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생각해 보는 <복음과상황>의 길

다시 새해가 밝았다. <복음과상황>은 기독 청년이 직면한 ‘상황’을 ‘복음’의 눈으로 분석하고 재해석하여, 신앙 실천의 의지를 벼리도록 격려하는 잡지다. 복음은 바벨론 제국의 잔악한 세계 지배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이던 시대에,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달려오는 전령이 전하는 아름다운 소식,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소식이다(사 52:7). 복음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온갖 무질서와 혼돈처럼 보이는 이 세상이 하나님나라가 건설되어 가고 있는 토대라고 선포하는 메시지다. 복음서에 나오는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현장에서 이 복음은 가장 강렬하게 선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생생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명명백백하게 증시(證示)하는 계시 사건이다. 로마제국의 정치권력과 유다의 종교권력의 협잡 아래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은, 모든 불의한 권력 행사는 무효화되며 모든 부당한 재판은 뒤집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 준다. 나사렛 예수의 부활은 이 세상의 모든 강압적이고 불의한 권력 행위가 종국에 파탄하며 하나님나라와 의를 추구하다가 희생당한 모든 자들이 신원될 것을 믿는 대반전의 신앙을 가능케 한다. 요약하면 복음은 이 세상의 정부들과 위계 결사체들(군대·기업체·대학·종교집단 등)이 내린 모든 불의한 판결을 뒤집는 최후 권위다. <복음과상황>은 이 압도적인 하나님의 현실 초극적이고 세계 변혁적인 복음의 관점에서 현실 상황을 분석하고 재구성하려고 노력한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사태들을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지 않으면, 우리는 도덕적 무정부주의와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세계를 지배하는 열강의 주요 언론 매체나 불의한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는 신문만 읽으면 세상에는 강대국의 보무당당한 정복 전쟁과 수출용 다국적 기업들의 막힘없는 시장 지배만 영속할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감미로운 통치를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는 성도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목격하지도 못하며, 그런 의로운 성도들과의 신령한 교제에도 참여하지 못한 채, 악당들의 활동상을 소상하게 보도하는 신문만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세상적 힘의 질서에 순응적으로 변한다. 그들은 정제되지 않은 악당 기사, 뇌물 받아 부자 된 사람 이야기, 부동산 투기해서 돈 번 사람 이야기, 권력에 야합하여 이익을 누리는 목사들의 이야기를 읽고 분통을 터뜨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패배주의자가 되기 쉽다. 즉 세상은 힘과 권력을 가진 집단의 의지가 관철되는 현장일 뿐이라고 냉소적으로 판단해 버리기 쉬운 것이다. 도덕적 무정부 상황에서 회의하던 냉소주의자는 어느새 악착같은 이기주의자가 되고, 이 세계를 움직이는 기득권 질서의 일원으로 안착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냉소주의자에서 힘과 권력을 숭배하는 자가 되면 권력 의지를 갖게 되고, 이기고 빼앗고 움켜쥐려는 야수적 인격으로 바뀐다. 그 결과 이들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분노와 긍휼의 동선을 포착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역동적인 현존을 역사 속에서 감지하지도 믿지도 못한다. 무신론자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자기 몸을 맡기는 셈이다. 힘과 권력욕이 각축하는 세상에 참여하여 살아가는 과정은 마음이 강퍅해져 가는 과정이요, 하나님에 대한 감미로운 의존과 신뢰를 잊어 가는 과정이다.

이 흐름을 중단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역사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기를 내어 주는 예수 그리스도적 사랑 실천에 참여해야 한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하려는 삶을 벗어 버리고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과 봉사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다. 아무리 신앙심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실천적 순종이 없는 한 그 신념은 희석될 수밖에 없다. 겸손하신 하나님께 공명하는 유일한 길은, 깊은 고독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일상생활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다.

