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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묵상의 길잡이 : 성경 - 박대영 목사님
1. 즉흥 연주와 텍스트
랑카스터의 겨울 밤은 깊어가고 벽난로가 넓은 홀을 데워주고 있었다. 기숙사 학생들이 둘씩 서넛씩 옹기종기 모여 홍차 한 잔 앞에 두고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서서 토론을 하기도 하고 바닥에 앉아 체스도 하면서 쉬고 있었다. 큰 웃음을 터뜨리는 재미난 이야기와 빨갛게 달아오른 열띤 대화가 있었지만, 모두들 자신들이 들어야 할 또다른 소리가 있기나 한 듯이 옆 사람이 간신히 알아들을 만한 저음들을 주고 받는다. 학생들의 다른 쪽 귀는 잔잔히 들려오는 피아노 연주를 향해 열려 있었다. 벌써 1 시간이 다 되어간다. 미국에서 온 학생 둘이 두 대의 피아노로 재즈를 연주하고 있다. 놀랍게도 악보 없는 즉흥연주다. 둘은 평소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여기서 처음 만났다. 연주가 끝나자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듯 하던 아이들이 큰 함성과 휘파람을 부르며 감사를 표한다.
한 친구에게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 즉흥연주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란다. 악보는 없지만 약속은 있단다. 재즈 고유의 코드 진행 방식이 있는데, 그 규칙을 잘 지키고 그 길을 따라가면, 그 안에서 연주자 개인에게 큰 자유가 주어진단다. 연주자마다 누리는 그 자유가 다양한 빛깔의 연주를 만들어낸단다. 하나 더 있다. 함께 연주할 때는 동료를 배려하는 자유의 절제가 필요하단다. 상대가 앞에 서면 자신은 배경이 되어 주고, 자신이 앞으로 가면 동료가 배경이 되어 주어야 한단다. 배려는 더 큰 자유를 만들어내지만, 무언의 약속과 소통이 깨지면 연주는 ‘혼돈’에 빠지게 된단다. 그렇게 우리는 1시간 동안 연주자와 재즈의 대화, 그리고 두 연주자 간의 조화로운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거다. 약속을 지키는 자유,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유, 상대를 배려하는 자기 부정의 자유가 빚어낸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다. 그들에게는 그 약속과 배려가 ‘보이지 않는 악보’였던 거다.
2. 악보 없는 연주, 대본 없는 연극, 지도 없는 여정의 세상
하나님을 떠나 독립을 선언한 세상은 곧바로 ‘혼돈’이 되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살 뿐이다. 길도 없고 규칙도 없고 배려도 없다. 자기 느낌, 자기 필요, 자기 만족의 지도를 따라서 자기가 만든 길을 가고, 그 길이 자신이 되는 인생을 산다. 화려한 수사로 장식된 소경들의 공허한 허풍만 가득하고, 곳곳마다 경적과 욕지거리로 시끄럽다. 악보도 없고 지휘도 없는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낸 불협화음이다. 대본 없이 무대에 선 연극 배우들의 무의미한 좌충우돌이다. 지도 없이 떠나는 위험천만한 정글 여정이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멈추고 들으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그저 존중과 관용(tolerance)을 최고의 미덕으로 떠받들 뿐이다.
