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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요한일서 3:10-16 20040711 조동천(현대교회 목사)

니키 검블의 저서, 「인생의 의문점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젊은 경찰이 런던 북부에 있는 헨든 경찰 대학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당신이 런던 외곽을 순찰하고 있는데 근처에 있는 주유소가 폭발했다. 조사를 해보니 인도에는 구멍이 생겼고 옆에는 차가 뒤집힌 채로 널부러져 있다. 차안에서는 강한 알코올 냄새가 나고 있다. 차안의 두 사람 모두 - 남자와 여자 - 는 부상을 입었다. 그 여자는 지금 멀리 미국에 나가 있는 당신 구역의 경위의 아내이며, 당신은 그녀를 알고 있다. 오토바이를 몰고 지나가던 사람이 멈추어 서서 당신을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당신은 그가 무장 강도 용의자로 수배중인 사람임을 알아본다. 갑자기 근처 집에서 한 남자가 뛰어나오며 자기 아내가 임신 중인데 폭발의 충격으로 곧 출산하려 한다고 외친다. 또 다른 사람이 도움을 청하고 있는데, 그는 폭발로 인해 가까이 있는 수로 속에 빠졌으며 수영을 할 줄 모른다. 정신 보건법 조항들을 염두에 두고,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간략하게 써라.”
그 경찰은 잠시 생각한 후, 펜을 들어 이렇게 썼다. “제복을 벗고 군중 속에 섞이겠다.” 그의 대답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크리스천으로서 크리스천 제복을 벗고 ‘군중 속에 섞이는’것이 더 쉬울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에 있든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구별되어야 하며,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빛이 빛날 때, 사람들은 그 빛에 끌리기 마련이다. 

이 세상은 너무나 잔혹한 일도 가슴아픈 일도 많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망막할 때가 많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복이 있다면 벗어던지고 군종 속에 섞여 살고 싶은 순간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무력하게만 느껴집니다. 

세상에는 신의 이름으로 너무나 많은 잔악한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종교의 사람들은 자기 신을 부르짖으며 민간인을 참수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애국이든 신에 대한 충성이건 잔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 다른 종교의 한 지도자는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위한답시고, 비참하게 죽은 이를 비하하기까지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잔인하게 복수를 감행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기도 합니다. 이런 세태를 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실제적인 힘은 왠지 증오나 미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시대를 향해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외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히 오늘 본문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을 겁니다(11절).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악을 이기는 힘으로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세상을 구원할 이 사랑을 우리 모두 소유하길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1. 정체성 규정: 사랑은 정체를 드러냅니다. 
첫째,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밝히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10-12절).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나됨을 여러분은 어디서 찾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증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특징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면 대강 ‘동남아시아 사람이겠다’ 또는 ‘아랍인이겠다’ 또는 ‘미국인이겠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외형적인 특징이 있어서 구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들의 특징은 무엇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의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10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표지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의를 행하지 않거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사랑! 하나님의 자녀들은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놀랍게도 믿음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도 믿고 떨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강조하면서 사랑과 동떨어지게 정죄하기에 바쁘고, 심지어 상대편을 매장하고 죽일 만큼 악을 자행하기도 합니다. 그러게 증오심이 가득하면서도 믿음의 순수성, 진리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탄생하지만, 사랑으로 입증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나는 것은 결코 믿음을 강조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 자녀로 드러나는 것은 사랑입니다. 조용히 사랑을 실천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에 인정받게 됩니다. 믿음의 있는 사람임을 사랑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을 외침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언으로 봉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히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단체에서 사랑을 실천할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말로 떠드는 것으로 세상이 결코 감동하지 않습니다. 높은 권력을 휘두르고 강한 이미지를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한 답시고 자기의 욕망을 은밀히 채우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나님께 우리가 속한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요 13:35) 또는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것에 두고 있지도 않습니다. 형식상의 교인인 가라지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축복을 얼마나 받고 부자로 또는 학자로 명성을 얻은 것에 두고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두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인간됨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넌 내 자녀구나! 나를 빼 닮았구나!” 할 때 그 기준이 외형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체가 없으십니다. 다만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우리의 인격과 삶의 태도와 방식에 하나님을 닮은 면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사랑이 없으면 마귀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 기독교가 지탄을 받고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존재가 아니라 세속적인 욕망이 가득한 천박한 자들로 욕을 먹는 이유가 무능해서가 아님을 잘 알 것입니다. 사랑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격이나 체질과 상관없이 사랑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표지가 사랑이길 바랍니다. 그 사람의 특징이 바로 사랑이 많다는 거야! 이런 소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듣고 살아가시길 축원드립니다. 


