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글 http://cafe.naver.com/verbumetvita/523

묵상 여정의 동반자(2) : 성령            

1      1. 들어가는 말: 이 소 없으믄 벌써 죽었어!  

어린 시절 소와 함께 자란 내게 올 봄은 영화 ‘워낭소리’와 함께 왔다. “저 놈의 소가 죽어야 끝이 나지, 언제 내 팔자가 피겠노.” 할머니는 자기는 뒷전이고 맨날 소부터 챙기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암)소를 질투하신다. 하지만 “우리 영감은 이 소 없었으믄 벌써 죽었어. 소 덕분에 살았지”라고 말씀하실 때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소의 관계를 온전히 이해하고 긍정하는 유일한 존재로 등장하며, “소하고 내하고는 팔자를 잘못 타고 나서 고생이래”라고 할 때는 소와 연대를 느끼는 동지가 되신다. ‘워낭소리’는 질투와 이해와 연대로 함께 고달픔 시간을 밀어내면서 살아가는 이들을 그린 관계 영화다. 여물 냄새 구수하게 나는 멜로 영화다. 감독의 말처럼 “할아버지 할머니의 하루하루는 반복되는 일상일 뿐이지만, 봄부터 겨울까지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쌓이는 동안 관계 역시 단층처럼 쌓였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운명공동체였던 소가 죽어 사라지는 순간 쌓여온 관계의 한 축이 무너졌고, “이 소하고 내하고 같이 죽을 거래” 하시던 할아버지 말씀처럼 일소가 없고 그래서 더 이상 일다운 일을 할 수 없게 된 할아버지에게 소의 죽음은 ‘정신적 사망 선고’나 다름 없었다. 워낭소리가 끝나면 상여소리가 시작되는 것이다(실제 상여 소리의 반주는 워낭으로 한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Old Partner’(올드 파트너)다. 할아버지 내외와 소 사이에는 30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 얹혀져서 일 것이다. 묵상의 여정에도 파트너가 있다. 우리는 늘 혼자였지만 동시에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 곁에는 운명공동체가 있었다. 그들과 맺어온 관계가 오늘의 나를 형성하였으며, 그들을 바라보고 상대하는 방식이 내 가치관이고, 그들을 향한 목표가 내 삶의 지향점이다. 운명공동체의 한 축이 ‘거룩한 공교회’(Holy Catholic Church)라면, 다른 한 축이 ‘성령’(Holy Spirit)이다. 교회와 성령이라는 동반자가 없는 영적 여정은 있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 그들과 함께 그들의 도움으로 그들을 위해서 서로 너무나 닮은 소와 할아버지의 걸음처럼 둘이 함께 느릿느릿 걷는 것이 영적 여정이고 묵상의 여정이다. 처음에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였지만, 내가 그들에게 맞추었는지 그들이 나에게 맞추었는지는 몰라도 우리의 보폭과 빠르기는 날이 갈수록 비슷해졌다. 신앙의 성숙이란 공동체의 걸음걸이에 내 걸음을 맞추고 결코 성령보다 앞지르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맞이한 순간부터 우리는 말씀(성경)의 지도(地圖)를 따라 동반자인 공동체와 성령과 더불어 살아왔다. 그들은 내게 지도 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갈 길을 보여주었고, 우리 앞에 나타난 숱한 사람과 사건들을 통찰하고 해석할 수 있는 안목을 열어주었다. 그들은 나의 ‘올드 파트너들’이다. “그들이 없었으면 나는 벌써 죽었다.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2     2.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2.1.                 2.1. 예수님의 음성과 성령의 음성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사람이고 책(성경)의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다스리신다. 급기야 아들을 통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직접 말씀하셨고, 승천하신 지금도 아들 예수님은 그 나라의 왕으로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히 <?xml:namespace prefix = st1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smarttags" /><?xml:namespace prefix = st1 />1:1-20). 그런데 이젠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Holy Spirit)을 통해서,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님의 말씀과 역사를 기록한 ‘성경’(Holy Scripture)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그래서 요한은 주(예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하고서는 그 말씀을 이렇게 마무리한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3:22). 말씀은 예수님이 하시는데 기록된 말씀인 성경(요한의 편지인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들어야 할 것은 ‘성령의 음성’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하셨다고 하심으로 자신과 하나님을 분리하지 않으셨는데(요 12:50), 요한도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일과 성령께 귀를 기울이는 일을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이다. 성령은 보혜사 예수를 대신하는 ‘다른’ 보혜사로서 그 예수를 증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요 15:26).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요일 3:24) 이제 교회는 성령께 응답함으로써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그분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고든 스미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진수는 성령의 촉구에 인격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응답하겠다는 결심이자 자발적 마음이요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시키시는 성령 안에서 행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고, 성령께 응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성령의 음성 듣기를 갈망한다. 세상과 교회에서 직면하는 여러 경쟁적인 요구와 기대 앞에서 성령의 음성 듣기를 갈망한다. 즉 우리가 내려야 하는 많은 선택들 속에서, 그리고 무수한 경쟁적인 음성들이 들리는 시끄러운 생의 한 가운데서 무엇이 예수님의 음성이고 성령의 음성인지 분별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2.2.            2.2. 성경 듣기와 성령의 음성 듣기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만 자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어떤 방법이든 결국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나 역사 진행의 목표와 별개일 수는 없다. 성령의 음성 듣기는 곧 성경 듣기인 셈이다. 성령 없는 성경운동은 근본주의(fundamentalism)와 자유주의(liberalism)의 두 극단을 낳는다. 성경 없는 성령운동 역시 은사주의와 이에 반발하는 경직된 구속사운동이라는 두 극단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 그들의 예배는 한쪽은 경박하고 다른 한쪽은 경직되었다. 성경과 성령의 조화로운 강조만이 경건한 예배로 이끈다. 하지만 이런 극단적인 경향들 사이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거기엔 하나님의 신비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다 설명하고 다 조종할 수 있다. 자유주의도 은사주의도 메마른 구속사 운동이나 근본주의 모두 너무 깔끔하게 자기 공식으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그 밖의 주장들엔 사랑 없는 태도로 비난한다. 그런 그들의 태도가 그들에게는 성경도 없고 성령도 없고 ‘사람’만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성경을 의지하여 성령의 음성을 들으려고 한다고 해서 항상 그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통해서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면서도 성경의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을, 성령의 음성이 아니라 내 음성을 듣는 데 그칠 수도 있다. 두 가지 경우가 그렇다. 

