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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묵상-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매일성경 순> 9-10월호에 투고한 글입니다. 거기엔 요약본이 들어가 있고 이것이 전문입니다.
1. 캐디에게 순종하는 골프의 황제
2. 묵상의 시작, 하나님의 정의를 수용하는 일
3. 묵상, 나를 읽고 하나님에 의해 내가 읽히는 일
4. 다윗의 춤
I. 캐디에게 순종하는 골프의 황제
미국의 프로 골퍼 타이거 우즈가 필드 위를 걸을 때 가장 가까이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 거구의 몸을 이끌고 큰 가방 어깨를 매고 걷는데, 그 안에는 골프채들이 잔뜩 들어 있다. 놀라운 것은 우즈가 공을 치기 전 항상 이 사람에게서 뭔가를 경청하여 듣고 그가 건네 준 골프채로 휘두른다는 것이다. 타이거 우즈는 이 사람의 지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화려한 조명은 우즈가 다 받고 있다. 이 사람이 타이거 우즈의 캐디인 스티브 윌리엄스(Steve Williams)다. 타이거 우즈는 가야 할 방향으로 공을 잘 때려 보내서 결국 자그마한 구멍 안에 그 공을 집어넣는 기술 하나로 상상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얼마나 멀리, 무슨 골프채로, 어느 방향을 향해 공을 보내야 하는지를 더 잘 아는 것은 선수가 아니라 캐디다. 게다가 마음 먹은 대로 공이 날아가지 않을 때는 우즈의 자세가 몸 상태가 좋을 때와 어떻게 다른지를 가장 잘 알아낼 수 있는 사람도 윌리엄스다. 쓰든 달든 윌리엄스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타이거 우즈가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상금의 십일조를 캐디에게 아낌 없이 갖다 바칠 만큼 우즈는 기꺼이 그의 조언이 경기 전체를 지배하도록 신뢰하고 맡겼다. 캐디를 바꾼다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타이거 우즈가 되겠다는 의미다. ‘순종하는 황제’라는 모순적인 자기 정체를 수용한 데서 ‘영광스런 황제’가 태어난 것이다.
II. 묵상의 시작: 하나님의 정의를 수용하는 일
‘묵상’을 통한 창조주와의 교제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며(real), 정보만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대면하는 일이며(relational), 그 만남을 통해 우리 자신의 성품과 주변의 삶을 변모시키는 변혁적이고(revolutionary) 급진적인(radical) 일이다. 창조주의 숨과 맞닿을 때, 바로 그 때 우리의 마른 영혼이 일어서고(revival),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교제 파트너로 다시 창조된다(re-creation). 창조와 성육신과 십자가는 우리와의 교제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부인’이었고, ‘자기 비하’였고, ‘자기를 내어줌’이었다. 하지만 그 애절한 마음을 적절하게 담아 본 적이 있는 인간의 언어는 지금껏 없었다. 우리와 맺은 언약을 향한 하나님의 이 신실함, 자식을 향한 아비의 지고한 사랑, 그리고 신부와의 진정한 ‘앎’을 추구한 신랑의 열망을 다 헤아린, 역사상 단 한 분 (예수님)이 존재했을 뿐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시면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묵상하고 보내신 분의 뜻을 묵상하여 그 뜻을 자신의 소명과 양식으로 삼으셨다. 순종의 묵상을 통해 예수님은 ‘아들’ 노릇에 신실하셨고 ‘종’의 사명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묵상과 순종의 삶은 자신의 모순적인 정체성을 수용하는 데서 시작하였다. 그는 하나님이면서 인간이셔야 했고, 하나님의 나라를 대리 통치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이면서 동시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보내신 이의 기쁨이 되어야 할 고난 받는 ‘종’이셨다. 왕이면서 맘대로 할 수 없고, 사랑 받는 아들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은 더 이상 삶과 죽음의 경계는 없었고, 수치와 명예의 경계도 없었다. 태어난 곳이 왕궁이 아니라 구유라서 문제 될 것이 없었고, 지배자로가 아니라 식민지 백성으로 산다는 사실이 그에게 수치로 여겨진 적도 없었다. 