그것이 “네 맘대로 하세요”라고 말하는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우상이다. 전에는 없던 새로운 시대가 당도한 듯이 호들갑이다. 하지만 이성을 척도로 삼던 모던시대나 그 이성 자체를 해체한 포스트 모던 모두 하나님 없이 자기 맘대로 살겠다는 생각의 동종변이일 뿐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경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오만하고 편협한 잣대일 뿐이다. 모던은 “너만 옳으냐”고 대놓고 반대했다면, 포스트모던은 “다 같이 잘해보자”고 웃으면서 반대할 뿐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아닌 자아가, 성경이 아닌 나의 경험이 텍스트이고 기준이고 권위라고 주장한다. 무례한 성경이 자신들을 환기시키고, 자극하고, 꾸짖고, 다듬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너무 많은 선택의 자유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궁지로 몰아가고 우리는 선택하는 자유를 빼앗기고 자발적으로(?) 선택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을, 자아와 자기 체험을 가장 권위 있는 텍스트로 삼는 한 그들은 자기 통제력을 상실한 채 익숙하고 길들여진 것에 이끌려 살고 있다는 것을. 이마트에 진열된 수십 종의 우유 중에 무엇을 사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그냥 먹던 거 먹었던 거 기억하는가? 선택을 하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정말로 그 자유를 행사했을 때 그 무모한 용기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고도 우리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3. 소통의 하나님, 소통의 나라
3.1. 낯선 세계로 인도하는 성경
창조자 하나님 안에서만 인간은 자유롭다. 그래서 묵상은 명상도 아니고 공상도 아니다. 자신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면벽수도만으로는 자신을 알지도, 찾지도, 만나지도 못한다. 묵상은 나 자신과 나를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과 나를 둘러싼 숱한 관계들을 새롭게 보게 하는 일이다. 그 새로운 재해석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것을 기록한 성경이다. 성경만이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며,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 인생이 돌아가는 방식, 그리고 우리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 보여준다. 하늘이 땅과 다르듯이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와 다르다. 성경이 없으면 우리는 설 수 없다. 선의를 가졌으나 무능한 인간들의 늪에 빠져 버릴 것이다.
따라서 묵상의 대상은 성경이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사건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고 그 인간의 모습 속에 투영된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성경묵상은 내 말이 통하고, 내 생각과 말로 창조해온 나의 나라를 전복하고, 우리에게 전적으로 낯선 하나님의 세상, 창조와 구원의 세상이 끝도 없이 우리 위로 그리고 우리 너머로 펼쳐져 있는, 그러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그래서 성경묵상은 이제 한치 앞도 못 보는 내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책임지고 칭송 받는 고단한 삶을 중단하게 한다. 모든 대상을 나를 위해 사용하고 이용하고 나의 논리와 이념을 위해 봉사하도록 환원하던 삶을 멈추게 한다. 성경묵상은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에 끌어들일 수 있는지, 어떻게 우리 삶에 참여시킬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일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성경이 우리를 일깨우고, 놀라게 하고, 성경이 내포하는 실재(reality)로 우리를 끌어들이도록 허용한다. 이젠 성경묵상은 하나님이 제시하는 조건대로 하나님께 참여하도록 성경이 나를 이끌게 하는 일이다. 내 자아의 어둡고 좁고 음습한 창고를 벗어나 하나님의 거대하고 광활하고 신비하고 낯선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일, 그것이 성경묵상이다. 신발 안에 들어간 조그마한 모래 한 알이 타자(other)가 될 때 우리 몸 전체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의 신경을 자극하듯이, 성경 말씀이 타자가 되고 그 말씀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도 자기 기만과 자기 충족적 순응주의라는 껍질을 벗고 자기 밖에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얻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 속에 깃든 신비를 되찾게 된다.
3.2. 말씀의 인격성과 성경 묵상
성경 묵상은 하나님 묵상이다. 하나님은 자연현상, 사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성경 등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지만, 성경만큼 결정적이지는 않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논문이나 보고서도 교과서도 아니다. 인격적으로 전달된 계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의미를 인격 대 인격으로 알려주는 계시다. 그분의 말씀이 곧 그분 자신이다.
우리는 말과 말하는 사람을 따로 뗄 수 없다. 말의 본질은 인격성에 있다. 말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성품과 뜻이 표출된다. 그것은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수단이다. 따라서 말을 통해 우리는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내 존재의 한 조각을 떼어 주는 것이다. 타인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알게 되고 그들의 삶에 동참하게 된다. 더 나아가 말을 통해 영혼은 영혼에 부딪친다. 단순히 기호나 소리뿐이라면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과 실체의 숨은 지렛대를 건드려 기호나 소리에 엄청난 힘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들의 정신적 측면이요 영적 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영과 대면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명사는 어원 분석의 대상으로, 동사는 문법 분석의 대상으로, 형용사는 감탄의 대상으로, 부사는 토론의 대상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책만이 아니라 말이고 인격이기에 연구 대상만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대상이다. 쳐다보는(見) 대상이 아니라 알아보는(觀) 대상이어야 한다. 사용할 대상이 아니라 수용할 대상이어야 한다. 유진 피터슨의 말대로, “우리가 읽는 말이 우리 삶의 내부가 되도록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리듬과 이미지가 기도의 실천, 순종의 행위, 사랑의 방식이 되도록 하는 독서”가 바로 성경 묵상이다.