2. 구원의 증거(14-15절): 사랑은 구원을 보장합니다.
둘째, 사랑은 구원받은 것을 확실히 알게 합니다. 사랑은 구원의 시금석이기 때문입니다(14-15절).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형제를 사랑하면 구원받은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가 구원 받은 것인지 아니면 혼자 착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놀랍게도 자기도 알고 남도 알게 됩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번역가인 위클리프 도우그 멜란드 부부가 브랄질의 풀니오 인디언들의 마을로 이주했을 때 원주민들은 순순히 그를 “백인”으로 불러 주었으나 그들의 말투에서는 인디언들의 백인에 대해 가져야할 경의를 느낄 수 가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백인들이 그들을 착취했고 집을 불태웠고 그들의 땅에서 약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멜란드 부부가 풀니오 말을 익힌 이후부터 그들은 의술과 다른 여러 수단으로 원주민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러자 원주민들은 그러한 도우그를 “가장 존경하는 백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들 부부가 그 종족의 풍습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을 무렵에 부족은 이젠 도우그를 “인디언 백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도우그가 상처로 인해 피가 엉겨붙어 있는 원주민 소년의 발을 씻어 주고 있을 때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한 원주민이 다른 원주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무심코 들었다. “지금까지 인디언의 발을 씻어준 백인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분명히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그 날로부터 도우그가 인디언 가정에 갈 때마다 그것은 이러한 도착을 알리는 것이 되었다. “여기에 우리에게 보내어진 하나님의 사람이 오신다.”-제임67 스 C. 헤플리

여기서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사랑이 영적인 상태, 즉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구원의 상태에 대한 인식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사실에 대한 정보는 사랑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결코 자기의 정의감이나 능력으로 영적인 상태가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컨디션은 반드시 사랑의 정도 즉 그 수준으로 드러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영적인 컨디션이 아주 안좋은 상태임을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는 “...사랑하지 않은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14절)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4살 먹은 마사는 그녀의 짧은 팔에 인형을 안고서 생각게 잠긴 듯이 엄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엄마, 나는 이것들을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그러나 이것들은 결코 나에게 사랑을 돌려주지는 않을 거예요.”-자넷 W. 로커비 

사랑이 없으면 죽은 인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사랑이 없으면 오히려 사랑이 없는 삶은 이미 지옥의 고통에 거하는 것이 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고 풍성한 은혜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어떤 외부에서 닥친 사건의 충격이나 세상이나 가족에게서 무리한 대우를 받을 때 곧잘 기쁨으로 오히려 이기며 축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상태가 피폐해 있고, 죄에 빠져 있을 때는 작은 시비에도 격분하고 증오와 미움으로 과격한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영적인 수준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함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 천국에 있는지 지옥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한 가지 만으로도 이미 스스로 심판을 받고 있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를 살인하는 자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15절). 사랑과 반대인 미움은 우리를 살인자로 몰아갑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영생의 없음을 입증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미움이 가득한 상태는 이처럼 영적으로 심각한 병이든 상태입니다. 

