도 이 책이 비판하는 대상들, 즉 모양만 기독교인인 사람, 모태신앙이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 친구 따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보다는 이 책이 낫다. ‘십자가’는 현재 한국교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지적 이해로서, 구원을 위한 암기 공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나의 죄가 마이너스인데 예수의 보혈인 플러스가 만나 제로가 된다는 식이다. 구원 받고 천국 가고 영생을 얻는 다는데 누가 그걸 거부할까. 한국교회는 주로 그렇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야말로 ‘십자가’가 문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죄와 맞닥뜨려서 예수의 은혜를 고백하고 내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 자체는 옳은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거기까지라는 게 아쉽다.

정지영 달라스 윌라드가 ‘죄 관리’를 얘기한 건 그 차이는 오십보백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반쪽짜리 진리는 그것을 진리의 전부라고 믿게 만든다는 점에서 명백한 거짓보다 못하고 위험할 뿐이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구원의 총체적인 면을 인간의 개인적인 죄로 제한하고 언제든 떳떳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인간의 영원히 죄스런 마음을 근거로 책망하는 저자의 주장은 무척 위험하다.

정모세 이 책 속의 ‘우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다루는 부분에서, 아주 미묘하지만, 우리의 우상 숭배적 죄악보다도, 우리가 결과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회개의 ‘감정적인’ 측면을 너무 강조하는 것을 느꼈다. 예수 십자가가 우리를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는 확증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꼭 ‘감정적인’ 자복만을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맥락상 도마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도마의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이원석 이 책은 수동적 복음을 전파한다. 185쪽에서 저자는 고아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 후 고아원 원장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 예수님께 감사하십시오”라고 말하라고 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적용이다. 저자는 또 ‘나’를 강조하지 말라고 한다.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자아의 죽음을 강조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도 ‘나’가 6번 나오는 것을 언급한다. 십자가는 자아를 무화(無化)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한다. 이는 자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이다. 자아의 중심에 하나님이 들어오시고, 그분이 나의 중심이요, 주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자아상은 십자가의 복음과 모순되지 않는다. 자아를 없애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학적 깊이는 없고 열심만 있는 목사가 말할 수 있는 내용에 불과하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김병규 성경의 가장 앞에 나와 있는 모세오경이 말하는 역사에 뿌리박힌 지극히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그 전망, 공동체 중심의 생활, 장엄한 복음에 대한 지평은 이미 한국교회에서 사라졌다. 또, 요한복음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고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성경이다. 그 안에 하나님나라가 드러나 있고 신적 생명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등 공동체적 요소가 많다. 그런데 <십자가>에서는 ‘나’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문제다. 직원 중 한 명이 전한 메시지가 아니라, 저자의 이력을 생각할 때, 저자 정도 되시는 분이 한 얘기로서는 너무 부족하다.

정모세 이 책에 자아 중심에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받아들이는 삶으로 가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여전히 ‘나’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비전에 대해서는 눈 감고 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균형이 없다면 틀린 것이다. 특히 한국의 상황에서 이러한 ‘나’ 중심적인 십자가 문제가 심각하기에 더 그렇다.

이원석 성서의 구속사적 전망까지 나가라고 하지도 않겠다. 부디 구약에서 말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명령만이라도 제대로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즉 성서에 있는 표면적 메시지 만 이라도 놓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정지영 저자나 규장 직원 분들이 체험한 일의 진정성을 다 받아들이더라도 이 책에서 말하는 신학만 보더라도 <복음과상황>에서 추천할 수 있는 책은 아니라고 본다. 복음도 없고 상황도 불충분하다.

진정한 십자가를 찾아서

정모세 성경의 구속 역사의 측면에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기서 ‘죄’의 문제는 하나님나라, 곧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 되지 못하게 한 것,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을 하게 한 것이었다. 따라서 ‘회개하라’는 말은 다음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와 함께 본질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저 개인의 존재론적이고 윤리적인 결함을 해결하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 하나님나라 백성의 모범적 삶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부활은 그 길에 대한 하나님의 지지 표명이자 긍정이다.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고 그 순종이 옳았음을 하나님이 부활로 신원하셨던 것을 그리 강조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뤄진 하나님 나라에 대해, 또 교회가 그 연장선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라는 것에 대해 잘 모르는 듯하다.

정지영 십자가가 우리 죄의 해결책이지만 이는 곧 하나님과의 화평하기 위한 길이다.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 죄를 없애는 것이지 죄는 목적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 십자가 이해는 어떤 의미에서 너무 기계적이다. 인격적인 관계가 없다. 법정적 칭의가 너무 극단적으로 강조되다 보니 관계적 칭의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부족하다. 또한 십자가에 극도의 감정 이입을 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가진 문제는, 잘 사용하라고 받은 선물을 상처라도 날까봐 깨지지 않게 잘 간직하고 아무 것도 못하는 것처럼 복음의 의미를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광활하고 단단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원석 복음의 본질은 관계적이고, 복음의 지평은 우주적이다. 오스카 쿨만의 <그리스도와 시간>(나단)을 보면, 창조의 우주적 지평에서 이스라엘의 선택으로, 다시 남은자로 줄어들어 급기야 그리스도로 집중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남은 자와 상응하고, 교회의 탄생이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응된다. 또한 구속의 우주적 완성이 창조의 우주적 지평에 겹친다. 복음은 구속의 우주적 확장이라는 원대한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고작 식비 청구를 속인 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니… 그 위대한 십자가가 이렇게 코믹하게 환원이 되나 싶었다.

김병규 복음 안에서 십자가가 바른 위치를 잡게 해 줘야 한다. 죄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고 전 우주적 지평의 틀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이해가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랬을 때, 십자가·부활·승천·재림 사건이 하나하나 별개의 사건들의 집합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연속적 흐름, 계획안에서 이루어져 갈 것이다.

