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욥기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고난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 스스로가 큰 고난을 겪어본 일이 없다고 생각이 된 터에 여러 글을 통해서 나의 묵상은 상당히 개념적이고 추상적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최근 총리후보자의 발언으로 이슈가 된 고난을 통과한 공동체의 운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개념정리가 필요하겠다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중 페북을 통해 한 분이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글을 보고 검색하던 중 블로그에서 발견하게 된 글이다.

전체 내용이 중요하지만 눈에 들어온 문장들을 파란색으로 표시해본다.

읽고 나서 느끼게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과 고난을 이해할 수 있으며, 삶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과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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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yijaeju/220035070879

고난과 하나님의 전능 리뷰


기독교 신학의 최우선 과제는 부조리한 고통과 악의 문제에 직면하여 기독교화 된 형이상학이나 형이상학화된 신학을 구성하는 것에 있지 않으며, 형이상학적 질문의 방향을 따라 악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해명이나 형이상학을 통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을 해체시켜 그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고통의 희생자들이 그들의 고통을 더 크게 부르짖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전능과 고난의 극복 (정리)

전능하신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대한 그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힘을 행사하며 자신의 고유한 힘을 사랑 안에서 드러낸다.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드러나며 하나님의 전능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스스로 참여하는 사랑의 전능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사랑의 하나님이며, 타자를 위해 스스로를 고난 속에 던져 놓는 하나님의 사랑은 전능하다.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서 하나님의 전능과 사랑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약하기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기에 고난에 참여하며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인간과 피조세계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며, 이를 자신의 고난으로 짊어짐으로써 사랑의 힘을 드러낸다. 이 역사의 질곡 속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무력함을 통해서 힘들의 갈등을 품고 극복하는, 하나님의 고유한 아가페의 힘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전능이야말로 고난당하는 자가 고통의 현실 속에 주저앉지 않고 고통의 틈새로 비춰오는 새로운 현실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고통에 참여할 뿐 아니라 고통당하는 인간 자신을 끌어안고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의 아픔에 동참함으로써 불가능을 넘어서는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며, 이러한 사랑의 전능 안에서 고난당하는 자가 고통을 딛고 일어설 힘의 원천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 안에서 나의 고난에 함께하신다면, 나는 고난 중에 결코 홀로 버려진 존재가 아니다. 나의 슬픔과 아픔이 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다. 이 사실은 나를 해방시켜 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연대할 힘을 제공한다. 하나님은 피조물과의 자유로운 사귐을 위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전능을 포기하는 전능을 보이시며 사랑을 자신의 고유한 본성으로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 고난 속으로 들어오시며, 고난가운데서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의 창조적 구원적 힘에 대한 신앙은 고난의 흔적을 몸에 지니면서 그럼에도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삶과 용기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신앙은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12:10) 이는 하나님의 전능을 통해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짊어질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고난과 신학

고통의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더 이상 악의 본질과 원인을 형이상학적으로 물을 것이 아니라, 고통의 극복과 그것의 가능성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감 으로써 율법적, 종교적으로 이해되었던 인과적 연결고리를 해체해버렸다. 또한 그는 고통의 종교적 원인을 밝히려고 하기보다는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그를 치유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은 세계의 원인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다가오셨다.

우리는 고통과 악의 문제를 직면하여 기존의 형이상학적 신학과는 정반대로 미래적 가능성으로 하나님을 묻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때 미래적 가능성으로 희망되는 하나님의 힘은 현재의 모든 파괴적인 것을 극복하는 힘, 사망에서 생명의 충만으로 창조하는 힘이다. 고통의 현실 속에 있는 자에게는 이 하나님은 여전히 힘없는 존재로 경험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무력함을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경험한다면, 함께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미래적 힘의 선취로 이해한다면, 고통당하는 자는 현실의 부조리에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 희망에 하나님과 동참하게 될 것이다. 이 자는 고통과 악의 파멸적인 힘에 짓눌린 삶의 암흑 속에서도 일어설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시적 무력함과 가능적 전능을 연결시켜 주는 메타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현실의 틈새를 꿰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가능적 미래의 빛에서만 우리는 전능한 하나님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힘은 현실 속에서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 받는 사랑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사랑은 미래적 가능성 안에서 고난당하는 자를 일으키실 창조와 구원의 힘으로 희망된다.

기독교 신학은 신의 존재와 행위 속에서 진지하게 고난의 현실을 목도하며,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며, 동시에 새롭게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는 자리로 인식한다.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기독교 신앙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적 참여를 통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고난의 의미를 해석하는 분이 아니라 고난을 극복하게 하시며, 파괴적인 고난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고통과 악에 짓눌려 닫혀버린 삶의 철문을 파쇄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주신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