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미국발 금융위기에 빠져 정신적 시계(視界)가 불확실한 밤바다에 표류하고 있다. 이 위기는 억제되지 않는 권력 엘리트들의 탐욕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가져다준 재앙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하나님의 진리를 크게 이탈한 고도의 자본주의적 소비 사회가 가져온 필연적 파탄이며 인류 역사를 주도하는 중심부 문명이 맞이한 막다른 골목이다. 소비주의 사회는 특정 계층의 인간들에게 욕망의 과도한 충족을 의미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의식주라는 기본적인 욕망의 부정과 비인간적 궁핍을 의미한다. 고도의 소비주의 사회는 자기부인의 문화와는 정반대로 질주하는 자기파멸적인 욕망의 과잉충족 사회다. 그것은 공동체 안의 가장 주변화되고 연약해진 구성원들의 눈물과 비통에 공감할 수 없는 사회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근심과 탄식을 자아내는 사회다. 그런 사회는 마음이 강퍅해져서 예언자의 목소리에 더 이상 응답할 수 없는 무감각한 파라오의 압제 체제이며, 급기야는 예언자적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사회다.
 

최근 우리는 자유 시민들의 정당한 목소리를 누르고 주변화된 자들의 생명 가치를 능멸하는 권력 중심부와 지배 문화의 강퍅함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본다. 그들은 유난히도 법과 질서를 강조하지만, 긍휼과 비통의 감수성, 체휼과 동정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월터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극단적인 욕망 충족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능력을 상실한 지배 문화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영적 감수성을 회복해 주는 한편, 왕권 의식으로 가득 찬 지배 문화에 의하여 억눌리고 무기력해진 변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새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희망을 고취시키는 책이다. 이 책은 중심과 주변을 나누고, 왕권 의식과 예언자적 상상력을 나누는 외견상의 이항대립 구도를 사용하지만, 실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도록 초청하는 나사렛 예수가 전한 복음의 원음(原音)을 아주 생생하게 재생하고 있다.
 

이 책은 1978년에 출판된 저자의 <예언자적 상상력> 개정·증보판이다. 2000년대 개정판은 20여 년 이상 성서연구 분야에서 일어난 변화를 반영하고 있으나 책의 중심 논지는 동일하다. 초판이나 개정판 둘 모두에서 브루그만은, 예언자를 단지 미래를 점치는 자라든가 사회 저항가가 아니라, 인간 정신을 획일화하고 노예화하는 전체주의에 대항하여 한 공동체의 근원적 변화를 촉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모두 일곱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모세, 예레미야, 제2이사야, 그리고 구약 예언자들의 총합이자 그 이상인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상상력과 목회를 감동적으로 분석한다. 모든 장이 설득력 넘치고 역동적인 어조와 문체로 채워져 있으나, 특히 5장과 6장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상상력과 목회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십자가 죽음의 대속적 차원만 알고 있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공관복음서의 예수상, 곧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면모를 입체적으로 재생해 준다. 때로는 과도한 단순화(왕정 체제와 모세 체제,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이분법적 구분)가 옥에 티처럼 보이기도 하나, 그것들이 이 책의 중심 논지를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의 순서를 따라 예언자적 상상력의 위력을 음미해 보고자 한다.
 

에언자적 상상력의 얼개와 메시지
 

제1장 ‘모세의 대안 공동체’에서 저자는, 오늘날 미국 교회의 정체성을 앗아 가는 미국의 소비주의를 히브리 노예들을 압제한 파라오의 억압 체제와 견준다. 미국의 자본주의 소비 문화에 교회가 순응하게 된 내적 원인은, 성서의 예언자 신앙 전통을 저버리고 그 결과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한 데 있다. 예언자는 한 사회의 지배 문화에 적응하고 동화되어 거룩성을 상실해 가는 교회를 경각시키는 사람이다. 예언자는 지배 문화의 의식과 인식에 맞설 수 있는 대안 의식과 인식을 끌어내고 키우고 발전시키는 예언자적 목회에 투신된 인물이다. 이 예언자적 대안 의식이 바로 예언자적 상상력이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지배 의식을 해체할 목적으로 현존하는 질서의 불법성을 드러내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신앙 공동체가 바라볼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고 선포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일을 한다. 저자는 모세가 바로 이런 예언자적 상상력을 구현한 구약성서의 첫 예언자라고 본다.
 

