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8
Ich und Du/ Martin Buber(대한기독교서회)


사람에게 세계는 두 겹이다. 세계를 맞이하는 사람의 몸가짐이 두 겹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가짐은 그가 말할 수 있는 근원어가 둘임과 발맞추어 두 겹이다.

근원어는 홀로 있는 낱말이 아니요 어울려 있는 낱말이다.
근원어의 하나는 복합어 '나-너'(Ich-Du)이다.
근원어의 또 하나는 복합어 '나-그것'(Ich-Es)이다. 

근원어 '나-너'는 존재의 전체를 바쳐서만 이를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근원어 '나-그것'은 존재의 전체를 바쳐서 이를 말할 수 없다.
세계는 이를 경험의 대상으로 볼 때 '나-그것'이라는 근원어에 속해 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근원어 '나-너'는 관계의 세계를 이룩한다.

'나'와 '너'의 만남은 은총에 의한 것이지, 결코 찾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향하여 근원어를 건네는 것은 '나'의 전 존재를 건 행위- 즉 나의 가장 본질적인 행위인 것이다.
'너'는 '나'를 만난다. 그러나 '나'의 쪽에서 보면 이는 '내'가 '너'에게로 다가가 '너'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만남"이란 결국 "택하는 것"인 동시에 "택함을 입는 것"이요, "능동"인 동시에 "피동"인 것이다. 이는 마치 자기의 전 존재를 기울여서 무언가를 행위하는 경우와도 같은 것이니, 실로 그 때에는 온갖 부분적 행위는 정지하고 그와 더불어 저들의 특수한 한계가 자아내는 행위 감각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능동적인 것"은 "피동적인 것"과도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나-너'의 근원어는 오직 자기의 전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다. 나의 전 존재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그 안에서 무르녹는 것은 나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 없이도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진실로 '나'는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매개로 해서만 버젓한 '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나'로 됨에 따라 나는 그를 '너'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온갖 참된 삶은 만남(Begegnung)이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서는 무조건적인 독존성과 무조건적인 포괄성이 한데 겹쳐져 있다. 하나님과의 절대적 관계에 들어간 뒤에는 사람은 고립된 어떠한 것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사람이 되었거나 물건이 되었거나, 하늘이거나 땅이거나, 그 아무것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 모든 것은 거꾸로 사람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계 안에 안겨 있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영원자 너'와 더불어 순수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코 '너' 이외의 모든 것을 저버려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 안에서, 그리고 '너'를 통하여서, 모든 것을 내다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이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세계를 그의 참 기초 위에 재건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로부터 얼굴을 돌이킨다거나 또는 이 세계만을 주시한다거나 해서는 하나님에게 다다를 수가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이 세계의 의미를 읽어 낼 때에는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현전에서 살아 움직이게 될 것이다...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내어 버리거나 떼어 버리거나 하지 않고 그들을 온통 '너' 안에 안아들일 때에는- 즉 이 세계의 가치와 그 진리를 인정하고 이를 하나님의 품으로 안아들일 때에는- 우리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안에 서 있는 것이 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타자"임에는 틀립없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완전한 자기 동일자"요 또한 "완전한 현존자"이기도 하다. 그렇다, 하나님은 땅 위에 나타나서 우리를 거꾸러뜨리는 "무서운 신비"인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자명의 신비요, 나의 '나'보다도 훨씬 더 나에게 가까운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종교적 상황-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현존한다는 것- 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율배반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이율배반의 비용해성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정률만을 인정하고 그 반률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이 상황의 의미가 손상을 입는다. 만일 우리가 정률과 반률로부터 하나의 종합을 빚어 보려 할 때에는 그 상황의 의미가 파괴된다. 만일 우리가 이 이율배반을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릴 때에는 그 상황의 의미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만일 우리가 이 이율배반의 알력을 우리들의 현실 생활 밖의 사건에로 도입할 때에는 그 상황의 의미는 말살당하게 된다. 진실로 인간 존재의 참 의미란, 우리가 어엿이 '산다'고 하는 것- 아무런 예견도 예고도 예정도 없이 그저 생존의 이율배반을 실컷 어깨에 짊어지고 곧장, 끊임없이, 새롭게 살아가는 데에 있는 것이다...다만 우리는 좋고 싫고를 떠나서 오직 그 두 개의 명제를 한 몸에 짊어지고 묵묵히 이를 살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실로 이를 살아 내는 것 밖에 그 둘의 통일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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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용되어진 책...

조금 이해가 되고 좋다고 생각하는 몇 부분을 적어놓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많은 내용은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앞으로 반복해서 읽으면 더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될 것이다.

소유가 아닌 관계...만남...인격성...

이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