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한손에는 성서2016. 8. 17. 15:20
포기의 시대에 희망해도 되는 건 무엇인가?
[296호 커버스토리]
[296호] 2015년 06월 25일 (목) 13:57:14강남순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goscon@goscon.co.kr

너 자신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라 
Work out your own salvation
- 빌립보서 2:12 (필자 사역)

포기의 시대, ‘빵만으로의 죽음’을 넘어서기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이 물음은 인류가 끊임없이 씨름해 온 주제이다. 단순해 보이는 것 같은 이 물음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이며 어떠한 조건들을 충족하며 살고자 하는지 복합적인 사유를 하게 한다.

인간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기본적인 삶의 물적 조건이 충족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으며, 그 물적 조건 너머의 세계, 즉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는 ‘빵만으로의 죽음’(death by bread alone, 마 4:4)이라는 매우 심오한 메타포를 통해서 인간이란 ‘빵’이 필요한 존재이지만 그 ‘빵’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며, 그 ‘빵’을 넘어서는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임을 분명히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물적 조건이 하찮은 것이라거나 또는 외면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러한 물적 조건들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인간이 자신의 삶에서 만족감과 행복, 그리고 의미를 느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철학, 신학 등 여타의 인문학들은 사실상 이러한 물적 조건과 동시에 필요한 다양한 삶의 조건들을 다루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육체를 지닌 인간에게 자신의 생존을 위한 의식주와 연계된 다양하고 구체적인 문제들은 분명 ‘필요조건’이지만, 그것이 ‘충분조건’이 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 예수의 ‘빵만으로의 죽음’이 지닌 심오한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의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이 동물들과 다른 독특성이 있다면, 인간은 처절한 절망과 무의미성의 삶 한가운데에서, 희망과 유의미의 세계를 절절히 갈망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좀더 나은 세계에 대한 동경과 추구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 먹을 ‘빵’이 있어도 인간만이 자살을 한다. 그래서 알베르 카뮈는 ‘자살이야말로 가장 진지한 철학적 주제’이며, 자살이란 ‘삶이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고백’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의미 물음을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 독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요즈음 한국사회에서 이 ‘빵’의 문제, 즉 물적 조건을 충족하는 다양한 조건들에 위기가 왔다고 한다. 그래서 최근 청년층을 ‘5포 세대’(연애·결혼·인간관계·출산·내 집 포기)라고 지칭하는 자조적인 신조어가 마치 당연한 진리처럼 회자되고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경제 구조의 위기가 청년들을 ‘포기세대’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달관세대’ ‘절망세대’ 또는 ‘5포 세대’라는 신조어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왜냐하면 이러한 신조어들은 다양한 개성과 상이한 인생관을 지닌 무수한 개별인들에게, 집단적인 ‘복수(複數)의 표지’를 붙이면서, 한국사회에 자조적 패배주의를 강력하게 확산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집단적 표지는 청년 개별인들 사이의 다양성과 상이성들을 외면하고 그들을 총체적으로 단일화함으로써, 한국의 모든 청년들을 ‘고정관념의 상자’ 속으로 집어넣는 기능을 한다. 

‘자포자기하는 청년들’이라는 표상을 담은 여러 가지 신조어들은, 자신만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치열하게 모색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적 약자들과 연대하는 ‘변화의 주체자로서의 청년들’의 존재를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부정하고 배제한다. 밀양 송전탑에서, 광화문 광장에서, 강의실에서, 또는 크고 작은 다양한 모임들에서 한국사회를 더욱 정의롭고, 평화롭고, 평등한 세계로 만들기 위하여 자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연구하고, 글을 쓰는 ‘청년들’의 열정과 헌신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다양한 ‘과학적’이고 객관적 수치들을 제시하면서 한국사회의 청년들을 ‘5포 세대’라고 규정해버리는 비관적 분위기 속에서, ‘희망’은 사치스러운 말로 들릴지 모른다. 공허한 희망의 강조는 이 척박한 현실세계에서 ‘나’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형성하고자 하는 투지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염려가 앞설 경우이다. 그런데 ‘낙관’할 수 없다고 하여 ‘희망’까지 버릴 수는 없다. 처절한 절망과 무의미성의 삶 바로 그 한가운데서,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그것은 인간을 비로소 인간으로 만드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희망함, ‘불확실성의 세계’로의 기투
아일랜드 태생의 프랑스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노벨상 수상 작 《고도를 기다리며》는 “되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어(nothing to be done)”라는 말로 시작된다. 등장인물도 다섯 명밖에 안 되고 두 막으로 구성된 너무나 단조로운 듯한 이 희곡은 참으로 많은 이들에게 심오한 의미를 던져준다. 디디(Didi)라고 불리는 블라디미르(Vladimir)와, 고고(Gogo)라고 불리는 에스트라곤(Estragon)은 어느 시골 길에 서 있는 나무 밑에서 ‘고도’(Godot)를 기다린다. 이 희곡의 표면적 구성을 보면 1막과 2막이 거의 유사하며 지극히 단조롭다. 