가장 먼저 영접할 줄 알았던 율법교사들과 성전 권력자들이 자기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핍박하고 비난하고 죽이려 한 것 때문에 하늘을 향한 자신의 순종을 재고하지 않으셨고, 심지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까지 자기를 몰라주고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하여 사명을 포기하려고 하지도 않으셨다. 결코 조화될 수 없어 보이는 모든 환경이나 조건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의 근거였고, 존재 이유였고, 존재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생명이었고, 그분이 명예였기 때문이다. 흙의 몸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떡과 고기와 물만 제공해준다면, 믿음의 대상이 애굽의 바로든 출애굽의 하나님이든 상관 없었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랐다. 남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숨막힌 부담감 때문에 ‘예’라고 말할 때처럼 확신있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고, 사람과 일에 과도하게 자신을 내어주는 우리와는 달랐다. 하나님의 ‘사랑 하는 자’와 ‘기뻐하는 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수용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수용과 인정에 늘 집착하는 우리와는 달랐다.
‘묵상’은 내가 누구인지를 수용하는 데서 시작한다. 내가 누구라고 정의하시는 그분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불릴 자격이 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는데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요 기뻐하는 자인 나에 대해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굳이 내가 사랑 받을 만한 사람임을 설득하고 증명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중간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시작된다. 그것이 생을 불사르는 헌신보다 앞선다. 예배보다 앞선다. 좋은 QT 교재(매일성경?)를 고르는 일보다 앞선다. 성경을 펼쳐 드는 것보다 앞선다. 기도하러 골방을 찾는 일보다 앞선다. 이것을 앞세우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묵상이 내 삶의 모든 활동들보다 앞선 일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묵상’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이 되지 않으면 결코 두 번째로 중요한 일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순적인 자기 정체에 대한 진정 어린 수용이 없이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없고 ‘갈망’도 없고 ‘배고픔’도 없다. 사랑은 용서하는 사랑, 즉 은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빠진 묵상은 ‘나’를 치장하는 종교적인 액세서리로 전락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묵상을 앞세우지 않는 모든 활동들 역시 쉽게 남의 기대에 못 미칠까 봐 두려워하는 내 마음을 위로하는 수단에 그치고 만다. 필사적으로 사랑하려고 하면서도 사랑하는 못하는 사람들이 된다. 자유를 원하면서도 자유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된다. 쉬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텅 빈 스케줄을 두려워하고 바쁜 삶을 자랑한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하고 내가 아는 사람들로 나를 정의하려고 한다. 세상의 중심에 자기를 놓으면서도 주의를 끌만한 대상이나 사람이 없으면 안절부절해 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불현듯 찾아오는 불안이라고 하는 불편한 감정을 어루만져 줄 정신적(영적이 아니라) 안마사로, 묵상은 스케줄 표의 한 칸을 채우는 활동으로, 제자가 되는 훈련 과정의 한 강좌로 전락할 수 있다.
