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8
The Homiletic Plot: The Sermon as Narrative Art Form

유진 L. 로우리

 

설교가 일어나기 시작하도록 하는 데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생각을 필요성과 주제 사이의 교차지점으로 끄집어 내는 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나의 생각 조각들을 적어서 책상 위에 두편으로 갈라 놓는 것이다- 즉 하나는 문제가 적힌 노트더미와 다른 하나는 주제나 혹은 해답 노트더미로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 관계 형태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쪽의 생각더미에서 나온 생각들을 다른 한쪽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설교란 언제나 가려움에서 지작해서 긁어 주는 쪽으로 옮겨 가는 데 이것은 달리 옮기면 인간의 곤경에서 복음에서 나오는 해결점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1) 평형을 뒤집어라. Ooops!

2) 모순을 분석하라. Ugh!

3)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Aha!

4) 복음을 경험하라. Whee!

5) 결과를 예견하라. Yeah!

 

불완전하다는 사실, 그것의 본질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청중이 설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가 된다. 설교를 듣는 사람ㄷ르이 가지고 있는 평형 깨뜨리기는 설교 시작의 열쇠가 된다.

 

적절한 분석을 하려면 행동의 '단순성'을 넘어서서 인과관계의 복잡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 자신을 돌이켜 보면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보다 나의 행동에 대해서 더 관대했는지를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내가 불공정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의 내적 복잡성보다 내 자신의 내적 복잡성에 더 많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설교자와 같이 공통으로 내가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볼 때, 세계를 '우리'와 '그들'- 설교작업에서 굉장히 편만해 있는 경향인데-로 쪼개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이것은 특수한 문제를 진단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도 그러한 상황에 개인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믕ㄹ 반추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 탐구란 다른 사람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결실이 없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자아정체성을 발견하려고 하고, 우리 자신을 찾으려고 희망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결과는 결코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오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최종적으로 발견되어진다! 자신의 정체성은 타인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물이다.

 

설교학적인 '아하'를 야기시키는 역전의 원리는 단지 문학의 도구나 멋진 전략 이상의 것이다- 비록 그것이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것의 뿌리는 복음 그 자체에 있다고 믿는다.

 복음과 세상의 지혜 사이에는 그 자체가 중요한 역전의 구성요소가 되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있다. 역사의 주님께서는 세상이 yes라고 하는 것에 확실하게 no라고 선포하시고, 세상이 no라고 하는 것에 울려 퍼지도록 yes라고 선포하신 길고 긴 기록을 가지고 계신다. 사고의 새로운 해석학적인 학풍의 본질적인 요점은 사실 뒤집음으로써의 복음(gospel of inversion)의 진리와 일치하기 위해서 성서적인 해석을 전도(뒤바꾸는)하는 것이다. 크래닥은 실제로 그런 과점을 요약하면서 '근본적인 역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신약성서에 명쾌하지 않아서 이해의 빛을 도입해야만 하는 구어체 문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분명한 우리 자신의 상황에 빛이 비추어져야 한다고 희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석하는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자유주의 개신교 강단의 근본적인 실수는 복음은 이간의 경험과 더불어 지속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복음이 인간의 경험을 뒤집어 놓은 후에도 인간 경험과 더불어 지속되고 있다고 말을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이리라. 바르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질문을 가지고 성서에 다가가서,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 대신에 단순히 우리 자신의 생각만 발견하고 만다고 언급하고 있다...

 두 종류의 설교가드이 있다. 하나는 무언가 말 할 것이 있지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이다. 또 다른 하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말할 거리가 없는 사람이다. 바르트주의자들은 바로 전자의 경우이고, 20세기 자유주의 설교가들은 후자에 속한다..

 나는 해결의 결정적인 실마리로서 역전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식 구성으로서의 설교 관점이 제3의 대안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현재 계획하고 있는 설교는 인간의 곤경의 순간에 회중과 접촉점을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귀납적으로 훌륭한 자유주의 전통형석을 갖추어 두 번째 단계(분석의 단계)로 옮겨 가는 것이다. 인간의 열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복음의 자원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을 향한 인간의 그러한 열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준다.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냄으로써, 이것은 전형적으로 일종의 역전을 포함하고 있는데, 새로운 문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수 있는 상황, 즉 연역적으로 정돈된 훌륭한 바르트적 형식으로 준비시켜 준다.

 역전의 원리는 바로 이러한 계획에 중심을 이룬다- 이것은 적어도 네 가지 형태로 발생할 수  있다. 1) 원인-결과의 역전 2) 변화된 원인의 역전 3) 변화된 가정의 역전 4) 변화된 논리의 역전 등이다.

 

나는 여기서 복음은 우리의 삶의 뒤편에서 선한 삶을 살도록 밀어부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불가피성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성도들에게 놓여진 매주일의 '죄의식의 여정'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인간 죄의식의 끔찍함은 강의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선포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지금도 행하고 계신 일을 알려 줌으로써 새로운 삶으로의 구속을 가능하게 한다.

 

성서적인 이야기식 설교

 

1) 모든 '중요하지 않은' 것에 주의하라.

2) 행간을 읽어라.

3) 만나는 모든 것을 파악하라.

4) 당신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자료를 도입하라.

5) 행동에서 동기로 옮겨 가라.

6) 사실보다 그 이전의 역동성으로 나아가라.

7) 감각을 총동원하라.

8) 늘 해오던 동일화 작업을 전환하라.

9)능동태 어법을 사용하라.

10) 1인칭이나 2인칭 단수 형태로 이야기를 몰고 가라.

11) 주관적인 데서 객관적인 데로, 특별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옮겨 가라- 그리고 다시 반대로 옮겨 가라.

12) 단계를 정하라(미리 암시하기)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