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호 발행인 논단]다니엘의 기도, 기독 청년의 순교
다니엘서 6장
[224호] 2009년 05월 22일 (금) 15:57:55 김회권  haekwonkim@hanmail.net

구약성경의 다니엘은 시편 1편이 말하는 물가에 심긴 나무 같은 상록수 신앙인의 전범(典範)이다. 그는 바벨론 제국이 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았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매개한다. 어떻게 다니엘은 청소년시절에 품었던 그 영적 지조와 절개를 노인이 될 때까지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그가 평생 그토록 아름다운 영적 지조와 절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체질화된 기도생활 덕분이었다. 다니엘서 6장은 다니엘의 기도생활을 좌절시키는 극한 환난을 소개하고 있다. 땅의 세계를 지배하는 페르시아 제국의 어인(御印, royal seal)이 찍힌 칙령이 내려져 한 달 동안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금지한 것이다. 이제 다니엘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 남았다. 현실에 순응하면서 기도를 멈출 것인가, 아니면 페르시아의 어인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어인 찍힌 칙령을 기대하며 기도를 감행할 것인가. 순교적 각오로 기도한 다니엘은 마침내 페르시아 왕의 어인 찍힌 조서를 무효화시킨, 하나님의 어인 찍힌 응답을 받아낸다. 요즘 활동적인 복음청년들일수록 실천의 우위를 앞세운 나머지 기도무용론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어인 찍힌 조서 같은 완강한 현상 질서를 바꾸려는 기독청년일수록 기도에 매진해야 한다. 기도는 페르시아 황제가 내린 법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칙령을 매개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거룩하게 변혁시키려는 하나님 나라 운동가들일수록 집요하고 줄기찬 기도생활에 정진해야 한다. 참된 복음주의는 기도생활의 치열성에서 만개할 수 있고, 진정한 사회변혁은 기도하는 기독청년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획회의, 각종 집회도 다 좋으나, 일주일간 혹은 한 달간 한적한 곳에 자신을 은둔시켜 기도로 단련하는 복음청년에게 미래가 걸려있다.  
 
다니엘 기도금지법을 선포한 페르시아 제국(1~9절)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오 왕은 자기 뜻대로 백이십 명의 고관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했다(1절). 그 120명의 지방 총독(satraps)을 다스리기 위해 또 세 명의 중앙 총리를 세웠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다니엘이었다(2절). 다니엘을 비롯한 중앙 총리들은 지방 총독들을 감독하는 자로서, 지방 총독의 재정 보고를 받아 왕의 국가재정이나 통치력의 누수를 막는 일을 맡았다(2절). 마음이 민첩한 다니엘은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보다 훨씬 뛰어났고, 왕은 그를 아예 전국을 다스리는 총통급 총리로 세우고자 했다. 왕의 인사의중을 알아차린 나머지 두 총리들과 지방 총독들은 국사에 있어서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았지만, 아무런 허물도 찾지 못했다(4절). 높은 관직에 오랫동안 있으면서도 권력형 비리가 없었다는 것은 다니엘이 순교자의 마음으로 관직을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뇌물을 안 받고 자기 월급대로만 사는 그리스도인 공무원은 순교자다. 우리나라의 모든 권력기관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순교적 청렴성으로 담금질 될 때 성서한국이 이뤄진다. 성서한국은 특정 도시를 하나님께 봉헌하자는 식의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태도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게 청렴을 유지하고 뇌물을 거절하면서 자기 월급만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기독청년들의 결단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심을 흠잡는 일 외에 다니엘에게서 어떤 흠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안(5절) 대적자들은 일명 다니엘 박해법이라고 불릴 수 있는 한 법령을 발의하기에 이르렀다(6~7절). 총리들과 고관들이 모여 왕에게 “다리오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라는 의례적 인사를 마치고(6절) 본론을 꺼냈다. 그들은 왕에게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공모하여 기안한, 이른바 집단 상소를 통해 한시적이지만 가장 엄중한 기도금지법령의 제정과 반포를 요청했다. 그들이 발의한 법령은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다”(7절)는 것이었다. 그들은 왕에게 이 금령을 제정하되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서 메대와 바사의 법령절대불개변한 관습에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강청했다(8절). 어처구니가 없는 악법이었으나, 다리오는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반포했다(9절). 세계사에나 한국현대사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악한 법들이 일사천리로 제정되어 인권을 탄압하고,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보호 조항마저도 유린한 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나님이 감찰하시는 이 세계 속에서도 이처럼 극한의 어리석음과 악을 표방하는 법들이 활개치고 있다. 인간의 양심 이하의 원리로 움직이는 법이야말로 악한 정권에서 발호하게 마련이다. 인간 정신의 가장 열등한 영역에서 기안되고 발포되는 법은 대개 법치주의라는 탈을 쓰고 인륜과 상식을 유린하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 자비와 진리에 터한 법인지의 여부다. 페르시아 제국의 다니엘 박해자들은 법령절대주의, 법조문 절대주의에 빠져 다니엘의 순결한 양심을 압박한다. 다니엘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할까?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10~17절)