디디와 고고가 단둘이 나와 이야기를 나누면, 뒤이어 포조와 럭키가 등장하여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사라진다. 그러고 나서 하루가 끝나갈 무렵이면 남자아이가 등장하여 “오늘은 고도가 오지 못하지만 내일은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떠난다. 그 뒤 다시 홀로 남아 고도를 기다리는 디디와 고고.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부터 고도를 기다렸는지, 언제까지 기다릴 것인지, 오지도 않는 고도를 기다리느라고 멀리 떠나지 못하고 왜 끊임없이 다시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지, 또는 도대체 고도가 누구인지를 그들은 알지 못하며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는 ‘고도’를 기다리지만 정작 그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인가는 전혀 알지 못한 채, ‘끝없는 기다림’ 그 자체가 그들의 일상적 삶이 되어 버린다. 표면적인 단순성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대화는 사실상 우울하고 복잡한 삶의 이야기들이며, 그들은 그 무거운 이야기들을 가벼운 코미디처럼 던지고 있다. 

1막에서는 장님이 아니었는데, 2막에서는 장님이 되어 나오는 포조에게 블라디미르가 언제부터 맹인이 되었느냐고 묻자 포조는 “나에게 묻지 마. 맹인에게는 시간개념이 없단 말이야”라고 말한다. 고도의 메신저인 소년도 그가 이전에 이곳에 왔었는지 아닌지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에, 우리가 매일 매일 그토록 집착하고 매달리고 있는 달력 속의 크로노스적 시간이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 희곡에 나오는 모든 이들에겐 우리가 자명하게 느끼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 개념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결국 ‘시간’이란 사실상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주는 것은 답이 아니라 끊임없는 물음들이다. 방랑자 같은 두 사람이 정체불명의 고도를 기다리는 끝없는 기다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나누는 무수한 이야기들은 삶의 의미 물음과 희망이라는 힘겨운 과제와의 대면을 애써 회피하려는 우리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비극적인 코미디와도 같은 《고도를 기다리며》는 우리의 일상적 세계를 돌연히 넘어서서 우리의 살아있음의 의미는 무엇이며, 무엇을, 어떻게 희망하고 기다려야 하는지 근원적인 물음들을 던져주고 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절망적으로 보이는 듯한 우리의 삶,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듯한 암흑의 한가운데서 이러한 물음들과 대면하는 것은 사실상 얼마나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희망’이란 ‘고도’처럼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수동적으로 막연히 기다리기만 해서는 ‘희망’이 나의 삶 속에 체현될 수는 없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것 같은 이 ‘포기의 시대’에, 나무 밑에 앉아서 ‘고도’가 나타날 것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무엇을 과감히 ‘포기’하고 동시에 무엇을 새롭게 ‘부여잡을 것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과 치열한 씨름을 해야 한다고 나는 본다. ‘희망하는 이들’—그들은 나무 밑에서 막연히 무엇인가 도래할 것을 기다리는 이들이 아니라, 그 기다림의 나무 밑을 단호히 떠나서 ‘불확실성의 미래’를 향해, ‘불가능해 보이는 세계’를 향해 용기 있는 걸음을 내딛는 이들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 ‘확실한 것’ 또는 ‘가능한 것’에만 자신을 기투(企投, 현재를 초월하여 미래에로 자신을 내던지는 실존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실존주의 철학의 개념-편집자)하는 이들은 사실상 과거 속에 자신을 매어두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없다’(눅 1:37; 막 10:27)고 성서는 전한다. 

희망에 대항하는 희망
‘이 세계는 지금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다’는 말은 이제 과장이거나 왜곡된 묘사가 아니다. 생태계는 파괴되고 있으며, 다양한 전쟁과 폭력은 인간을 포함한 뭇 생명들의 삶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정치, 종교, 문화의 이름으로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인간적 기본 권리의 심각한 유린으로 인해 무수한 사람들이 고통과 암흑과 같은 절망에 시달리고 있다. 더 나아가서 모든 것이 자본화되고 상품화되면서, ‘물질적 가치’가 평등, 평화, 정의와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근원적으로 뒤흔드는 세계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희망한다는 건 도대체 무엇인가. 

