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현재에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신앙이 두터워질 무렵 주님은 이런 질문을 던지시며 우리를 한 단계 높게 이끄십니다.
모두 다른 대답을 하겠지요.
"내가 외로울 때 곁에 계시는 분입니다."
"내가 행복할 때는 잊어버리고 내가 불행할 때는 찾게 되는 분입니다."
"내 은행 통장에 적자가 날 때 '좀 채워주십시오' 하고 기대보는 분입니다."
"내가 두려울 때 기도할 대상입니다."
여러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고 이 대답을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게 해줍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아라 여기며 엘리아 선지자와 세례 요한과 비교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다른 메시아와 다릅니다.
엘리아는 이교도들과 바알 신을 믿는 사제들을 죽이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 믿는 자들을 엘리아 선지자처럼 처형하지 않으시고
신앙안에 감싸주신 분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이방인을 배척하는 대신에 하늘의 왕국으로 초대하시고
하느님의 사랑의 연회에 참석할 기회를 주셨지요.
예레미야 처럼 고통 속에 절규하는 선한 자의 모습과도 다르십니다.
삶의 고행을 묵묵히 받아들이던 자기 학대자 masochist 가 아니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행복보다는 불행을 선택하곤 하지요.
세례요한도 지상의 행복은 포기한 사람이었지요.
이런 선지자의 모습에 익숙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먹보에 술주정뱅이' un glouton et un ivrongne 라는 취급을 받기도 하십니다.
결혼식에 참가해 함께 와인을 마시며 흥청거리며 기뻐하시며 취하시는 분이셨고
아마 결혼 축가도 한 구절 불러 주셨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상설교를 하기 전에도 배를 먼저 채워 주신 분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것을 아시던 인간의 뱃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는 분이셨습니다.
베드로는 우리 시대의 신앙인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믿음이 있으면서도 의심하게 되고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면서도 예수를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배반한 사람이죠.
제자였으면서도 적이 된 적도 있고
강하면서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죠.
사랑이 가득찬 사람이면서도 많이 비겁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 항상 그의 곁으로 돌아온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임을 알아차린 사람이고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할 수 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약속을 실행하려 오신 분이지만
우리를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려 오신 분입니다. 사랑으로 말입니다.
'La Loi de Jesus ne se fait jamais accusatrice pour l'homme. Seul l'amour montre si nous sommes fideles ou non au Christ.' / Anselm Grun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불행 속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사랑 뿐입니다.
우리의 가슴이 사랑의 감정으로 콩콩 달음박질 할 때 느껴지는
삶에 대한 능동적인 기쁨이 바로
예수님의 우리를 향하신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기쁨안에 머무르길 바라십니다.
이상은 책에 나오는 한 생각에서 부터 나의 말로 바꾸어 본 글입니다.
마태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의 모습을 여러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한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이 책은
신부님의 인간적인 훈훈한 시선으로 복음서를 여태까지 알던 의미와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