다니엘은 여기서 정공법을 선택한다. 10절은 이런 엄혹한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다니엘의 영적 돌파력과 기개를 증언한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는 왕의 어인이 찍힌 칙령이 선포된 것을 알고도 습관대로 자신의 다락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이 페르시아 왕의 칙령을 무효화하실 수 있는 참 대왕이심을 인정한 것이다. 야웨 하나님께 범죄하여 먼 이역만리 이방 땅에 유배되어 갔다할지라도 이 약속의 땅, 그 중에서 야웨께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 그리고 그 중에서도 야웨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늘 성소에서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셔서 기도에 응답해 달라는, 솔로몬의 중보기도에 터하여 기도했던 것이다(왕상 8:46~49).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이 지배하는 현실을 전복하시고, 하나님의 어인 찍힌 칙령이 페르시아 왕의 칙령을 무효화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에게 기도는 페르시아적 현실을 하나님의 현실로 전복시키는 하나님의 통치수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 땅을 다스리도록 위임하셨기에 인간의 역위임을 받으신 후 인간역사에 개입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맡기신 지상통치의 위임을 다시 양도함으로써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해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가 이 땅의 폐쇄적인 질서를 재편하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이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정통한 이해를 가진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왕적 책임이다. 기독청년들은 이 땅이 페르시아 왕의 어인이 찍힌 칙령이 지배하는 현실로 전락하지 않도록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천지주재권, 하나님 나라 통치대권을 가슴 깊이 확신하고 영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일편단심을 쏟아내는 기도는 단기적으로 박해를 초래할 수도 있으며,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는 역경에 직면케 할 수도 있다(딤후 3:10~12). 마침내 다니엘 기도금지법이 효력을 발하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기도하는 것을 본 대적자들은 고칠 수 없는 페르시아 법령을 어긴 그를 다리오 왕에게 고발했다(10~12절).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 다니엘이 왕과 왕의 도장이 찍힌 금령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나이다”(13절). 이 말을 들은 왕은 몹시 근심하였고, 해 질 무렵까지 다니엘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다(14절). 다니엘의 대적자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더욱 강경하게 왕의 온정주의와 동정심을 압도했다. 그들은 왕에게로 달려가 메대와 바사의 절대불개변의 규례 관습을 상기시키며(15절), 즉시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고 강압했다(16절). 하는 수 없이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고 명한다. 다만 왕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보호해 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16절). 이에 형 집행자들이 돌을 굴려다가 굴 어귀를 막았다(17절). 

역전된 운명,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의 대적들(18~28절)

원하지 않게 충신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 던진 다리오 왕은 깊은 번뇌에 빠져들었다(18절). 날이 새자마자 일어난 왕은 급히 사자 굴로 달려갔고(19절), 다니엘이 던져진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는 슬피 소리 지르기까지 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놀랍게도 저 아래 사자 굴에서 다니엘의 응답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21~22절).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22절). 다리오 왕은 매우 기뻐하며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고 명했고, 사자 굴에서 올라온 다니엘의 몸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던 것이다(23절). 물론 다니엘의 사자굴 경험을 너무 일반화해서는 안 될지 모른다. 사자 굴에 던져진 모든 시대 성도들의 운명이 이같이 살아생전 대역전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상 성도들의 순교 이야기는 사자 굴에서 찢겨 죽음으로 믿음의 승리를 확정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다니엘적 대역전승을 이생에서 거두었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자 굴에서 당장 건져주시지 않고 부활의 약속만 주신 후에, 우리 몸이 사자에게 찢기도록 내버려두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안적 삶에서도 확증된 하나님의 구원개입이 본문에서 일어난 것이다. 
   