III. 묵상: 나를 읽고 하나님에 의해 내가 읽히는 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수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묵상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 뿐만 아니라 모순적인 자기 조건과 대면한다는 뜻이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긴장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이면서 세상의 사랑은 받지 못하는 간극을 인정하고,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꾸만 각성제만 찾는 내 자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생명임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안식의 순간인지 알면서도, 거의 한 번도 예외 없이 성경을 펼치고 무릎을 꿇기까지 불굴의 의지로 다짐해야 하는 이 모순덩어리와 화해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묵상’은 하나님을 읽는 일이기 전에 ‘나’를 읽는 일이며, 하나님께 내가 ‘읽히는’ 일이다. 따라서 본문(text)을 대하기 전에 하나님이 지으신 나 자신(혼돈 가득한 광야)과 그런 나를 ‘사랑하는 아들’로, 그리고 ‘기뻐하시는 종’으로 새로이 지어가시기 위해 허락하신 삶의 조건들(혼돈 가득한 광야)을 연구하고 관찰하고, 그 실상을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은 기대하기 어렵다. 매번 묵상이 어려운 것은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다. 성경을 대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 지금도 써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내러티브)를 읽어내지 못하고 그 이야기 속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성경의 이야기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성경 이야기를 해석하는 입장에 서기 전에 땀과 눈물과 웃음과 신음이 버무려진 성경 속의 인물, 즉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헨리 나우엔은 “우는 것을 배우는 것과 철야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 새벽을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 것, 아마도 이것이 인간적이 된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교제의 파트너로서의 ‘인간’이다. 나에 대한 묵상은 내 속에 있는 슬픔과 응어리와 분노와 야망과 대면하고, 응답 없는 캄캄한 현실 속에 있는 나를 만나게 한다. 그런 내가 성경 내러티브 속의 인물이나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치유 받고, 화해하고, 인내할 힘을 얻고, 기다릴 소망을 얻게 하는 모든 과정이 묵상이다. 숱한 QT 이론이나 묵상 교재들(매일성경을 포함하여)은 자칫 우리를 마비시키는 심리적 마취제가 되어 이런 영적 감수성과 자발적인 영적 수용성(Spiritual receptivity)을 둔감하게 하고, 단지 우리의 기분을 더 좋게 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묵상은 자기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고통스런 과정이다. 그래서 아침마다 기도하고 성경을 펼쳐서 묵상하는 일이 매번 결심이 필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나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나 사이의 엄청난 간극이 늘 내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차리라 ‘성경’ 읽기는 쉽고 ‘묵상 교재’ 묵상은 쉽다. 내가 “참, 잘했어요”라고 도장 찍어주면 되는 숙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관찰이 빠진 묵상, 즉 사적이고 내면적이지 않은 삶에서 나온 대화는 잡담에 불과하고, 그 때의 기도는 독백에 불과하다.
별로 달갑지 않은 자기와의 만남은 자칫 우리 자신을 절망으로 이끌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 절망이 자기 포기로 가지 않고 자발적인 자기 비움으로 나아가게 하는 단 하나의 처방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로 여겨주신 ‘하나님의 모순적인 정의’(定義, definition)를 기억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우리의 책임을 묻고 자격을 요구하는 무수한 교리를 침묵시키시는 ‘경계를 허무는 사랑’이다. 이 사랑만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준다. 자기와 만나는 위험한 모험의 길에 나서게 한다. 거룩하신 주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죽지 않을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게 한다(히 4:16).
IV. 다윗의 춤
어거스틴은 말한다: “기본적으로 사랑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자아를 잊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하나님을 잊고 부인할 정도로 자아를 사랑하는 사랑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랑을 다윗과 사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다윗은 목동으로 있을 때에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동안 목동으로 살았다. 왕 위에 오르고도 열방과 같은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목자’로 살았다. 왕 같지 않은 왕으로 산 것이다. 왕이면서 동시에 아버지 심부름을 해야 하는 막내 아들이었다. 왕이면서 사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궁정 음악가였다. 왕이면서 광야 동굴을 전전하는 도망자였다. 반대로 사울은 왕이면서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느라고 왕의 삶을 누리지 못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왕위를 자기 힘과 자원으로 유지되는 왕위로 바꾸어버렸다. 한 사람은 삶의 조건은 그것을 부인한다 해도 하나님이 주신 정의를 수용하고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정의를 거부하고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았다.
