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연(外延)을 넓혀 가는 기독 청년들의 하나님나라 운동

복음주의적 기독 청년들의 사회 참여가 점차 그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공의 정치 실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성경적 토지 정의의 입법화, 공정 무역, 교회 갱신, 교육 개혁과 사교육 폐해 극복, 세상에 대한 기독교의 선한 영향력 확장 및 교회에 대한 자기비판적 담론형성을 위한 언론 운동, 기독교 윤리의 실천, 그리고 평신도들을 위한 각종 교육 프로그램 운영 등 열의와 진정성으로 가득 찬 기독 청년들의 사회적 활동은 한국 기독교의 앞날에 대해 밝은 전망을 갖게 한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의 주류 교회로부터 아직 두터운 지지와 환영을 받지는 못하지만 생각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이런 활동에 종사하는 청년들을 통합시키고 집중시키는 중심 주제는 하나님나라다. 여기서 하나님나라는 공간적 실체를 가리키기보다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자체를 의미한다. 하나님나라는 개인의 인격, 가정, 조직체, 국가, 국제 질서, 그리고 피조 세계 전체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관철되는 사건이요 상태다. 물론 하나님 통치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실현될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성취될 나라다. 그것은 죄악된 권력 집단들과 개인들의 집단적인 반대와 완강한 저항을 감수하면서도 소수의 남은 자들인 하나님 자녀들의 부단한 순종과 견결한 실천을 통해 완성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나라는, 특정한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건축되어져 가는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덧없는 ‘특정한’ 시대의 과업을 통해 건축되어져 간다.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보면, 어떤 시대는 하나님나라의 자유 가치를 실현하는 데, 또 다른 시대는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공평, 연대성과 평화를 실현하는 데 투신되었다. 어떤 민족은 하나님나라의 기초를 놓는 데, 어떤 민족은 하나님나라의 세계적 확장에 쓰임받았다. 이처럼 하나님나라는 하나님 당신의 고유한 과업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에게 공명하고 응답하는 사람들의 과업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고유하고 ‘절대 주권적인’ 통치 확장 행위이지만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위임된 과업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운동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붙잡힌 하나님 자녀들의 ‘응답적’인 운동이다. ‘운동’이라는 말 때문에 하나님나라가 인간 주도적인 기획 혹은 인간의 힘만으로 성취되는 특정한 역사 발전이나 정치․경제상의 진보를 의미하는 말로 오해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연코 그런 말이 아니다. ‘운동’이라는 개념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나라 ‘운동’의 의미와 그 성경적 기원
    
첫째, 창세기 1:2이 하나님의 창조 운동을 증언한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고 있었다’는 구절은 하나님의 세계 창조가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신이 주도한 ‘운행’의 산물임을 보여 준다. ‘운행하고 있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머라헤페트’는 ‘라하프’(rāḥaph)라는 동사의 능동분사형으로 지속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신(혹은 바람)이 지속적으로 흑암에 뒤덮인 바다를 향해 운동했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흑암의 원시 바다에 뒤덮여 있는 ‘땅’을 건져내기 위해 하나님의 신이 쉴 새 없이 운행했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기초가 될 마른 땅이 드러나도록 불어 대는 바람같은 야훼 하나님의 운행이, 바로 하나님나라 ‘운동’의 으뜸되는 신학적 근거다. 

둘째, 사도행전 2:1~4의 불같고 바람같은 성령의 강림이다. 성령의 불같고 바람같은 역동적 ‘운동’은 낱개의 개인들을 공동체로 변형시키는 운동이며, 하나님의 영에 100% 공명하고 공감하도록 결단케 하는 자복 운동이다. 바람같고 불같은 성령의 내습(來襲)을 경험한 개인들은 하나님나라 운동의 대의에 합류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게 된다. 