3.3. 말씀의 창조성과 성경 묵상
그렇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에 참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창조 역사에 참여하게 되고 내가 그분이 말씀하신 의도대로 새창조 되어 간다. 그 때 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된다. “언어의 본질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무언가를 형성하는 데 있다.” 친밀함을 만들고 인품을 만들고 아름다움을 만들고 선을 만들고 진리를 만든다. 반대로 왜곡되고 거짓되고 부당한 힘에 의해 악용된 말은 창조된 것을 부수고 파괴하고 오염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말은 늘 ‘사건’을 만들어낸다. 물리적인 힘이 만들어낸 사건보다 훨씬 그 영향력이 크고 결과도 오래 지속된다. 인터넷 상의 근거 없는 악플이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하루하루 성실하게 쌓아 올린 한 인생을 망가뜨려버렸고, 결국 떳떳한 엄마로 남기 위해 사랑하는 자녀들을 두고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연예인을 우리는 안다. 말이 허물어지면 존재가 허물어진다. 그래서 시편 기자들도 살인자, 부정한 자, 고리대금업자, 이방인보다 거짓된 입술과 아첨하는 혀를 더 호되게 비판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를 향한 가장 무서운 공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의심하게 하거나 부인하게 하는 것인 이유다.
동시에 성경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굴복하고 그것으로 기도하는 대신에, 소유하고 옹호하고 기리는 것 역시 말씀의 생명력과 창조력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고전적인, 그러나 늘 성공적인 하나님 나라 파괴 전략이다. 성경에 대한 찬양은 있고 성경의 권위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변증은 있지만, 그것이 나와 내 삶을 창조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사유화하고, 하나님을 사유화하는 우상숭배고 기만이다.
성경묵상의 목적은 우리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며,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 작동하게 하는 데 있다. 우리가 성경을 사용하여 우리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사용하여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이끄시는 것이다. 우리를 성경에 정통한 학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진정한 그리스도인-경외심을 품은 예배자, 자기 희생의 고난을 감수하는 자, 일편 단심의 추종자-이 되게 하는 것이다.
4.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창조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언어를 얻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게 된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하게 된다. 작곡가는 연주자가 자기 악보를 무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연주자의 연주가 다 똑같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아무도 연주가 악보에 나오는 음을 정확하게 재생산하는 행위라고 보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한다. 우리를 조작하지도 않고 강제하지도 않고 인생에 대한 주의력을 흩트리지도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는 넓은 세상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욕망과 탐욕으로 버무려진 무의미한 즉흥 연주에 취해 있는 세상을 향해 성경은 존 케이지의 “4분 33초” 같은지도 모른다. 그 악보에는 TACET, 즉 ‘침묵’이라는 음악용어만 기록되어 있다.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공연장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들이 각자에게 어떤 음악으로 다가오는지 느끼게 하려는 시도란다. 자기 내면의 소리와 대면하게 하는 ‘침묵’이야말로 소음을 존재 이유로 삼는 세상이 가장 참을 수 없어하는 소리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이 주는 그 침묵은 약속 준수와 자유의 포기 속에서 1시간 동안 악보도 없이 즉흥 연주를 하였던 나의 친구들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리듬과 박자에 맞춰 창의적인 개성을 발휘하고 만끽할 무대가 될 것이다. 그 침묵은 길을 잘 아는 가이드를 따라 처녀림을 여행하는 이들이 느끼는 신기와 신비의 감동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경’ 묵상은 내 삶의 저자이신 창조주와의 만남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창조되어 가고, 내 인생이 하나님 나라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 가는 것을 발견하는 희열을 경험하게 해 줄 것이다.