권력의 자리를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자는 결코 춤을 출 수 없다. 사울은 춤추지 않았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백성들의 흥겨운 노래와 춤이 오히려 그를 하나님과의 교제의 문을 닫는 경직된 사람이 되게 하였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노래가 있었고 춤이 있었다. 특히 여호와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당도하자 너무 기쁜 나머지 알몸이 되는 것도 모르고 춤에 몰두했다(삼하 6:20). 그 순간 다윗 앞에는 찬양 받으실 하나님만 계셨을 뿐이다. 자신과 상관 있다고 눈으로 볼 수 있게 임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만 보일 뿐이었다. 그 순간 자신을 세우고 보호하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벌거벗고 춤추는 왕’이라는 모순적인 정체를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권력자 사울의 딸 미갈에게는 그것이 왕을 왕 되게 하고, 왕을 백성들과 경계 지어주는 왕의 권위와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을 뿐이다. 그 마음으로는 법궤의 도착이 주는 엄청난 메시지를 묵상할 수 없었다. 자신을 지키느라고, 사람들의 수용과 인정을 계산하느라고,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 발돋음할 수 있는 도약대를 경멸한 것이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춤판에 참여하는 일은 이처럼 나를 대면해야 하고 나를 잊어야 하고 나를 부인해야 하는 위태로운 일이다. 그것은 나에게 먼저 ‘인간’이 되라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통제하고 조정하고 조작할 수 없는 ‘타자’(하나님)가 있음을 인정하라는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교제로서의 묵상은 날마다 원점으로 돌아와 그런 나와 대면하는 용기와 모험에서 시작한다.
위험을 무릅쓴 사람만이 자유롭습니다 -
웃는다는 것은 바보처럼 보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운다는 것은 감상적으로 보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은 성가신 일에 연루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당신의 참된 자아를 드러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상과 꿈을 사람들 앞에 내어놓는 것은 그들의 사랑을 받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돌려 받지 못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건 죽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건 절망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시도해본다는 것은 실패를 각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어떤 위험도 무릅쓰지 않는 것입니다.
전혀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며,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그는 여하간의 고난이나 슬픔도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배우거나 느끼거나 변하거나 자라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확신에 매인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는 자유를 빼앗긴 것입니다.
오로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만이 자유롭습니다.
-작자미상, 숨 번역
2. 묵상-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매일성경 순> 9-10월호에 투고한 글입니다. 거기엔 요약본이 들어가 있고 이것이 전문입니다.
1. 캐디에게 순종하는 골프의 황제
2. 묵상의 시작, 하나님의 정의를 수용하는 일
3. 묵상, 나를 읽고 하나님에 의해 내가 읽히는 일
4. 다윗의 춤
I. 캐디에게 순종하는 골프의 황제
미국의 프로 골퍼 타이거 우즈가 필드 위를 걸을 때 가장 가까이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 거구의 몸을 이끌고 큰 가방 어깨를 매고 걷는데, 그 안에는 골프채들이 잔뜩 들어 있다. 놀라운 것은 우즈가 공을 치기 전 항상 이 사람에게서 뭔가를 경청하여 듣고 그가 건네 준 골프채로 휘두른다는 것이다. 타이거 우즈는 이 사람의 지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화려한 조명은 우즈가 다 받고 있다. 이 사람이 타이거 우즈의 캐디인 스티브 윌리엄스(Steve Williams)다. 타이거 우즈는 가야 할 방향으로 공을 잘 때려 보내서 결국 자그마한 구멍 안에 그 공을 집어넣는 기술 하나로 상상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얼마나 멀리, 무슨 골프채로, 어느 방향을 향해 공을 보내야 하는지를 더 잘 아는 것은 선수가 아니라 캐디다. 게다가 마음 먹은 대로 공이 날아가지 않을 때는 우즈의 자세가 몸 상태가 좋을 때와 어떻게 다른지를 가장 잘 알아낼 수 있는 사람도 윌리엄스다. 쓰든 달든 윌리엄스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타이거 우즈가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상금의 십일조를 캐디에게 아낌 없이 갖다 바칠 만큼 우즈는 기꺼이 그의 조언이 경기 전체를 지배하도록 신뢰하고 맡겼다. 캐디를 바꾼다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타이거 우즈가 되겠다는 의미다. ‘순종하는 황제’라는 모순적인 자기 정체를 수용한 데서 ‘영광스런 황제’가 태어난 것이다.
