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5. 묵상 여정의 동반자 (1) : 공동체 (말씀과 사역 연구소) |작성자 숨
http://cafe.naver.com/verbumetvita/485
1. 나와 너의 모호한 경계
1.1. 나와 너의 경계
내 기도 속에서 타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던가? 내가 존경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때로는 나를 불편하게 했고 낯뜨겁게 했지만 맞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사람의 언어를 어느새 내가 사용하고 있지는 않던가? 너무나 낯설고 기이하여 내 것을 다 버리지 않으면 수용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내 속에 들어와 보지도 못하고 문전박대 당한 줄 알았던 생각이, 장마철 지하 자취방 벽을 타고 피어 오르던 곰팡이처럼 서서히 엄습하여,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점령군 행세를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나는 별로 비굴하다가 생각하지 않으면서 인용 부호를 넣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도리어 그것이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사자후(獅子吼)를 토하고 있지 않던가? 이렇듯 어디까지가 내 생각이고 어디서부터가 남의 생각인지 알 수 없고, 인용과 표절, 순종과 굴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1.2. 나를 정의하는 너
“나는 나다(I am who I am)”(출 3:14)라고 하셨던 하나님 말고는 우리는 아무도 자기 자신만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나라는 존재는 오로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삶의 조건이나 관계를 통해서만 규명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나고 자란 곳과 나의 가족과 친구들, 내가 다닌 학교와 내가 읽은 책, 나의 직업, 내가 만난 사람과 내가 겪은 일들이 오늘의 나를 형성했다. 아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없다. 누구나 오늘 내가 마련한 삶의 조건으로 내가 기대한 내일을 맞이하여 살고 더 많은 소유와 권력이 더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내일을 우리에게 안겨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우리가 가장 많이 속는 인생 최대의 기만적인 진실이다. 그처럼 확실한 불안보다는 불확실한 안정을 택하는 것이 인간이다. 유익하더라도 불확실한 것보다는 무익하더라도 확실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지(to live) 않고 살아지는(to be lived)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능동적인 존재인 만큼 수동적인 존재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이웃이, 나의 공동체가, 내가 맺고 있는 무수한 관계가 나를 정의한다. 무엇보다도 내 존재의 근거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를 정의한다.
1.3. 나를 발견하게 하는 너
성경 묵상의 여정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그것은 ‘되고 싶은’ 내가 ‘이미 된’ 나의 모습을 감추려고 바른 짙은 분장을 지우고 속살을 감춘 껍데기를 벗기고 나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이다. 그런 내가 적나라한 날 것으로 하나님을 뵈옵는 통쾌한 고통이요 끔찍할 만큼 행복한(terribly happy) 작업이 묵상의 여정이다. 나를 만날 용기가 없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대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경과 성령과 공동체다. 에드워드 패럴이 그것을 잘 지적하고 있다.
“경청하는 이는 드물다. 살다 보면 편하게 이야기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는 때가 있다. 그들에게는 들을 수 있는 대단한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를 듣는다. 이전보다 높은 수준의 말하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 우리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을 찾기 전에는 우리 자신을 참되게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혼자 힘으로는 어렵기 그지 없다.”
히말라야를 오르는 이들에게 셰르파는 지도 자체일 뿐 아니라 짐꾼이고 길동무이고 내 목숨을 지켜주는 자일이다. 성경이 묵상 여정의 지도이고 나침반이라면, 성령과 성도 혹은 거룩한 공회인 교회는 그 여정의 동반자, 즉 셰르파 같은 존재들이다. 지도를 읽을 수 있는 독법을 제시해 주는 선생이요, 사실상 운명 공동체다. 그들은 나를 형성하고, 나를 지도하고, 나를 발견하여 하여, 함께 하나님을 알현하는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한 몸이다.