둘째,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들과 만나 서로 지지받고 격려받아야 한다. 이 성도의 통공은 통시적으로도 일어나야 하고 공시적으로도 일어나야 한다. 먼저 우리에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신 성도들의 발자취를 읽고 격려받아야 한다.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서로 둘러싸고 격려하는 운동장을 생각하면서 달려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성경 읽기와 신앙 인물들의 역사를 공부하는 길이다. 동시에 우리 시대에 믿음의 순전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형제자매들과의 교유를 통해 안위를 받고 격려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안고 십자가를 지는 성도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늘 확인해야 한다. 

불의한 힘과 권력자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기쁜 소식(사 52:7)에 근거하여 그것을 분석하는 훈련이 기독 청년들에게 요청된다. 이런 점에서 예언자 아모스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미시적 사태들을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복음의 거시적 관점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하여 동시대인들에게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답하려고 한 인물이었다.

<복음과상황>적 세상 읽기의 전범(典範), 아모스서

아모스는 분단 시대의 지성인이었으나 분단을 초극한 하나님나라의 시민이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두 왕실이 하나님의 백성을 갈랐으나,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통일이스라엘적 관점으로 자신의 분단 조국이 직면한 현실을 분석한 예언자였다. 그는 남유다 소재 드고아의 농민이었으나 북이스라엘의 벧엘로 올라가 불의한 종교와 정치권력의 야합을 규탄했다. 국제 정세를 분석했고 국제 관계의 정의와 불의를 논했다. 그는 법정의 부패와 악한 종교권력, 이들과 결탁한 폭압적인 정치권력의 실상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고, 가장 가난한 자들이 당하고 있던 비인간적 처우와 궁핍, 그들의 한숨을 숙지하고 있었다. 북이스라엘을 향해 쇄도하는 거대한 심판의 홍수를 한 세대 먼저 예견하고 그것으로부터 살아날 길을 제시했다.

아모스는 분명 풍요와 번영의 시기에 하나님이 보내실 가뭄과 궁핍을 예고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가장 기름진 목장도 가뭄에 타들어 갈 것을 경고했다. 그가 예고한 가뭄은 자연 순환의 일부로 경험되는 가뭄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갈 무서운 가뭄이었다. 그는 국제 정세 추이에 민감했고 국가 간에 벌어지는 전쟁, 조약 파괴, 그리고 전쟁을 통한 인신매매와 영토 침략을 비판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는 물론이며 인근 다섯 왕국의 대표적인 죄악들을 구체적으로 탄핵했다(다메섹[3~5절]; 블레셋[6~8절]; 두로[9~10절]; 에돔[11~12절]; 암몬[13~15절]; 모압[2:1~3]). 유다는 야훼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조상들이 섬긴 거짓 신들에 홀려 그릇된 길로 나갔다(2:4~5). 가장 늦게 언급되는 이스라엘이 부국강병이란 국가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국운 융성을 누리며 지은 죄는 가장 크고 심대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악은 가난한 동포들을 잔학하게 학대함으로써 언약 공동체를 파괴한 죄였다(2:6~16). 북이스라엘의 부유층은 의로운 사람을 돈 받고 팔고, 신발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다. 둘째, 성 문란과 음란 죄였다. 셋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을 거부한 거짓 종교에 집착한 죄악이었다. 신명기 법전에 의하면 아무리 가난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겉옷은 반드시 밤에는 돌려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것은 일교차가 심한 이스라엘 지역의 차가운 밤을 나기 위한 이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빚을 갚지 못한다고 전물로 압수한 겉옷을 제단 옆에 펴놓고 철야 기도를 드렸다. 넷째, 하나님의 구원사 망각 죄와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 상실 죄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을 얻게 하신 그 근본 은혜를 망각해 버렸다. 그들의 죄는 구원사 망각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필사적으로 저항한 죄였다. 나라의 영적 토대를 굳건하게 세워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일으키신 나실인에게 독한 포도주를 마시게 해 타락시키는 한편, 추상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의 입을 봉하려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특권적 선민의식으로 변질시켜 버린 나머지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3:1~2). 예언자 아모스는 야훼의 영으로 가득 차 당신백성의 죄악을 징치하려고 분연히 일어나신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대변하는 사나운 맹수처럼 심판 예언들을 분출했다(3:3~8).