모세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내세워 파라오의 정적(靜的)인 승리주의와 억압과 착취 정치를 해체한다. 모세의 핵심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된다. “우리가 만일 가진 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질서만 강조하는 정적인 신을 따른다면 억압을 떨쳐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자유롭게 행하시는 하나님, 곧 기존 체제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그 체제를 반대하실 만큼 자유로운 분, 노예들의 탄식을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응답해 주실 만큼 자유로운 분, 제국이 정해 놓은 모든 신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이 사실은 사회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자유로운 새 하나님을 소개하거나 사회 해방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를 인간적인 정의의 정치와 결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처럼 파라오의 정적인 승리주의와 억압 체제에 대한 모세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비판과 활성화로 구성되어 있다. 출애굽기 1~12장에 걸쳐 전개되는 출애굽의 구원 이야기는 이집트 제국의 번영과 막강한 힘을 분쇄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의 드라마다. 파라오 체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탄원과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예언자적 긍휼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점이다(출 2:23~25).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미래를 제시함으로써 예언자적 활성화의 생생한 예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자유와 기존 질서를 해체하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
 

제2장 ‘왕권 의식과 대항 문화’에서 저자는, 모세의 대항 공동체 구축활동은 단순한 반체제적인 사회활동과는 구분된다고 말한다. 모세의 대안 의식, 곧 예언자적 상상력은 종교와 정치 사회적 기존 질서의 해체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이 대안 의식은 첫째, 체제 고착적인 질서의 신(神) 관념에 하나님의 자유라는 관념을 대립시킨다. 이집트의 신들에 의해 영원한 가치가 있다고 선포된 것들이 하나님의 자유 앞에 무력화된다. 둘째,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정의와 긍휼이라는 관념임을 역설한다. 노예와 산파들로 이루어진 소수자 집단이 하나님의 자유라는 관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집트의 정적인 승리주의 종교를 돌파할 수 있었다. 노예로 이루어진 소수자 집단이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주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것이 억압적인 상황에 저항하는 데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줄 사회적인 비전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파라오 체제와 모세의 갈등이 솔로몬적 왕정 체제와 그것에 대항하여 일어난 예언자들에 의해 재현되고 계승되었다고 본다. 브루그만은 솔로몬이 이룬 풍요와 번영은 일부분 억압적인 사회정책 때문이었다고 본다. 솔로몬의 풍요(왕상 4:20~23)는 억압의 정치(왕상 5:13~18; 9:15~22)가 가져다준 선물이요 하나님의 친근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내재적 종교(왕상 8:12~13)에 의해 뒷받침되었다는 것이다. 솔로몬 체제의 내재적 종교는 모세가 그토록 강조했던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접근성 사이에 마땅히 존재해야 할 긴장 관계를 해소해 버렸다. 하나님의 접근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하는 쪽을 택했던 모세의 종교와 하나님의 접근성을 강조한 솔로몬의 종교는 날카롭게 충돌하게 되었고, 이 충돌이 왕국 시대의 예언자 운동의 배경을 제공했다.
 

제3장 ‘예언자적 비판과 파토스의 포옹’에서 저자는, 예레미야를 모세적 의미의 예언자적 상상력을 구현한 예언자의 전범으로 파악한다. 예레미야는 애통의 시가를 통하여, 왕권 체제가 있는 힘을 다해 지켜 내려 했던 사회 세계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선포하고자 애썼다. 그의 예언자적 비판은 분노가 아니라 고뇌였다. 하지만 솔로몬 체제가 구현한 왕권 의식은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린 자들과 연약한 구성원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격정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왕권 의식에 대항하여 예언자적 상상력과 그것에 입각한 상하고 찢긴 공동체 구성원들의 아픔과 탄식을 체현했다. 그는 애통과 공감을 잃어버린 왕에 맞서서 모세적 대안 의식을 구현했다. 냉담한 풍요와 냉소적인 억압과 뻔뻔스런 종교에 맞서서 그는 애통과 격정, 공감과 체휼의 종교를 주창했다.
 

