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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묵상 여정으로의 초대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먼 여행 

1.1. 친구가 돌아왔다

친구가 돌아왔다. 먼 길을 둘러서 돌아왔다. 최루가스 잔뜩 묻히고 술 한 잔 걸친 채 ‘교회가 그럴 수는 없다’며 떠났던 그 선량한 친구가 다시 찾아왔다. 몇 해 전 아들이 또래 친구가 필요할 나이가 되자 먼저 아내 손에 들려서 주일학교로 보냈다. “세상이 이리도 험한데 부모라고 무슨 수로 제대로 건사허겄냐. 하나님 헌티 맡길란다. 잘 부탁헌다고 전해드려라.” 그러면서도 자기는 안 맡겼던 친구가 이젠 아내 손, 아들 손 잡고 같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려운 사람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아닌 것은 절대 아니었던 친구에게 국민들이 징허게 고생하던 시절 힘 있는 사람들에게만 유독 관대한 듯 보이던 하나님이 야속했을 것이다. “나 하나 교회 박차고 나가 봤자 하나님이 눈 하나 깜짝 안 할 줄 알았다. 근디 그분, 내 맘 만큼 독하지 못하시더라. 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참 모질었어. 그분 뒤통수에 대고 헐 말 못 헐 말 다 했거든. 참 속(마음)도 좋으시지. 어디가 이쁘다고 이렇게 또 불러주셨는지….”   



1.2.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늘 하나님은 그런 식이었다. 우리가 먼저 시작하는 법은 없었다. 항상 먼저 찾아와 주셨고 맨 나중까지 기다려 주셨다.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 <?xml:namespace prefix = st1 />3:9) 하며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우리를 찾는(pursuing)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작은 음성의 메아리요, 항상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만도 아니요, 온 세상을 채운 영광이요, 존재 하는 모든 것이 사실 우리를 향해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의 단단한 메아리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고 바라는 것이 수도 없이 많을 때도, 하나님은 매번 나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당신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영적인 열망을 심어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게 하셨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바라는 우리 안의 불꽃마저도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열망의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교제를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신다. 심지어 자신에게 수치와 조롱을 안겨다 주는 일일 때라도, 하나님은 ‘나를 찾아 떠난 이 여정’을 중단 없이 지속하고 계신다. 다 ‘사랑’ 때문이다. 사랑하시니 아깝지 않으셨던 거다. 나와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보다 하나님이 내게 더 바라시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다. 사랑하시기에 창조하셨고, 창조하셨기에 사랑하신다. 그런데 세상 어디서든 ‘사랑의 관계’는 거저 생기지 않는다. 저절로 생기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제품’으로 찍어내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인격’ 있는 ‘작품’(masterpiece)으로 ‘창조’하셨다. 그것은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뜻이며, 하나님이 맘대로 조종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타자’(other)로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자유’만이 ‘사랑의 관계’를 낳을 수 있으니 그 길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자유가 거절당할 수 있는 위태로운 결정이며,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한 자기 포기의 결정이었다. 창조는 위험을 무릅쓴 하나님의 사랑의 결단의 결과인 것이다. 제임스 힐만의 말대로, 창조는 인간이 거할 자유로운 공간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뒤로 물러남’의 사건이다. 관계의 파트너를 향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데서는 굴종만 있고 복종은 없으며, 거기서는 ‘사랑’이 형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을 사랑의 파트너로 삼은 하나님의 전능성은, 라벤슨의 표현대로, 악에 의해 상처받고 망가지는 것을 견디는 전능성이다. 그 사랑에 압도되어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분의 주권에 순종할 때 완전해지는 겸손한 전능성이다. 



‘묵상’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그토록 바라셨던 그 ‘사랑의 소통’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트레이시는, 그것은 평생 동안의 여정이며, 위로부터 부르시는 소리를 듣는 일이며, 그 음성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거룩한 대로(大路)를 걷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친밀한 교제를 위해 우리를 지으셨고 부르셨으며, ‘묵상’은 그 초대장을 받고 그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초청을 거부하고 하나님 없는 자유를 선택했다. 하나님 바깥에서의 자유를 원했다. 하나님은 버림 받았고 소통은 단절되었고 자유를 준 그분의 숭고한 사랑은 이용당했다. 하나님이 떠난 자리는 외로움에 떠는 두려움의 자리가 되었고, 인간은 지금도 중독과 소음과 쉼 없는 분주함으로 이 공허를 메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를 떠나 스스로 ‘말’의 주인이 되겠다고 한 순간 자기 자유는 물론이고 자기 존재 전체를 허물고 말았다. 하나님과의 끊어진 소통(묵상)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뿐 아니라 이웃과 피조 세계 전체와의 소통 단절로 이어졌다. 항상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늘 외롭다고 중얼거리면서 살게 되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다가 인간마저 되지 못한 채 금수(禽獸)와 다를 바 없이 그저 탐욕스런 본능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역사의 매 순간마다 먼저 손 내밀고 불러주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 좀처럼 포기할 줄 모르는 고집스럽고 바보 같은 눈 먼 사랑이 없었다면, 인간에겐 희망이란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에, 나 주가 먼 곳으로부터 와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주었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고, 한결같은 사랑을 너에게 베푼다.(렘 31:2b-3)