2. 공동체를 수용하기
2.1. 소극적인 수용: 공동체에게 나를 허용하라
헤셸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교과서(敎科書)가 아니라 교과인(敎科人)이다. 교사의 인품은 학생들이 읽는 본문이다. 그들은 절대 까먹지 않을 본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읽기 전에 우리는 공동체에 의해 읽혀야(to be read) 한다. 그들이 우리 자신을 읽고 영향을 미치도록 공동체를 위한 공간(空間)을 우리 안에 마련해야 한다. 세상은 누군가의 생각을 수용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자기 생각과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을 긍지로 여긴다. 내가 생각하는 듯이 믿고 생각하고 내가 행동하듯이 행동하면 나와 상관 있는 사람으로 받아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공동체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조건을 둔 사랑이며 대가를 바라는 사랑이고 따라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건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건이 우리 세계로 들어오도록 허용해야 한다. 자기 부인의 사랑이 아니고는 결코 공동체를 얻을 수 없다.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신 또 다른 책이다. 성경은 이미 성경 저자들과 그가 속한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을 통과한 그들의 간증이고 고백이다. 그 시대의 도전을 향한 저자 공동체의 신학적인 응전(應戰)이다. 그 성경이 나 자신을 읽게 하는 것이 성경묵상이라면, 그 성경을 읽은 공동체가 나를 읽고 나를 질책하고 나를 일깨우고 나를 격려하도록 맡기는 것 역시 성경묵상이다. 성경 묵상을 하는 나는 이미 단독자로서의 ‘나’가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과 함께 하는 ‘나’이기 때문에, 나를 향한 관심사와 공동체의 관심사는 별개가 아니다.
2.2. 적극적인 수용: 나에게 공동체를 허용하라
1) 환대
공동체와 내가 하나라는 점에서 나는 끊임없이 영향을 받을 준비를 하는 동시에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존재다. 따라서 이기적인 오만함은 공동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파괴하는 무서운 질병이다. 공동체에게 내 사랑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고, 나를 긍정해야 하는 동시에 공동체를 위해 나를 부정해야 하는 둘 사이에 우리는 끼어 있다.
소로우(Thoreau)는 말한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삶의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련다. 그 사람이 내 삶의 방식을 충분히 익히기 전에 내가 다른 생활 방식을 발견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나는 이 세상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각 사람이 매우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자기 아버지의 생활방식이나 어머니의 생활 방식, 이웃의 생활 방식이 아닌 자기만의 방식을 찾고 추구하게 하련다.”
소로우의 생각이 바로 환대(hospitality)의 네덜란드어 ‘하스토레이하이트’가 뜻하는 바다. 이 단어는 ‘손님의 자유’라는 뜻이란다. 손님에게 큰 사랑을 느끼게 하면서도 동시에 구속이나 부담을 주지 않고 자유를 주는 것이 환대라는 뜻일 것이다. 주인에게 가장 좋은 것이 늘 손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공동체에 기여하고 변화시키고 영향을 미치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 참된 섬김이다. 선택할 다른 대안이 없는 구석으로 이웃을 몰아 가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선택과 위탁을 할 수 있도록 장(場)을 열어주는 것이다.
2) 가난한 마음과 가난한 생각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가난한 생각’과 ‘가난한 마음’이다. 즉 ‘겸손’(humbleness)이다. 겸손을 통해서 우리는 ‘공동체라는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공동체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된다. 헨리 나우엔은 “세상은 이러저러하다고 우리 얘기하는 것을 그친다면 세상은 더 이상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무슨 운동을 배울 때든지 우리는 우리를 잘 아는 코치에게서 똑 같은 요구를 받는다: “힘 빼십시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요구다. 힘이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자신의 습관을 고집하겠다는 뜻이 된다. 코치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으면 코치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내 스타일, 내 취향, 내 목표를 고집하면 공동체는 없다. 그것은 스스로도 모르는 자신을 고집하겠다는 것밖에는 다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난이 훌륭한 주인을 만든다. 아무도 가난한 사람에게는 자기를 방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를 지킬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어느 정도는 방문객을 적대자로 여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난한 주인은 우리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고 단지 주어야 할 것만 있는 존재다. 인생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생각의 가난과 나는 쉽게 선입견과 걱정과 시기에 가득 찬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마음의 가난이 나에게 공동체를 가져다 준다.