셋째, 히브리서 4:12~13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라는 구절이다. 하나님 말씀의 운동력은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까지 분석해 내고 폭로하는 신적 분석력이자, 자복시키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설복되고 감화되어 발생하는 활동이 바로 하나님나라 운동인 셈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신적 주도성 및 인간적 수동성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영과 말씀에 사로잡혀 파생되는 운동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지극히 순전한 복종을 바치는 운동이며, 자기 기득권(계급적․계층적․신분적 기득권)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추진하는 자기 부인 운동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의 보상은 하나님과의 생명 연합, 하나님 모방, 하나님 자녀들의 대가족 향유, 그리고 종말론적으로는 하나님나라의 상속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 청년들이 말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은 바로 이런 의미다. 
    
하나님나라는 성경의 중심 주제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종교 권력에게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배제된 성경 사상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득권자나 권력 체제를 향해 항구적인 자기 갱신과 자발적 변혁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개인들에게는 급진적 전향을 요구한다. 따라서 하나님나라라는 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에 살면서 고독을 느껴 보지 못하고 불안에 떨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경하고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다. 2000년 교회사를 보면, 이스라엘 본토에서 시작된 기독교 복음이 유럽 문명에 이식될 때 기독교 신은 본래의 체제 변혁적이고 급진적인 신선함을 잃고 기존 세계의 상류층 문화에 길들여진 채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하나님나라 복음은 제왕들과 영주들의 종교로 전락했고, 기독교회는 적어도 1500년 이상 세상 정치권력과 종교, 경제적 권력의 최상층부에 자리 잡은 사람들에 의해 대표되는 귀족들과 왕후들의 지배자 종교가 되어 버렸다.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이나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면 유럽 문명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얼마나 결정적으로 왜곡하고 변질시켰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거대한 대리석 석궁과 엄청난 크기의 돔(dome) 지붕과 화려한 고딕식 예배당이 기독교 문명의 가시적 기념물로 남겨지는 동안에, 하나님나라의 세계 변혁적이고 자아 갱신적인 에너지는 거대한 대리석 예배당과 그 안에서 벌어진 거창한 종교 제의들 안에서 소거되어 버렸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기독교 신앙이 거룩한 문화 창조의 에너지도 발출하기 전에 세속화의 위협 아래 굴러 떨어진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며,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묵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되는 나라다

하나님나라는 창세기 1~2장에서 그 첫 모습을 드러낸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나라의 기원과 토대를 말하고, 2장은 하나님나라의 역사적 지향을 부각시킨다.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최고 주재권을 가지신 왕만이 내리실 수 있는 명령(fiat)으로 세계를 창조하신다. 하나님의 세계 창조는 인간의 협조와 지지, 믿음과 순종의 매개없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도 의논하지 않고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자기만족적 자기평가를 일곱 차례나 반복하심으로써 이 세계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창조되었음을 인정하셨다. 화가가 자기 그림에 낙관을 찍듯이,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반복된 말로 자신의 창조물을  품평하신다.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애착과 무한 긍정을 표현하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창세기 1장에서 이 세계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의 자기만족, 자기 왕권의 과시요 확장임을 짐작할 수 있다.

후대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연 해설을 제공했다. 이사야에 따르면 하나님의 세계 창조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창조 세계에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하박국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인정하는 거룩한 교양이 온 피조 세계에 넘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강조한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보좌요 발등상이라는 말이 바로 온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 대상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온 세계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지식과 교양을 충만케 하는 사역인 것이다. 창세기 2장은 이 하나님나라가 인간의 순종과 믿음을 통해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릴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나라는 천상 영역, 이데아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대표로 하는 피조물의 세계 속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세계 통치에 결정적인 동반자인 ‘사람’이 등장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에 대한 피조물의 대표자인 사람의 순종과 응답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피조물인 인간의 믿음과 자발적 순종의 위치가 드러난다. 인류의 대표자인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순종이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는 사건이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롬 5:12~21). 결국 창세기 1~2장은 하나님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이 성취해 가는 하나님 스스로의 통치권 확장 활동이면서 동시에 피조물 인간의 응답을 요청하는 매우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과업임을 강조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고유 절대 주권과 권능으로 시작되고 세워지는 나라임과 동시에, 인간의 자발적인 순종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것이다(시 33편). 
   
