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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여정의 장(場): 광야(1) 

혼돈과 더불어 사는 삶


I. 들어가는 말: 불가능은 있다!

1. 당황스런 부고

한 선교사님의 부고(訃告)를 문자 메시지로 받았다. 몇 일 전 “이젠 다 된 것 같아요. 정신이 온전할 때 인사하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난 괜찮아요. 고마워요”라고 작별인사 했던 그분이다. 기적은 없었다. 암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암과 함께 사는 것처럼 너무 평안해 보여서 그대로 오래 사실 줄 알았다. 새로운 시술법의 효과가 나타났을 때는 ‘그러면 그렇지’ 하고 환호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대로 죽는 것은 시집도 안 가고 복음을 위해 헌신해온 이 분에게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던가 보다(그럼 더 호강하다 근사하게 죽는 것이 어울린다고 생각한 건가?). 작별인사가 믿기지 않아 금새 찾아가지 않았다. 죽음을 부정한 것은 선교사님이 아니라 나였다. 더 죽어야 할 사람은 선교사님이 아니라 나였다. 더 죽어야 할 것이 남아 있기에 난 살아있는 것이고, 다 죽고 주님 뵈올 만 하니 선교사님은 그만 사시는 것이다. “그래도 난 죽음을 미리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얻어서 참 감사해요.” 당황해하던 첫 모습에서 극도의 평강을 누리던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은 한 순간도 선교사님을 삼키지 못했고, 도리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밀어 올려주었다. 부고는 선교사님이 죽음에 꺾였다는 소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죽음에 넘겨준 선교사님 안에서 죽음이 무너졌다는 소식이었다. 



2. 우리 시대의 신화

하지만 이것은 ‘긍정의 힘’을 믿고 ‘만사형통 복음’을 신봉하고 ‘할 수 있다’ 정신으로 무장된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죽음이다. 그것은 기도가 무용지물이 되고,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하신 듯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의 자녀인 우리가 왕자와 공주같이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게 풍족한 창고가 있어서 우리가 달라고 하면 주신다고 믿는다. 게다가 좋으신 하나님이시지 않는가? 그러니 어찌 자식들이 고난당하기를 바라시겠는가? 그저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확실히 믿기만 하면 된다. 된다고 믿으면 된다. 선물 배달이 늦어진 건 내게 잘못이 있다는 뜻이다. 숨겨진 죄 때문일 수도 있고 기도가 충분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성공의 열쇠는 간단하다. “좀더 열심을 내라!”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고 가르치고, 세미나를 열고, 책을 쓰는 이런 사이비 ‘신앙전문가들’이 환호를 받으며 활동하고 있다. 그들에게 선교사님의 죽음은 기도가 부족했거나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키기에는 충분하지 못했기에 찾아온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필요할 때마다 달려가서 도와주는 도우미로 전락한다. 



하지만 이런 태도가 사실 우리를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하고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가로막은 죄의 본질이다. 우주를 지배하고 나라를 통치해야만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내 세계에서 내가 중심이 되면 그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자기 마음대로 세상 일이 돌아가기를 바라고 자기 마음대로 되도록 조종하고 마음대로 안 되면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이미 자기 나라의 왕, 즉 하나님이 된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신앙 역시 자기 만족의 수단일 뿐이다. 제임스 구스타프슨은 말한다.



“종교적 믿음과 의식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되어 준다. 개인과 사회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해결하고, 나름대로의 윤리적 근거를 제시한다. 개인의 신앙과 사회 전체의 신앙은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리거나 하나님을 높이거나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오직 그들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부차적인, 아니 때로는 목적 달성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존재일 뿐이다.”



II. 광야의 영성



1. 창조의 원자재로서의 혼돈

묵상은 하나님은 하나님 노릇하고 사람은 인간의 자리를 잘 지키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만나고 배우고 경험할수록 하나님을 좀더 알아가고 나를 더 잘 알아갈 것이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과 삶의 조건을 향한 내 태도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인간을 정의한 최초의 방식이 ‘말씀’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말씀을 듣는 인간, 말씀대로 창조하는 인간과 말씀대로 지음 받는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과 인간이 누구인지를 각각 드러내 보였다. 인간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말씀 사건을 통해서이고, 인간이 존재 의미를 회복하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한 반응을 통해서다. 즉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다른 인간과 피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만 진정으로 존재를 누릴 수 있는 의존적인 관계적 인간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 안에는 스스로는 극복하여 생존할 수 없는 커다란 ‘혼돈’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완벽하고 완성된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존재로서 완성을 향한 목표를 품고 있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다. 그 혼돈이 인간을 인간 되게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차별되게 한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그 혼돈 자체가 한 사람을 진정한 인간으로 새 창조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원자재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에덴동산 이후에 척박해진 삶의 조건이나 인간적인 한계, 율법이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등에 의한 하나님의 통치와 통제는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을 진정한 자유인이 되게 만드는 길이며 하나님의 진정한 교제의 파트너가 되게 하는 길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한 새창조 핵심은 삶의 조건의 창조가 아니라 인간 창조이기 때문이다. 즉, 아무 걱정 없이 고난 없이 슬픔도 없고 죽음도 없이 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 창조의 목표가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으로 만족할 수 있는 참 하나님의 형상(대표)을 창조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2. 묵상: 혼돈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는 일

