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4
생명의 말씀사/ Alister Mcgrath

칭의는 인간의 행위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한편, 칭의를 얻은 인간은 이후로는 선행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책권을 얻지 않는다. 칭의에 관한 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과 인간의 의뢰하는 수동성을 강조하는 바울의 논지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반론을 뛰어넘으며, 우리 시대에도 직접적이고 밀착된 적실성을 갖는다.

루터는 주장하기를, 칭의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개인의 지위 변화이지 본성의 심원한 변화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믿음으로 의롭지만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 있다.

믿음은, 칼빈이 간파하였듯이,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담고 있는 질그릇이다. 칭의의 문제에서 우리는 수동적이고 하나님은 능동적이다. 

칭의와 성화는 구별될 수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1540년경 개신교 칭의 교리의 특징
1. 칭의는 그리스도인이 의롭다는 법정적인 선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의로워지는 과정과는 사뭇 다르다. 본성이 아니라 신분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2. 치으이(믿는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외적인 행동)와 성화 혹은 중생(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갱신의 내적 과정)을 주도 면밀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구별한다.
3. 의롭다 하시는 의는 그리스도의 낯선 의로서, 믿는 자는 밖으로부터 그에게 전가된다. 이 의는 믿는 자에게 생래적으로 내재하거나 그 안에 정주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4. 칭의 는 페르 피뎀 프롭터 크리스툼(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을 통하여)으로 일어난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칭의의 방편이요, 칭의의 기반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해된다.

로마 카톨릭과 어거스틴은 개신교와 루터와 칼빈이 칭의와 성화 이 둘을 한데 묶어 이해한 것을 칭의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가. 우리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나. 우리는 믿음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실존적인 측면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진리에 대한 지식(다시 말해서, 객관적인 진리)과 진리에 의해 붙들림(달리 말해서, 주관적인 진리)을 즐겨 나눈다. 칭의가 개입하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인 지식 바로 이것이다.

복음은 죽음과 무의미에 대한 공포와 정면 대결을 한다....이신칭의의 교리위에 세워진 기독교의 선포는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경험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것을 변혁시키시며 진정한 실존으로부터 비껴 나간 우리의 소외를 없애시어 하나님 자녀로서 그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인 측면
인격이라는 개념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유이다.
보편구원론 비판. 아니오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한다.
이신칭의 라는 기독교 교리를 정초시켜야 할 곳은 바로 여기, 즉 갈망의 경험, 인간 관계 안에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잡을 수 없다는 낭패감, 우리 손에 영영 들어오지 않을 듯하면서도 인간 관계 그 자체 너머에 있을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그 지향성이 되어야할 것이다.
부버가 지적햇듯이, 모든 인간 "당신"은 그 자신 너머에 있는 "영원한 당신" 곧 하나님을 지향하고 잇다. 인간 관계에서 채워지지 않는 그 국면 때문에 하나님을 지향하게 된다. 즉, 인간 관계를 통해서 오지만 그것 안에는 없고 그것을, 아니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지향하ㅏ게 된다는 뜻이다.

윤리적인 측면
세속 윤리 체계가 도덕적인 행위를 목적(달리 말해서 성취하려는 것 또는 성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논의 하지만, 이신칭이에 기반을 둔 신학적인 윤리체계는 미리 정해진 것 또는 표출하도록 의도된 것, 즉 회심을 통한 개인의 근본적인 변혁에 초점을 맞추고 논의한다. 진정한 기독교 윤리의 출발점은 개인의 회심이 새로운 순종과 삶의 방식 그리고 최소한 세속 윤리체계와는 잠재적으로라도 다른 새로운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신칭의 교리는 세속 윤리 체계가 무시하거나 평가 절하하거나 부인하는 인간 본성의 결정적인국면, 즉 죄를 인정하도록 촉구한다.
"죄인이 되어 마음껏 죄를 지으라. 하지만 더욱 강하게 믿음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라."는 루터의 저 유명한 언표에 깔려 있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다. 달리 말해서 세상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그 안에서 움직이다 보면 죄를 짓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행동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요, 설령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용서 받을 수 있음에 안도하고 기뻐하라는 뜻이다.

1. 이신칭의 경험에 관계된 교리이다.
기독교 신앙의 요점은 무엇보다도 경험이다. 교리 체계를 받아들이으냐는 경험 이후의 문제이다.
2. 이신칭의는 역설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포착되는 분이 아니다, 혹은 우리의 유한한 사고의 범주 속에 포박될 수 없는 분이라는 간단한 사실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 말하려는 어떤 시도도 역설의 모습을 띨 수 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많은 복음적인 설교가들이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난관에 부딪히고는 한다. 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청중의 마음을 돌려 주시기를 간구한다(회심을 일으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전제 위에서). 하지만 정작 설교할 때에는 하나님께 반응하느냐 않느냐의 선택권을 마치 청중들이 가지고 있는 양 설교한다(회심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린 문제인 양). "기도할 때에는 칼빈주의자, 설교할 때는 알미니안주의자"라는 우스개가 나온 것도 이런 상황 아래서이다.
왜 이 역설이 칭의 교리의 핵심적인 특징을 이루고, 왜 그렇게 중요한가? 단순하게 말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칭의 문제에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관한 두 가지 부적절한 이해를 일부러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구원을 마치 종주먹을 들이대듯이 강요하는 전능자의 손에 마냥 놀아나는 마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견해(보편구원론적인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반응하고 않고는 오직, 오로지 우리에게 달린 문제일 뿐이라는 견해이다. 후자에게서 "선택"은 다른 뜻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택했다는 의미이다.
은혜라는 역설- 이 역설은 궁극적으로는 예정 교리를 안전판으로 삼는다-은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이 우리의 칭의에 개입하시는데, 심지어는 우리가 그분에게 보이는 반응 역시 그분의 개입 결과이다. 이 역설은 복음을 위험스러울 정도로 단순화 하는 경향에 대항하여, 특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거부하고가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달린 것처럼 호도한느 사람들에게 맞서는 안전판이라고 말하면 적절한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칭의에 기여했다고 억지로라도 말할 건더기가 유일하게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토록 은혜스럽게 용서해주신 죄뿐이다."

3. 이신칭의는 인격적인 겸손과도 연관이 있다.
칼빈이 말했듯이, 우리는 빈 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우리에게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받을 것뿐이다. 
4. 이신칭의는 세속적 가치관의 전복을 말한다. 
5. 이신칭의는 기독교의 미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교리는 전도, 즉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선언을 강조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교리는 신약에 아주 강렬하게 각인 된 바로 그 경험이 오늘날에도,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한다. 게다가 각 개인이 지금 여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잇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신칭의 교리의 교의적 중요성
누가 구속자인가? 가현설(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존재를 가장한 하나님)과 에비온파(인간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를 입었다)
누가 구속의 대상인가? 마니교(일종의 숙명론)와 펠라기우스주의(자유주의, 전적주권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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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과연 행함을 강조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강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면서 읽은 책이다.
그러나 답은 그렇게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전제를 깔고 난다면 얼마든지 우리의 행함이 강조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을 이루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 성령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