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되는 나병과 피부병을 진단하는 것에 대한 본문이 나온다. 묵상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메세지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45,46절에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스스로를 부정하다 외치며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해야했다. 우리는 육체적인 나병은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 영적인 나병에 걸린자로 하나님의 임재에서 격리된 채 살아야했다. 그러나 우리를 만지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게 되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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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체 내에서 한 지체가 죄를 범하면 처음에는 한 사람이, 그 다음에는 두 세 사람이, 그 다음에는 교회 전체가 권고하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한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으로 한 사람을 정죄하려는 위험을 방지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누가 죄를 지으면 먼저 개인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문을 내거나 함께 그 사람을 씹는 경향이 많다. 사실 한 사람을 직면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죄를 지으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 우리의 성향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해 죄를 직면하게 하고 회개하려고 하는 것이 올바른 공동체의 모습이다.
 일흔 번씩 일곱번까지 용서하라는 것은 490번 용서하라는 의미보다는 그만큼 온전하게 끝까지 용서하라는 의미로 본인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큰 용서를 받은 존재이며,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용서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주 고백하는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문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 고백을 할 때마다 마음의 찔림이 있다. 나를 힘들게 하기에 더 이상 미워하지 않으려 세워놓은 마음의 벽까지도 허물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도 나를 용서하신 그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그동안 쌓여진 마음의 벽을 또 허무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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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단상2011. 7. 29. 10:50
예언자와 안티는 한 공동체를 비판한다는 측면에서는 똑같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언자와 안티는 엄연히 다른 존재이다.

이 둘의 차이점을 확연히 드러내는 특징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하나님의 말씀의 유무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예언자는 그 공동체를 사랑하며 그 공동체의 회복을 기대하며 소망하지만,
안티에게는 그런 사랑과 소망없음이 차이점으로 드러날 것이다.

내가 섬기는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되도록 비판할 수 있어야겠으나,
사랑과 소망을 품는 내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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