2.1. 묵상의 장: 광야

따라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곧 고난 받는다는 뜻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에서 살면서 고난을 받지 않겠다는 것은 스스로 인간임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고,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첫 인간의 죄를 되풀이 하겠다는 뜻이다. 그 고난이 하나님을 생명과 생존의 원천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의 죄 때문에게 확대 재생산되어 아무도 스스로 그 죄가 만든 체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만큼 되었다. 이곳이 바로 우리가 날마다 묵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소다. 모든 일이 우리 맘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 가는 듯 보인다면 신기루거나 환각일 뿐이다. 사탄이 늘 하는 일이 바로 많은 돈과 출세와 명예를 통해 진정한 현실을 부정하게 하고 자기도취나 자기기만을 현실로 착각하게 하는 일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이런 조건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산으로 사든, 사막으로 사든, 무인도로 가든, 도시에 살든 그곳은 광야다. 직업이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돈이 많든 적든, 건강하든 병이 있든, 내 몸은 광야다. 우리는 스스로는 씨를 맺을 수도 있고 씨를 낼 수도 없고 씨가 살아남을 수도 없는 공간과 시간을 안고 사는 존재다. 우리는 창조주도 아니고 창조를 견인해갈 능력도 없는 존재다. 우리는 바로 ‘거기서’ 묵상한다. 그 조건은 제거나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의 대상이며, 인간 새창조의 수단이기에 더불어 함께 살아야 할 대상이다. 



2.2. 묵상: 혼돈과 더불어 사는 것

묵상은 바로 이 혼돈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마치 지뢰 밭을 피해가기 원하는 군인처럼, 말씀 묵상을 통해 인생 곳곳에 묻혀 있는 함정이나 시련의 골짜기를 피해갈 수 있는 법을 배우거나, 그 어려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법을 배우는 수단으로 사용하려 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광야에서 만든 황금 송아지 하나님을 만든 사람들이나 혹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법궤를 이용하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어진다. 마치 구원은 고생 많은 이 땅에서 고생 없는 천국으로 장소 이동하는 것으로 이해하거나 출애굽의 목표가 고센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공간 이동 시키는 행위로 오해하는 것과 같다. 자기 백성이 정말 쾌적한 환경에서 고생 없이 살게 하는 것이 창조와 구원의 목표라면, 에덴동산이 가장 좋았고, 바로를 제거한 후 애굽의 고센이 가나안보다 더 살기 좋았다. 천국이 천국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 묵상을 통해 우리 앞에 시시각각 갖가지 형태로 찾아오는 혼돈의 실체를 파악하고 인정하고 직면하면서, 어둠 속에 질서를, 물 위에 궁창을, 바다 가운데 마른 땅을 내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 혼돈 속에 질서를 내시는 하나님 나라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혼돈이 하나 둘씩 물러가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온전히 왕 노릇 하실 수 있는 그릇이 되어 가는 것이다. 묵상이 없는 삶,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하나님과 소통하지 않는 삶은 그 혼돈에 삼켜져서 산다는 뜻이다. 



III. 나가는 말: 묵상-온 몸으로 써내려 가는 일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혼돈인 ‘성육신’과 ‘십자가’(사망)의 요구에 순종하셨다. 혼돈을 수용하는 일은 한 번도 쉽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피할 때는 내가 더 큰 혼돈의 일부가 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여 그것을 수용하고 직면할 때 사랑이 잉태되고 생명이 살아난다. 바울도 이렇게 고백한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4,17). 그 결과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고 말할 수 있었다. 



묵상은 노트 위에 펜으로 써내려 갈 뿐 아니라 광야 인생 길에서 온 몸으로 써내려 가야 한다. 그것은 내 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남기는 일이다. 시인 <?xml:namespace prefix = st1 />송수권은 평생 자신을 위해 헌신한 아내를 수술실에 보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내의 맨발

- 갑골문 甲骨文



뜨거운 모래밭 구멍을 뒷발로 파며 
몇 개의 알을 낳아 다시 모래로 덮은 후 
바다로 내려가다 죽은 거북을 본 일이 있다 
몸체는 뒤집히고 짧은 앞 발바닥은 꺾여 
뒷다리의 두 발바닥이 하늘을 향해 누워있었다 



유난히 긴 두 발바닥이 슬퍼 보였다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마취실을 향해 
한밤중 병실마다 불꺼진 사막을 지나 
침대차는 굴러간다
얼굴엔 하얀 마스크를 쓰고 두 눈은 감긴 채 
시트 밖으로 흘러나온 맨발 



아내의 발바닥에도 그때 본 갑골문자들이 
수두룩하였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거북이 발바닥 같은 아내의 발에서 그는 갑골문자를 보고 있다. 단 한 푼도 거저 주는 법이 없는 이 팍팍한 세상에서, 시류에 영합하지 않으면서 시를 쓰려는 남편을 대신하여 헌신적으로 살아온 삶이 빚은 문자다. 남편의 시를 지키고, 남편의 존경스런 생각과 삶을 드러내려는 사랑의 흔적이다. 묵상은 내 심령에 딱딱한 갑골문자를 새기는 일이다. 십자가의 흔적을 만드는 일이다. 어려움과 시련을 피해가는 법을 알아내는 묘책을 손에 쥐는 일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신비를 경험하는 일이다. 묵상은 광야를 지나면서 신기루에 속지 않고 우상을 만들지 않고, 오직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광야처럼 다 죽은 내 심령을 말씀의 능력이 풍성하게 역사하는 가나안 같은 심령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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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