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요단, 필립얀시)
one 구약성경은 애써 읽을 가치가 있는가?
two 어둠 속에서 바라보기: 욥기
욥기는 대부분의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계약적 믿음" 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의 믿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고민해 온 문제이다. 그러나 이 고통의 재료로 만들어진 이야기의 중심주제는 믿음이다. 욥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즐거움보다는 믿음에 더 관심이 많으신 것을 보여준다. 금처럼 가장 순수한 믿음은 극한 역설의 상태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보류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욥기는 우리의 믿음의 선택이 우리와 우리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 자신에게도 중요하다는 놀라운 진리를 제시한다.
1. 하나님께서는 욥의 문제들을 허용하셨으니 실제로 고통을 일으킨 것은 사단이었다.
2. 욥기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능력이나 선하심이 부족했다는 언급이 없다.
3. 욥은 고난이 언제나 죄의 결과로 온다는 이론을 단호하게 논박한다.
4. 우리는 하나님의 공정성이 이생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들은 하나님께서 사후에 공의를 베푸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5. 하나님께서는 욥의 의심과 절망을 꾸짖지 않으셨으며, 그의 무지함을 꾸짖으셨을뿐이다.
6. 어느 누구도 고난에 대해 다 알수 없다. 하늘의 싸움임을 모르고 제한된 시각에서만 봤다.
7. 하나님께서는 결코 완전히 침묵하시지 않는다.
8. 좋은 의도의 충고도 때로는 유익보다 해를 끼칠수 있다.
9. 하나님께서는 논의의 초점을 욥이 당한 원인에서 그의 반응으로 다시 맞추셨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문제를 결코 설명하지 않으셨다.
10. 하나님의 계획에서 고난은 구속될 수 있거나 더 고상한 유익에 사용될 수 있다.
three 쓰고도 단 인생: 신명기
모세의 삶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이루셨다"이다. 모세의 연설의 메시지는 "기억하라!"였다. 사랑은 그분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의 기초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출애굽의 스릴에 흥분되어 그에 앞선 비극 400년이나 시내 광야와 뒤이은 약속의 땅에서 나타난 비참한 실패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그 누구에게도 그렇게 숩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 관해서 가장 위대한 현실주의자였다. 신명기에 기록된 모세의 슬프고 설득력 있는 연설에는 두 개의 후기가 있다. 첫째는 그의 백성들에 대한 모세의 무서운 예언이 성취된 후에 일어난 사건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끔찍한 저주가 성취되었기도 하고 요시야 시대에는 "언약책"을 통해 영적인 대청소와 부흥이 일어났다. 두번째 후기는 신약성경 마가복음 9장 3절에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되실때 모세가 나타났다. 모세는 마침내 약속의 땅의 산꼭대기에 서있는 생전의 꿈을 이룬 것이다.
four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 시편
시편은 하나님을 사람에게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께 나타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의 기능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이미지와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시편은 영혼을 치유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해 느끼는 모든 감정을 하나님께 내오놓아도 좋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경배(예배)란 우리가 몰두하던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전략이다. 시편의 소수만이 찬양과 감사에 초점을 맞추고 70퍼센트가 애가의 형태를 띤다. 다윗은 사건들을 회상하고 거기에 관한 시편을 쓰면서 하나님을 무대 중앙에 세우는 방법을 발견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든지 다윗은 이것을 경험했다. 다윗의 시편은 일상의 삶을 초자연적인 세계의 실체에 맞추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유쾌하든 불쾌하든 간에 모든 행동과 느낌, 모든 경험을 반드시 하나님께 아뢴다는 뜻이다"(C. S. 루이스).
