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조적인 작품은 언제나 고유의 생명력을 가진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으나 그 그림의 본질을 복제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이 아는 전부를 다른 예술가에게 거리낌 없이 줄 수 있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기 삶의 중심에 근접해 산다. 그래서 타인의 성공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진정한 예술가는 타인의 성공이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타인의 작품은 도리어 그의 지평을 넓혀주고 그의 은사를 끌어낼 뿐이다. 28
그는 자신의 자리가 있음을 알며, 그 자리를 자신에게 보여 주실 분 곁에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삶이 그의 소명이 된다.
삶을 소명으로 여긴다는 말은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다. 넓은 길은 생각이 없는 길, 좁은 길은 생각이 있는 길이라 불러도 좋다. 30
부모는 자녀의 개성을 끌어내고 자녀가 자신만의 특별한 운명을 자각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자녀를 자신의 연장 정도로 여긴다. 32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군중에서 발을 빼도록 도모하신다. 어떤 사건이나, 번뜩이는 통찰이나, 큰 아픔이 일어난다. 34
자신이 그 길을 가지 않고 있는데도 그 길을 가고 있다고 상상하기 십상이다. 이 지점에서, 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놓친다. 이들은 자신은 두 길을 알고, 또 두 번째 길을 선택했으니 당연히 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35
내적 여정의 세 가지 소통. 자신, 하나님,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
모든 동물은 자신만의 세계에 산다고 말한다. 그것은 움벨트, 곧 자신이 반응하는 바깥 세계의 대상으로만 구성된 닫힌 세계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좁은 움벨트를 넓히고 더 알아가는 과제를 평생 수행한다. 42
이렇게 자신과 소통하는 일에는 질문하기도 포함된다. 교회는 질문을 끌어내는 곳이라고 알려져야 마땅하다. 43
우리는 경직되고 편협한 삶이 노년에 시작된다고 착각한다. 사실, 이런 삶은 이십 대나 삼십 대에, 또는 언제든 우리가 내적 여정을 포기할 때 시작된다. 44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알려면, 자주 자기 연구를 내려 놓고 하나님의 '크심과 위엄'을 묵상해야 한다.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고는 절대로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48
그러나 그분을 아는 주된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 뿌리를 내린 기도다. 48
삶의 내용과 질은 우리가 평범한 일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우리가 시간을 내어 내적인 삶에 자양분을 공급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달렸다. 49
**헌신이란,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 "기꺼이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에게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볼 때까지, 서로의 관계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임을 알 때까지, 서로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살자고 약속하는, 비참하고 비틀대는 한 무리의 죄인들에 대한 헌신이다.
* 교회 밖에서 그룹을 만들 때, 우리는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들과 멀리하고 싶은 사람들을 구분한다... 교회는 유일하게 이렇게 하지 않는 곳이다. 한 사람을 교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까닭은 그가 특정 유형이기 때문이거나, 삶에서 특정 위치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사람을 부른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부르셨다. 58
이런 이상한 공동체에서, 우리의 헌신은 일시적이지 않고, 우리는 마음껏 행동하고 말하게 된다... 말 때문에 잘릴 위험이 없음을 안다면 모임에 대해 부정적 반응과 행동을 서슴없이 표현해도 된다... 다시 함께할 테고, 그것이 지금 이렁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것에 좌우되지 않음을 안다면 자신과 형제 사이에 무엇이 가로막혔는지 말해도 괜찮다. 59
* 평화는 그리스도인이 교제하는 목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우리는 진실한 모습을 서로 숨기면서까지 '좋은'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런 평화를 추구하면 순례자로 동행하는 걸 포기하는 셈이다. 60
구르지에프는 우리가 자신에 대한 환상이 아닌 진짜 자신을 보아야 하며, 마찰은 갈등을 일으키고 갈등은 사람들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는 이론을 적용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곳에 마음이 더 잘 맞는 환경과 마음에 더 잘 맞는 사람, 즉 "나처럼 생각하고 나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렇게 유별난 그룹을 고집해 봐야 유익이 없다고 합리화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상당히 우둔한 생각이며 허상이다. 61
내적인 삶을 키우는 목적은 잣니에게 비밀스런 유익을 안겨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조용한 아침 시간에 자기 내면에서 아늑한 자리를 찾는다고 해도, 사람들이 살아가며 부대끼는 현장에서 그 아늑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곳에서 한 말과 그곳에서 빚어진 우리의 모습이 바깥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결국 그 일은 중요하지 않다. 65
내적인 삶의 성장과 관련된 훈련을 향해 늘 "율법주의!"라고 불러대는 사람들이 특별한 일을 성취하는 데 꼭 필요한 엄격한 훈련에 대해서도 그렇게 불러대는 오류를 범한다.