희망이란 암흑처럼 느껴지는 절망적 현실 속에서 인간을 살아남게 하는 ‘치유제’가 되어왔다. 반면 ‘왜곡된 희망’은 인간에게 ‘독’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희망이란 ‘위험의 위로자’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칸트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네 가지 물음을 가지고 씨름했다. 그중 ‘나는 무엇을 희망해도 되는가’라는 물음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중요한 화두로 다가온다. 칸트는 무엇을 ‘희망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희망해도 되는가’(Was darf ich hoffen)라고 물음으로써, 희망에는 ‘해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즉 모든 희망이 다 정당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타자들을 짓밟고서라도 눈에 보이는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저버리는 이기적 탐욕과 욕망에, ‘희망’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칸트에 의하면, 그러한 탐욕과 욕망만을 충족하기 위한 행위들은 ‘급진적인 악’(radical evil)이다. 

여기에서 ‘낙관’과 ‘희망’의 차이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낙관’이란 ‘사실적 수치’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수치와 통계들에 의해서 사람들은 다가오는 미래를 비관하기도 하고 낙관하기도 한다. 그러나 ‘희망’이란 눈에 보이는 객관적 자료가 아니라, 보이지는 않지만 사랑, 우정, 정의, 평화 등과 같이 인류를 지켜온 ‘소중한 가치’들에서 출발한다. 그러한 불가시적 가치들을 수치화하여 사실적 자료로 전환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보이지 않고 만져질 수 없는 가치들에 근거해서, 더욱 정의로운 세계, 좀더 평등하고 평화로운 미래를 꿈꾸고 기다리는 것—이것이 바로 ‘희망함’의 정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희망’이란, 구체적인 수치들을 계산해서 그 결과를 낙관할 수 있는 상태를 두고 붙이는 이름이 아니다. 주식투자를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상황을 면밀하게 계산하고 데이터를 분석하여 그 결과를 예견하고 낙관하는 것을 가리켜 ‘희망’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반면 모든 것에 희망이 없는 극도의 절망적인 상황 한가운데서, 모든 객관적 수치들이 비관적 미래를 예견하는 그 상황 한가운데서, 암흑과 같은 절망을 넘어서는 용기와 더불어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열정을 갖는 것— 바울은 이것을 ‘희망에 대항하는 희망’(hope against hope)이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롬 4:18). 한글성서에는 이 심오한 표현이 잘 드러나 있지 않은데, 영어로 보면 ‘희망에 대항하는 희망’이라는, 모든 것들이 절망적으로 보이는 그 한가운데서 강한 희망의 끈을 부여잡아야 하는 우리의 모습을 매우 시적인 메타포로 표현하고 있다.  

‘희망함’은 인간의 존재 조건
진정한 신앙인 또는 진정한 종교인이란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끊임없이 성숙시키고 풍성하게 만드는 이들이라고 나는 본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표상이란, 아직 오지 않았지만 더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암시한다. 아직 오지 않았지만 도래할 세계에 대한 ‘믿음’, 그 믿음을 가지고 지금의 현실을 좀더 나은 세계로 만들기 위한 ‘희망’의 몸짓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러한 ‘믿음’과 ‘희망’이 결국은 나, 타자, 신에 대한 ‘사랑’을 일구어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필연조건들이 된다.  

다양한 객관적 수치들이 미래를 ‘낙관’하기 어렵게 하지만, 그렇다고 ‘희망’을 버려야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희망함’이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지니며 지금보다 나은 세계를 구성하는 가치를 향해서 ‘나’를 맡기는 삶의 방식이다. ‘나/우리’만이 아니라 ‘너/그들’도 ‘함께’ 동료시민으로, 기독교적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세계를 꿈꾸는 희망, 그 누구도 차별받거나 그 존재가 부정되지 않고 인간 그 자체로 존중받는 사회를 꿈꾸는 희망은 ‘사치’가 아니다. 오히려 ‘희망함’은 우리를 인간으로 살아있게 하는 ‘필연적 요청’이며, 지금보다 나은 세계를 향하여 우리 모두가 간직하고서 함께 밝혀 나가야 할 소중한 삶의 촛불이다. 

희망의 촛불을 가슴에 지니고 살아가는 이들에 의해서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우리가 몸담은 이 세계를 보는 눈을 새롭게 형성해가야 한다. 무수한 ‘이름 없는 별’들이 모여 아름다운 행성계를 이루는 세계로, 작은 걸음이라도 용기 있게 내디딜 수 있다. 가슴속 깊이에 ‘희망의 촛불’을 지닌 이들에 의해, 연애, 결혼, 인간관계의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연애관, 결혼관, 인간관계관이 창출될 수 있는 가능성의 공간이 열리게 된다.

‘우리는 희망한다. 고로 존재한다.’   
 

강남순
현재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학교 브라이트신학대학원의 종신교수이다. 최근 영어 저서로는 《Diasporic Feminist Theology》와 《Cosmopolitan Theology》가 있고, 한국어 저서로는 《현대여성신학》 《페미니즘과 기독교》 《페미니스트 신학》 등이 있다. 미국 드류 대학교(Drew University)에서 공부했으며(Ph.D.), 세계신학교육기관협의회(WOCATI) 회장을 맡고 있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