II. 묵상의 시작: 하나님의 정의를 수용하는 일
‘묵상’을 통한 창조주와의 교제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며(real), 정보만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대면하는 일이며(relational), 그 만남을 통해 우리 자신의 성품과 주변의 삶을 변모시키는 변혁적이고(revolutionary) 급진적인(radical) 일이다. 창조주의 숨과 맞닿을 때, 바로 그 때 우리의 마른 영혼이 일어서고(revival),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교제 파트너로 다시 창조된다(re-creation). 창조와 성육신과 십자가는 우리와의 교제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부인’이었고, ‘자기 비하’였고, ‘자기를 내어줌’이었다. 하지만 그 애절한 마음을 적절하게 담아 본 적이 있는 인간의 언어는 지금껏 없었다. 우리와 맺은 언약을 향한 하나님의 이 신실함, 자식을 향한 아비의 지고한 사랑, 그리고 신부와의 진정한 ‘앎’을 추구한 신랑의 열망을 다 헤아린, 역사상 단 한 분 (예수님)이 존재했을 뿐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시면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묵상하고 보내신 분의 뜻을 묵상하여 그 뜻을 자신의 소명과 양식으로 삼으셨다. 순종의 묵상을 통해 예수님은 ‘아들’ 노릇에 신실하셨고 ‘종’의 사명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묵상과 순종의 삶은 자신의 모순적인 정체성을 수용하는 데서 시작하였다. 그는 하나님이면서 인간이셔야 했고, 하나님의 나라를 대리 통치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이면서 동시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보내신 이의 기쁨이 되어야 할 고난 받는 ‘종’이셨다. 왕이면서 맘대로 할 수 없고, 사랑 받는 아들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은 더 이상 삶과 죽음의 경계는 없었고, 수치와 명예의 경계도 없었다. 태어난 곳이 왕궁이 아니라 구유라서 문제 될 것이 없었고, 지배자로가 아니라 식민지 백성으로 산다는 사실이 그에게 수치로 여겨진 적도 없었다. 가장 먼저 영접할 줄 알았던 율법교사들과 성전 권력자들이 자기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핍박하고 비난하고 죽이려 한 것 때문에 하늘을 향한 자신의 순종을 재고하지 않으셨고, 심지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까지 자기를 몰라주고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하여 사명을 포기하려고 하지도 않으셨다. 결코 조화될 수 없어 보이는 모든 환경이나 조건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의 근거였고, 존재 이유였고, 존재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생명이었고, 그분이 명예였기 때문이다. 흙의 몸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떡과 고기와 물만 제공해준다면, 믿음의 대상이 애굽의 바로든 출애굽의 하나님이든 상관 없었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랐다. 남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숨막힌 부담감 때문에 ‘예’라고 말할 때처럼 확신있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고, 사람과 일에 과도하게 자신을 내어주는 우리와는 달랐다. 하나님의 ‘사랑 하는 자’와 ‘기뻐하는 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수용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수용과 인정에 늘 집착하는 우리와는 달랐다.