사자 굴에서 멀쩡하게 살아나온 다니엘을 본 왕은 이제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들의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어 버렸다(24절). 이런 운명 대역전극을 지켜본 다리오는 온 땅의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한 조서를 내린다(25절). 이 조서는 다니엘의 하나님을 공적으로 인정하고, 그의 절대주권과 그의 나라를 찬양하고 있다.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목격한 이방 군주 다리오가 야웨 하나님의 세계통치권과 역사주재권을 공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사자 굴에 던져진 기독청년들은 “내 주여 뜻대로 행하옵시며…”라는 찬송으로 체념해서는 안 된다. 다리오 왕의 어인이 효력 정지되도록 강청하는 기도에 정진할 수 있는 기개와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하루 세 번 드리는 기도는 기독청년의 순교다 
 
일생동안 조금씩 일관성을 갖고 신앙원칙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순교자며, 십대부터 백발이 될 때까지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 역시 순교적인 신앙이다. 기독청년들은 순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기독청년들이 죽는 방식에는 순교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청년 앞에는 순교 외에도 자연사와 병사, 사고사 및 기타 비명횡사 등이 있으나, 순교 외에 다른 것들은 기독청년들이 선호해서는 안 되는 죽음의 방식들이다. 순교란 불멸의 가치를 위해 필멸(必滅)의 목숨을 상대화하고 희생시키는 삶이다. 그래서 순교란 사실 엄청 이익이(?) 남는 영악한 이해 타산적 결단이다. 썩어질 생명을 죽이고 영생할 가치를 살리는 결단이기 때문이다. 만약 돈과 우정 사이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기독 청년은 돈을 희생시켜 우정을 지켜내야 한다. 찰나적 욕망 충족과 영원한 희락 추구 둘 중 하나를 취해야 한다면,  기독청년은 응당 후자를 취해야 한다. 우정을 위해 돈을 죽이는 것이 일종의 순교요, 영원한 희락을 위해 찰나적 쾌락추구를 포기하는 것이 순교다. 순교에서 죽는 것은 썩어 없어질 욕망이며 옛 자아지, 영원한 생명이나 불멸의 가치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청년들은 순교를 두려워하거나 순교에 직면했을 때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 때문에 손해를 보고, 의롭게 살다가 가난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순교다. 
      
597년에 그레고리 1세 교황이 된 힐데브란트 수도사의 말처럼 로마제국의 창검 아래 순교하는 기회가 사라진 이상, 제자도를 실천하는 것만이 순교다. 즉 일상생활의 소소한 현장에서 비영웅적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영웅적인 순교자는 예수님처럼 3년간 강렬하게 살다가 단번에 산화(散華)하는 식의 순교는 하지 않는다. 일생 동안 예수님의 격렬한 영단번의 죽음을 미분하듯 서서히 죽어갈 따름이다. 활동적이고 지극히 능동적인 기독청년들에게 매일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은 순교다. 형식적인 기도생활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늘 매순간 기도해야지 하루에 굳이 세 번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은 경직된 율법주의가 아니냐며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의심이다. 일단 하루에 세 번 씩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일 자체가 거의 초인적인 성실과 인내로 지지되는 훈련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또한 습관 속에 기도몰입을 경험한 사람은 그가 확보한, 그 정한 시간의 기도생활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분투하게 되고, 어렵게 확보된 정한 시간에 드린 기도생활은 일종의 은밀하고 지속적인 희락의 원천이 된다. 에즈라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은 이런 점에서 기도생활의 신비한 능력과 영적 의미를 아주 간결하면서도 체험적으로 간증하고 있다. 생산성의 신화, 효율과 가시적인 성과에 목맨 현대사회에서 낮 시간을 삼등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거룩한 바보가 되기로 결단하지 않는 한 시도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24시간을 갖고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죄와 불순종의 사람이 가진 24시간은 방황과 심판, 불안과 공포 속에서 상실된 시간이다. 하나님을 향해 생동감 넘치는 신뢰와 감사 찬양을 드리는 사람만이 온전한 시간의 선물을 향유할 수 있다. 
      
