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들의 부름”
(만일 여러분이 예언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겔 13:1-16; 요 1:14-18
목회를 할 때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찬사는 “그 목사님은 참 예언자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예언자는 오늘 날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며, 예언자는 “때의 징조”를 읽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은 예언자처럼 때때로 일어나는 사건들 앞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참으로 예언자적인 목회를 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예언자가 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 에스겔서의 구절은 참으로 놀랍게도 예언자들을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이 그들 마음대로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다.” 다음 축제일에 무엇인가를 설교하기 위하여 거짓 예언자들은, 그들 자신의 견해와 그들 자신의 사상, 그들 자신의 영감과 감상을 끌어들입니다. 그들의 설교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견해들로 채워지고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회중들은 너무 자주 그리고 온전히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에 따르면, 참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만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참 예언자는 자기 백성을 잘못 인도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참 예언자는 평강이 없을 때, “평강이 있다”고 말하기를 거부합니다. 사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예언자는 분명히 심판을 설교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신학생들에게 발견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3년 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신학생들은 열심히 지식을 함양하게 됩니다. 싫든 좋은 간에 모두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를 받고, 때가 되어 교정을 떠날 때가 되면 신학생들은 모두 교회를 향하여 공격적이 됩니다. 기존의 교회를 향하여 왜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말하려고 앞으로 나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설교를 할 때면 내가 예언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자기중심적인 습성으로 인하여, 어리석게도 그들을 혼내주는 것이 예언자적 목회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언자들을 향해 공격합니다.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아니 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는 아니하였느니라.” 에스겔은 이것을 군사적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거짓 예언자들이 그들 자신을 군대의 전열에 배치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전선에 뚫린 구멍을 메우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위험을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전쟁의 날에 적을 공격할 화살을 나르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와 우리들의 교회들이 전투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승리하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삶과 죽음의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소멸시킬 수 있는 적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적은 원자폭탄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실제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적은 또한 우리가 예측하고 있는 사탄이나 사망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적은 이미 전투에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의 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이 에스겔의 말에서 아주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여러분과 저 그리고 백성들을 공격하고 계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죽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투쟁해야 할 분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삶과 죽음의 투쟁을 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주의 날이다.
오늘 날처럼 안락과 안전을 추구하는 축복의 복음에 익숙한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큰 충격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와 싸우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은 그리스도인인, 비그리스도인을 넘어 모두의 찬양이자, 노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우리들의 죄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조물주 사이에 불모지를 만들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거기에, 즉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 전체 속에 있습니다. 자기 백성, 자기 아내를 매음녀라고 비난하는 무도한 남편인 하나님,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나를 버린 것이다…”고 외치시는 창조주 하나님.
우리는 정중하게, 아, 그것은 바로 새 이스라엘이 아니라, 옛 이스라엘이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들의 거역하는 죄를 모른 체 우리들의 사업에 열중합니다. 가령, 우리는 소수민족의 인권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잘 못한 것에 대해여 화를 냅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거부합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이들의 무모한 시도를 비웃고 미워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택하지 않습니다. 단지 “신약성서의 윤리는 불가능한 요구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일시적인 기분에 맞도록 신약성경을 고칩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들의 요구를 잘 들어줄 가장 훌륭한 목사를 찾아 교회탐방을 합니다. 유물론적인 무신론자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의 세계적인 폭력행위를 규탄하면서도 베트남과 중동 지역에서 그들의 진로를 봉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의 자원을 뺏고자 명분 없는 전쟁을 시작합니다. 우리의 편리와 욕심을 위해 자연생태계를 고려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 나라에서 파괴분자들이요, 극단주의자들이며 부랑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을 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반란을 진압시키기 위해 우리를 공격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에 대하여, 반역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싸워야 할 적입니다.
오늘 본문을 깊이 조사해 보시면, 우리는 어느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공격의 주요 역할을 담당하도록 요청되고 있음이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한 사람에게 적에 대한 주요공격이 담당하도록 요청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예언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공격을 실행하는 자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강단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마치 설교자라는 사실 때문에 어쨌든 그들이 병역 의무를 면제받는 것처럼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심판을 선포하도록 지명된 자들보다 그것을 훨씬 더 손쉽게 해낸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언서들을 살펴보면 예언자들 자신이 제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서 매음 행위를 하는 신부들을 징계하려 하십니다. 그래서 호세아 역시 우선 매음녀와 결혼한 자식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놀고 있는 자기 자식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의 집과 유산을 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기 가정을 버려야 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보시기에 가장 소중한 것, 시온을 파멸에 넘겨주십니다. 그래서 에스겔 역시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죽음의 손에 넘겨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적인 하나님의 공격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말할 것 같으면, 주님은 예레미야와 싸우는 무서운 용사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귀로 들은 말을 소리 높여 고통 중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하나님의 공격의 파도를 자신의 삶 속에서 고스란히 경험하였습니다.