‘묵상’은 내가 누구인지를 수용하는 데서 시작한다. 내가 누구라고 정의하시는 그분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불릴 자격이 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는데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요 기뻐하는 자인 나에 대해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굳이 내가 사랑 받을 만한 사람임을 설득하고 증명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중간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시작된다. 그것이 생을 불사르는 헌신보다 앞선다. 예배보다 앞선다. 좋은 QT 교재(매일성경?)를 고르는 일보다 앞선다. 성경을 펼쳐 드는 것보다 앞선다. 기도하러 골방을 찾는 일보다 앞선다. 이것을 앞세우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묵상이 내 삶의 모든 활동들보다 앞선 일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묵상’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이 되지 않으면 결코 두 번째로 중요한 일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순적인 자기 정체에 대한 진정 어린 수용이 없이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없고 ‘갈망’도 없고 ‘배고픔’도 없다. 사랑은 용서하는 사랑, 즉 은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빠진 묵상은 ‘나’를 치장하는 종교적인 액세서리로 전락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묵상을 앞세우지 않는 모든 활동들 역시 쉽게 남의 기대에 못 미칠까 봐 두려워하는 내 마음을 위로하는 수단에 그치고 만다. 필사적으로 사랑하려고 하면서도 사랑하는 못하는 사람들이 된다. 자유를 원하면서도 자유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된다. 쉬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텅 빈 스케줄을 두려워하고 바쁜 삶을 자랑한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하고 내가 아는 사람들로 나를 정의하려고 한다. 세상의 중심에 자기를 놓으면서도 주의를 끌만한 대상이나 사람이 없으면 안절부절해 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불현듯 찾아오는 불안이라고 하는 불편한 감정을 어루만져 줄 정신적(영적이 아니라) 안마사로, 묵상은 스케줄 표의 한 칸을 채우는 활동으로, 제자가 되는 훈련 과정의 한 강좌로 전락할 수 있다.
III. 묵상: 나를 읽고 하나님에 의해 내가 읽히는 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수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묵상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 뿐만 아니라 모순적인 자기 조건과 대면한다는 뜻이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긴장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이면서 세상의 사랑은 받지 못하는 간극을 인정하고,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꾸만 각성제만 찾는 내 자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생명임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안식의 순간인지 알면서도, 거의 한 번도 예외 없이 성경을 펼치고 무릎을 꿇기까지 불굴의 의지로 다짐해야 하는 이 모순덩어리와 화해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묵상’은 하나님을 읽는 일이기 전에 ‘나’를 읽는 일이며, 하나님께 내가 ‘읽히는’ 일이다. 따라서 본문(text)을 대하기 전에 하나님이 지으신 나 자신(혼돈 가득한 광야)과 그런 나를 ‘사랑하는 아들’로, 그리고 ‘기뻐하시는 종’으로 새로이 지어가시기 위해 허락하신 삶의 조건들(혼돈 가득한 광야)을 연구하고 관찰하고, 그 실상을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은 기대하기 어렵다. 매번 묵상이 어려운 것은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다. 성경을 대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 지금도 써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내러티브)를 읽어내지 못하고 그 이야기 속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성경의 이야기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성경 이야기를 해석하는 입장에 서기 전에 땀과 눈물과 웃음과 신음이 버무려진 성경 속의 인물, 즉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헨리 나우엔은 “우는 것을 배우는 것과 철야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 새벽을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 것, 아마도 이것이 인간적이 된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교제의 파트너로서의 ‘인간’이다. 나에 대한 묵상은 내 속에 있는 슬픔과 응어리와 분노와 야망과 대면하고, 응답 없는 캄캄한 현실 속에 있는 나를 만나게 한다. 그런 내가 성경 내러티브 속의 인물이나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치유 받고, 화해하고, 인내할 힘을 얻고, 기다릴 소망을 얻게 하는 모든 과정이 묵상이다. 숱한 QT 이론이나 묵상 교재들(매일성경을 포함하여)은 자칫 우리를 마비시키는 심리적 마취제가 되어 이런 영적 감수성과 자발적인 영적 수용성(Spiritual receptivity)을 둔감하게 하고, 단지 우리의 기분을 더 좋게 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묵상은 자기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고통스런 과정이다. 그래서 아침마다 기도하고 성경을 펼쳐서 묵상하는 일이 매번 결심이 필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나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나 사이의 엄청난 간극이 늘 내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차리라 ‘성경’ 읽기는 쉽고 ‘묵상 교재’ 묵상은 쉽다. 내가 “참, 잘했어요”라고 도장 찍어주면 되는 숙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관찰이 빠진 묵상, 즉 사적이고 내면적이지 않은 삶에서 나온 대화는 잡담에 불과하고, 그 때의 기도는 독백에 불과하다.