예언자 아모스는 사마리아에서 자행된 불법과 잔학한 폭압 정치를 탄핵했다(3:9~15). 폭압 정치의 온상인 호화스러운 궁궐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거짓 종교들의 본거지인 벧엘 제단들은 동시에 초토화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아모스가 보기에 이런 사마리아의 부패와 가난한 자들의 억압 이면에는 사마리아 유한부인들의 망국적 유흥 문화가 있고(4:1~3), 북이스라엘의 거짓 종교가 있었다. 거짓 종교는 하나님의 정의(신적 친절)와 공평(부당한 권력자 억제와 견제)을 실천하는 데 무관심한 반면 맹목적인 기복 신앙을 고취하는 종교였다. 유력자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부추기고 눈감아 주는 종교였다. 지주들과 지배층 사람들은 가난한 동포들을 학대하고 억압한 죄를 가리기 위하여 거짓 종교에 더욱 매달렸다. 그 결과 이스라엘 농업은 재기 불능의 파산을 맞이할 것이며, 적군의 침략으로 사마리아는 유린될 것이고 나라의 기간요원들인 청년들은 대가 끊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할 수 없는 수준까지 강퍅해져 버리고(4:4~12), 이스라엘 왕국은 재기 불능의 몰락을 경험할 것이다(5:1~3).

이런 참혹하고 퇴로 없는 심판 신탁을 선포하는 중에서도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살아날 길을 제시한다(5:4~15). 거짓 종교의 상징 처소인 유명한 성소 순례를 즉각 중단하고 야훼 하나님 자신을 찾으라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6). 여기서 ‘야훼를 찾는 행위’는 소극적으로는 불의한 행동들을 즉각 중단하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즉 정의(신적 친절과 공동체적인 약자 돌봄)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잔학 행위를 그치며(7절),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다. 야훼를 찾는 길은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일을 즉시 그치는 것이다(12절). 적극적으로 야훼를 찾는 길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는 일”(15절)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공동체 전체의 안녕과 형제 부조적인 인애를 강조하는 예언자들과 올바른 재판관을 존중하는 행위다(10절).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야훼를 찾는 데 실패하고 멸망의 길을 자초했다. 이 몰락의 도상에서 하나님을 찾는 길은 양상을 약간 달리한다. 이 경우 야훼를 찾는 행위는 심판과 정화의 채찍으로 임하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공동체의 죄악을 지적하고 나라 전체의 살길을 제시하는 통렬한 예언자적인 탄핵을 받아들이는 것, 책망을 듣고 자복하여 죄악된 습속과 관행을 즉시 중단하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준비인 셈이다(5:16~24).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4절) 하는 일에 착수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면할 준비를 하는 길이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만날 준비를 하지 못하면 이스라엘은 다메섹 밖으로, 북방 먼 곳으로 유배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5:25~27). 

