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_구약/레위기'에 해당되는 글 16건

  1. 2016.10.06 레20:1-16
  2. 2016.04.29 레16장 속죄일
  3. 2016.04.10 레7:11-27
  4. 2016.04.09 레6:24-7:10
  5. 2016.04.02 레2:1-16
  6. 2016.04.02 레위기 2장
  7. 2016.04.02 레위기 1장
  8. 2016.04.01 레1:1-17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7절)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우리가 거룩하기를 원하신다. 규례를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말씀을 통해 거룩해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

먼저 몰렉이라는 이방신을 섬기는 삶에서 떠날 것을 말씀하신다. 진노하여 백성 중에서 끊으신다 말씀하신다. 매우 분노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거룩에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현재 우리는 이방신을 섬기지 않고, 자녀를 몰렉에게 바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속의 가치에 우리 자녀들을 순순히 바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의 가정이 늘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지기를 소망한다.

다음으로 성적인 범죄에 대한 경고를 주신다. 근친상간, 짐승이나 동성과의 성행위를 금하신다. 고대에도 이런 행위가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이것은 그만큼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함께 해 온 뿌리 깊은 것이다. 성이라는 것은 인간의 중요한 욕구 중 하나이기에 이것을 잘 이해하고 다스릴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은 거룩을 요구하신다. 소극적인 태도로 조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적극적으로 거룩한 성에 대한 가치관, 문화를 세우며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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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16장 속죄일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 것.

속죄일을 위해서 제사장은 수송아지 속죄물, 숫양 번제물
거룩한 세마포 옷
회중의 속죄제물로서 숫염소 두마리, 번제물 숫양 한 마리

6절 아론은 자기와 집안을 위해 속죄제를 드린다.
두 염소 중 하나는 속죄제, 하나는 아사셀을 위해 광야로

제사장 속죄 의식
11절 아론 자기와 집안을 위해 속죄

회막 속죄의식
20절 그 지성소와 회막과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기를 마친 후에

아사셀 염소

가장 거룩한 대제사장과 지성소일지라도 속죄가 필요함을 본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그 곳에서 죄를 용서하실지라도. 이 땅의 것은 거룩한 것일지라도 부정함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진정한 거룩함이며, 이 땅의 가룩함은 한계가 있다.
대제사장의 속죄는 그 또한 인간임을 보게 된다.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귀중한 역할을 감당하지만, 한계는 분명하다.
결국 진정한 속죄, 온전한 거룩함을 필요로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그분이 주시는 의와 거룩함을 사모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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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기쁨은 아끼지 말자

레7:11-27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15절)

화목제에 대한 제사 지침에 관련된 말씀이다. 화목제는 감사, 서원, 자원을 위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회복과 구원에 대한 감사, 헌신의 서원, 자발적인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그런데 이 화목제물의 고기는 목적에 따라 처리 방식이 다르다. 특히 감사로 드리는 제사는 고기를 이튿날 아침까지 두면 안된다. 다른 화목제물의 고기도 셋째날까지 남기면 안되지만 감사제는 허용되는 기간이 더 짧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제물의 부패를 막아 제사의 부정을 막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화목제물 모두 공통적이다. 그런데 감사제의 제물은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먹어야 했다. 이 말씀에 순종하려면 어떻게 해야했을까? 가급적 당일에 많은 사람과 이 고기를 함께 나누어야 했을 것이다. 결국 감사는 가능한 많은 사람과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공동체와 함께 기쁨과 풍성함을 나누어야 한다. 많은 이와 나눌수록 하나님께 합당한 것이다.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공동체 속에서 공유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과 회복의 감사는 많이 나눌수록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 절약이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감사의 유익과 기쁨을 나누는데는 아끼지 말자.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은 목자, 한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 잃은 작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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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소비

레6:24-7:10
거룩한 곳에서 먹을 것이며(26, 7:6)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은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잡고, 제사장이 먹는다. 이것은 지극히 거룩한 것이라고 반복된다. 그리고 이것을 제사장들이 먹되 거룩한 곳에서 먹으라고 한다. 지극히 거룩한 것이면 차라리 온전히 불태워야 할 것 같은데 제사장들로 먹게 하신다. 대신 거룩한 곳에서 먹게 하신다.