4. 묵상의 길잡이 : 성경 - 박대영 목사님
1. 즉흥 연주와 텍스트
랑카스터의 겨울 밤은 깊어가고 벽난로가 넓은 홀을 데워주고 있었다. 기숙사 학생들이 둘씩 서넛씩 옹기종기 모여 홍차 한 잔 앞에 두고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서서 토론을 하기도 하고 바닥에 앉아 체스도 하면서 쉬고 있었다. 큰 웃음을 터뜨리는 재미난 이야기와 빨갛게 달아오른 열띤 대화가 있었지만, 모두들 자신들이 들어야 할 또다른 소리가 있기나 한 듯이 옆 사람이 간신히 알아들을 만한 저음들을 주고 받는다. 학생들의 다른 쪽 귀는 잔잔히 들려오는 피아노 연주를 향해 열려 있었다. 벌써 1 시간이 다 되어간다. 미국에서 온 학생 둘이 두 대의 피아노로 재즈를 연주하고 있다. 놀랍게도 악보 없는 즉흥연주다. 둘은 평소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여기서 처음 만났다. 연주가 끝나자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듯 하던 아이들이 큰 함성과 휘파람을 부르며 감사를 표한다.
한 친구에게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 즉흥연주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란다. 악보는 없지만 약속은 있단다. 재즈 고유의 코드 진행 방식이 있는데, 그 규칙을 잘 지키고 그 길을 따라가면, 그 안에서 연주자 개인에게 큰 자유가 주어진단다. 연주자마다 누리는 그 자유가 다양한 빛깔의 연주를 만들어낸단다. 하나 더 있다. 함께 연주할 때는 동료를 배려하는 자유의 절제가 필요하단다. 상대가 앞에 서면 자신은 배경이 되어 주고, 자신이 앞으로 가면 동료가 배경이 되어 주어야 한단다. 배려는 더 큰 자유를 만들어내지만, 무언의 약속과 소통이 깨지면 연주는 ‘혼돈’에 빠지게 된단다. 그렇게 우리는 1시간 동안 연주자와 재즈의 대화, 그리고 두 연주자 간의 조화로운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거다. 약속을 지키는 자유,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유, 상대를 배려하는 자기 부정의 자유가 빚어낸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다. 그들에게는 그 약속과 배려가 ‘보이지 않는 악보’였던 거다.
2. 악보 없는 연주, 대본 없는 연극, 지도 없는 여정의 세상
하나님을 떠나 독립을 선언한 세상은 곧바로 ‘혼돈’이 되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살 뿐이다. 길도 없고 규칙도 없고 배려도 없다. 자기 느낌, 자기 필요, 자기 만족의 지도를 따라서 자기가 만든 길을 가고, 그 길이 자신이 되는 인생을 산다. 화려한 수사로 장식된 소경들의 공허한 허풍만 가득하고, 곳곳마다 경적과 욕지거리로 시끄럽다. 악보도 없고 지휘도 없는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낸 불협화음이다. 대본 없이 무대에 선 연극 배우들의 무의미한 좌충우돌이다. 지도 없이 떠나는 위험천만한 정글 여정이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멈추고 들으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그저 존중과 관용(tolerance)을 최고의 미덕으로 떠받들 뿐이다.