첫째, 기술의 문제다. 성경이 1차적으로 21세기를 사는 나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라 나와 전혀 관련이 없는 역사 속의 1차 독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간과한 경우다. 성경은 특정 상황에서 일어난 특정 문제를 향해 던지는 특정 방식의 신학적, 신앙적 응전(應戰)이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들을 때는 성령께서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저자이시기에 오늘 우리에게도 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를 구현하실 수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인간 저자의 작품이라는 점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경을 통해 오늘 나에게 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싶은 생각은 주님과의 교제를 갈망하는 건강한 태도이지만, 성령은 늘 내게 ‘명시적으로’ ‘문자적으로’ ‘의심의 여지 없이’ ‘직접’ ‘내가 듣고 싶을 때’ 말씀하시는 분은 아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분부는 1차적으로 아브라함이 듣고 순종해야 할 명령이지 나에게 분가하라거나 교회를 옮기라고 주신 명령이 아니다. “말씀을 받았다” 혹은 “하나님께서 내게 … 하라고 말씀하셨어요”라는 말은 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정말 내 바람의 투사가 아니라 성령의 음성이 되게 하려면 직관이나 느낌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때 그들에게 주신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할 뿐 아니라 그 의미가 오늘을 사는 내게는 어떻게 다양하게 적용될 수 있고, 그 많은 적용의 가능성들 가운데 바로 내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다시 주의하여 듣는 기술이 필요하고, 우리는 그 과정을 존중해야 한다. 얼른 속 시원하게 성령님의 음성을 듣고 싶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더라도 우리만의 지름길이나 묘수나 비법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성령의 음성 듣는 법에 있어서는 고수를 자처하지 말아야 한다. 성령께서는 우리보다 더 우리가 자신의 음성을 잘 알아듣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원하시면서도 직통 계시를 주시지 않는 성령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둘째, 마음의 문제다. 성경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성경을 앞에 두고도 얼마든지 우리 마음은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을 수 있고, 예수님의 엄청난 사랑도 웃음거리로 만들 수 있고,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도 무시할 수 있다.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한 사탄의 무기 중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었다(마 4:6; 시 9:11,12 인용).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친 예수를 죽이려고 한 유대인들이 내세운 근거도 안식일에 일하면 죽는다는 율법(출 35:2)이었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님을 말씀으로 정죄하였고, 성령이 충만하신 예수님을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지폈다고 하였으며,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나무에 달려 죽은 자마다 저주를 받은 자(신 21:23)라는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보았다. 예수에 대한 그들의 편견과 기득권을 지키려는 그들의 욕망이 성경 바른 해석뿐 아니라 성경의 바른 적용도 막은 것이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에 관한 본문을 묵상하면서 나를 늘 고난 받는 예수님의 처지와만 동일시 하면서 자기 연민에 빠진다면, 내 안의 바리새인을 향해 준엄하게 경고하시는 성령의 음성은 결코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성경의 이름으로, 사랑의 동기로,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주께서 오늘 내게 주신 말씀으로’ 예수님의 몸의 지체를 아프게 하고 공동체를 상하게 할 수 있다. 



