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인문2018. 4. 10. 18:08

핵심은 불균형이다. 경제의 규모는 막대하지만, 그 결실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나누는 시스템이 부실하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지성은 쇠퇴하고 있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면서 죽음을 준비하기는 훨씬 힘들어졌다. 경쟁력은 높아졌지만, 혹독하게 경쟁하면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부작용과 개인적 피로감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40쪽.


인간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원하는데, 바로 존재감이다... 모욕은 바로 그 자존감을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62쪽.


즉, 수치심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서 유발되는 감정이라면, 모욕감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따라서 수치심에는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섞일 수도 있지만, 모욕감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모욕감을 유발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 분노나 원한 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64쪽.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적인 언행에 가깝고, 경멸 또는 멸시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가깝다. 모욕에는 적대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반면, 경멸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 67쪽.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지역에서 사회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파괴된 존엄성을 회복하는 작업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개개인의 마음을 깊이 살피면서 자아를 새롭게 수립하는 것, 그리고 인간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공동체의 건설이 그 핵심이다. 79쪽.


그러나 이런 굴종과 복종은 사람에게 요구해선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은 자신이 맞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에 반해 굴복한다는 느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80쪽.


올드보이나 디스커넥트 같은 영화에서 잘 묘사했듯이,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기억은 세상에 대한 증오 또는 자기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억울하게 수모를 당했다는 피해의식은 다른 집단에 대한 맹렬한 공격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82쪽.


한국인의 삶은 부정적인 감정에 많이 노출되어 있고, 거기에는 불합리하거나 불공정한 또는 그러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관행들이 맞물려져 있다... 그러나 변화를 일으킬 힘은 턱없이 모자란다. 그런 감정 자체를 표출할 통로조차 너무 비좁다. 그 어두운 에너지가 해소되지 못한 채 증폭되고 사회적으로 악순환을 일으킨다. 111쪽.


잘사는 것을 경제적인 부유함으로 등치시키는 어법에는 한국인의 생활 경험과 가치관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잘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는 개념이다. 건강, 인간관계, 경제적인 여유, 물리적인 공간의 안락함, 일의 보람, 마음의 평화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맞물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느 ㄴ왜 그 가운데 경제력 하나만을 따지게 되었을까?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가 반세기 동안 진행된 압축 성장 덕분에 삶이 극적으로 달라졌다...한국의 경우 그 변화가 워낙 초고속으로 진행되어서 경제적인 차원의 변수가 훨씬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13쪽.

조선사회에서는 보편적으로 개방되어야 할 '귀'마저도 벼슬이라는 것으로 축소되고 획일화되었다는 것이 최 교수의 평가이다. 

그에 비해 '귀'는 공적인 차원에서 끝없는 확장성을 가진다. 이웃에게 덕이 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에 힘쓰면서 삶의 격을 드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벼슬로 '귀'의 의미가 국한될 때, '가문의 영광'을 세우는 비좁은 목표를 넘어서지 못한다. 116쪽.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요소들을 기준으로 사람의 높낮이를 매기고 귀천을 따지는 것이 우리의 속물적 문화다.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발견하면서 자신의 귀중함을 깨닫고 서로의 존엄을 북돋아주는 관계가 절실하다. 그러한 관계가 자라나는 사회적 풍토를 조성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있다. 119쪽.


신분제의 와해에 결정타를 매긴 것은 6.25 전쟁이다. 124쪽

따라서 권력의 시스템이나 사회 구조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거나 논쟁하지 못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비전을 창조하면서 현실과 맞붙어 싸운 경험이 박약했다. 그 결과 겉으로 보이는 신분제도는 사라졌으나 신분의식은 온전존하게 되었다. 혼란기를 통과하면서 기존의 지배 질서는 무너졌지만, 귀족적 차별의식은 오히려 보편화되었다. 그래서 한국은 여전히 전통적인 신분 관념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다.  126쪽.


'오만과 모멸의 구조'는 무엇인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멸시하고 조롱하는 심서잉 사회적 관성으로 고착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모멸감을 증폭시키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에 대한 과민함이 그것이다. 한국인들은 그 점에서도 유별나다는 것을 앞서 언급한 바 있다. 138쪽.


개인주의는 여러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매긴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한국에는 그런 의미에서의 개인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 남에 대해 신경을 너무 곤두세운다. 141쪽.


한국의 근대화는 합리적 개인화를 수반하지 못한 채 집단 에너지를 동원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공동체는 빠르게 해체되었지만, 대안적인 공동체나 자발적인 결사체의 형성은 지극히 미미했다... 고도 성장기에는 상승 이동의 즐거움으로 그러한 부실함이 상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저성장 단계로 접어들자, 사회의 약한 고리들에서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다. 142쪽.