그것이 “네 맘대로 하세요”라고 말하는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우상이다. 전에는 없던 새로운 시대가 당도한 듯이 호들갑이다. 하지만 이성을 척도로 삼던 모던시대나 그 이성 자체를 해체한 포스트 모던 모두 하나님 없이 자기 맘대로 살겠다는 생각의 동종변이일 뿐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경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오만하고 편협한 잣대일 뿐이다. 모던은 “너만 옳으냐”고 대놓고 반대했다면, 포스트모던은 “다 같이 잘해보자”고 웃으면서 반대할 뿐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아닌 자아가, 성경이 아닌 나의 경험이 텍스트이고 기준이고 권위라고 주장한다. 무례한 성경이 자신들을 환기시키고, 자극하고, 꾸짖고, 다듬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너무 많은 선택의 자유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궁지로 몰아가고 우리는 선택하는 자유를 빼앗기고 자발적으로(?) 선택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을, 자아와 자기 체험을 가장 권위 있는 텍스트로 삼는 한 그들은 자기 통제력을 상실한 채 익숙하고 길들여진 것에 이끌려 살고 있다는 것을. 이마트에 진열된 수십 종의 우유 중에 무엇을 사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그냥 먹던 거 먹었던 거 기억하는가? 선택을 하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정말로 그 자유를 행사했을 때 그 무모한 용기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고도 우리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3. 소통의 하나님, 소통의 나라
3.1. 낯선 세계로 인도하는 성경
창조자 하나님 안에서만 인간은 자유롭다. 그래서 묵상은 명상도 아니고 공상도 아니다. 자신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면벽수도만으로는 자신을 알지도, 찾지도, 만나지도 못한다. 묵상은 나 자신과 나를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과 나를 둘러싼 숱한 관계들을 새롭게 보게 하는 일이다. 그 새로운 재해석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것을 기록한 성경이다. 성경만이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며,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 인생이 돌아가는 방식, 그리고 우리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 보여준다. 하늘이 땅과 다르듯이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와 다르다. 성경이 없으면 우리는 설 수 없다. 선의를 가졌으나 무능한 인간들의 늪에 빠져 버릴 것이다.
따라서 묵상의 대상은 성경이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사건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고 그 인간의 모습 속에 투영된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성경묵상은 내 말이 통하고, 내 생각과 말로 창조해온 나의 나라를 전복하고, 우리에게 전적으로 낯선 하나님의 세상, 창조와 구원의 세상이 끝도 없이 우리 위로 그리고 우리 너머로 펼쳐져 있는, 그러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그래서 성경묵상은 이제 한치 앞도 못 보는 내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책임지고 칭송 받는 고단한 삶을 중단하게 한다. 모든 대상을 나를 위해 사용하고 이용하고 나의 논리와 이념을 위해 봉사하도록 환원하던 삶을 멈추게 한다. 성경묵상은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에 끌어들일 수 있는지, 어떻게 우리 삶에 참여시킬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일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성경이 우리를 일깨우고, 놀라게 하고, 성경이 내포하는 실재(reality)로 우리를 끌어들이도록 허용한다. 이젠 성경묵상은 하나님이 제시하는 조건대로 하나님께 참여하도록 성경이 나를 이끌게 하는 일이다. 내 자아의 어둡고 좁고 음습한 창고를 벗어나 하나님의 거대하고 광활하고 신비하고 낯선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일, 그것이 성경묵상이다. 신발 안에 들어간 조그마한 모래 한 알이 타자(other)가 될 때 우리 몸 전체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의 신경을 자극하듯이, 성경 말씀이 타자가 되고 그 말씀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도 자기 기만과 자기 충족적 순응주의라는 껍질을 벗고 자기 밖에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얻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 속에 깃든 신비를 되찾게 된다.
3.2. 말씀의 인격성과 성경 묵상
성경 묵상은 하나님 묵상이다. 하나님은 자연현상, 사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성경 등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지만, 성경만큼 결정적이지는 않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논문이나 보고서도 교과서도 아니다. 인격적으로 전달된 계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의미를 인격 대 인격으로 알려주는 계시다. 그분의 말씀이 곧 그분 자신이다.
우리는 말과 말하는 사람을 따로 뗄 수 없다. 말의 본질은 인격성에 있다. 말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성품과 뜻이 표출된다. 그것은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수단이다. 따라서 말을 통해 우리는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내 존재의 한 조각을 떼어 주는 것이다. 타인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알게 되고 그들의 삶에 동참하게 된다. 더 나아가 말을 통해 영혼은 영혼에 부딪친다. 단순히 기호나 소리뿐이라면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과 실체의 숨은 지렛대를 건드려 기호나 소리에 엄청난 힘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들의 정신적 측면이요 영적 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영과 대면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명사는 어원 분석의 대상으로, 동사는 문법 분석의 대상으로, 형용사는 감탄의 대상으로, 부사는 토론의 대상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책만이 아니라 말이고 인격이기에 연구 대상만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대상이다. 쳐다보는(見) 대상이 아니라 알아보는(觀) 대상이어야 한다. 사용할 대상이 아니라 수용할 대상이어야 한다. 유진 피터슨의 말대로, “우리가 읽는 말이 우리 삶의 내부가 되도록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리듬과 이미지가 기도의 실천, 순종의 행위, 사랑의 방식이 되도록 하는 독서”가 바로 성경 묵상이다.
