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와 사랑의 공동체
마7장
1. 주변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1-5절)
2. "놀라운 것들"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6절)
3. 그들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단순히 구한다(7-11절)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자신은 물론 상대의 유익을 위해-천국의 방법은 단순히 구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변화를 구하는 것이요 상대가 나에게 구하는 것을 어떻게든 들어주는 것이다.
상대에게 뭔가를 하라거나 달라거나 혹은 뭔가가 되라고 요청하는 것은, 곧 강요나 억지가 없는 단순한 속박의 영역에 그 사람과 함께 서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있다. 요청이란 본질상 양쪽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다. 반대로 일방적인 요구는 사람을 인간시킨다...그런데 그 길은 상대의 자유에 자신을 맡겨야 하는 길이다. 구하고 요청하는 행동은 본질상 상대가 거부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구하는 것의 위력은 너무도 커서 많은 사람이 거기에 불편을 느낄 정도이다. 부탁을 잘 하는 사람을 일부러 피해 다니는 이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상대의 유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것 같은 절박한 필요, 그 필요에 대한 기본 해답이 마침내 여기서 주어진다. 그 해답은 기도, 즉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타인에게 주려는 유익을 확실히 성취할 수 있는 보장된 길이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이야 말로 다른 사람을 마땅이 대해야 할 모습으로 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 영적공동체 안에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
다르게 말하자면, 예수의 제자로 사는 사람들 안에는 예수의 임재와 행동이 빠진 관계란 존재할 수 없다. "일대일" 관계란 없다. 모든 관계는 예수를 통해 중재된다. 나는 너와 함께, 너에게 너를 위해 해줄 일을 생각할 수 없다. 우리-예수와 나-가 너와 함께, 너에게, 너를 위해 해줄 일을 생각할 뿐이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 받는 이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그리스도가 서 계시기 때문에 나는 감히 그들과의 직접적 관계를 꿈꾸지 않는다.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을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은 곧 나의 사랑으로 상대를 규제하고 지배하고 강요하려는 모든 시도에서 상대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뜻이다...그러므로 이 영적 사랑은 형제에게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께 형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언제나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를 통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은 전저긍로 그리스도 안의 진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영적인 사랑은 잘 안다.'
C. S. 루이스
'기도란 언제는 "응답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도가 하나의 동인으로서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강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일단 "효력"을 낼 때는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응답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임의 재량이 하나님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기도는 우리를 파멸로 몰아넣고 말 것이다. 학교 교장이 학생들에게 이러게 말하는 것은 전혀 무모한 일이 아니다. "이러이러한 일은 정해진 교칙상 자유로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밖에 이러이러한 일은 일반 교칙으로 허용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이다. 그런 일을 하기 원하거든 나를 찾아와 요청해야 한다. 내 방에서 문제 전반에 대해 나와 대화해야 한다. 결과는-두고봐야 한다.'
또 인간에게 두 가지 인과법칙을 이야기 한다.
하나는 전적으로 우리의 통제하에 있는 것...화단에 잡초가 있거나 자동차 바퀴가 터졌다면 그저 잡초가 죽고 바퀴가 고쳐지도록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은 좋지 않다...기본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위임으로 순리상 나의 영역에 속한 문제이다. 그러나 헤로인에 중독됐거나 지적 유행 풍조의 미로에 빠진 친구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돕든지 반드시 기도하는 것이 좋다. 상대를 "고쳐 주는" 거이 내 능력 밖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능력 밖이어야 더 좋기 때문이다.
예수는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조건 그를 "고쳐 주지" 않았다. 인생의 본질과 구속에 대해 깊은 교훈을 주는 사건이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 슬픔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를 향한 놀라운 믿음이 담겨있는 말씀이다.
그분은 베드로가 시험을 이겨내기를 간절히 원하셨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도록 그냥 두셨다. 그분은 베드로에게 정죄나 수치심이나 "지혜의 진주"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초자연적 능력으로 그의 영혼이나 두뇌를 바꿔 놓지도 않았다.
기도의 기본은 요청이다. 기도란 결코 구하는 것만은 아니며 나의 소원을 구하느 것만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하수인이나 해결사가 아니며 우주는 내 욕심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관심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훌륭한 일"에 대해 기도하려고 애쓸 때 기도는 죽는다.
"기도란 하나님과우리가 함께 행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것이다." 이 묘사는 기도의 초점을 즉각 우리의 현 위치에 맞추지만 동시에 자기 중심주의는 허락하지 않는다. 이 대화의 동행 과정에는 의당 요청이 있게 마련이다. 기도는 내 삶의 관심사- 하나님의 관심사이기도 한-를 하나님께 숨김없이 나누는 것이다. 물론 그분은 내 관심사에 관심이 있으시며 특히 우리의 관심사는 그분의 관심사와 일치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이다. 거기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은 어차피 하실 일을 하시면서 마치 우리 기도에 응답하는 것처럼 가장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요청은 하나님이 하시거나 하시지 않는 일에 정말 변화를 가져온다. 어차피 모든 일이 우리의 기도와 무관하게 될 대로 된다는 개념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많은 이들의 생각을 사로잡는 망령이다. (모세의 기도, 히스기야의 기도) 이 장면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당신 앞에 신실하게 서는 자들에게 '설득 당하시는' 하나님이다. 요청에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요소란 전혀 없다. 기도에 "무조건 공식"이란 없다. 요청한 내용은 주어질 수도 있고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선한 이유에서이다. 인격간의 관계란 바로 그런 것이다.
기도란 무엇보다도 성품을 형성하는 길이다. 기도는 자유와 능력을 섬김과 사랑에 접목시켜준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결국 얻으시는 것-사실상 우리가 자신의 삶에서 결국 얻는 것- 단순히 우리가 갖추게 될 인격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분의 능력을 받아 원하는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인격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 훈련의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을 앞질러 문제를 내 손으로 거머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를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 바로 이런 기다림의 체험 속에서 하나님 앞에 더없이 값진 성품, 즉 그분의 능력을 받아 자신이 택하는 일을 능히 해낼수 있는 성품이 빚어지는 것이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때로는 기도의 응답에 다른 이들이나 나 자신의 변화가 포함되기 때문일 수 도 있다.
눅18장 불의한 재판장에게 구하는 과부
요청이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요청이 계속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할 몫이다.
기도가 인격과 인격간의 관계 방식으로 진행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 물론 기도는 어김없이 그런 관계의 방식이지만 요청이라는 전반적 특성은 남아 있다. 사실, 그 반대의 가정이야 말로 기도를 "중단"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기도를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단번의 간단한 행동으로 자동 장치가 작동됨으로써 필연적으로 그 결과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같은 문제로 두 번 기도하는 것은-하나님이 아직 모르고 계시기라도 하다는 양-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도 나는 보았다....기도는 절대 자동 장치가 아니다. 기도란 언제나 인격적 협상이다.
주기도문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