창세기 1~2장에서 인간에게 위탁된 중심 활동은 다스리고 통치하고, 관리하고 지키는 행위다. 하나님나라와 인간에게 위임된 이러한 사명은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된다. 창조는 물과 땅이 뒤얽힌 혼돈(混沌)으로부터 경작지를 건져 내어 피조물들을 위한 생명의 왕국을 건설하는 행위였다. 하나님의 창조는 질서 부여 행위였으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세계의 기초를 하나님의 성품인 공평과 정의 위에 세우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물리적 환경의 창조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질서, 신적 친절과 공평(시 89:13~14)으로 운영되는 생명 공동체의 창조까지 포함하는 활동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 이후의 하나님나라의 행로는 아담 자손의 불순종과 저항으로 숱한 좌절과 퇴행을 겪었다. 구약성서의 첫 책인 창세기 3~11장의 인류 원 역사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 인간적 저항과 방해들로 점철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적 저항과 방해에 대하여 징벌과 심판으로 응답하셨다. 인간의 죄악을 징치하는 징벌 행위는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사람과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는 징벌과 심판만으로 관철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일부 인간을 먼저 선택하셔서 구원하는 구원사를 개시하심으로써 당신의 세계 통치를 이어가셨다. 죄와 불순종으로 부패하는 인간을 갱생시켜,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변혁시키기 위해 믿음의 사람들을 이 땅에 일으키셔서 세상에 파송하신 것이다. 아담-셋-에노스-노아-셈-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계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보여 주는 증거다. 또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율법을 받아 나라를 구성하고 사회를 이루도록 부름받은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세계 통치의 증거였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일으키신 예언자들은 인간 왕국들을 아우르시고 어거하시는 초월적인 세계 통치 지휘부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사 6:1~3; 렘 22:18~22; 암 3:7~8; 왕하 22; 시 103:19~22). 이스라엘 역사를 세계 만민의 역사와 결정적으로 구분 짓는 표지는 초월적인 하나님나라의 특명 전권대사로 활약한 이 예언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의 참된 왕이 인간 왕들이 아니라 천상 보좌에 앉아 세계를 통치하시는 야훼 하나님임을 결정적으로 증거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역사의 종점에 나사렛 예수가 등장했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구약 예언자들을 거쳐 독생 성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절정에 이르렀던 것이다. 구약 예언자들의 야훼의 말씀 대언은 창조 때 시작된 하나님나라 건설 과업을 계승하는 작업이었고,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된 하나님나라를 완성시키려는 활동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잠시간 혹은 부분적으로 대언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다. 창조적 권능을 내뿜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 순종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 전체는 태초부터 이 세계 속에 활동해 온 하나님나라의 총체적 면모를 일시에 계시했다. 나사렛 예수의 순종을 격려하고 돕는 성령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고갱이였다. 12사도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은 성령으로 추동된 자발적인 순종 운동이었다. 
   
하나님나라는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 주도적인 나라다.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전하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이 이 세계를 다스린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사랑, 평화, 희락, 연대와 우정, 돌봄과 치유가 일어난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나라를 말할 때에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이어지는 부단하고 순전한 순종이 담보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말하려면 스스로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순종이 담보된 사람들의 입술에서 하나님나라가 선포될 때 그것은 자아 갱신적이고 세계 변혁적인 파급력이 발산되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철저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으로 주도되는 운동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화 감동과 말씀의 감화력으로 개인과 공동체를 추동시켜 하나님나라에 근사치적인 세계를 만들어 가는 운동이다. 한국교회의 영적 분투나 열심만으로는 하나님 통치를 매개할 수 없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약간 더 의로운, 약간 더 청빈한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하는 대중 계몽운동도 아니고 윤리 각성운동도 아니다. 그런 행동들도 의미 있기는 하나 성경적인 하나님나라 운동은 아니다. 이 말은 모든 점진적이고 상대적인 의미의 사회 개선 활동의 의의를 훼손하는 말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말의 의미를 너무 비근하게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이다.
 
