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냐 공부냐
성년인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시험하는 것이 ‘하나님이냐 돈이냐’에 있다면, 청년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도전하는 것은 ‘예배냐 공부냐’입니다. 돈을 버는 사람이 예배를 돈의 가치로 환산한다면,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할 것이냐 아니면 돈 벌러 나갈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공부하는 학생들은 예배를 공부와 시험의 잣대로 잴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시간 동안 얼마나 공부할 수 있으며, 예배하지 않는 친구들이 얼마나 공부할 것인지를 두고 번민합니다.
예배하기 위해 공부하기를 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성공과 성취를 인생을 재는 척도로 삼는 시대에, 자기 계발을 위해 시간을 하루도 아니고, 분단위와 초단위로 쪼개어서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을 강요하는 때에 예배야 말로 시간 낭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도, 무작정 어디론가 달리기도 벅찬데 절대 가치인 하나님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숙고한다는 것은 뒤처진 자의 그럴 듯한 변명쯤으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예배는 당연히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하여, 마르바 던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이것은 분명히 고귀한(royal) 시간 낭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림없는 시간 낭비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예배에 참석해서 얻는 유익은 전혀 없다.”(「고귀한 시간 ‘낭비’」, 9) 그녀가 보기에 시간 사용에 관한 한, 예배드리는 시간을 다른 것에 투자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 건질 것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예배가 시간 낭비라니요? 이 글을 읽고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은총을 덧입고 그 덕으로 사는 자로 어떻게 예배를 시간 낭비라고 말하느냐는 겁니다. 저자도 이를 인정하는지 ‘고귀한’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했지만, 제목 자체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어서 다른 제목을 검토하다가 결국 ‘고귀한 시간 낭비’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리 있는 말입니다. TV나 인터넷 시간과 비교해 보면 예배가 고귀한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료를 보니, 우리나라 사람의 일일 TV시청 시간이 하루 평균 3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터넷은 주당 9.6시간이라고 합니다. 아마 청소년들이나 대학생들의 인터넷 시간은 훨씬 상회할 겁니다. 반면 독서는 주당 3시간에 불과합니다. 하여간에 TV와 인터넷을 합하면 대략 5시간을 사용합니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대략 80세로 본다면, 평생의 5분의 1에 가까운 시간입니다.
TV와 인터넷이 상상력과 사고력을 죽이고, 가족 간의 대화를 없애고, 소비와 탐욕을 조장하고, 성적 욕망과 폭력을 부추긴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어느 정도 유익한 면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유해성이 심각합니다. 사용을 제한하고,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명과 기술을 원천적으로 부정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간을 그것들이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일주일에 TV와 인터넷으로 30여 시간을 사용하면서도 10분의 1에 해당하는 독서시간, 그리고 주일 낮예배로만 한정하더라도 30분의 1에 불과합니다. 설령 예배가 시간 낭비라고 하더라도 TV와 인터넷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백번 양보해서 예배가 지루하고 고루하더라도 해롭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정말 해롭습니다. 그런데도 예배드리는 시간을 아까워한다면, 더욱 해로운 TV와 인터넷은 아예 담을 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에 비하면 공부는 훨씬 효율적이고 유익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공부 대신 예배하는 것은 특히 고3 학생들이나 시험 기간 중에는 이만 저만 걱정이 아닙니다. 부모나 당사자로서 그리 간단치 않는 선택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대학이 갖는 중요성을 익히 아는 터에 시험공부 위해 예배를 빼먹는 것을 그리 이해 못할 바가 아닙니다. 학원에서도 시험 기간에 맞추어 주일날, 강의나 공부를 하도록 지도하는데, 다른 친구들이 공부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성적의 하락을 감수하면서라도 예배하는 것은 보통 이상의 용기와 결단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한홍 목사님의 특강 테이프를 들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리더십에 관한 것이었는데, 기도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데, 고3이면 더 예배해야 하는다, 어쩌자고 그 중요한 때에 예배드리지 않느냐구요. 지혜의 영이요, 지식의 근원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더 없이 필요한 그 때에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잘못이라고 질타하더군요. 제가 다른 곳에서 쓴 것처럼 “기도를 잘 하는 사람이 공부도 잘 합니다.” 다만 기도와 예배가 공부 잘 하고, 성공하기 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그 끝은 실로 씁쓸할 것입니다.
제 죽마고우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 친구는 초등학생 때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친구가 신앙생활하면서 무섭게 변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도 타의 모범입니다. 토요일 밤 자정까지만 공부하고 취침합니다. 주일예배와 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음악을 듣거나 독서를 하면서 쉬고는 밤 12시가 지나자마자 공부를 재개합니다. 중학교 졸업할 때는 독보적인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주일 하루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날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최고 가치였던 것입니다. 다른 어디에선가 말씀드렸듯이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공부도 잘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예배에 관한 한 우선되어야 할 것은, 공부를 중단하고 온전히 예배에 정성을 다해야 하는 까닭은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예배는 일의 그침이요, 하나님의 가치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니는 것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합니다. 다시 말해 부모나 학생이나 모두 자신의 삶에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예배가 먼저인지 아니면 공부가 우선인지에서 판가름 납니다. 공부가 아무리 중요하기로서니 하나님의 가치를 경배하고, 자기 영혼을 돌보는 것에 비할 바 아닙니다.
예배는 세상의 가치 기준과 잣대를 따라 사는 것, 매일 염려하는 실존으로 살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해서, “우리는 세상의 가치와 대조되며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 다른 길을 선택할 기회를 줄 수 있는 대안 사회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특별한 시간”(「안식」, 60)이 바로 예배입니다. 자녀들이, 그리고 내 자신이 무엇을 따라 살기를 원하나요? 하나님인가요? 진학인가요? 주님의 말씀으로 제가 대답을 대신할까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