아모스가 보기에 지배층과 국가 지도층의 철저한 부패, 약한 동포를 억압한 죄는 사마리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죄악은 남유다의 시온에까지 전염되었다. 아모스는 남북 두 왕실 모두의 죄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탄핵했다. 멸망의 시각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실과 지배층은 죽음을 부르는 연회와 환각적인 유흥에 탐닉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연약한 백성들의 궁핍과 비참에 연대할 수 있는 공감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자들은 연약한 동포의 눈물과 한숨, 고통과 울부짖음을 듣고도 도저히 공감할 수 없고 같이 아파할 수도 없는 무감각한 자들이다. 그들은 권력의 술에 취해 있고 착취와 억압의 정치가 주는 혜택에 인이 박힌 자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의 호화로운 궁궐은 파괴되고, 큰 집들 작은 집들은 완전히 붕괴되고 거리는 살해당한 백성들의 시신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나라 전체의 파탄을 의미하는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를 운영할 기간요원들은 먼 북방 왕국으로 유배될 것이기 때문이다(6:1~14).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라 전체를 타격하는 대파국적 심판 전에 이스라엘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시기 위해 중보자 아모스의 중보기도를 유도하신다. 대파국적 심판을 철회할 명분을 스스로 찾으시기 위해 작은 심판들을 연쇄적으로 보내시겠다고 선포하신다. 먼저 농작물과 초장을 파괴하는 메뚜기 재앙(7:1~3)과 지진과 화산 활동을 암시하는 큰 불 재앙(바다를 삼키는 큰 불)(7:4~6)을 내리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아모스는 메뚜기 재앙과 큰 불 재앙을 통보받고는 간절하게 중보자적 탄원을 드린다. ‘야곱이 미약하여 그 심판을 견딜 수 없으니 심판 계획을 철회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2, 5절). 야훼 하나님은 두 번씩이나 중보자 아모스의 기도를 듣고 심판 계획을 철회하셨다. 이 예비적 심판 신탁들을 듣고 이스라엘은 응당 마음을 찢고 돌이켜야 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고 더욱 더 격렬하게 하나님의 예언에 저항했다. 그래서 셋째 재앙 예고인 다림줄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국 전체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에서 너무 크게 어긋나 자체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상황임을 밝히 드러내 주셨다(7:7~9).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북이스라엘은 자기갱신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총체적 저항으로 응답했다.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세와 왕실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의 예언에 저항하며 그를 마침내 고향 땅으로 추방해 버린다.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협박과 심판을 예언하며 생계를 유지하라고 조롱한 것이다(7:10~17). 아마샤와 여로보암은 아모스를, 협박과 심판예언을 남발하면서 금품을 갈취하던 예언자들 중 한 명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자 아모스는, 자신은 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땅과 재산이 있으며 진실로 자신을 격동시킨 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과 장악하심이라고 선포한다. 동시대의 예언자 미가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예언자가 아니고는 왕과 지주, 악한 제사장 체계를 향해 하나님의 전쟁과 분노를 대언하지 못한다(미 3:8). 

마침내 넷째 재앙인 여름 과일 한 광주리 예언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예고한다(8:1~13). ‘여름 과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카이츠는 ‘끝’을 의미하는 케츠의 유음이의어(類音異意語)다. 이 끝은 이스라엘 지배층의 몰락을 의미했다. 백주 대낮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 흑암 때문에 국제 정세와 시세의 향방을 몰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려는 젊은이들은 전곡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닐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예언자들은 이제 멸망을 앞둔 도성에서 종적을 감추어 버릴 것이다(8:11~13). 그래서 마침내 우상을 숭배하던 사마리아는 우상과 함께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모스가 받은 마지막 환상은 성전 문지방이 흔들리는 환상으로 북이스라엘 국가 종교가 파괴되고 왕국이 멸망당하는 환상이었다(9:1~10).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 성전 제단의 붕괴에서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나라, 하나님께서 그 임재를 철수해 버린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왕국이 무너진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궁전을 하늘에 세우사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을 직접 통치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인간 왕이 없던 출애굽 시절의 공동체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직접적 다스림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열국 중에 유배되어 흩어진 자들을 체질하여 남은 자들을 거두어 들이신 후에 새로운 이스라엘 역사를 시작하실 것이다. 만국 중에서 체질하고 정결케 하여 거두어 들인 이스라엘은 고토로 돌아와 다윗과 같은 성군의 통치 아래 다스림을 받을 것이다(9:11~14).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왕실의 멸망이 통일 군주 다윗의 나라 실현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 웃시야 왕 치하의 유다 왕국으로는 북이스라엘 동포들을 거룩하게 흡수통일할 수 없다고 보았다. 찢겨진 다윗의 천막이 회복되었을 때, 즉 공평과 정의의 다윗 통치를 실현하는 이상적인 왕실이 들어설 때에야 참다운 남북 동포들의 연합과 일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다윗의 천막은 현재로는 찢겨져 있어 북이스라엘 동포들을 품기가 어렵지만 하나님이 복구해 주신 다윗의 천막에서는 남북 동포들이 다윗 왕국적 기상을 회복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아모스는 북왕국이나 남왕국 모두의 창조적 재편을 통한 겨레의 일치, 즉 다윗 왕국적인 정의와 공평의 토대 위에서 일치와 연합을 희구했다.