“나는 내 백성의 기도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내 백성은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보아라, 나 여기 있다. 보아라,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제멋대로 가며 악한 길로 가는 반역하는 저 백성을 맞이하려고, 내가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이사야 65:1-2)



1.3. 헤픈 사랑(눅 15장)과 집요한 사랑의 추격자(시 23편)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여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셨으며, 심지어 가장 낮은 인간보다 한 발 더 아래로 내려와 그들을 대신하여 돌아가심으로써 또다시 자기를 버리는 사랑을 보여주셨다.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여정은 끝없는 ‘자기 버림’과 ‘자기 부인’의 여정이다. 아래로 아래로의 여정이다. 사랑 아니면 상상할 수도 없는 그 추락의 여정이 우리를 죽음에서 건졌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향한 자기 탐닉의 사랑밖에 할 줄 모르던 우리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아버지가 바란 것은 금의환향이 아니었다. 그저 돌아기만 바라셨다. 돌아온다는 것은 아들에게 죽은 것이나 다름 없던 아버지가 살아난다는 것이요, 아버지에게 죽었던 아들이 살아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고개만 돌려도,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오는 탕자 아들을 보고서 뛰어나가 맞이한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악취나고 부끄러운  것 투성이인 우리를 단 한 마디 따져 묻는 것도 없이 용서하시고, 우리와 풍성한 산 교제를 나누기 위해 단 일초도 기다리지 않으시는 참을성 없는 아버지가 되신다. 아들을 위해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이 행동하시고, 아버지를 인정한 아들을 얻고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듯이 기뻐하신다. 이보다 더 헤픈 사랑을 본 적이 있는가? 



시편 기자는 우리와의 교제를 갈망하시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이렇게 노래한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기 ‘나를 따른다’를 직역하면 ‘나를 추격한다’이다. 그것도 ‘평생’ 추격하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까지, 아니 죽음 그 너머까지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따라다니실 것이다. 왜 그토록 집요한 사랑의 추격자가 되시는가? 영원토록 여호와의 집(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1.4. Shall we dance?

아마 이 추격은 내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시절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따라서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은 나를 ‘중간에서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뒤쫓아오신 하나님의 여정인 것이다. 술래잡기 놀이에서 술래인 아버지는 어서 아들에게 붙잡히기를 바라신다. 숨바꼭질 할 때 아버지는 술래인 아들이 어서 자신을 찾아주기를 기다리며 “나 여기 있다” 하고 소리쳐 주신다. 묵상은 하나님이 주신 혜택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일이며, “나 여기 있다” 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찾아내서 함께 웃고 즐거워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이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요한계시록 3:20)



조이스 럽은 이것을 자신에게 춤을 권하는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늘 공허하고 죽고 텅 빈 내 뼈의 마른 골짜기에 찾아와 내게 춤을 청하신다.” 하나님은 열정도 없고 소망도 없고 활기도 없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 풍성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지 않겠느냐고 내게 신실하게 물으신다. 묵상은 하나님과 추는 춤판에서 그분의 리드에 나를 맡기고 그분의 리듬과 박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내 자유를 그분의 움직임에 양도할 때 우리는 주께서 창조하신 놀라운 스텝에 취하여 참된 자유의 희열을 맛볼 것이다. 



이렇듯 묵상을 통한 창조주와의 교제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며(real), 정보만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대면하는 일이며(relational), 더 나아가 그 만남을 통해 우리 자신의 성품과 주변의 삶을 변모시키는 변혁적이고(revolutionary) 급진적인(radical) 일이다. 창조주의 숨과 맞닿을 때 우리의 마른 영혼이 일어설 것이고(revival), 우리는 하나님의 교제의 온전한 파트너로 다시 창조될 것이다(re-creation). 



주님은 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까지 먼 길을 달려오셨고, 역사를 가로질러 오늘 내 앞에 서셨다. 그래서 아주 간절하고 곡진하게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면서 우리를 당신과의 깊은 교제의 관계로 부르신다. 손을 내밀며 묵상의 춤판에서 만나 천국의 자유를 춤추자고 하신다. 



잃어버린 꿈들.

잊혀진 즐거움들.

내 불안한 활동들과

광포를 먹고사는

탐욕스런 세상에

팔려 버린 영혼처럼.



바로 그 때 오래된 뼈더미가

가장 메마르고

버려진 듯싶은 그 때.

강한 생명의 호흡 하나

내 죽음을 꺠우네.



하나님이라 하시는 분

내 파편 조각에 다가와

서늘한 눈빛으로 청하시네.

“나와 함께 춤을 추겠니?”

내 안에 파고드는 음성.

내 심장 속에서 뛰고

죽음의 뼈를 일으키네.



한결같이 믿어주신 분께

내 기다리던 자아

네, 내어드리고

그렇게 춤은 시작되네.

                                      -조이스 럽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