해설에 보니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으심, 제물의 오용과 남용 방지, 제사장들의 거룩한 삶을 보장하여 예배를 존속하게 함으로 이해된다.

제사와 제사장의 신약과의 불연속성이 있기에 연속성을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그러나 연속성 속에서 적용점을 찾는 시도는 가능할 것이다.

먼저 사역자의 입장에서 보면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린 헌금으로 생활하는 사역자들은 그 전체의 삶이 거룩해야 한다. 그래야 성도들에게 예배의 정당성을 느끼게 할 수 있다. 특히 소비에 있어서도 거룩을 드러내야 한다. 너무 과도한 제한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앞선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금욕이 아니라, 신앙의 공동체와 거룩을 염두에 두는 씀씀이가 필요하다. 이것은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된다.

고객이 왕인 소비의 시대를 사는 우리. 왕 같은 제사장인 그리스도인이여. 소비는 거룩해야 한다. 거룩한 소비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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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를 기억

레2:1-16
기념(2, 9, 16)

소제는 곡식의 고운 가루나, 화덕, 철판, 냄비로 만든 것이나, 첫 이삭을 드린다. 여기에는 유향, 기름, 소금을 넣을 수 있으나 누룩과 꿀은 넣을 수 없다. 곡식예물은 한 해 곡식농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음을 상기시키는 기념물이다.

예배는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다. 나의 소득과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하며 감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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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부터는 아담이 아닌 네페쉬. 소제는 번제를 드려 죄와 죄책을 벗고 하나님께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음을 의미한다. 더 가까이 가는 과정에 소제가 드려진다.

곡식예물은 예배자의 수고의 산물이면서 한 해 곡식농사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기념물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기념물.

고운가루. 예배자 자신이 하나님 앞에 고운 가루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을 갖도록 함.

떡과 부침으로 튀김으로 제물을 만들라 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연합을 의미한다.

기름과 유향. 하나님게 나아가는 예배자는 반드시 기쁨과 감사함으로 나와야 한다.

누룩과 꿀. 누룩은 발효. 발효역할을 세상 사람들의 사상. 꿀은 육욕적인 환락과 쾌락

소금. 하나님의 언약이 불변함을 강조

처음 익은 것 또는 첫 이삭의 소제. 하나님이 축복하심을 인정하는 최상품의 것.

지극히 거룩한 것. 소제에서 번제단에 태워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고 남은 나머지 제사장 몫이 되는 것. 지극히 거룩한 것이 하나님의 소유인 것처럼, 지극히 거룩한 것을 먹고 살아야 하는 제사장 또한 하나님의 소유인 것을 상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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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근동의 제사는 윤리적 삶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차이

번제는 헌신과 속죄의 의미

안수는 전가보다는 대체, 동일시의 의미가 강하다

헌물자가 직접 짐승을 잡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뜬다. 참여, 능동적.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까지 드릴 수 있다. 가난한 자를 향한 긍휼, 그러나 죄에 대한 값을 반드시 치뤄야 하는 엄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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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이 아닌 예배자

레1:1-17
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5절)

목회자임에 불구하고 '그'라고 지칭한 사람을 예물드리는 자보다는 제사장이라고 피상적으로 이해했음을 이실직고한다. 몇 번 강의를 들었음에도 머리 속의 편견 혹은 전제가 있어서였을까. 본문에 의하면 예물을 드리는 자가 짐승을 직접 잡아야 한다. 피를 흘려야 하고,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야 한다. 제사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예물드리는 자가 직접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현재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예배 드리는 태도를 점검할 것을 요구한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다. 관객이 아니라 예배자가 되어야 한다. 죄의 잔혹함과 폭력성, 사죄의 자유와 해방감을 직접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위해 회중은 예배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며, 예배시 수동적 자세가 아니라 능동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예배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것이 인원이든 하드웨어든, 예배의 본질에서 멀어지기 쉽다고 느껴진다. 결국 이런 태도가 제의의 예배 뿐 아니라 삶의 예배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예배의 관객이 아니라 배우가 되라. 직접 예배로 뛰어들라. 예배에 관한 드림을 그치고, 예배를 드리라. 소와 염소의 울음소리를 듣고, 손에 피를 묻히라. 그 때에 죄의 무서움을 알게 되리라. 그러면 속죄를 갈망하리라. 그 후에 그리스도의 속죄의 달콤함을 맛보아 알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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