그것은 나의 지식과 경험과 감정으로 남을 대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럴 때 나의 삶보다 더 위대한 삶이 있고, 나의 역사보다 더 뛰어난 역사가 있고, 나의 경험보다 더 큰 경험이 있고, 내가 아는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공동체를 통해서 볼 수 있게 된다. 그 때 비로소 성경 속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권면(베드로전후서)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순종하려고 하고 그것에 의해 내가 영향을 받는 것을 굴종으로 여기지 않고, 그 말씀이 나의 기도가 되고 고백이 되고도 표절이라고 말하지 않듯이, 공동체의 체험과 고백과 권면과 꾸짖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 때 그들의 살아온 역사가 나의 역사와 창조적으로 연결되며, 그들의 삶은 나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고 그들이 느끼는 하나님이 내가 느끼는 하나님에게 서로를 드러내며 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과거 성직자의 훈련 단계 중에서 배움을 통해 터득한 확실한 무지인 독타 이그노란티아(docta ignorantia)를 익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교육을 받아서 자기 마음대로 상황을 통제하고 사물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은 하나님을 부리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림을 받기 위한 교육이다. 수련의 기간은 지식을 익히는 기간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을 버리는 기간이고, 공동체를 섬길 때는 많은 말로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많은 것을 듣는 사람이 되게 하는 훈련이다. 빈틈없이 교육을 잘 받은 성직자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선과 악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어떻게 가는가를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명한 무지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 속에서, 그 날의 여러 가지 사건 속에서, 또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이 겪은 삶의 경험을 담고 있는 여러 책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껏 듣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요하네스 메츠(Johannes Metz)는 이 가난한 마음과 생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상대방을 내리누르며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그럼 우리는 상대방의 존재에 감춰져 있는 신비한 비밀과 진정으로 만날 수 없으며, 오로지 우리 자신만을 만날 뿐이다. 만남으로 인한 가난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기에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자기 주장에 빠져버리며, 거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그 대가란 외로움이다. 자기를 열어 놓음으로 인한 가난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기에 우리의 삶은 인간 존재의 포근한 충만함으로 빛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진짜 자신의 그림자만 안고 사는 것이다.”
생각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만족을 추구하지 않고, 삶의 신비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창조적인 상호 의존감을 추구하기에, 그런 자들만이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3. 대립을 통한 하나됨
손님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이 손님에게 빈 집을 내준다는 뜻은 아니다. 버나드는 사랑의 4단계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를 놀랍게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동체를 진정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위치를 정하는 한계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겸손한 선이고 융통성 있는 선이어야 하지만, 모호한 중립성 뒤로 숨어서는 안 된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의견과 생활방식을 분명하고도 명료하게 드러냄으로써 공동체와 맞서기도 해야 한다. 그것이 살아있는 관계다. 자기 주관이 있는 사람과 자기 신념이 없는 사람 사이에 진정한 대화란 있을 수 없다. 헨리 나우엔은 말한다: “우리 나름의 삶의 선택과 태도와 관점이 경계선이 되어서 그 경계선에 자극을 받아 방문객이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의식하게 되고 그 입장을 비판적으로 탐구할 때, 우리는 대화할 수 있다.” 대립이 없는 수용은 어느 누구도 섬기지 못하는 상냥한 중립성이 되고, 수용이 없는 대립은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무서운 공격성이 된다. 나를 향한 긍정과 부정, 자기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기를 사랑해야 하는 두 긴장 속에서만 우리는 공동체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4. 나가는 말
넬슨 만델라는 자서전 ‘멀고 먼 자유의 길’에서, 다른 정치범들과 거의 30년을 보낸 로빈섬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당국이 저지른 최대 실수는 우리를 함께 수용한 것이었다. 함께 있으면서 우리의 결의는 더욱 굳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붙들어 주었고, 서로에게서 힘을 얻었다. 알고 있던 바와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나누었고, 그러는 동안 각자의 용기는 몇 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우리 모두 눈앞에 닥친 어려움에 똑같이 반응하지는 못했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고, 스트레스 반응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래서 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일으켜 주었고, 그 과정에서 둘 다 강해질 수 있었다.”
