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9

Under the Unpredictable Plant

좋은씨앗/ 유진 피터슨

 

 신선한 자극을 추구하다보면 발전이나 덕목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무익하고 파괴적인 생각은 없다. 목회자의 삶이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성숙이 외적인 자극, 즉 '좋은 생각', 뛰어난 감동, 고양된 영향력이나 개념 등에 의존한다는 어떤 주장도 거부하는 삶이다.

 오히려 목회자는 내면의 두려움 또는 유혹과 환상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지닌 어두움과 함께 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구원은 우리 마음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신선한 직무와 새로운 개념을 추구함으로써 지루함, 성적 좌절, 불안, 만족스럽지 못한 욕망에서 탈피하고자 애쓰는 것은  자기 마음의 모든 영역을 은혜로부터 차단시키는 행위이다.

 교회 생활에서 전적으로 '세속적인' 경험- 하찮은 직무들로 구성된 제한된 일상, 단조로움과 외로움- 과 굴욕이 없다면, 인간의 본성을 온전히 겪어볼 길은 전혀 없다. 교회 사역은 환상을 깨뜨리기 위한 훈련 과정이다. 목회자는 세상이 허황된 신앙의 정체성에서 탈피하기 위해 교회 사역에 나선다. 목회자는 소명을 받은 자로서 극적이며 만족할 만한 삶을 살아가려는 열망을 품어야 하고, 지성에 의해 강회된 자아의 영토 확장주의 속에 있는 환상의 뿌리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성 베네틱트의 규율'이라는 책이 내용 중 저자가 수도원과 수도사를 교회와 목회자로 바꾸어서 인용)

 

 교회의 미화는 일종의 음란한 포르노그라피와 같다. 교회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처럼 드러내려 한다. 이는 여러교회들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보여주었던 모습이다. 이처럼 도발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진들은 개인적인 또는 인격적인 관계들이 빠져 있다. 그 사진들은 지배, 만족, 단순하고 비인격적인 영성 등에 대한 열망을 부러일으킨다.

 많은 목회자들이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상상하는 모습은 그런 음란한 사진- 매력적인 교인들로 넘쳐나는 높은 뾰족탑의 교회 모습- 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교회에 대한 거부는 좀더 교묘하게 진행되는데, 지금과 다른 구조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목회자들이 배고프고 목마른 자들을 위한 수용 시설을 시작하려는 막연한 공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고상한 동기를 품은 사람들만을 위한 계획적인 공동체를 세우고 싶어 하지는 않는가? 아니면 신학교나 대학에세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리로 도피하려는 꿈을 꾸지는 않는가? 죄와 신비로운 은혜의 복잡성이 더이상 소명과 관련된 관심거리가 되지 않고, 소명적인 관심이 여전히 위협적이긴 하나 전에 비해 훨씬 다루기 쉬운 무지와 지식의 범주로 대치된 학교로 옮기는 것을 원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한 모든 공상은 머지 않아 현실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앗아가고 목회자들을 무기력하고 초조한 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이처럼 순종하는 생활 속에서 나 자신의 만족감은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목회 사역을 수행했는데, 사람들은 점점 내게 반응을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교 시간에 내가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 선포한 설교 속에서 다른 것을 들었고, 나는 그들의 부주의한 태도를 불쾌하게 여겼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에 반응하는 방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들을 위해 세워놓은 계획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 그 계획이 그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잘 진행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그들을 지도하는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서 나의 명성을 높여주었을 것이다.

 

 고난, 극도의 고난, 풍랑과 같은 고난은 우리의 껍데기를 벗겨내 본질적인 문제에 눈뜨게 하면서 우리 삶의 기본적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요나에게서 발견되는 근본적인 실체는 기도하지 않은 것이었고,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었다.

 

목회자들이 '더욱 원대한 도전' 또는 '더 광대한 기회의 땅'과 같은 말을 하면서 현재의 위치에서 편안함을 누리지 못하고 다른 곳을 바라는 태도는 선지자적인 열정이나 제사장적인 헌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태도는 영적인 죄악의 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그 죄악은 영지주의 바이러스에 의해 생겨난다.

 영지주의는 고대 시대에 생겨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장소와 물질을 경멸하고 업신여기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다. 그들은 복음을 그럴듯한 개념들로 장황하게 설명한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더 탁월하게 설명한다. 그들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용납하지 못하고, 일상 생활 속의 하찮은 일들이나 무질서로 인해 당혹감을 느낀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좋은 감정들로 복음을 다시 조립한다.

 또한 영지주의는 우둔한 사람들과 꾸준히 자기 길을 가는 이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사람을 상당히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른다. 소위 '영적으로 깊은' 사람들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을 선호하고, 전문가들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그와 반대로, 복음은 지역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특정 지역에 적용되고, 대단한 열정으로 육신과 물질과 특정 장소 속으로 몰입하려는 성향을 지닌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고백하는 모든 자를 용납하고 받아들인다. 목회자의 지속적인 직무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역하는 그 자리와, 그곳에서 현실적인 상황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역하는 그 자리와, 그곳에서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그 사람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지역적인 일들에 대한 특화된 사랑, 지역적인 지식과 지역적인 헌신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그런 사랑'이 있어야 한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