별로 달갑지 않은 자기와의 만남은 자칫 우리 자신을 절망으로 이끌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 절망이 자기 포기로 가지 않고 자발적인 자기 비움으로 나아가게 하는 단 하나의 처방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로 여겨주신 ‘하나님의 모순적인 정의’(定義, definition)를 기억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우리의 책임을 묻고 자격을 요구하는 무수한 교리를 침묵시키시는 ‘경계를 허무는 사랑’이다. 이 사랑만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준다. 자기와 만나는 위험한 모험의 길에 나서게 한다. 거룩하신 주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죽지 않을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게 한다(히 4:16).
IV. 다윗의 춤
어거스틴은 말한다: “기본적으로 사랑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자아를 잊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하나님을 잊고 부인할 정도로 자아를 사랑하는 사랑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랑을 다윗과 사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다윗은 목동으로 있을 때에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동안 목동으로 살았다. 왕 위에 오르고도 열방과 같은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목자’로 살았다. 왕 같지 않은 왕으로 산 것이다. 왕이면서 동시에 아버지 심부름을 해야 하는 막내 아들이었다. 왕이면서 사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궁정 음악가였다. 왕이면서 광야 동굴을 전전하는 도망자였다. 반대로 사울은 왕이면서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느라고 왕의 삶을 누리지 못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왕위를 자기 힘과 자원으로 유지되는 왕위로 바꾸어버렸다. 한 사람은 삶의 조건은 그것을 부인한다 해도 하나님이 주신 정의를 수용하고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정의를 거부하고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았다.
권력의 자리를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자는 결코 춤을 출 수 없다. 사울은 춤추지 않았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백성들의 흥겨운 노래와 춤이 오히려 그를 하나님과의 교제의 문을 닫는 경직된 사람이 되게 하였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노래가 있었고 춤이 있었다. 특히 여호와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당도하자 너무 기쁜 나머지 알몸이 되는 것도 모르고 춤에 몰두했다(삼하 6:20). 그 순간 다윗 앞에는 찬양 받으실 하나님만 계셨을 뿐이다. 자신과 상관 있다고 눈으로 볼 수 있게 임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만 보일 뿐이었다. 그 순간 자신을 세우고 보호하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벌거벗고 춤추는 왕’이라는 모순적인 정체를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권력자 사울의 딸 미갈에게는 그것이 왕을 왕 되게 하고, 왕을 백성들과 경계 지어주는 왕의 권위와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을 뿐이다. 그 마음으로는 법궤의 도착이 주는 엄청난 메시지를 묵상할 수 없었다. 자신을 지키느라고, 사람들의 수용과 인정을 계산하느라고,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 발돋음할 수 있는 도약대를 경멸한 것이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춤판에 참여하는 일은 이처럼 나를 대면해야 하고 나를 잊어야 하고 나를 부인해야 하는 위태로운 일이다. 그것은 나에게 먼저 ‘인간’이 되라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통제하고 조정하고 조작할 수 없는 ‘타자’(하나님)가 있음을 인정하라는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교제로서의 묵상은 날마다 원점으로 돌아와 그런 나와 대면하는 용기와 모험에서 시작한다.
위험을 무릅쓴 사람만이 자유롭습니다 -
웃는다는 것은 바보처럼 보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운다는 것은 감상적으로 보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은 성가신 일에 연루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당신의 참된 자아를 드러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상과 꿈을 사람들 앞에 내어놓는 것은 그들의 사랑을 받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돌려 받지 못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건 죽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건 절망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시도해본다는 것은 실패를 각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어떤 위험도 무릅쓰지 않는 것입니다.
전혀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며,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그는 여하간의 고난이나 슬픔도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배우거나 느끼거나 변하거나 자라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확신에 매인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는 자유를 빼앗긴 것입니다.
오로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만이 자유롭습니다.
-작자미상, 숨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