자신을 찾아가고 함께 믿음의 순례의 길을 걸어가도록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지혜가 ‘교회’(공동체)이고, 사탄에게는 가장 절망적인 무기가 ‘교회’(공동체)일 것이다.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는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고, 또 끝까지 순례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달려갈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 아프리카의 속담에 “혼자서 많은 멋진 것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는 말이 있다. 내가 읽고 보고 느끼고 경험한 하나님은 하늘의 무수한 별 중 하나일 뿐이고, 수많은 직소퍼즐 중 한 조각일 뿐이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은하수를 만나고 온전한 메시지를 듣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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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와 너의 모호한 경계
1.1. 나와 너의 경계
내 기도 속에서 타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던가? 내가 존경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때로는 나를 불편하게 했고 낯뜨겁게 했지만 맞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사람의 언어를 어느새 내가 사용하고 있지는 않던가? 너무나 낯설고 기이하여 내 것을 다 버리지 않으면 수용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내 속에 들어와 보지도 못하고 문전박대 당한 줄 알았던 생각이, 장마철 지하 자취방 벽을 타고 피어 오르던 곰팡이처럼 서서히 엄습하여,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점령군 행세를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나는 별로 비굴하다가 생각하지 않으면서 인용 부호를 넣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도리어 그것이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사자후(獅子吼)를 토하고 있지 않던가? 이렇듯 어디까지가 내 생각이고 어디서부터가 남의 생각인지 알 수 없고, 인용과 표절, 순종과 굴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1.2. 나를 정의하는 너
“나는 나다(I am who I am)”(출 3:14)라고 하셨던 하나님 말고는 우리는 아무도 자기 자신만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나라는 존재는 오로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삶의 조건이나 관계를 통해서만 규명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나고 자란 곳과 나의 가족과 친구들, 내가 다닌 학교와 내가 읽은 책, 나의 직업, 내가 만난 사람과 내가 겪은 일들이 오늘의 나를 형성했다. 아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없다. 누구나 오늘 내가 마련한 삶의 조건으로 내가 기대한 내일을 맞이하여 살고 더 많은 소유와 권력이 더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내일을 우리에게 안겨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우리가 가장 많이 속는 인생 최대의 기만적인 진실이다. 그처럼 확실한 불안보다는 불확실한 안정을 택하는 것이 인간이다. 유익하더라도 불확실한 것보다는 무익하더라도 확실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지(to live) 않고 살아지는(to be lived)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능동적인 존재인 만큼 수동적인 존재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이웃이, 나의 공동체가, 내가 맺고 있는 무수한 관계가 나를 정의한다. 무엇보다도 내 존재의 근거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를 정의한다.
1.3. 나를 발견하게 하는 너
성경 묵상의 여정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그것은 ‘되고 싶은’ 내가 ‘이미 된’ 나의 모습을 감추려고 바른 짙은 분장을 지우고 속살을 감춘 껍데기를 벗기고 나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이다. 그런 내가 적나라한 날 것으로 하나님을 뵈옵는 통쾌한 고통이요 끔찍할 만큼 행복한(terribly happy) 작업이 묵상의 여정이다. 나를 만날 용기가 없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대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경과 성령과 공동체다. 에드워드 패럴이 그것을 잘 지적하고 있다.
“경청하는 이는 드물다. 살다 보면 편하게 이야기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는 때가 있다. 그들에게는 들을 수 있는 대단한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를 듣는다. 이전보다 높은 수준의 말하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 우리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을 찾기 전에는 우리 자신을 참되게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혼자 힘으로는 어렵기 그지 없다.”
히말라야를 오르는 이들에게 셰르파는 지도 자체일 뿐 아니라 짐꾼이고 길동무이고 내 목숨을 지켜주는 자일이다. 성경이 묵상 여정의 지도이고 나침반이라면, 성령과 성도 혹은 거룩한 공회인 교회는 그 여정의 동반자, 즉 셰르파 같은 존재들이다. 지도를 읽을 수 있는 독법을 제시해 주는 선생이요, 사실상 운명 공동체다. 그들은 나를 형성하고, 나를 지도하고, 나를 발견하여 하여, 함께 하나님을 알현하는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한 몸이다.