고립된 개인들이 자기 정체성이 박약한 가운데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행복과 불행, 오만과 콤플렉스 사이의 왕복을 거듭한다. 143쪽.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상대방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일이 벌어진다. 자동차도로가 그 현장 가운데 하니다. 인격과 대비되는 '차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운전대만 잡으면 심성이 거칠어지는 사람이 있다. 자동차라는 사물 속에 얼굴을 숨기고 익명의 타자들과 상호작용하는 상황에서, 다른 차가 조금만 진로를 방해해도 마구 경적을 울려댄다. 얼굴을 마주보고서는 내뱉지 못할 극언을 혼잣말로 퍼붓는다. 167쪽.


소통에는 정성이 중요하다. 정성이란 몸과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 몸으로 함께 있는 사람이 내게 온 마음을 기울여줄 때 자신의 존귀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 않고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경청하고, 하나 마나 한 말들만 늘어놓으면 자존감이 상한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사소한 부주의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로 받아들여져 섭섭한 감정을 자아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186쪽.


사회학에 '예의 바른 무관심'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공공장소에서는 신경을 끄는 것이 곧 배려인 경우가 많다. 189쪽.


동정은 인간적인 감정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이 거기에 깔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리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러한 이분법에 갇혀 있는 시선은 그로부터 비롯되는 행동은 자기도 모르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시혜에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진정한 덕행이 되기 위해서는 혜택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 동정이 침해나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7쪽.


다시 말해서 감정은 팔지만 자존심은 절대 팔지 않는다는 원칙이 존중받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감정노동자들이 자신의 인격을 방어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212쪽.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것은 습득된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 이하로 보는 것은 습득되었을 확률이 높다. 221쪽.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 또는 배신을 당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조르주를 구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살아야 할 이유'였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그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자기를 다시 발견하게 해준 '집 짓는 일'이었다.

돈이 너무 많은 일을 좌우하고 돈 때문에 모멸감을 맛보기 일쑤인 현실에서, 나의 자존을 세우기 위해서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것에 착복해야 한다. 돈의 논리로 포섭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삶의 근원적인 가치에 눈떠야 한다. 물론 절대 빈곤으로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조차 영위하기 어렵거나 너무 많은 빚에 쪼들리는 이들에게는 한가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돈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 굴레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숨통을 트고 안정적으로 생애를 계획할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돈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는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따져야 한다. '좋은 삶'이 어떤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240쪽.


인간은 사사로운 삶의 공간에서 친밀감과 평온함을 누리지만, 그것을 넘어선 공공의 세계에서 자기의 존재 가능성을 확대한다. 낯선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공동의 경험과 공적인 서사(내러티브)를 창출하면서 더욱 고양된 자아를 만날 수 있다. 255쪽.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관계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내가 못난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수치스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뒷담화를 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신뢰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의 결점에 너그러우면서 서로를 온전한 인격체로 승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258쪽.


언제부터인가 힐링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치유는 단순히 상처를 어루만지는 위로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음의 새살이 돋아나기 위해서는 내면의 어떤 힘이 약동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소망과 가능성을 응시하는데서 시작된다. 그것을 꺼내어 존재의 날개로 펼칠 때 기꺼이 갈채를 보낼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우정과 환대가 곧 힐리이 된다. 살아있음을 축복하면서 존재를 중심으로 맞아들이는 만남에서 우리의 생애는 고귀해진다. 서로를 격려하면서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관계에서만 인간적 존엄을 누릴 수 있다. 259쪽.


인간은 자기를 알아주는 공동체를 만나 공적인 자아를 실현하면서 진부한 삶에 생기와 역동을 불어넣을 수 있다. 260쪽.


거울 속에서 사라지는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263쪽.


지위가 높거나 해당 분야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것을 전혀 내세우지 않는 사람, 자신이 어떤 면에서든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의식이 없이 상대방을 대하는 덕성의 소유자 말이다. 애써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을 동등한 눈으로 바라보며 존중하는 태도가 체질화된 것이다. 그런 이들은 상대방과 주변 사람을 은은하게 감싸 안는다. 269쪽.


삶이 특별해지는 순간은 자신이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는 말이 있다. 272쪽.


채근담.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욕을 받고서도 낯빛에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 가운데 무궁한 뜻이 있으며 또한 무한한 활동이 있다. 281쪽.


실존주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롤로 메이는 조언한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자동회로를 차단해보라고. 거기에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고. 286쪽. 


타인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의 비교 속에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그들 앞에 과시하고 군림하는 것, 다른 하나는 우열의 관념에서 벗어나 마음을 나누고 함께 배우며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온갖 관심은 외형적인 것들에 치중되면서, 나 자신은 공허한 중심으로 남는다. 후자의 경우에는 나를 돌보는 힘이 자라난다. 301쪽.


모멸감을 줄이려면 이러한 문화와 사회 풍토를 바꿔가야 한다. 가치의 다원화가 핵심이다.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여러 차원으로 틔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평범함과 비범함을 나누는 기준 자체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이라면 무두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바탕과 존엄함에 눈을 떠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저마다 지니고 있는 다양한 잠재력이 개발되고 꽃피울수 있는 기회가 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승인해주면서도 도전과 성취를 북돋아주는 관계와 공동체가 다양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305쪽.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