제4장 ‘예언자적 활성화와 경탄의 출현’에서 저자는, 예레미야의 사역이 단지 근원적 비판을 넘어 가장 대담하고 창조적인 희망을 선포한 목회였음을 역설한다. 앞서 말했듯이, 예언자적인 대안 공동체는 비판과 동시에 활성화를 기도(企圖)한다. 예레미야의 목회는 유다 공동체와 바빌론 포로 공동체에게 생생한 신앙과 생명력을 불어넣어, 파국적 멸망 너머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미래를 주목하도록 했다. 왕권 의식이 백성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향해 나가는 힘을 포기하고 닫힌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드는 반면에,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충만했던 예레미야의 목회 과제는 백성들로 하여금 역사 속에서 일하시며 마침내 새 일을 추진하시는 하나님을 앙망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기원전 587년에 유다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한 왕권 의식이 자신에게 아무런 자원도 남기지 않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예레미야는 왕권 의식을 지배했던 절망을 뚫고 하나님의 깊은 섭리 속으로 들어가 유다의 종말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을 통찰했다. 이 공공연한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희망의 근거는, 야웨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품으신 한결같은 질투였다. 이러한 질투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시고, 자신의 미래를 그들의 미래로 허락하셨다. 이 하나님의 질투에서 비롯된 새 일은 예언자들에게 경탄의 언어를 고취시켰다. 특히 제2이사야는 절망한 왕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예언자를 위한 경탄 언어의 대표적 전령이었다. 그는 예레미야 애가의 파토스와 욥의 분노를 알았고, 또 그것을 몸으로 체험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토스와 분노를 뛰어넘어 희망과 송영의 언어로 나아간다. 제2이사야의 시는 포로생활의 종식과 그 후에 벌어질 하나님의 새 역사를 다채로운 경탄의 이미지로 선포했다.
 

왕권 의식에 도전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제5장 ‘나사렛 예수의 비판과 파토스’는 이런 예레미야와 제2이사야 등의 예언자적 비판 목회가 어떻게 나사렛 예수에게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브루그만은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상상력이 어떻게 현실을 변혁하고 당대의 지배 문화였던 왕권 의식을 비판했는지를 자세히 논한다. 첫째, 예수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 의식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이 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 그리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와 기존 권력자들과의 껄끄러운 갈등은 모두 왕권 의식을 비판하는 대안 의식의 등장을 웅변한다. 둘째,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막 1:15; 눅 4:18~19)는 하나님의 친정통치 시대가 도래했음을 통고하는 한편, 당시의 지배 권력자들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냉혹한 비판을 함의한다.

