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3
달라스 윌라드(IVP)
The Divine Conspiracy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이 선인지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이 선하게 되도록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선한 사람이 되려고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선을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죄관리의 복음'
신앙고백이 삶 전체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현 상황은, 우리 시대에만 있는 것도 아니요 최근에 생겨난 것도 아니다...역사상 우리 기독교의 메시지가 본질상 오직 죄, 곧 행동의 잘못, 존재의 잘못, 그리고 그 결과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에만 관심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시점에 처해 있다. 현재 기독교의 메시지의 핵심으로 제시되는 것 속에는 삶, 즉 우리의 실체적 실존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극히 주변적으로만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서있는 자리이다.

기독교의 선포 및 실천의 전체 스펙트럼을 잘 살펴보면, 우익 신학의 본질이 되는 유일한 것은 개인의 죄 용서임을 알 수 있다. 좌익의 경우에는 사회악이나 구조악의 제거에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복음은 "죄 관리의 복음"이 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삶과 성품의 변화는 구속적 메시지의 한 부분이 '되지 못한다.' 매순간의 인간 실체의 깊이는 신앙과 영생의 지평에 들지 못한다.

복음서에서 복음에 관한 한 최대 이슈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는냐 하는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삶, "위로부터" 오는 삶의 성분인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 우리는 과연 그 안에서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대언하는 모든 이들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중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내가 설교하고 가르치는 복음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의 풀타임 학생이 되게 하는 본연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가?
그것을 믿는 이들은 당연히 "다음 단계"로서 예수의 제자가 되고 있는가?
실제로 내 메시지의 본질을 믿는 이들에게 마땅히 기대할 수 있는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자원이 인간 생활과 여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 생활과 기독교 제자도의 복음은 없고, 죽음을 위한 복음 아니면 사회참여를 위한 복음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영혼은 인생의 광야에서 시들어 죽도록 방치돼 있는 채 말이다. 창조 때에 의도된 환경, 곧 살아있는 영생의 나라로 인도하는 이가 없는 탓이다.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현재적 실체를 예수의 말씀과 인격을 믿는 믿음을 통해 말(설교)과 삶으로 똑바로 제시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학생 내지 도제가 될 수 있다. 그분이 우리의 자리에서 살아가실 삶, 그 삶을 사는 법을 그분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분의 영원한 질의 삶에 지금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의미있게 다가와야 할 하나님 나라

4장 참된 복을 누리는 자: 8복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형편이 좋다는 말은 사실상 어디에도 없다. 8가지 조건이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서 행복을 얻는 길로 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8복은 "혁명 이후" 누가 높은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지적도 아니다. '8복은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지금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눈앞의 현실 상황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예시한 말씀이다.' 인간이 모든 희망을 포기한 현실 상황들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천국 통치가 예수 안에서 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 사례를 8복은 하나하나 꼽고 있다.

자신의 삶에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자동적으로 기억하게 돼 있다. 위대한 교사의 비밀은 듣는 이들의 삶의 실제 흐름에 영향을 주는 말, 그런 경험을 제공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 특유의 교육 방식으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가르침을 청중의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 사건과 연결시키셨다. 일상 생활에서 드러나는 듣는 이들의 마음과 습관, 그것이 예수의 말씀의 표적이었다.

8복이란 예수의 근본 메세지, 즉 하나님의 통치와 의가, 세상 속 우리 가운데 인간으로 찾아 오신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값없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는 하나의 도구이다.

5장 천국 마음의 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

"온전하라"는 계명은 이상주의의 허영이 아니며 실천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그 계명을 지킬 수 잇는 자로 빚으실 것이다.
C. S. 루이스, '내가 믿는 기독교'

우리는 신약 시대에 바울의 뒤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유대교 교사들의 일을 이상하게 전복시켜 스스로 그 안에 갇히고 말았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식법의 준수를 더하려 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도덕법을 빼려 한다. 믿음과 순종의 결합이야말로 21세기에 들어서는 교회의 중대 과제이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면 목표를 율법이 아닌 다른 것, 그 이상의 것에 두어야 한다. 율법의 행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삶,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근본적인 오류도 여기 있다. 이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에 초점을 두어, 그 행위들이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행해야 하는가를 조목조목 자세히 규정했다.
우리가 변화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영혼의 내면 새오할이다. 그러면 행동은 자연스럽고 쉽게 뒤따라 나온다. 

상황과 천국의 의(디카이오수네) 마 5:21-48
화, 성적매력, 배우자와의 불행한 관계, 상대방에게 뭔가를 믿게 하고 싶을 때, 신상에 해를 입었을 때, 원수가 있을 때

런던이나 애틀란타에 가지 않는다는 계획으로 뉴욕에 갈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부당하게 화내지 않는다는 계획으로는 이웃 사랑에 이를 수 없다. 십계명처럼 율법은 행동만을 다루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아무리 필요하고 선하고 아름답다 해도 행동의 '근원'인 인간의 마음에는 절대 이를 수 없다. 율법이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율법으로는 안된다. 그러나 능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관계라면 얼마든지 가능핟.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에서 그것을 배울 수 있다.

"나는 예수의 예화에 나타난 행동을 그대로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예수의 예화에 예시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있는가?"가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다. 

천국 마음의 완성이 바로 아가페 사랑이다...의는 곧 사랑이다.

바리새인들은 행위가 자연스럽게 율법에 부합되는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아가페의 사랑은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이에게 가 닿는 사랑이다.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되어진 혹은 앞으로 될 수 있는 우리의 존재의 핵심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