아모스를 따라 우리 시대의 ‘복음’과 ‘상황’ 엮어 읽기

분단 의식을 극복하는 기독 청년

무엇보다도 아모스처럼 ‘복음’으로 ‘상황’을 읽고 해석하는 기독 청년들은 겨레의 분단 시대에 살지만 분단 의식에 매이지 않는다. 분단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것을 초극하실 하나님의 위대한 은총의 햇살을 기대하며 그 햇살을 선취하여 겨레의 화해와 일치 역량을 비축하기 위해 애쓴다. 생물학적 민족주의의 명분만 갖고는 남북한 동포들의 연합과 일치는 어렵다. 정의와 공평이 작용한 결과, 창조되는 평화(사 32:16~17)만이 기독 청년이 추구하는 겨레의 일치와 화해다. 공평과 정의는 유력한 자, 기득권 가진 자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부당한 불법, 편법 이익을 스스로 거룩하게 도륙하여 이웃 사랑과 봉사에 바칠 때, 그 결과 억울하게 압제당한 가난한 이웃의 하소연이 소통될 때 일어난다. 분단 체제의 해소는 공평과 정의의 구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언자적 비통과 공감의 영성으로 연단된 기독 청년

아모스는 외견상 풍요와 국운 융성의 시대에 궁핍과 기근을, 공동체의 파괴를 간파했다. 아모스는 남유다의 웃시야 왕과 북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 2세 치세 동안에 혜성처럼 나타난 예언자다. 여로보암과 웃시야는 대규모 농지 개간과 확보, 농업 생산력 증가, 영토 확장, 국제 교역 증가, 국방력 강화, 장기간의 평화 내치(52년간 통치한 웃시야와 40여 년간 통치한 여로보암 2세) 등으로 일반 역사에서는 나름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역설적인 사실은 웃시야와 여로보암이라는 두 왕이 다스리던 그 시기가 주전 8세기의 가장 위대한 네 예언자 아모스·호세아·이사야·미가가 등장하여 지주와 권력 엘리트, 부패한 제사장 계층을 집중적으로 탄핵하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두 왕 모두 거대한 지주들의 출현을 방치했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애국심과 야훼 신앙의 기초단위인 자작·자영 소농들의 공동체를 급격하게 해체시켰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 모두에 ‘가난한 자들’이라고 하는 미증유의 사회현상이 나타났다. 그 가난한 자들은, 북이스라엘이 국제적으로 전개되는 경제 흐름에 적응하기 위하여 대규모 조방농업과 대지주제도를 도입했을 때 조상 전래의 땅을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한 이스라엘 동포들이었다. 이 가난한 자들의 농토 박탈은 성문의 법정을 통해 내려진 불의한 재판을 통해 이뤄졌고, 풍요의 우상을 섬기던 당시의 거짓 종교에 의해 옹호되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자영·자작 소농 해체는 야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위협했다. 아모스는 가난한 자들의 집단적 출현이 나라 전체가 멸망당할 망조라고 보았다. 아모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을 때 바로 북방 메소포타미아의 앗수르 제국에서는 신흥 정복 군주 디글랏빌레셀 3세가 남서진 정복을 위한 무장 행렬을 차비하고 있었다. 그는 단지 봄과 가을에 조공 물품을 약탈하러 가는 정도가 아니라 한 나라의 기간요원들을 뿌리째 포로로 잡아 가서 재기가 불능하게 한 새로운 정복 군주였다. 아모스는 이 사실을 보고 북이스라엘 처녀가 쓰러졌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 전통에 정통한 기독 청년

