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6
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John piper, 생명의 말씀사) 

1장 기쁨이 왜 의무인가? 
우리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는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성 어거스틴 
만일 내 안에 이 세상의 어떤 경험도 결코 만족시켜 줄 수 없는 갈망이 있다면, 나는 다른 세상을 위해 지음받은 것이다. C. S. 루이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2장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함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라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즐거워할때에 영광을 받으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만족을 누릴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고귀한 사명이라는것. 
루이스, '영광의 무게' 
만일 가장 현대적인 지성에, 자신의 유익을 바라고 진정으로 그것을 향유하기를 소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숨어있다면, 이 개념은 칸트와 스토아 학파로부터 스며들어온 것이며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말해 두고 싶다. 사실 상급에 대한 분명한 약속과 복음서에 약속되어 있는 어마어마한 상급을 생각한다면, 우리 주님께서는우리의 소원이 너무 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약하다고 생가가실 것 같다. 우리는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는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조차 없어서 빈민가에서 진흙 파이 만드는 일을 계속 하고 싶어하는 무지한 어린아이처럼, 무한한 기쁨이 주어졌는데도 여전히 술과 섹스와 야망에 팔려 시간을 낭비하는 냉담한 피조물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즐거워한다. 
루이스, '시편명상'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든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찬양이든, 찬양에 관한 가장 명백한 진실은 이상하게도 나를 피해 갔다. 나는 모든 즐거움이 자연스러게 찬양으로 넘쳐 흘러 들어간다는 것을 정말 몰랐다. 연인들은 애인을 칭송하고, 독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시인을 칭송하고,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골길을 칭송한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기꺼이 하는 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정작 가장 귀한 분에 대해서는 하지 않으려 한다는 데 있었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을 기쁘게 찬양하는 것은, 찬양이 단순히 기쁨의 표현만이 아니라 기쁨의 완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갈망하는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3장 애정은 선택이 아니다. 
감정은 의무의 일부이며 명령. 
기독교 희락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명령을듣고 성 어거스틴처럼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시되, 주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4장 기쁨의 추구는 교만과 자기연민을 막는다. 
자랑은 성공에 대한 교만의 반응입니다. "나는 많은 일을 성취하였으니 칭찬받을 만하다." 
자기 연민은 고난에 대한 교만의 반응입니다. "나는 많은 고난을 당하였으니 칭찬을 받을 만하다." 
내가 기쁨을 위해 선한 일을 한다면, 자랑하고자 하는 충동이 사라집니다. 

5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기쁨을 추구하라. 
기쁨의 추구는 모든 선행의 근본동기 입니다. 만일 당신의 목적이 충만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라면, 당신은 사람들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본질(고후8:1-4) 
첫째,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이 마케도니아 교인들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헤에 대한 그들의 기쁨이 흘러 넘쳐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후히 채워주게 했습니다. 
넷째, 마케도니아 교인들은 자신들의 보잘 것 없는 소유를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내어줄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기뻐함이 넘쳐 흐르고 확장되는 것으로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희락주의자의 만족은 다른 사람들의 상처에도 요동하지 않는 신비한 평온함이 아닙니다. 이 무익하고 타락한 세대에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만족입니다. 

6장 기독교 희락주의와 예배 
공적 예배에서 
첫째, 무력한 예배의 진정한 원인은 사람들이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얻기 위해 나아오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얻기 위해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쳐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 것이 설교자의 일읿니다. 
둘째, 예배의 본질을 하나님에 대한 만족으로 볼때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분을 주시는 것 대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초점이 옮겨진다면 그 결과 중심이 되는 것은 미묘하게도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것의 질이 됩니다. 
셋째, 기독교 희락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그 자체가 목적인 예배의 본질에 주의하게 함으로써 예배의 우선순위를 보호합니다.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는 것이라면 예배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7장 기독교 희락주의와 결혼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이유는 남편과 아내가 각각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배우자의 즐거움 안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거룩한 기쁨 안에서 자신의 기쁨을 추구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십시오. 

8장 기독교 희락주의와 돈 
부자가 되기를 열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딤전4:7-10) 
첫째,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7절)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간단한 생활 필수품만으로 만족할 수 있고 또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때, 우리에게 평안과 안정감을 줄 별도의 돈이나 물건은 필요하지 않습니다.(8절)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르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 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히13:5-6) 

셋째, 그러한 추구는 결국 인생의 파멸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9-10) 

삶은 전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왕의 자녀로서" 호화롭게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들립니다. 특히 왕도 전쟁을 하러 나선 마당에 말입니다. 

9장 기독교 희락주의와 선교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을 부인할때 더 좋은 것을 위해 덜 좋은 것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참된 생명을 향한 갈망이 우리로 하여금 삶의 작은 쾌락과 안락을 부인하게 할 것이라고 가정하십니다.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수 없는 것을 내어주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짐 엘리엇) 


맺음말 
마지막소명-우리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고난과 위험을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 그리스도는 고난을 택하셨습니다. 
에드워즈, "자기부인은 슬픔의 근원과 기초를 파괴한다." 
그분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 누리는 기쁨의 근원이시며 목적이십니다. 고난을 통해 기쁨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기쁨의 근원되시는 분의 고귀함, 즉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그분의 무한한 가치를 찬양합니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