이렇듯 예수님과 성령의 음성을 듣는 일, 즉 성령의 내적 증거(inner witness)를 찾고 그것을 확신하는 일은 다름 아닌 ‘분별’(discernment)의 작업이다. 그것은 우선 마음의 문제이고 동기의 문제이며, 더 나아가 그것은 예민한 영적 기술을 요구하는 문제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겸손한 마음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이 들은 모든 음성을 다 성령의 음성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알고 또 그것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기술이나 공동체나 상황을 통해 성령의 음성을 분별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묵상 여정의 동반자인 성령의 음성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우리 내면의 감정적인 소용돌이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기대일 수도 있다. 심지어 신비적인 영적 체험조차도 모두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고 하시지만 동시에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일 4:1)로 말한 것이다. “순수한 마음은 늘 분별하는 정신으로 보완되어야 한다.”



3        3. 들음의 인격성

3.1.               3.1.  성령의 음성과 관계 

성령의 음성을 분별하는, 즉 성령과 소통하는 가장 중요한 기술은 특정한 방법이 아니라 사실상 ‘관계’다. 말하지 않아도 그 속을 알고, 눈빛만 보아도 그 마음을 알고,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 심경을 헤아리는 것은 방법이 아니라 관계다. 말 해야 알고 시켜야 하는 것은 우리의 묵상 여정의 동반자이신 성령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소통 방식은 아니다. 삶은 그렇게 공식으로 설명하고 단답형 답안지로 대답하고 사안마다 결재를 받아야 할 만큼 단순하지 않다. 산다는 것은 곧 결정(決定)하는 일이고 결단(決斷)하는 일이고 결행(決行)하는 일이다. 미처 몰랐지만 알고 보니 그 때를 놓쳤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던 순간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그런데도 직통 계시라는 손쉬운 방법을 쓰지 않으신다. 알아 듣게 말씀하시는 법도 없다. 대개는 말씀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라고 ‘내가’ ‘생각한’ 것들이다. 성령께서는 그동안 자신과 살아오면서 켜켜이 쌓아둔 관계 위에서 창조적으로 판단하고, 관계 속에 녹아든 ‘감’(sense)으로 결정하고, 관계가 열어준 상상력으로 현실을 너머를 보고, 관계가 뒷받침 해준 저력으로 광야의 삶을 감행하길 원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아주 평범하고 새로울 것도 없는 삶 속에서 우리를 만나 주신다. “영적 도취감과 비범한 신비 체험을 통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삶의 현존에서” 우리는 그분을 만나는 것이다.



성령과의 관계가 우리의 눈을 열어준다. 그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안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알고, 그래서 성경 저자의 의도를 찾는 데만 성령의 역할은 제한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대신 성령께서는 성경 속에 살고 있는 하나님과 사람들과 그 사람들의 삶의 조건을 이해하는 안목을 열어주신다. 또 동시에 내가 신문을 읽을 때, TV를 볼 때, 날마다 이런저런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그 성경 속에서 만난 사람들과 하나님을 보던 관점으로 해석하고 통찰하고 선별하고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오늘 내가 묵상한 본문이 당장 내가 궁금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해준다 하더라도 그들의 이야기가 내 인식의 지평을 넓혀서 오늘 나의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하고 “나의 판단을 더 깊게 하고 내 삶을 더 성숙하게 하도록” 성령께서는 역사하시는 것이다. 