내면과 외면은 모두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68
* 교회는 지금껏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할 때가 너무 많았고, 우리가 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돕지 못했다. 새로운 형태의 교회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에 맞게 만들어질 것이다.
외적 여정은 부분적으로 내적 여정에서 발견한 은사에 따라 결정된다. 71
한 사람의 삶에서 어느 순간에는 합당한 소명이 다음 순간에도 반드시 합당하지는 않다. 74
자신이 진리로 이애하는 대상에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줄 때, 새로운 앎에 이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그분의 세상과 화해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이다. 이러한 화해는 우리 안에서 화해가 이뤄지는 만큼만 이뤄진다. 75
그는 타인의 은사를 끌어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우선 과제이자 사명이라고 요약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마음 깊이 알고 있으며,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입니다." 76
* 지금 하는 일을 아주 즐겁게 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깊은 것을 끌어낼 방법을 가진 셈입니다. 이런 사람이 좋은 소식(Good News)입니다. 그는 좋은 소식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 자체가 좋은 소식입니다. 그는 새사람이 누리는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은사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사람은 성령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게 할 수 있습니다." 77
섬김에 뿌리내리지 않는 기독교 공동체는 없으며, 관계에 뿌리내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섬김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씻기신 발은 다름 아닌 친구들의 발이었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란 쉽지만 이웃을,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82
* 고든은 그룹 중재자의 책임에 대해, 늘 무엇보다 그룹의 하나됨을 유지하고 그 깊이를 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려면, 계속해서 소명을 일깨우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가 말한 '소명을 일깨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간단히 말해, 매우 기본적인 사실을 거듭거듭 말한다는 뜻이었다. 92
세이비어 교회에서 우리는 공동체로 살아간다. 공동체로 살면서 자기 문제를 감추지는 못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우리의 어린 시절 가정에 가장 근접한 공동체다.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 받은 상처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새로운 '믿음의 가정'에서 다시 밝히 드러난다. 102
* 진정한 성장에는 아픔이 따른다. 진정한 깨달음에는 고통이 따른다. 103
또한 정신 건강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해체 과정이 없으면 인격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이론들을 진지하게 숙고한다. 우리 자신과 타인들의 눈에 우리의 내면이 산산조각 나고 있다면, 그런 과정은 인격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한 준비 단계일 것이다. 103
우리 사회가 노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삶에서 영적 차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삶에 새겨진 하나님의 계획을 놓치고, 삶이 각 시기마다 우리 존재를 새로운 단계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삶에서 우리의 감정을 격동시키는 다른 모든 위기는 성장과 더 깊은 사고를 낳는 동일한 창조적 잠재력을 갖는다.