저주시편을 기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욥기, 예레미야, 하박국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기도를 드리든지 참고 들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감정들, 억제되지 않은 분노들을 그분께 내어놓을때에만 고치시고 치료해주실 수 있다.
five 지혜의 마지막: 전도서
잠언은 삶을 이해한다. 지혜를 배우고, 신중히 행하며, 규범을 따르면 네 사람이 길고 번성하리라. 그러나 전도서는 자신있고 실제적인 음조는 사라지고 체념과 냉소가 그자리를 대신한다. 전도자는 지혜가 어리석음에 비해 몇가지 이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나 지혜로운자의 운명이나 우매한 자의 운명이나 다를게 없다고 본다. 이러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반영한다. 원하는 것을 얻는 저주. 그렇기에 황금의 시대에 전도서와 같은 절망의 책이 나올 수 있었다. 좋은 시대가 진짜 위험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최선의 노력이 폐허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도서는 즐거움을 좇는데 우리 삶을 바치게 만들 정도로 즐거움을 너무나 매혹적으로 제시한다. 그런 다음 이러한 즐거움이 궁극적으로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잊혀지지 않는 깨달음도 준다. 우리는 또다른 집을 향해 가도록 영원을 사모하도록 지음 받았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 세상의 사실들이 일의 결국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 의미가 세상 속이 아니라 밖에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비트겐슈타인).
six 하나님께서 대꾸하신다: 예언서
예언서의 가장 놀라운 특징이자 17권의 책을 자세히 연구해 볼 만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의 애절한 물음에 답하신다는 사실이다. 예언서들은 "성공신학"의 실패를 강하게 항의한 것 같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에 관심이 있다는 증거로 예언자들을, 다시말해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던 바로 그 사람들을 내세우신다. 예언서를 읽는 사람이라면 무감각하고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 인격이시며, 당신이 만난 어떤 사람 못지 않게 열정적이신 하나님을 만난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주요 메세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예언서를 읽다보면 예언자들에게는 지금이 나중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저자는 예언자들의 통찰력을 지금/나중/훨씬 나중 의 셋으로 구분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예언자들의 성취를 볼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래 약속을 초과하는 방식으로 그 약속들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다.
예언자들은 인간의 동경을 규정한다-사실 모든 유토피아적 비전은 예언자들의 멋진 말에서 기원한다. 그런 후에 이들은 지금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영광되 미래를 그려낸다. 이들은 사람들이 혼란과 절망의 시대에도 붙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의 비전을 제시했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미래로 날아가고 싶어하나 예언자들의 메세지는 일차적으로 나의 지금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예언자들은 보통사람보다 용기가 많았던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시각, "그림자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이러한 시각은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예언자들은 이 세상을 비록 무대 뒤의 보이지 않은 힘의 영향에 의해서이기는 하지만 각 사람이 연기를 하는 무대로 묘사한다. 중요한 질문은 "느부갓네살이(또는 러시아나 중국이) 얼마나 많은 영토를 다스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진격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충성을 잃지 않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는가?"이다.
예언서를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년 혹은 2050년에 무슨일이 일어날지를 보다 분명히 아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내 삶에서 무엇을 성취하기 원하시는가를 보다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seven 마지막 답변의 전주곡
어떤 의미에서 구약의 모든 역사는 예수를 위한 전주곡이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수께서 태어나실 가계와 정체성과 민족의 형성에 기여한다. 구약성경, 특히 이 책에서 논의한 부분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가지 질문이 다른 형태로 계속 떠오른다. 내가 소중한가? 하나님께서 돌보시는가? 왜 하나님은 행동하지 않으시는가?
나는 소중한가? 복음서에 있는 예수와 그 분이 행하신 일에 눈을 돌린다. "해 아래" 있는 내 실존이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내린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와 모순된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시다.
하나님이 돌보시는가? 예수께서 그 해답이시다. 예수께서는 고통의 문제에 결코 철학적인 해답을 주려 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실존적인 해답을 주셨다. 우리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을 듣길 원하지만 그 대답을 얻지 못하고 대신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신다는 신비로운 확증을 얻는다.
왜 하나님은 행동하지 않으시는가? 이 질문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중요한 차이만 빼고 똑같은 대답을 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심으로써 행동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심으로써 행동하셨으며, 이번에는 연약함과 낮아지심이 아니라 능력과 영광 가운데서 그 분을 다시 보내심으로 다시 한번 행동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 날이 오면, 구약성경 저자들을 그렇게 괴롭혔으며 지금도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질문들은 아이들이나 묻는 질문들처럼 우리의 가뭇한 기억 속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