2. 공동체를 수용하기
2.1. 소극적인 수용: 공동체에게 나를 허용하라
헤셸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교과서(敎科書)가 아니라 교과인(敎科人)이다. 교사의 인품은 학생들이 읽는 본문이다. 그들은 절대 까먹지 않을 본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읽기 전에 우리는 공동체에 의해 읽혀야(to be read) 한다. 그들이 우리 자신을 읽고 영향을 미치도록 공동체를 위한 공간(空間)을 우리 안에 마련해야 한다. 세상은 누군가의 생각을 수용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자기 생각과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을 긍지로 여긴다. 내가 생각하는 듯이 믿고 생각하고 내가 행동하듯이 행동하면 나와 상관 있는 사람으로 받아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공동체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조건을 둔 사랑이며 대가를 바라는 사랑이고 따라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건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건이 우리 세계로 들어오도록 허용해야 한다. 자기 부인의 사랑이 아니고는 결코 공동체를 얻을 수 없다.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신 또 다른 책이다. 성경은 이미 성경 저자들과 그가 속한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을 통과한 그들의 간증이고 고백이다. 그 시대의 도전을 향한 저자 공동체의 신학적인 응전(應戰)이다. 그 성경이 나 자신을 읽게 하는 것이 성경묵상이라면, 그 성경을 읽은 공동체가 나를 읽고 나를 질책하고 나를 일깨우고 나를 격려하도록 맡기는 것 역시 성경묵상이다. 성경 묵상을 하는 나는 이미 단독자로서의 ‘나’가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과 함께 하는 ‘나’이기 때문에, 나를 향한 관심사와 공동체의 관심사는 별개가 아니다.
2.2. 적극적인 수용: 나에게 공동체를 허용하라
1) 환대
공동체와 내가 하나라는 점에서 나는 끊임없이 영향을 받을 준비를 하는 동시에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존재다. 따라서 이기적인 오만함은 공동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파괴하는 무서운 질병이다. 공동체에게 내 사랑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고, 나를 긍정해야 하는 동시에 공동체를 위해 나를 부정해야 하는 둘 사이에 우리는 끼어 있다.
소로우(Thoreau)는 말한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삶의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련다. 그 사람이 내 삶의 방식을 충분히 익히기 전에 내가 다른 생활 방식을 발견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나는 이 세상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각 사람이 매우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자기 아버지의 생활방식이나 어머니의 생활 방식, 이웃의 생활 방식이 아닌 자기만의 방식을 찾고 추구하게 하련다.”
소로우의 생각이 바로 환대(hospitality)의 네덜란드어 ‘하스토레이하이트’가 뜻하는 바다. 이 단어는 ‘손님의 자유’라는 뜻이란다. 손님에게 큰 사랑을 느끼게 하면서도 동시에 구속이나 부담을 주지 않고 자유를 주는 것이 환대라는 뜻일 것이다. 주인에게 가장 좋은 것이 늘 손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공동체에 기여하고 변화시키고 영향을 미치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 참된 섬김이다. 선택할 다른 대안이 없는 구석으로 이웃을 몰아 가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선택과 위탁을 할 수 있도록 장(場)을 열어주는 것이다.
2) 가난한 마음과 가난한 생각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가난한 생각’과 ‘가난한 마음’이다. 즉 ‘겸손’(humbleness)이다. 겸손을 통해서 우리는 ‘공동체라는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공동체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된다. 헨리 나우엔은 “세상은 이러저러하다고 우리 얘기하는 것을 그친다면 세상은 더 이상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무슨 운동을 배울 때든지 우리는 우리를 잘 아는 코치에게서 똑 같은 요구를 받는다: “힘 빼십시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요구다. 힘이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자신의 습관을 고집하겠다는 뜻이 된다. 코치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으면 코치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내 스타일, 내 취향, 내 목표를 고집하면 공동체는 없다. 그것은 스스로도 모르는 자신을 고집하겠다는 것밖에는 다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난이 훌륭한 주인을 만든다. 아무도 가난한 사람에게는 자기를 방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를 지킬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어느 정도는 방문객을 적대자로 여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난한 주인은 우리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고 단지 주어야 할 것만 있는 존재다. 인생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생각의 가난과 나는 쉽게 선입견과 걱정과 시기에 가득 찬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마음의 가난이 나에게 공동체를 가져다 준다.