3.3. 말씀의 창조성과 성경 묵상
그렇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에 참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창조 역사에 참여하게 되고 내가 그분이 말씀하신 의도대로 새창조 되어 간다. 그 때 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된다. “언어의 본질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무언가를 형성하는 데 있다.” 친밀함을 만들고 인품을 만들고 아름다움을 만들고 선을 만들고 진리를 만든다. 반대로 왜곡되고 거짓되고 부당한 힘에 의해 악용된 말은 창조된 것을 부수고 파괴하고 오염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말은 늘 ‘사건’을 만들어낸다. 물리적인 힘이 만들어낸 사건보다 훨씬 그 영향력이 크고 결과도 오래 지속된다. 인터넷 상의 근거 없는 악플이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하루하루 성실하게 쌓아 올린 한 인생을 망가뜨려버렸고, 결국 떳떳한 엄마로 남기 위해 사랑하는 자녀들을 두고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연예인을 우리는 안다. 말이 허물어지면 존재가 허물어진다. 그래서 시편 기자들도 살인자, 부정한 자, 고리대금업자, 이방인보다 거짓된 입술과 아첨하는 혀를 더 호되게 비판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를 향한 가장 무서운 공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의심하게 하거나 부인하게 하는 것인 이유다.
동시에 성경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굴복하고 그것으로 기도하는 대신에, 소유하고 옹호하고 기리는 것 역시 말씀의 생명력과 창조력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고전적인, 그러나 늘 성공적인 하나님 나라 파괴 전략이다. 성경에 대한 찬양은 있고 성경의 권위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변증은 있지만, 그것이 나와 내 삶을 창조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사유화하고, 하나님을 사유화하는 우상숭배고 기만이다.
성경묵상의 목적은 우리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며,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 작동하게 하는 데 있다. 우리가 성경을 사용하여 우리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사용하여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이끄시는 것이다. 우리를 성경에 정통한 학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진정한 그리스도인-경외심을 품은 예배자, 자기 희생의 고난을 감수하는 자, 일편 단심의 추종자-이 되게 하는 것이다.
4.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창조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언어를 얻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게 된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하게 된다. 작곡가는 연주자가 자기 악보를 무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연주자의 연주가 다 똑같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아무도 연주가 악보에 나오는 음을 정확하게 재생산하는 행위라고 보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한다. 우리를 조작하지도 않고 강제하지도 않고 인생에 대한 주의력을 흩트리지도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는 넓은 세상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욕망과 탐욕으로 버무려진 무의미한 즉흥 연주에 취해 있는 세상을 향해 성경은 존 케이지의 “4분 33초” 같은지도 모른다. 그 악보에는 TACET, 즉 ‘침묵’이라는 음악용어만 기록되어 있다.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공연장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들이 각자에게 어떤 음악으로 다가오는지 느끼게 하려는 시도란다. 자기 내면의 소리와 대면하게 하는 ‘침묵’이야말로 소음을 존재 이유로 삼는 세상이 가장 참을 수 없어하는 소리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이 주는 그 침묵은 약속 준수와 자유의 포기 속에서 1시간 동안 악보도 없이 즉흥 연주를 하였던 나의 친구들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리듬과 박자에 맞춰 창의적인 개성을 발휘하고 만끽할 무대가 될 것이다. 그 침묵은 길을 잘 아는 가이드를 따라 처녀림을 여행하는 이들이 느끼는 신기와 신비의 감동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경’ 묵상은 내 삶의 저자이신 창조주와의 만남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창조되어 가고, 내 인생이 하나님 나라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 가는 것을 발견하는 희열을 경험하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