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2017. 6. 28. 22:38

복음의 공공성을 읽고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신뢰를 잃었다. 주일과 평일 사이 신앙의 불일치는 어제 오늘 일도 아니다. 어째서 이런  신앙의 균열이 생겨났을까. 신앙의 공적인 성격을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왜 이렇게 사적인 종교가 되어버렸을까. 기복신앙이나 개인의 탐욕과도 깊은 연관이 있겠다. 그러나 처음 한국에 기독교가 전해질 때 복음을 받아들여 신자가 될 때 엄청난 핍박과 순교까지 감당해야 했다. 개인이 신앙을 갖는 것 이외에는 더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가 이런 핍박과 박해를 인내하고 뛰어넘어 어느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공적인 자리에서 어떻게 발휘되어야 하는지는 별로 강조되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신앙 좋은 사람이지만, 직장과 사회에서는 전혀 비신앙인들과 다를 바 없는 자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실질적 의미는 복수로 존재하는 사람이다. 공동체야 말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이다. 이런 관계를 고려할 때 우리 신앙은 수많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공적일 수밖에 없다. 48-49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왕적인 존재로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왕의 통치가 공적이듯이 성도의 삶과 행위가 더더욱 공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59

다스리는 것이 사람의 존재 이유라고 선언하며, 노동이 그 다스림의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예배하라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일하라고 사람을 지으셨다. 노동은 하나님이 그분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의 존재 근거다. 사람에게 주신 사명은 제의가 아니라 일상의 일이었다. 65

탐욕의 근원은 자기애다.83

하나님의 명령보다 개인의 욕망을 최우선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모든 영역을 사적 욕망의 영역으로 삼아버린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풀이한다.

원죄를 반복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원복을 따라 관계를 피차 회복하고 세우며 공적 본질을 지켜나가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 것인가 102

 

정의와 공의.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 받는 것은 열방을 위한 순종의 선택이요, 부르심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백성은 근본적으로 공적 존재다. 12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땅고 자손의 약속을 주시는 이유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129

하나님이 공적 이유로 그분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쩨다카로 규정할 수 있는 상황은 마음을 같이 하는 것, 동의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쩨다카를 행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내 처지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쩨다카는 근본적으로 공적 문제다. 132.

하나님의 법도인 규례를 근거로 재판에서 판결을 내린다는 점에서, 미슈파트는 하나님의 법도를 근거로 올바른 사회 질서를 이루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132

성문이 쩨다카와 미슈파트의 현장이라는 점은, 이 두 가치가 근본적으로 사사로운 것이 아니며 공공 영역과 연관이 있음을 명확이 보여준다.

외모와 뇌물에 좌우되는 재판은 자신이 유익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과 동일하다136

공적이라는 말은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도 씅니다. 138

이스라엘의 미슈파트와 쩨다카의 준수 여부는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통해 바로 드러난다. 141

정의와 공의가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약자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공적 차원을 고려한다는 의미가 이 사회의 약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구체화된다.142

결국 의인들의 세상은 개인이나 집단의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서로 도으이하고 공감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세상이다. 143

 

출애굽

시내 산 율법은 근본적으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법이다.

선악의 판단 기준이 하나님, 하나님의 법이 될 때 공동체적인 삶, 함께 살아가는 삶, 달리 말해 공적 삶이 가능해진다. 160

다들 죄 짓는 중에도 홀로 죄 짓지 않는 한 사람이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아니다. 그럴 때도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함께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를 찾으신다. 161

 

문제의 본질은 동성애가 아니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힘없는 나그네를 향한 집단 성욕의 폭력적 발현이 문제였다. 교회는 동성애와 싸우는 곳이 아니라 나그네를 대접하기에 힘쓰는 곳이다. 179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는 것이 소돔의 멸망의 원인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겨오이하지 않는 이들의 근본 특징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삶은 마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그저 자기가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고 다른 이에게 유익을 주며 정직하게 사는 삶이다.

요셉 본문은 우리에게 기독교인임을 종교 의식을 통해 말하지 말고, 일상을 통해 말하라고 한다. 190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는 마침내 성공해서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그 부를 가지고 한 일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영향력 있는 위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193

 

레위기19

공적 규례의 본질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삶을 든든히 지켜내는 것이다.

연약한 이웃을 바르게 대하는 거룩함에 대한 말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세속적인 것 같은 개념을 가장 종교적인 단어인 거룩함으로 표현한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거룩한 삶은 내 자신의 자선보다는 사회 경제적인 틀, 법적인 틀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고, 내 자신의 자선보다는 서로 안정적으로 보호하는 구조에 관심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인간이라는 이상은 제도와 구조의 변화라는 현실과 함께 가야 한다.

지극히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일 수 있는 종교적 개념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19장의 특징이다.

 

우상숭배는 전적으로 자기를 위한사적 종교다.

자신의 힘과 이익과 안전과 평화를 위해 신을 조종하는 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이므로, 우상숭배가 번성하는 곳에서는 힘없고 약한 자들이 짓밟힐 수밖에 없다. 예언자들이 우상숭배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사회 경제적 불의를 고발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295

 

관계 안에서 이루는 쩨다카와 쩨다카 있게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미슈파트는 현실에서 가장 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 예민하게 드러난다. 315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개인의 사귐을 더 깊게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없다. 하나님에게 돌이키는 것은 성문에서 회복하는 정의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공적 삶의 현장에서 지켜내는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렇게 공적인 신앙을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한 데서 비롯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신앙의 사사화는 부족하거나 미흡한 신앙이 아니라, 잘못된 신앙이다. 342

사회의 약자들을 중심에 둔 사고방식과 실천과 행동이야말로 야훼 신앙의 본질이며, 공적 신앙의 핵심이다. 343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섬김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