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개신교를 보면서 예수신앙이 취하는 형태(form)로서 한국 개신교는
더이상 유효성이 없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는 단지 교회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을 고백하는 양식과도 관련이 있을 듯 싶습니다.
그런면에서 본회퍼의 '성인이 된 세계'라는 문제의식을 다시 한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듯 하구요.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이제 전통적인 신 고백은 적실성이 없어진 것은 아닌가를 묻고 있지요.
저는 본회퍼적 질문은 수긍하면서도 그의 답변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의 질문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문제의식에 천착한다면 그의 답변 역시 낡은 것이 된 것이 아닌가 싶어서요.
그런 생각을 <옥중서간>에 나타난 '성인이 된 세계'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몇자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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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과 대면하는 신학의 또 다른 방식
-본회퍼의 '성인이 된 세계'에 대한 단상-
본회퍼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치에 저항에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다 감옥에 갇혀 결국 사형당한 진보적이고 실천적인 신앙인. 다른 하나는 천재적인 기독교 신학자. 특히 신학자로서 본회퍼는 더 이상 종교적 신앙형태가 필요 없게 된 ‘성인이 된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탐구하려한 면모가 흥미로웠다. 한 참 기독교 신학에 관심이 있던 시절 세속화 신학의 출발점이라고 불리는 이 신학자의 작업이 궁금하여 그의 <옥중서간>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기독교에 대한 비종교적 이해보다는 신앙인으로서 본회퍼의 경건함에 더 감동했던 것 같다. 신과 성서와 교회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이 그 어떤 보수적 그리스도인들 보다 뜨겁고 깊이 있는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저 급진적인 사유와 행동을 한 과격한 신학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성인이 된 세계’에 대한 그의 논의는 대부분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다시 읽으니 전혀 새로운 내용을 읽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을 다시 읽는 지금에는 ‘성인이 된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본회퍼의 고민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본회퍼가 말하듯 기독교를 종교의 형태로 이해하지 않으려 시도했던 최초의 신학자는 바르트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 서문에서 기독교를 ‘종교’와 대비하여 ‘계시’로 규정하고 종교가 인간의 편에서 시작된다면 계시는 신의 편에서 시작된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신의 계시가 인간의 지평으로 들어와 인간의 지평을 부정하는 사건에서 그의 ‘위기신학’이 시작된다. 그러나 본회퍼는 바르트가 신학적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을 위한 어떤 구체적인 길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바르트는 ‘계시적극주의’의 한계에 매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에 대한 비판은 동시에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회퍼가 말하는 ‘성인이 된 세계’, 기독교 신앙에 대한 ‘비종교적 해석’, ‘무종교성의 시대’와 같은 개념들은 정확히 자유주의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이와 같은 개념들을 통하여 슐라이어마흐에서 시작된 자유주의의 근대정신에 대한 대응을 비판하는 것이다. ‘성인이 된 세계’란 인간의 이성이 성숙하여 더 이상 자연세계에 대한 신앙적/신학적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시대를 의미한다. 이성과 과학으로 해명될 수 없는 신앙과 신학은 이제 비진리의 영역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한 자유주의의 대응은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답변의 영역이 신앙이며, 그 영역은 감정의 영역이라고 보았다. (슐라이어마흐는 종교의 원천을 인간의 ‘절대의존의 감정’에서 찾는다) 이렇게 하여 신앙과 신학은 감정이라는 종교의 영역에 고착되게 된다.
하지만 본회퍼는 인간이 자기의 한계상황에서 조차 더 이상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 시대에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애써 보존하기 위해 여전히 한계상황에 대한 구원신화를 작동시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를 의심한다. 이런 방식은 비성인에게나 걸 맞는 방식이다. 마치 율법이라는 형태로 기독교 신앙이 존속하는 시대가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수명을 다하였듯이 종교라는 형태로 기독교 신앙이 유지되는 시기도 끝났다는 것이다. 한계상황에서 구원으로 요약되는 종교적 형태의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 대한 부정을 함축하게 된다.‘불안, 곤궁, 공포, 동경으로부터의 구원, 보다 좋은 내세에서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199)을 추구하는 종교는 결국 이 세상에 대한 부정을 결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인이 된 세계에서 이제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 대한 강한 긍정을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기독교인은 구원신화를 믿는 자와 같이 이 지상의 과제와 곤란에서부터 마침내 영원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인까?) 이 지상의 생을 남김없이 다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다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신 분이 그와 함께하시게 되고, 또한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는 것이라네.....구원신화는 인간의 한계경험에 의해서 성립한다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인간을 생의 한가운데서 붙잡는다네.”(200)
그렇다면 ‘성인이 된 세계’를 긍정한다는 것.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을 죄인으로 선언하고 그 죄라는 한계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신에 의존하는 부정의 계기에 의해서 신앙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구원을 베푸는 신을 인간의 내면성이라는 영역에 가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인이 된 세계에서 우리는 이제 신 앞에서 우리가 어떤 상태로 서있는 가를 아는 것이다. 이제 성인이 된 우리에게 “신은 우리들이 신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자로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212)준다. 다시 말해, 이제 무신성의 세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신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을 나누지 않고 인간이 처한 상황 전체로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영역이 사라지고, 종교의 영토가 상실된 세계 속에서 신은 어떻게 존재하며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본회퍼는 이 세상 속에서 신의 상실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신의 무기력함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그의 전능함이 아니라 그의 약하심과 고난에 의해서 우리를 도와주는 것(마8:17)이 보여주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신 앞에서 신과 함께, 우리들은 신 없이 산다, 신은 자기를 이 세상으로부터 십자로 추방한다, 신은 이 세계에 있어서는 무력하고 약하다, 그리고 신은 바로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들과 함께 있고 우리를 도와준다네”(212)
신을 상실한 세상, 무신성의 세상이란 바로 신이 이 세상 속에서 무기력하게 고통 받고 고난당하는 존재로 자리 잡은 세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은 그렇게 무력하게 고난당함으로 고난 받는 자와 함께 하며, 그리스도인이란 이 세상 속에서 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인 것이다. 무기력하게 고난 받고 고통 받는 신을 긍정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신을 따라 이 세상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회개이며 그러한 삶을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종교적 행위가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생활 속에서 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215)이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된다. 세상과 구별되는 특정한 의례들과 종교적 행위들이 교회의 정체성,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고난에 동참함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신이 이 세계 속에서 당하는 고난을 함께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며 그것이 교회의 존재론이다.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교회.