왕권 의식에 도전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그의 목회를 통해 실체화되었다. 예수의 근원적 비판을 대표하는 몇 가지 사역들을 살펴보자. 첫째, 예수의 용서 메시지와 용서 행위(막 2:1~11)는 현존하는 종교 체제의 중개 기능과 권위를 위협하는 행위였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예수가 위험을 자초하게 된 가장 근원적인 행동은 죄 용서였다. 둘째, 예수의 안식일 치유(막 2:23~28)는 안식일을 관장하고 거기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의 아성을 공격하는 행위였다. 당시 안식일은 사회의 안정을 나타내는 성스러운 표지였기 때문에 안식일 계명을 ‘위반’하는 일은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셋째, 버림받은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나누었던 예수의 밥상 교제는 사회의 근본 도덕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눔으로써 유지되던 종교 체제를 무력화 하는 일이었다. 넷째, 예수의 병자 치유와 귀신 축출은 인간을 병들게 하고 귀신 들리게 하는 극단 경험으로 몰아 가던 당시의 악마적인 사회 체제, 권력 관계의 실상을 폭로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사회가 불결하다고 판정한 사람들(막 7:24~30)과 죄인들(막 2:1~12), 하나님께 벌 받은 사람들(요 9:1)까지 하나님나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무한 자비의 과시였다. 다섯째, 당시 천대받던 여인들에 대한 나사렛 예수의 긍정과 존대는 성차별적 남성지배사회를 타격하는 사회 비판적인 자비의 실천이었다. 여섯째, 세금과 빚에 대한 예수의 담론(마 20:1~16)은 단순히 영적인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금과 십일조, 사용료, 소작료, 압류 처분으로 인한 재산 상실 등의 문제로 시달리던 갈릴리와 유대 농민들을 자유하게 하려는 예수의 정치적 해방 담론이었다. 마지막으로, 예수가 성전에 대해 보였던 태도(막 11:15~19; 요 2:18~22)는 가장 불길한 체제 전복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예수는 성전을 비판함으로써, 사실은 자기만족적이고 교조적인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성전체제주의자들의 선택 교리를 공격한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와 실천은 예언자적 긍휼에서 발원되었다. 긍휼은 비판의 근원적 형태이다. 예수의 긍휼은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공적인 사회 비판이었다. 예수는 이 아픔 속으로 뛰어들었고, 마침내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구현했다. 예수는 지배 문화가 거부한 사람들의 애통을 긍휼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냈으며, 이렇게 아픔을 구현하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권위는 지배 문화의 파멸적 종말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왕권 의식에 대한 결정적 비판이 된다. 브루그만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고매한 사람의 희생이라고 이해하는 자유주의도 거부하고 중보적인 속죄 죽음이라고만 말하는 보수주의도 거부한다. 오히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속에서 예언자적 비판의 궁극을 본다. 그 행위를 통해 예수는 죽음의 세상이 종말에 이르렀음을 선포하면서 죽음을 자신의 인격으로 끌어안는다. 예언자적 비판의 궁극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 끌어안으신 사건이다. 이러한 궁극적 비판은 의기양양한 분노로 가득 찬 비판이 아니라 격정과 긍휼로 이루어진 비판이다. 더 나아가, 예수의 수난 고지들과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한 말들은 지배 문화와 왕권 의식의 철옹성 같은 죽음의 질서를 궁극적으로 해체한다. 근원적 비판을 이루는 이 전승은 자기를 내어 주는 예수의 비움, 지배권을 포기함으로써 다스림, 그리고 자기비움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완성에 관해 말한다. 복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권력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비운 이 분은, 다른 누구도 엄두를 못 낼 권위를 가지고 인간다움을 허락하는 지고의 권력자이다. 이 자발적인 권력 포기를 통해 하나님께 절대적 순종을 드린 예수에 대한 십자가 처형은 신앙의 역사 속에 등장한 결정적인 사건이기는 해도 뜻밖의 사건은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 처형은 모세가 파라오와 맞서 싸운 이래로 예언자들이 겪어 온 고난과 희생의 총화이다. 모세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무기 삼아 억압의 정치에 맞서 싸웠으며, 이 모든 일이 그의 목회와 죽음에서 드러난다. 모세처럼 예수도 하나님을 포로로 삼은 종교에 대항해, 하나님의 자유 곧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고 죽음에 대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그 자유를 무기 삼아 싸웠고, 이 일 역시 그의 목회와 죽음에서 드러난다.

제6장 ‘나사렛 예수의 활성화와 경탄’에서 저자는,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사역의 궁극을 더 깊이 다룬다. 그 예언자적 사역의 궁극이란 단지 낡은 체제에 대한 그의 비판에 있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와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통해 새로운 인간적인 시작을 열었다는 데 있다. 나사렛 예수가 말과 행동, 특히 십자가 처형을 통해 왕권 의식을 해체하는 일을 했으며 또 그의 공동체를 향해 그러한 해체를 슬퍼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의 일에서 핵심은 해체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건설이었다. 이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활성화 사역이다. 첫째, 예수의 탄생은 새로운 사회 현실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활성화를 의미했다. 모든 옛 역사는 로마 제국 황제의 호적 포고령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예수가 창시한 새로운 역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작한다. 새 왕의 탄생은 하늘과 이 땅에서 전혀 다른 식으로 열리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표지이다. 이 새로운 시작은 옛 질서의 희생자들로부터 나온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늙은 여인(엘리사벳), 결백하지만 믿음으로 행한 젊은 여인(마리아), 말문이 막혀 버린 늙은 남자(사가랴), 그리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목자들) 가운데서 시작이 이루어진다. 둘째, 예수의 목회도 근원적인 시작을 열어 주는 활성화다. 예수의 탄생이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는 반면에, 예수의 사역은 그 희망의 가능성들을 절망의 세상 속에서 온전히 이룬다. 예수의 사역은 대부분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희생자들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셋째,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목회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었다.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구분이 무너지고 백지화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훨씬 더 근원적인 일이다. 치유하고 죄를 용서하는 일도 가치 있지만, 사람들을 병자와 죄인으로 만드는 조건들이 더 이상 통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더 큰 일이다. 특히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지복 선언이 근원적인 새로움의 결정체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새로운 미래로 향하게 하는 궁극적 활성화다. 부활은 지금까지 존재한 현실에 근거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전적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 행위다. 저자는 부활의 역사적 유일회성이라는 특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부활이 예전에 예언자들의 말에 의해 제시되었던 대안적 미래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세의 대안 공동체가 능력의 말씀으로 노예들을 해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미래를 선사받았듯이, 예수의 부활은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미래를 열어 주었다.
 