하나님나라는 다양한 단위로 존재하며 역사 속에서 점진적이며 유기적으로 성장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피조물에게 나타나는 은총이다. 그것은 구원의 형태, 약속과 인도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종종 징벌, 정화적 심판, 그리고 쉼 없는 징계와 연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의 에덴동산은 물리적 인간세계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였다. 하나님나라는 먼저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된 자 거듭난 자, 믿는 자에게 영생으로 나타난다. 영생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으로서 의와 진리, 거룩함으로 거듭난 개인의 삶이다. 둘째, 하나님나라는 믿음의 가정에 나타난다. 셋째,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확대된 가족공동체나 교회 공동체에 나타난다. 넷째,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지배하는 국가 공동체다. 다섯째,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인애와 정의가 지배하는 국제 질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인애와 정의가 지배하는 피조물 전 생태계 공동체다(사 11, 65장).
    
따라서 하나님나라 운동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한 개인의 부단한 인격 갱신과 하나님나라의 질서에 근접하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중단없는 사회변혁 운동을 내포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감화 감동으로, 혹은 하나님의 강력한 부름에 응답한 개인들의 복음 영접과 회개 운동이다.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 모두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복음 선포를 통해 복음 영접과 회개를 동시에 요청했다. 개인의 믿음과 회개가 하나님나라 운동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나라의 질서에 편입되려면, 개인이 하나님나라의 도래의 현실성을 인정하고, 즉각 하나님 없이 살던 때의 삶을 전적으로 혁파하고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 없이 살던 때는 돈과 권력, 부동산과 동산, 인맥과 학맥, 종교적 열심과 세습적 상속 등이 구원과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세상적인 토대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다. 그래서 그것들을 버리고 나사렛 예수가 전파하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순복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을 믿고 회개한 시민들이 많아지면 사회구조적 변혁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로마제국의 콜로세움 검투사 경기장이 사라지는 역사가 이런 진실을 잘 예증한다.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은 주후 72년에 유대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초토화했던 베스피안 황제가 짓기 시작하여 400년 이상 로마제국의 대중오락장으로 성황을 누렸으나 주후 500년경에는 사실상 용도 폐기되었다(523년경 마지막 검투 경기 기록). 그렇게 된 이유는 로마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로 바뀌면서 검투사 경기가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의 원형경기장 2층의 베스피안 황제 유물 전시장에 걸린 해설문의 분석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 사회의 구조악을 해체하는 데 개인들의 자각적이고 의식 있는 조용한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일화다. 초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콜로세움 경기장 안 가기 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신앙 고백상과 가치 지향 자체가 잔인한 동물 학대, 전쟁 노예 학대, 잔악한 살인 경기와는 상극이었다. 기독 청년들 개개인의 사사로운 소비 행위, 내밀한 윤리․도덕적 결단 등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독교인들의 내밀하고도 자발적인 결단이 축적되어야 비로소 한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를 표방하는 문화가 생겨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력에 충실한 신앙생활만 해도 한국의 대중문화를 어느 정도 순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40여 일의 사순절 기간이나 종교개혁 주간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절제와 금욕을 실천한다면 그 기간 동안에는 영화사들이 자극적인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흥행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과도한 육류 소비가 줄어들 것이다. 이것을 통해 기독교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를 세상에 널리 공포할 수 있을 것이며, 절제와 겸손, 자비와 나눔의 기독교 문화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나라 운동은 개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사회 관습, 제도, 법, 그리고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성경적 진리와 일치시키는 사회구조를 만들어가는 운동이어야 한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한 사회의 운영 원리를 성서적 정의와 공평, 인애와 자비의 원칙에 수렴시키는 운동인 것이다. 가령 먼지가 가득 찬 체육관에서 성실하게 운동하는 개인을 생각해 보자. 성실하게 운동하는 것은 건강에 좋은 일이나 먼지가 가득 찬 체육관에서 막무가내로 성실하게 운동하면 할수록 건강에 해롭다. 먼지가 가득 찬 체육관 시설과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개인의 건강 증진은 어렵다. 