**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큰 문제 없는 사람들을 가장 불쌍히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고통과 상실의 기억이 없으며, 한밤중에 울었던 기억도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겪는 아픔과 상실을 듣는 귀가 없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슬픔에 잠긴 세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104
*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잘 듣지 못하는지 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간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말도 듣지 못한다. 111
사실, 우리는 태생적으로 타인에게 존재하고, 순간에 대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로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은 내주하시는 교회의 주님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을 그분의 임재 속으로 불러들이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 자신이 그분의 임재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간의 하나님과 함께 서 있는 대신, 수많은 길을 달려 내려온다. 125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된 말씀만이 우리에게 들린다는 인식이 거의 없다. 내면의 깊이가 더할 때마다 거룩한 것에 마음이 열린다. 127
우리는 미래마저도 과거를 회피하는 도피처로 삼는다. 다시 말해, 자기 삶의 역사를 살피려 들지 않고 미래로 피하려 든다...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사랑으로 모험을 감행할 만큼 안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훈련'이란 사랑이 있다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실패와 시련, 상실을 비롯해 어떠한 삶의 역경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열정적인 사랑이 고난을 당당히 견디게 해 주리라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144
우리가 종종 새것을 못 받아들이는 까닭은 자신의 자리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145
구성원들이 이렇게 말하는 그룹은 질병의 징후를 보이는 셈이다. "이 작은 그룹은 멋져요. 이곳 사람들을 사랑해요. 이들도 저를 사랑하지요. 이곳이 우리 교회예요. 다른 사람들은 필요 없어요." 157
데이스프링 수련회를 통해, 목회자들은 교회 갱신의 문제가 자신의 내적 문제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160
수련회에서 우리는 자신과의 소통과 하나님과의 소통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자주 분명하게 확인했다. 165
교회는 보살핌과 관심과 교육을 통해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 감의 여정을 스스로 시작하게 해 주어야 한다... 종이신 주님을 본받아 사는 공동체를 말하지 않고는 세상 속의 교회를 말할 수 없다... 자신 속에 있는 분리의 담을 허무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가시적 공동체만이 소외와 고립으로부터 우리를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175
** 타인을 사랑하는 첫걸음 중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특별한 카리스마를 불러내시게 하는 것이라고 고든은 다시 강조했다. 그는 사랑이란 자신을 타인에게 주는 사건이며, 우리의 본질이 실현되지 않으면, 즉 우리가 본래 의도되었던 존재가 되지 못하면, 자신을 타인에게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잠재력이 막혀 흘러갈 창조적 통로를 찾지 못하면, 우리는 타인에 대해 시기심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지 않고는 타인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182
"여기서 말하는 충만하고 결실이 풍성한 종교란 신비적이고나 정서적인 요소, 역사적이거나 제도적인 요소, 지적이거나 과학적인 요소 사이의 창조적 긴장을 포함하는 종교를 말한다." 187
1. 존재하는 사람이 되려면 내적인 삶을 발전시켜야 한다. 2. 삶을 향해 열려 있는 복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은사를 찾아내고 활용해야 한다. 3. 잠재력을 실현하려면 훈련해야 한다. 4. 성장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알아야 한다. 5. 받기보다 주면서 사는 데 강조점을 두는 삶으로 보이지 않는 선을 넘으려면 목자가 되어야 한다. 188
* 이들에게 '기독교 공동체'로 산다는 말은 선교한다는 뜻으로 보였고, 교회로서 선교한다는 말은 공동체로 산다는 뜻으로 보였다. 194
우리는 먼저 서로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가 선교하며 만날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된 거지요. 195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실패에 율법주의적 태도를 취했으며, 규범이란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고 구성원들이 서로를 위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잊었다. 214
이들이 거리에서 보았던 어둠은 자신 속에서 발견한 어둠과 다르지 앟았다. 이것은 이들에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 같았다. 어쩌면, 이들 사이의 사랑만큼 중요한 것으로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증명했다.
그해 말에 누군가 이들에게 언약 공동체를 정의해 보라고 했다면, 세밀한 정의를 제쳐 두고 간단하게 몇몇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며 무엇인지 알려고 몸부림쳤던 씨름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227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는 안정이냐, 위험하지만 온전한 삶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269
제자의 삶이란 적어도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며 구체적이고 책임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공동체에 속하는 삶을 포함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그 속에서 우리의 장점을 발견하고 약점을 드러내는 공동체이고, 그 속에서 친밀감을 쌓고 상처를 경험하는 공동체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이해와 가치관에 적대적인 형제를 참아 내는 공동체다. 이것은 그 속에서 우리가 지지를 받는 공동체이며, 배신당하기도 하는 공동체다. 이러한 공동체는 타인을 위한 사람이 목표가 되는 공동체다. 2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