제7장 ‘목회의 실천에 관한 주’에서 저자는, 1~6장의 내용을 요약한 후에 예언자적 목회와 관련된 실천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브루그만은 예언자적 목회는 거창한 사회적 십자가 운동이라든가 의분을 쏟아 내는 비판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대안적 인식을 제시하는 목회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언자적 목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자기들에게 특별한 방식을 따라 행하는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대안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상에 대해, 그리고 어떤 상황에든 빛을 비출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취하는 태도와 자세, 해석학에 관심을 갖는다. 셋째,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애통과 탄식을 피력함으로써 무감각을 꿰뚫고 들어간다. 고통을 드러내어 함께 나누는 일은 고통의 현실을 가라앉게 만들고 죽음을 몰아내는 방법이 된다. 넷째, 예언자적 목회는 절망을 꿰뚫고 들어가서는 사람들이 새로운 미래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음을 믿고 그 미래를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확증해 주는 말과 몸짓과 행동만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가 있다.

마지막에 저자는, 이런 예언자적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 예언자적 상상력, 근원적 신앙은 인간이 쌓을 수 있는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예수의 관심이 하나님나라의 기쁨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예수는 이 기쁨을 약속했으며, 사람들을 이 기쁨으로 초청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미래를 기뻐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질서에 애통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이 애통이야말로, 하나님나라의 기쁨에 이르기 위한 형식적이고 외적인 요구사항이 아니라 유일한 문이자 통로가 된다.
 

끝으로 저자는,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애통과 희망이 지배 문화의 굴레를 깨뜨린다는 확신을 지닌 참된 신앙인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실천임을 강조하며, 결미에 목회의 실천 후기를 첨부한다. 슬픔과 희망을 품고서 저항과 대안을 이루는 일에 참여하는 구체적인 하위 공동체 몇 곳을 제시하고, 그들을 통해 예언자적인 상상력이 현장에서 실천되는 모습을 살펴본다.
 

예언자적 목회는 오늘도 가능하다
 

브루그만은 번영과 풍요를 구가하는 미국의 주류 사회를 흔들어 깨울 예언자적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적으로 주도적인 공동체와 갈등관계에 있는 하위 공동체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의 소비주의가 예언자적 담론과 행동을 촉발시키는 가장 주요한 환경이라고 말한다. 결국 예언자적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능력과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주류 문화에 창조적으로 대항하는 하위 공동체를 길러 내는 목회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파주의로 후퇴한 태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며, 또는 끝없이 저항과 비판을 제기하고 대결적인 ‘사회 행동’을 실천하는 삐딱한 공동체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배 문화가 이루어 놓은 모든 ‘가상현실’에 맞서는 생명과 희망의 공동체를 일구는 목회다.
 

이처럼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예언자가 먼 옛 과거에 속한 인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시대에 출현할 수 있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예언자의 서식지는, 고도의 자본주의적 소비주의 사회, 경쟁과 탐욕으로 인간의 정신을 마모시키는 도시의 소비문화에 의해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들의 누추한 삶의 자리다. 도시에 속한 교회가 바로 이 과도한 욕망 충족의 사회인 도시 문화를 해체하고 자애와 형제적 우애가 넘치는 사귐의 공동체를 이루는 예언자적 목회를 하기에 적합한 하위 공동체로 부름 받았다. 교회는 왕권 의식에 젖어 자신의 종말이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벳세다와 고라신과 가버나움 같은 도시 사회가 아니라, 가난하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애통하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위로를 경험하는 산상수훈 시민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브루그만은 무감각과 냉정함으로 강퍅하게 된 도시 문화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목회는,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비판과 활성화를 두 축으로 하는 예언자적 목회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예언자적 목회는, 기존 권력자들과 날카롭게 충돌하다가 감옥에 가고 이후 정치적 유명 인사가 되어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그런 목회가 아니라, 지배 문화의 변두리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애통과 체휼 목회를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죽을 때까지 비영웅적으로 감당하다가 남몰래 죽는 목회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교회가 참으로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가 보혈로 값 주고 사신 기업(基業)이라는 말이 아주 실감나게 다가올 것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