한국사회가 부동산 투기로 재테크를 하거나 온갖 편법과 탈법, 위법과 불의로 토지를 매입하여 부를 구축하는 틀을 바꾸지 않고 개인의 양심만 세차게 담금질해서는 한계가 있다. 마약 밀수업 조직에 뛰어든 조직폭력배가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그 조직의 목표 자체가 반사회적이라면 그의 성실한 조직 생활은 반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나치 체제가 흉악무도한 악의 왕국이었기에 그의 지휘 계통에 따라 성실하게 공무를 수행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행동 자체가 악의 실행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듯이, 우리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의 구조적 악과 불의를 해소하지 않고는 개인의 윤리적 청정화만 강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 청년들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개인의 양심을 더럽히고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드는 사회 운영의 틀 즉 법, 제도, 관습, 심지어 가치관까지를 바꾸고자 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하나님나라 운동은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 환경을 지키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이 하나님나라 운동의 일환일 수가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부근의 한강 상류는 서울 시민이 식수를 채취하는 1급수 수원지다. 따라서 이곳의 농촌 마을은 농약 사용이 금지된 지역이다. 농약 대신에 오리가 물이 찬 논 사이를 오가면서 벌레를 잡아 병충해를 막고 있다. 그런데 인근 지방자치 단체들이을 탐낸 러브호텔 건축을 무분별하게 허가해 생활 폐수를 배출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정부가 시도하는 4대강 정비 계획에 따르면 이 유기농 지역도 인위적인 제방 구축 등의 이유로 시멘트 구조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소수의 생각 있는 시민들이 팔당 수원지를 보호하기 위해 관련 법규를 고치려고 하고, 수원지 파괴 오염 행위를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역부족이다. 이런 경우 기독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실로 다양하다. 해당 지자체장과 의회를 찾아가 항의하고 주의를 진작시키는 일, 관할 국회의원 사무실에 전화하고 관련 자료를 보내는 일, 이런 사회적 영향력이 큰 쟁점을 언론에 보도하는 일, 그리고 그 수원지를 보호하기 위해 도보로 순례하는 퍼포먼스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기독 청년들은 이런 사회적 활동의 신앙고백적 근거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생명 가치가 특정 사기업의 단기적 경제적 이익보다 훨씬 더 소중한 하나님나라의 본질적인 가치임을 믿고 생명의 강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특정 기업의 재개발 이익보다는 자국민의 생명권과 주거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공평과 정의에 보다 더 가까운 정부 정책이다. 용산 참사는 상대적으로 힘 약한 개인들을 희생시키고 기업이나 부동산 재개발 업자의 배타적 이익을 훨씬 우선시한 반기독교적인 정부가 일으킨 참사인 것이다.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추동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발적이고 자기희생적인 헌신 운동이다. 그것은 성령의 감화 감동을 덧입은 하나님 자녀들에게 위탁된 운동이다. 그것은 정치권력을 휘둘러 타인의 의지를 복속시키는 현실 정치 운동이 아니다. 유다의 예언자 예레미야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고도의 민중 자치적․ 자율적인 계약 공동체가 형성된다.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강제적 율법 준수를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은 인간의 어떤 시민적 법적 강제가 요구하는 것을 훨씬 초월하는 자기희생적인 봉사를 할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성령의 감화 감동에 사로잡힌 120문도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유재산을 팔아 가난한 형제자매들의 생존권을 옹호해 준다. 그 결과 아무도 핍절한 사람이 없는 공동체가 탄생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의 자발적이고 자원적인 물적 희사로 유지되는 공동체적인 삶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다. 한 지체가 다른 지체의 불편과 고통을 자동적으로 공감하고 체휼하는 완벽한 공동체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이상 사회의 표본이다.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의 삶이야말로 육법전서로 대표되는 법적 강제력으로 유지되는 세속 왕국을 거룩하게 해체하는 참 대안 사회, 곧 하나님나라라고 본 것이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은 바로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이고 자원적인 십자가 순종을 재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계명의 금지 조항이 요구하는 윤리적인 기대를 상회하는 사랑과 공의의 능력을 발휘한다(롬 13:8). 이처럼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한 기독 청년들의 삶은 하나님의 감미로운 생명력 넘치는 통치가 구현되는 현장이어야 한다. 약간 더 의로운 삶을 살아서는 다른 사람의 불의를 고칠 수도 없고, 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혁시킬 수도 없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 가신다는 말이 맞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율법 요구에 복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