특히 이삼십대에 기도를 체질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의 승리자가 된다. 여기 승리자라는 말에 섣불리 냉소를 보이지 말자. 우리의 승리는 천박한 세상에서의 출세와 성공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뇌물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한 의지에 대한 승리,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 패배주의와 무기력한 의기소침에 대한 지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심의 승리를 말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승리자라는 것은 이런 뜻이다. 기도는 즐거운 고역이다. 그것이 즐거운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웹2.0적인 쌍방향소통이기 때문이다. 소통되는 경험, 그것도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과 소통되는 경험은 이 세상살이에 지쳐 냉소와 무감각으로 완악해진 기독청년의 마음을 완벽하게 위로하고, 부드럽게 만든다. 그러나 또한 기도가 고역인 이유는 육체를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단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앙생활 중 가장 감미로운 부분이 기도생활이라는 것을 직간접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만,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도들에게 기도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활동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계속 숨 쉬려고 하지 않는다. 숨 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죽는다. 영인(靈人)이 계속 영적인 호흡을 하여 영인 모드(mode)로 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당장 죽지는 않지만, 대신 육인(肉人) 모드로 살아가게 된다(롬 8:5~11). 이것이 죽는 경험이다. 사납고 무서운 인간성, 즉 세파에 마모된 야수적 인간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은 그렇게 사는 것을 “산다”고 말하지 않고, “죽는다”고 말한다. 사나운 눈빛, 꼭 다문 입, 패기와 경쟁심으로 가득 찬 빛나는 이마, 질 수 없다고 버티는 환도뼈의 각도서린 입상(立像)은, 죽음빛깔을 띤 사이비 활기이며 세상적 생명이다. 이런 죽음의 생기는 주로 을지로, 충무로, 신도림역, 워싱턴 D. C, 그리고 뉴욕의 맨해튼 등 메트로폴리탄에 집단군락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곳에 사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생기, 살기(殺氣)로 충만한 인생임을 의미한다. 죽음의 생기는 자기파멸적이고 이웃살해적이며 공동체 파괴적이고 하나님 모독적인 반생명, 반창조, 반그리스도적인 기운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살기(殺氣)마저도 생기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기독청년은 페르시아 제국의 어인이 찍힌 포고령처럼 자신이 능히 극복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할 때, 예루살렘 창문으로 달려가 하늘로 열린 창문을 향해 아우성쳐야 한다. 페르시아 왕의 칙령이 위협하듯이 명령하는 현실을 하나님께 고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페르시아 왕의 칙령이 남발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현실의 법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가? 이 때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문을 확보한 사람은 세상을 이긴다. 
     
너무나 번잡스럽고 산만한 오늘날, 기도의 용사들이 배출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이런 시대 풍조에 도전한다. 우리는 이른 새벽, 정오, 늦은 밤 숨 쉬는 순간마다 기도를 습관화하는 기독청년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제 기독청년들의 활동에너지가 분출되는 행사와 활동과 대회의 계절이 다가왔다. <복음과상황> 체육대회, 성서한국대회, <뉴스앤조이>의 각종 집회, 기윤실의 각종 모임, 공정연대, 평화와통일을위한기독인연합, 한반도평화연구원, 평화한국 등은 한결같이 소중하고 보배로운 기독청년들의 배움과 익힘과 행함의 동아리들이다. 이 동아리에 속한 모든 기독청년들이 자기소모적인 활동에 몰입하기 전에, 기도정진의 도량에서 땀 흘리는 기독청년으로 거듭 태어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김회권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본지 발행인) haekwonkim@hanmail.net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