그것은 나의 지식과 경험과 감정으로 남을 대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럴 때 나의 삶보다 더 위대한 삶이 있고, 나의 역사보다 더 뛰어난 역사가 있고, 나의 경험보다 더 큰 경험이 있고, 내가 아는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공동체를 통해서 볼 수 있게 된다. 그 때 비로소 성경 속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권면(베드로전후서)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순종하려고 하고 그것에 의해 내가 영향을 받는 것을 굴종으로 여기지 않고, 그 말씀이 나의 기도가 되고 고백이 되고도 표절이라고 말하지 않듯이, 공동체의 체험과 고백과 권면과 꾸짖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 때 그들의 살아온 역사가 나의 역사와 창조적으로 연결되며, 그들의 삶은 나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고 그들이 느끼는 하나님이 내가 느끼는 하나님에게 서로를 드러내며 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과거 성직자의 훈련 단계 중에서 배움을 통해 터득한 확실한 무지인 독타 이그노란티아(docta ignorantia)를 익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교육을 받아서 자기 마음대로 상황을 통제하고 사물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은 하나님을 부리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림을 받기 위한 교육이다. 수련의 기간은 지식을 익히는 기간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을 버리는 기간이고, 공동체를 섬길 때는 많은 말로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많은 것을 듣는 사람이 되게 하는 훈련이다. 빈틈없이 교육을 잘 받은 성직자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선과 악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어떻게 가는가를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명한 무지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 속에서, 그 날의 여러 가지 사건 속에서, 또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이 겪은 삶의 경험을 담고 있는 여러 책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껏 듣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요하네스 메츠(Johannes Metz)는 이 가난한 마음과 생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상대방을 내리누르며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그럼 우리는 상대방의 존재에 감춰져 있는 신비한 비밀과 진정으로 만날 수 없으며, 오로지 우리 자신만을 만날 뿐이다. 만남으로 인한 가난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기에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자기 주장에 빠져버리며, 거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그 대가란 외로움이다. 자기를 열어 놓음으로 인한 가난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기에 우리의 삶은 인간 존재의 포근한 충만함으로 빛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진짜 자신의 그림자만 안고 사는 것이다.”
생각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만족을 추구하지 않고, 삶의 신비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창조적인 상호 의존감을 추구하기에, 그런 자들만이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3. 대립을 통한 하나됨
손님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이 손님에게 빈 집을 내준다는 뜻은 아니다. 버나드는 사랑의 4단계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를 놀랍게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동체를 진정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위치를 정하는 한계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겸손한 선이고 융통성 있는 선이어야 하지만, 모호한 중립성 뒤로 숨어서는 안 된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의견과 생활방식을 분명하고도 명료하게 드러냄으로써 공동체와 맞서기도 해야 한다. 그것이 살아있는 관계다. 자기 주관이 있는 사람과 자기 신념이 없는 사람 사이에 진정한 대화란 있을 수 없다. 헨리 나우엔은 말한다: “우리 나름의 삶의 선택과 태도와 관점이 경계선이 되어서 그 경계선에 자극을 받아 방문객이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의식하게 되고 그 입장을 비판적으로 탐구할 때, 우리는 대화할 수 있다.” 대립이 없는 수용은 어느 누구도 섬기지 못하는 상냥한 중립성이 되고, 수용이 없는 대립은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무서운 공격성이 된다. 나를 향한 긍정과 부정, 자기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기를 사랑해야 하는 두 긴장 속에서만 우리는 공동체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4. 나가는 말
넬슨 만델라는 자서전 ‘멀고 먼 자유의 길’에서, 다른 정치범들과 거의 30년을 보낸 로빈섬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당국이 저지른 최대 실수는 우리를 함께 수용한 것이었다. 함께 있으면서 우리의 결의는 더욱 굳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붙들어 주었고, 서로에게서 힘을 얻었다. 알고 있던 바와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나누었고, 그러는 동안 각자의 용기는 몇 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우리 모두 눈앞에 닥친 어려움에 똑같이 반응하지는 못했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고, 스트레스 반응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래서 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일으켜 주었고, 그 과정에서 둘 다 강해질 수 있었다.”
자신을 찾아가고 함께 믿음의 순례의 길을 걸어가도록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지혜가 ‘교회’(공동체)이고, 사탄에게는 가장 절망적인 무기가 ‘교회’(공동체)일 것이다.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는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고, 또 끝까지 순례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달려갈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 아프리카의 속담에 “혼자서 많은 멋진 것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는 말이 있다. 내가 읽고 보고 느끼고 경험한 하나님은 하늘의 무수한 별 중 하나일 뿐이고, 수많은 직소퍼즐 중 한 조각일 뿐이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은하수를 만나고 온전한 메시지를 듣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