3.2.               3.2. 성령의 음성보다 더 크신 성령: 낯설음

하지만 우리는 내가 들은 성령의 음성보다 성령은 항상 더 크신 분임을 인정해야 한다. 기독교 영성은 내가 듣고 내가 이해하고 내가 안 만큼 순종하는 응답의 영성이어야 한다.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의 영성이다.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조아리는 겸손과 마음의 가난이 필요하다. 그래야 내 이해 범위를 넘어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고, 나에게 충격과 불편함을 주는 낯선 음성마저도 수용할 수 있고, 내 욕망의 찌꺼기들을 하나 둘씩 제거해 나갈 수 있게 된다. 내가 다가가기 전에 성령께서 먼저 내게 다가오셔서 일하기 시작하시고 또 내 삶에 주권을 갖고 일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성령의 ‘의외성’을 수용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성경해석의 과정을 건너 뛴 문자적인 계시, 사람이나 우연한 상황, 혹은 신비적인 체험마저도 자유자재로 사용하시는 성령님을 내 신학이나 교리나 경험으로 제한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낯익은 구절들이 한 순간 불현듯 전혀 새로운 문자로 내 정신을 혼미케 하고, 내 가치관을 뒤흔들어놓고, 죽은 문자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게 하는 성령의 역사만이 이 익숙함에서 우리를 구해낸다. ‘탈자동화’ 작업이다. 성령께서 주권적으로 허락하시는 그런 낯설음과 충격과 감동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 세상에 순응하지 않고 과감히 맞서서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현실이고 실상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도저히 우리 인간이 길들일 수 없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 뿐 아니라 지금 내 삶에서도 역사하고 계심을 믿을 수 있게 하신다. 

  

4      4.  나가는 말



다니던 학교에 말을 못하는 부부가 있었다. 학교 서점에서 그 부부가 소리 없이 대화를 나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지만 그들의 얼굴을 보니 말이 잘 통하는 듯이 보인다. 입을 부지런히 여닫지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대신 두 사람의 손이 부지런히 ‘소리 없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말(words)은 있지만 소리(voice)는 없었다. 그들은 소리가 그리운 사람들이다. 소리가 없기에 그들은 손 놀림 만으로도 더 큰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다. 눈으로 말하고 얼굴 표정으로 말하고 온 몸으로 말한다. 소리가 없으니 더 큰 소리로 듣는 사람들이다. 시각 장애인들이 극장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요청한다. 그들에겐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눈이 있다. 그들에게 소리의 의미는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우리에게 다가오는 소리의 의미와 다르다. 그들에게 소리는 ‘영상’이다. 그들에겐 소리에 묻어 있는 온갖 색깔들을 놓치지 않는 예민한 감각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볼 수 있기에 오히려 귀 기울여 듣지 않는다. 볼 수 있기에 보는 것만으로 듣기 전에 소리를 판단하고, 들으면서도 우리의 귀를 의심하고, 들리는 소리를 왜곡하고, 그 소리를 하찮게 취급한다. 소리가 있으나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본다고 하면서부터 보이지 않았고 듣는다고 하면서부터 들리지 않았다. 때로는 내가 본 것이 지금 들리는 소리를 방해하고 내가 들은 것이 지금 들리는 것을 듣지 못하게 할 때가 많았다. 그 어떤 방법보다 나의 생각과 마음을 바꾸는 것이 ‘성령의 음성’을 더 잘 듣는 길이었다. 어떤 위대한 스승과 지도자의 ‘소리’라도 하나님의 소리를 다 담을 수 없다는 것과, 그 누구의 ‘소리’ 속에도 하나님의 ‘소리’가 들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품는 것이 참 중요했다.

묵상은 성령의 소리를 듣는 일이다. 그것은 내 소리를 죽이는 일이 아니라 내 소리를 분별하는 일이다. 더 침묵하고 더 고독해지는 것이고, 더 느리게 더 꾹꾹 눌러서 성령과 함께 걷는 일이요, 성령께서 자기 목소리를 담아 두신 공동체의 소리를 내 소리로 누르지 않고 그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함께 걷는 일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