엘머 게이츠라는 사람의 실험에 의하면 성인이 분을 내며 뿜어내는 탄산가스를 액화시키면 여러 가지 색깔의 침전물이 생기는데, 이 물질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치명적인 독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화를 낼 때는 밤색, 고통이나 비애를 느낄 때는 회색, 후회로 마음의 가책을 느낄 때는 핑크색의 침전물이 생긴다는 것이다. 화가 날 때 생긴 밤색 침전물을 쥐에게 주사하자 몇 분 내에 죽었으며, 한 사람이 한 시간 동안 계속 화를 낼 때 생긴 독소는 80명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심한 독소가 배출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이 미움이 가득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순간적인 미움을 속히 버리고 사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줄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이 진리에서 난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18-19절).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주 앞에서 우리 마음이 굳세게 될 만큼 구원의 확신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힘 있는 신앙생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즉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진실한지의 여부는 사랑으로 판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랑은 자기 자랑이고, 자기 의이지만, 사랑이 없는 믿음은 위선이고 껍데기에 불과 합니다. 스스로 속아서는 안됩니다. 정교하게 자신을 진찰하고 사랑이 없으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회개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미움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살인자나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줄을 알게 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3. 사랑의 능력(16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사랑의 기원
셋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생기느냐는 점입니다. 이기심 많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습니까? 누가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겠습니까? 그것이 잘 안되어서 문제이지요! 자 어디서 사랑의 힘을 공급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16절은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마땅히 행할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을 사랑의 사람으로 바꾸어 온통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16절 본문의 흐름을 잘 보십시오. 사람의 생명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생명을 무엇으로 바꾸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신의 생명을 형제를 위해 버리다니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그 해답이 이렇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6절) 여기서 놀라운 논지는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처절한 사랑이 마땅한 것,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즉 자기의 목숨을 내어줄 만큼 희생적인 특별한 일이 더 이상 기적도 억지로 하는 힘겨운 현상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능력이 나올 수 있습니까? 다만 예수님의 사랑,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랑에 젖어 있으면 사랑은 밥을 먹거나 이야기하거나 걸어 다니는 것만큼이나 일상의 자연스런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받은 만큼 맛본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온 사람은 사랑이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합니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마땅한 일이 됩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사랑을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받고 자라서 그렇습니다. 가난하건 부하건 상관없이 사랑에 감싸여 살아온 사람은 이미 엄청난 하늘의 은혜를 받고 축복을 다 받고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은 사랑을 한다는 것이 기적같이 어렵고 힘든 일이고 부자연스런 고역이 됩니다.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을 받아 본 적이 그의 삶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산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성격적인 결함이 심하여 어린 아이의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남기고 늘 폭행을 가하고 잔인하게 대한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든 자기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더욱 강퍅해지고 단단한 악으로 자기의 마음을 무장해서 중심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으려고 애를 쓸 겁니다. 이것은 자기 방어지제가 작동하여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현상입니다. 물론 그것마저 꺾이고, 기를 빼게 되면 아이가 정신병에 걸리거나 반쯤 넋이 나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오니 스스로 자신을 잊어버리고 부인하여 그 상황에서 고통을 잊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이에게 무정하게 한 부모의 성격적인 결함은 자신이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자동적인 반응이고, 복받치는 분노와 피곤함을 감당 못해 미움과 증오가 순간 폭발하여 그런 것입니다. 이미 물리적이건 언어건 폭력을 가하는 그 사람 또한 상처를 받은 피해자로서의 과거가 많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 이야기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어떤 사람의 행동이 포악하고 거칠다면 ‘그 내면에는 그리고 그의 과거에는 얼마나 상처가 많았으면 그런 지경이 되었을까?’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으니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전혀 자신의 체질과 정서에 어울리지 못하기에 차라리 죽는 것이 견디기 쉬운 일로 느껴질 정도로 스스로를 역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가 볼 때 우리는 그가 살아 있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마땅합니다.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그 포악함 속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다른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남을 헤아리고 이해해 주는 마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수적입니다. 그들은 마귀의 자녀로 평생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지 못한 불쌍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구체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감격하고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본래 진노의 자녀였는데,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 자기 목숨을 내어준 사랑 때문에 오늘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런 사람이 된 것 아닙니까? 

조류중 모성애가 가장 뜨거운 것은 펠리컨입니다. 펠리컨은 새끼들에게 줄 먹이가 없으면 자신의 가슴살을 뜯어 먹입니다. 병에 걸려 죽어 가는 새끼에게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입에 넣어줍니다. 어미 펠리컨은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칩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펠리컨을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인간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대신 피를 흘린 펠리컨 같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2천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모두 책임지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인간의 탐욕 교만 불신 증오 거짓을 모두 혼자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희생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위한 밥이 되시길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지금 미국의 뉴욕 주가 아직 황야로 있을 때입니다. 그 지역의 원주민 인디언들은 유럽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을 매우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브레베 선교사, 달르망 선교사는 참으로 놀라운 신앙의 증인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당한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친 몽둥이로 온몸을 두들겨 맞고 머리카락, 턱수염, 손톱은 생채로 뽑히고, 손가락은 그들의 입에 넣고 깨물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고통들을 주님과 인디언들을 사랑하므로서 견디어 냈습니다. 그 인디언들은 선교사들에게 소름끼치는 고문을 가한 다음에 심장을 도려내어 씹어 먹고 피는 그대로 마셨습니다. 왜 그들은 이토록 잔인한 행동을 하였을까요? 인디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의 피를 마심으로서 용감한 정신을 자기들 안에 스며들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인디언들도 그 선교사들의 죽음을 초월한 사랑의 능력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 선교사들은 죽음을 통하여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죽음 희생적인 죽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려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피를 내어주셨고, 몸의 살을 주셨습니다. 그 희생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얻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를 사는 것이 마땅치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와 각도에서 본문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기에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결코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마땅한 것으로 알고 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목숨을 버리신 그 감동이 있고, 그 은혜 가운데 젖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처럼 엄청난 희생적 삶이 마땅한 것, 자연스러운 것이 됩니다. 이것은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목숨을 내 놓은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그러니 사랑할 능력이 우리 속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목숨을 내어 놓을 수밖에 없을 만큼 흉악한 죄인이었는데,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에 젖어서, 사랑의 공급을 받아, 사랑에 능력이 있는 사람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