본회퍼의 논리는 상당 부분 동감이 간다. 특히 이 세계 속에서 신이 어떻게 존재하며 활동하는가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나의 고민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본회퍼가 무신성의 세계를 신이 무기력하게 세상 속에서 고난 받는 세계로 이해할 때 매우 공감했다. 신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나는 이런 믿음이 일종의 신화라고 생각한다)이 또 하나의 폭력이 되는 세계에서 신의 전능함에 대한 이미지를 변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문제의식은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근대적 문제제기를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서 형성된 것이기에 나로서는 그의 사상 전반에 전면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는 바르트처럼 그 운동에 대립하지도 않고, 자유주의처럼 종교의 고유영역으로 도피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그 운동의 문제의식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이제 근대세계(이 세계가 바로 ‘성인이 된 세계’의 조건이며, 바로 그 용어의 세속적 버전이다)에서 무기력하고 비참해진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가 주장하는 성인이 된 세계, 인간의 자율성 등은 전형적인 계몽주의적 개념이다. 칸트는 계몽을 한 마디로 성숙으로 정의하며, 그에게 성숙이란 이성의 자율적 사용에 대한 용기에 다름 아니다. 기독교가 영광스런 신의 표상에 대한 맹목 속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폭력이 되고,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을 부정하는 상황에 대한 계몽주의적 비판의 해방적 가능성을 본회퍼는 인식하고 있었고, 그는 계몽주의의 그러한 문제의식에 십분 동의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계몽 이후 인간 이성의 자율성이 확장된 세계에서 신과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에 관한 종교적 표상은 더 이상 무의미해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제는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조차 자신의 신앙을 종교로부터 탈피해가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 같다. 본회퍼의 이런 문제의식은 그의 해방적 관심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지 않았나 싶고, 그런 측면에서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러나 본회퍼의 이런 생각은 계몽주의를 비롯한 근대적 사유가 가진 또 다른 한계를 보지 못한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해방의 약속이며 자율의 약속이었던 계몽주의와 근대성이 또 다른 억압의 시작이었음을 그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갈 것도 없이 본회퍼와 비슷한 시기를 독일에서 살았던 철학자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2차 대전을 전후하여 오히려 계몽의 이면을 바라본다. 본회퍼가 감옥에서 ‘성인이 된 세계’에 대한 그의 신학적 작업을 구상하던 시기인 1944년에 출간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이 자연의 계산가능성 확보를 통한 지배의 논리였음을 음울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았던가. 성숙과 자율을 추구한 계몽이 사실은 지배와 폭력의 에토스를 생산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그들의 냉철한 분석은 결코 성인이 된 세계라는 조건이 우리가 그대로 긍정해야할 조건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본회퍼의 의도는 공감이 가지만 현실에 대한 그의 분석에는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는 지나치게 계몽을, 그리고 근대성을 긍정했다. 상황에 대한 철저한 응답을 지향했던 그의 신학적 지향으로 인해 그는 근대성의 어두운 면을 살필 수 있는 문제설정능력을 상실했던 것은 아닐까? 동시대의 철학이 계몽과 근대성을 회의할 때, 오히려 계몽과 근대성을 자신의 신학이 전개되어야 할 조건으로서 삼은 상황신학적 경향의 한계를 그의 논의는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더욱이 이제 탈근대적 세계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본회퍼의 분석이 현실 적합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과연 본회퍼의 신학, 특히 '성인이 된 세계'론이 과연 현재적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본회퍼의 중요성은 그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기 신앙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질문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는 것 같다. 본회퍼의 ‘성인이 된 세계’ 개념은 본회퍼가 살아갔던 시대적 상황인 근대성과 기독교의 충돌 가운데서 나온 신학적 대응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동시대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와 이미지를 고민했던 그의 신학적 질문은, 상황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 신학이라면 여전히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본회퍼가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그의 질문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본회퍼를 현재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면 그의 질문을 따라서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탈근대적 세계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는 무엇일까? 탈근대적 맥락에서 기독교 신앙에는 어떤 이미지가 필요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