아모스는 모세 이래로 이스라엘에 계승되어 온 선택, 계약, 가나안 땅 기업 상속 등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대우는 공평과 인애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의 근거가 됨을 믿고 있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전통을 숙지한 사람, 하나님의 구원사를 윤리적·도덕적·정치사회적 책임감의 관점에서 소화한 사람들 중에 일어난다. 하나님의 구원, 즉 선택과 계약을 자기만족적인 구원 신앙으로 변질시킨 사람들은, 늘상 하나님의 임재를 주장하지만 실은 하나님과의 공감을 상실한 자들이다. 하나님께 속 깊이 공명한다는 말은 가난한 지체들의 아픔과 슬픔에 메아리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가장 비참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하여 많이 아는 자들, 하나님의 은총 햇살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들의 삶에 주목하는 사람들 중에서 예언자가 일어나고 나실인이 나온다. 예언자는 비통의 감수성이 고양된 사람이다. 기독 청년들이 힘없고 권력에서 가장 먼 자들, 가장 비참한 사람들의 아우성에 응답하려고 할 때, 예언자적 감수성에 공명할 수 있을 것이다.

중보자적 공감과 체휼의 기독 청년

아모스는 폭풍 같은 심판 언어를 분출한 활화산이었으나 그 중심에는 긍휼과 동정심이 불탔다. 아모스는 정작 하나님의 편이 되어 임박한 심판을 통고해 놓고는 이내 이스라엘 백성의 편이 되어 심판의 완화를 간청했다. 예언자는 한편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추상같은 분노에 동참하여 불 같은 신탁을 쏟아 내면서도 심판으로 짓이겨질 위기에 처한 동포들의 처지에 한없이 동정하며 체휼하는, 자기모순적인 감정에 시달린 자였다. 아모스는 결국 메뚜기 환상과 가뭄 환상으로 북이스라엘을 전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심판 말씀을 듣고 그 엄혹한 심판을 철회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아모스는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심판을 철회시킬 정도로 강력하게 중보했다. 실로 예언자적 기독 청년은 비판자와 탄핵자임을 넘어 동정심과 애휼이 넘치는 중보자다. 
 
국제적 불의와 국내적 불의를 관찰하고 탄핵하는 예언자적 기독 청년

예언자 아모스는 정의와 공평과 관련된 국제 정세와 국내 정세에 정통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인근 나라들의 죄악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분석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었다. 그는 제단과 성문의 법정에서 벌어지는 비리와 재판 부패, 뇌물 재판의 실태를 잘 알고 있었고, 민심을 시원하게 울려 주는 촌철살인의 민속학적 지혜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상류층 유흥 문화의 내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야훼의 날을 구원과 빛의 날이라고 기대하는 자들-의 그릇된 구원 전승 해석의 자기기만적 작태를 알고 있었다. 아모스는 악한 종교(값비싼 순례 종교, 성대한 절기와 축제 종교, 기름진 제사 종교,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만족적으로 해석하는 영적 청맹과니 종교)와 악한 정치(민중 압제적, 강대국 외교 동맹 의존적)의 동맹, 악한 법정과 악한 지주들의 동맹을 통찰할 수 있는 사회과학적 인식 능력을 구사했다. 
  
결론

아모스적 교양과 영성을 가진 기독 청년들은 새해에도 ‘복음’의 확신을 갖고 ‘상황’을 분석하고 돌파하는 일에 투신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케 하는 일들이 병발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에 정통한 이해를 구축하기 위해 성경을 제대로 읽고 해석하는 일에 계속 도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고취된 기독 청년들만이 ‘사회 지도층과 권력기관들의 허물을 감히 지적하고 규탄할 용기’를 구비할 수 있을 것이다(미 3:8). 하지만 기독 청년은 자신이 심판 언어의 궁극적 발화자가 아님을 인식하고, 심판 언어, 비판 언어를 분출함과 동시에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미약한 동포들에게 가해질 심판의 참상을 체휼하는 비통과 공감의 사람들이 되어 중보기도에 몰입해야 한다. 미약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독 청년들은 하나님나라의 평화 비전에 붙들려 분단 시대를 초극할 실천력을 비축해야 한다. 다윗의 찢어진 장막이 다시 기워져서 남북한 동포가 함께 공존공영할 수 있는, 그리하여 전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 운동을 주도하는 하나님 중심의 겨레 화해를 성취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할 것을 부탁한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