“슬프고 아프다 매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포위와 멸망을 전하도록 택함 받은 자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포위됐기 때문에 불결한 거름더미 위에서 요리한 형편없는 음식을 먹어야 했던 최초의 예언자였습니다. 에스겔은 전혀 활동할 수 없는 철저한 무감각 지대로 끌려가는 포로 신세를 가장 먼저 경험한 사람입니다.
분명히 성경에 나타난 예언자들의 직무는 백성들 대신에 먼저 고통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강단에 선 현대의 예언자들 역시 그와 못지않은 운명이 요구됩니다. 여러분은 죄 많은 여러분의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설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심판을 경험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많은 여러분의 백성들에게 고통과 패배, 근심과 슬픔, 그리고 절망에 빠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언자처럼 여러분은 그들이 있는 삶의 집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의 결과를 견디도록 요구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언자가 되려고 한다면, 평안하고 어려움 없는 목회를 구하지 마십시오.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죄를 위하여 상함 받고 눈물 흘리며 고통당하는 투쟁을 구하십시오.
예언자들은 적에 대해 저항합니다. 그들은 전선이 무너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 많은 민족이 무너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 많은 민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나 우리는 그들이 저 많은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주께 탄원하고 기도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시내산에서 40일간 밤낮으로 금송아지 만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해 달라고 간청하는 모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모세-우리는 그를 정의의 예언자라고 부른다-가 있습니다.
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형제인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받고 끊어지기를 원한다는 다소의 바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예레미야에게 그런 모든 기도로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성경의 예언자들은 어디서든지 죄 많은 자기 백성을 위한 중보자로 나타납니다. 만일 우리가 예언자적인 목회를 하기 원한다면, 예레미야 같이 완강하게 한 영혼을 멸망하는 심판에 넘겨주기를 거부하며 가장 슬픈 자,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자들 가운데서 가장 무지한 죄인을 위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 영혼을 포기 하지 않음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행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싫어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교회 안에서 한 푼도 헌금하려 들지 않고, 자기가 아는 아무에게나 여러분을 비판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모임에서 너무나 독선적이기 때문에 여러분으로 하여금 화가 치밀게 하는 그런 여인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경멸하고 있는 교만하여 철저히 고집쟁이나 과격적인 이들을 향해 어떻습니까? 그들과 고통당하고 그들을 포기하기를 거부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당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복음의 확실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여, 그들의 주의 날에 있을 전투에서 견딜 수 있도록 하려 하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예언자가 되기 원한다면, 바로 이것이 여러분에게 요구되는 과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예언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다는 것은 그 말씀에 따라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님도 역시 한 영혼을 넘겨주기를 거부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전쟁터에서 우리의 대열에 구멍이 뚫린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의 몸을 그 갈라진 구멍에 끼우지 않는 한, 우리는 멸망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공격하실 때 전투를 견뎌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파괴자요, 부랑자요, 극단주의자들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날에 해를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불모의 땅 변두리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적 앞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의 자녀로, 그의 백성으로 말입니다.
참으로 여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전투에서 우리의 편에만 있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적이 보낸 사절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우리 편을 들려고 우리나라의 대왕(하나님)이 그분을 전선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적인 그 대왕께서(하나님) 우리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 자신을 매개자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 분은(하나님) 우리 가운데 있는 한 반역자를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신의 아들(예수님)을 죽이려 하셨습니다. 그 분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기 왕국에 있는 백성을 구원하려고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인간을 예언자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사자, 즉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학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말씀의 완전한 희생과 자비 가운데서 선포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여러분이 현명하여 시대의 징조를 식별할 수 있다고 해서 예언자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여러분이 여러분의 백성에게 심판을 선포할 수 있기 때문에 예언자가 아니라, 여러분은 여러분이 고통을 당하고, 주의 날에 있을 전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 있는 새 이스라엘의 집을 위해 방벽을 쌓을 때에만 하나님에 의해 보내지는 예언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