이원석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의 변화가 행동의 변화보다 중요하다. 결혼을 한 뒤 싸우고 밉더라도 결혼했다는 것에 변함이 없듯 정서적, 윤리적 차원을 넘어 그 이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역사·사회·구조에 대한 관점도 없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거시적 시야도 부재한 상황이 아쉽다. 복음의 관계적 전망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

어떤 책을 낼 것인가, 그것으로 평가해야

정모세 책을 만드는 출판사가 책과 함께 출판사의 생활을 엮어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의 언어>의 “갓피플·규장 전 직원 70여 명이 근무 중 성령세례를 받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상상치도 못한 이 놀라운 일이 2007년 4월 6일 오후 4시에 일어났다”에 이어서 연타석 홈런 아닌가? 다만, 부와 번영에 대한 복음이 아니라 성령 체험과 죄를 자복해야 한다는 메시지와 새로운 공동체적 변화를 출판에 담아내고자 한다면 그걸 카피로 쓸 게 아니라 앞으로 낼 책을 통해 하나씩 보여 주는 게 더 낫지는 않았을까? 출간하는 책들이 스스로 말을 하게 하는 방법도 좋았을 것이다.

김병규 일과 관련해 갓피플 사람들을 만나보면 진정성이 느껴진다. 회사의 변화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죄를 자복할 만큼 진정한 회개가 있었다면 출판· 유통을 하는 회사로서 자신들이 과거에 냈던 책들, 더 나아가 지금 내고 있는 책들을 돌아보고 거기에 대해 말해야 했지 않을까? 그러나 책에는 그런 언급이 한 군데도 없는 점이 아쉽다.

정지영 기독교 출판사 실무자로서 현실이 앞에 있기 때문에 뭐라고 얘기하긴 힘들다. 다만 책은 구호와 선동이 아닌 핵심과 내용을 다뤄야 한다. 우리의 비판을 통해 어렵지만 꼭 읽어야 하는 책들이 출판되면 좋겠다.

김병규 창조 세계를 폭넓은 시각으로 이해한다면 인문학적 관심도 가져야한다. 십자가가 원색적 복음으로 돌아가야 했다면 오히려 반대로 더 멀리 퍼져나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거대 출판사 편집장인 저자가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출판계가 너무나 빈약하고 가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원석 아무리 그래도 회사 직원들이 고백한 내용을 책으로 내는 것은 상도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는 신자들의 자복 내용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행위이다. 일종의 관음증을 자극하는, 상행위라고 생각한다. 의식적 진정성을 넘어서서 전인적 진정성을 고민해야 한다. 돈을 버는 것이나 특정한 내용을 홍보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기독인과 기독교 기업으로서 넘어서면 안 될 선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추천하는 책

정모세 몇 달 전에 짐 월리스의 <회심>의 번역을 마쳤다. 번역하는 중에 감동을 받아서 중간중간 자주 번역을 멈추고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던 책이다. IVP에서 8월 중에 출간될 예정이다. 이 책은 <십자가>나 ‘컨버전 북스’와 어떤 점에서 다루는 주제는 동일하다.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컨버전 북스’의 책들은 고전으로서의 묵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 좋지만, 짐 월리스 책에서 어떤 중요한 차별성과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꼭 비교해서 읽어보면 좋겠다.

한국교회의 복음 이해와 관련해서는, 나는 복음의 ‘정치성’에 대해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더 깊이 인식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하나님 나라와 교회 모두 굉장히 정치적인 실체이다. 예수님 자신이 정치범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것을 내면화하고 개인 윤리화함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바의 맛깔을 심각하게 잃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나라 이해를 위한 기본서로 양용의 교수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성서유니온선교회)를 그리고 그 나라의 정치성에 관해서는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IVP)과 짐 월리스의 <하나님의 정치>(청림)를 권한다. 톰 라이트의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크리스챤다이제스트)와 아직 번역되지 않은 <What Saint Paul Really Said >등 바울의 복음 이해에 관한 책들은, 우리 시대의 빈약한 복음을 해독하는 데 아주 좋은 치료제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원석 김세윤 교수의 <구원이란 무엇인가>(두란노)와 <복음이란 무엇인가>(두란노)를 추천한다. 한국교회에 결여된 복음의 관계적 이해를 가장 쉽게 설명하고 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 이 관계 속에서 윤리적 문제는 오히려 사소한 것이다. 사실 자식이 성장하며 부모의 속을 썩이기도 한다. 언제나 착한 자녀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런 자식을 사랑하며 자식은 그런 사랑 속에서 점점 성숙하게 된다. 복음의 관계적 지평 속에는 개인의 지적 오류와 윤리적 실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넓은 시야가 담겨있다. 개인의 윤리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고작 자신의 윤리 속에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정지영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복있는사람)을 추천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고 복음에 대한 시각을 교정하고 있다. 또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IVP)을 추천한다. 그 책에서 가장 절정에 이르는 부분은 양자됨에 대한 내용이다. 또 복음을 하나님과의 화해라고 볼 때 샬롬을 개론으로 다룬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춤할 때까지>(IVP)를 추천한다.

김병규 나는 특정 책을 추천하기보다 저자, 정확히는 설교자 두 명을 추천하고자 한다.  독자들이 박영선 목사의 책을 읽음으로써 김응국 편집장의 <십자가>의 아쉬운 점을 보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박영선 목사가 하나님 은혜의 장엄하고 큰 은혜를 전해줬다면 그 다음으로 추천할 김홍전 목사가 자신의 강설들을 통해 전하는 복음의 역사적 정황에서의 하나님나라의 광대함을 독자들이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정리·사진 이종연 기자 limpid@newsnjoy.co.kr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