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_구약/아모스'에 해당되는 글 12건

  1. 2015.12.16 암9:1-15
  2. 2015.12.15 암8:1-14
  3. 2015.12.14 암7:10-17
  4. 2015.12.13 암7:1-9
  5. 2015.12.12 암6:1-14
  6. 2015.12.11 암5:18-27
  7. 2015.12.10 암5:1-17
  8. 2015.12.09 암4:4-13
심판의 이유가 극복되는 회복

암9:1-15
그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11절)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있는 자들을 심판하시되 한 사람도 피하지 못하게 하신다. 자연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이 때 선민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똑같이 죄에 대한 심판을 받는다. 그 날에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회복시키며, 성읍, 포도원, 과수원이 세워진다. 포로로 끌려갔던 자들이 돌아와 다시는 흩어지지 않게 될 것이다.

성전에 있는 자들이 심판을 받는다. 이것은 예배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교회에 다닌다는 것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또한 출애굽이라는 특별한 사건이 다른 민족의 이동과 같은 평범한 것이 되어버린다. 죄 앞에서의 심판은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에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구원, 안정, 특권은 당연한 것이 아니다. 걸 맞는 책임과 삶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긴 심판의 말씀 끝에 회복의 말씀이 나온다. 그러면 그렇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8:2) 하셨지만, 결국 회복시켜주시는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이시다. 니느웨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 요나가 된 심정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렇게도 격렬하게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자들을 향해 심판을 전했던 아모스는 뭐가 되나? 회복 한 방이 이전의 모든 심판을 깨끗이 날려버리는가?

그렇지 않다. 회복은 심판을 무시하지 않는다. 물타기가 아니다. 종교와 일상의 분리, 종교적 정치적 기득권자들의 사치와 향락, 약자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극복되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방향과 지침(김근주)'가 될 것이다. 공의와 정의의 일상이라는 제물이 제단에 올려지는 참된 신앙공동체의 회복을 소망하게 한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일상에서 약자와의 관계를 조준하는 말씀


암8:1-14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4절)


하나님께서는 '여름 과일 한 광주리(카이쯔)'를 보이시며 '끝(케쯔)'을 말씀하신다. 절대 다시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가난한 자를 삼키고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날에 큰 고통과 애통이 땅에 가득하게 될 것이며,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로 모두 쓰러질 것이다.


식언하지 않으시고, 뜻을 돌이키지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종종 이상하게도 심판을 말씀한 이후에 하나님께 백성들이 부르짖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셨다. 그런데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말씀하신다. 그야말로 끝장이다. 우리는 용서와 긍휼이 없으면 안되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심판의 이유는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착취와 이익을 위한 부정 때문이다. 속이는 저울, 부당한 임금, 먹지 못할 음식 판매이다. 제사와 예물이 심판의 근거가 아니다. 일상과 삶이 문제다. 일상 속에서 어려운 이웃을 어떻게 대하는가의 문제이다.


이런 문맥 속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새롭게 이해된다. 본문을 쪼개는 말씀, 성실한 묵상과 연구에 따른 말씀, 진실한 말씀과 같은 텍스트와의 관계가 중심이 아니다. 오히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 대한 일상에서의 삶의 방식이, 즉 일상 속에서 약자와의 관계에 초점이 있다. 즉 이런 잘못을 조명하고 죄를 지적하며 회개하게 하는데 정조준 된 말씀을 찾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내가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가? 일상 속에서 약자와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설교를 전했을 때의 시선과 반응이 부담스럽다. 두렵다. 이런 모습의 내가 부끄럽다. 본문은 나의 설교가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 아니라 오히려 쓰러뜨리데 가까움을 지적한다. 아모스라는 리트머스지는 나의 메세지가 목마름에 갈증을 더하는 소금물이라고 결과를 내놓는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아마샤 vs 아모스

암7:10-17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15절)

벧엘의 선지가 아마샤는 아모스의 심판예언을 반역과 저항으로 여로보암 왕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유다로 돌아가서 거기서 생계를 유지하며 살라고 말한다. 이에 아모스는 자신의 예언은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 때문임을 강조한다. 또한 아마샤와 이스라엘의 멸망, 정치와 결탁한 종교의 심판을 예언한다.

진정한 예언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대비된다. 한 사람은 부패한 권력의 종으로 기득권 유지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안녕에 대한 관심은 없다. 비판과 저항을 배척하고 예언을 생계와 출세와 관련시켜 이해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집중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한다. 매일성경 해설에 나와 있듯이, 화려한 이력, 능숙한 언변, 사람들의 반응, 대가가 아니라 보내신 분의 말을 충실히 대변한다. 위협과 협박에도 하나님의 심판을 가감없이 전한다. 권력과 기득권에 대한 저항과 비판을 가한다.

화려한 이력, 능숙한 언변, 사람들의 반응, 대가. 이 네 단어가 눈에 꽃혔다. 아니 내 마음이 들켰다. 아니라고 하지만 늘상 노심초사 고민하고 흔들리는 것들이다. 저항과 비판정신은 제로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은 내가 아마샤라고 고발한다. 심판이 네 앞에 당도했다고 경고한다. 어찌할꼬.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심판 중에라도 긍휼의 중보를

암7:1-9
사하소서(2), 그치소서(5)

하나님께서는 환상으로 메뚜기와 불 재앙을 미리 보이셨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것을 두고 하나님께 중보함으로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시지 않았다. 그러나 세번째 다림줄 환상을 통해 그 잘못을 밝히시며 심판하시되 종교와 정치 모두 멸망할 것을 말씀하신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이다. 죄와 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단호하게 선언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이 땅과 백성의 죄악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한다.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한다. 기득권자들에게 심판을 담대히 선포하는 것 중요하다. 그러나 이 땅에 대한 긍휼을 품고 중보하는 마음도 중요하다.

물론 중보가 있다고 해서 무조건 심판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잠시 유예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이렇게 중보를 통해 재앙이 연기가 되어도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완고함과 심각성이 드러난다. 죄로 결탁된 종교와 정치의 철옹성.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철저히 무너질 것이다.

비록 이런 과정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께 중보해야 한다. 심판이 임박한 이 땅을 향한 긍휼의 기도를 올려드려야 한다. 약자의 고통을 향한 긍휼, 심판을 목전에 두고 있는 자들을 향한 긍휼의 중보.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결국 하나님께서 긍휼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공의와 정의의 또다른 이름, 긍휼.

암6:1-14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6절)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사치와 향락에 젖어살면서 백성들의 상처와 어려움에는 무반응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가장 앞서 심판하신다. 모든 궁궐과 성읍과 땅을 멸망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며 말씀이다. 이것은 공의와 정의를 찾을 수 없고 경험할 수 없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층에 대해 경고와 심판을 말씀하신다. 저들은 향락과 사치를 즐긴다. 감각의 극치를 체험한다. 그런데 그 감각이 백성과 이웃의 아픔과 상처에는 전혀 무감각한 이중성을 보인다. 그 아픔을 제일 먼저 달래주라고 세웠는데, 그렇지 않아 제일 앞서서 심판을 당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이루었는지에 관심이 없으시다. 지금 하나님의 모든 관심은 약자의 아픔과 상처이다. 그것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가지고 판단하신다. 이웃의 아픔과 상처를 얼마나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가가 공의와 정의의 판단기준이다. 함께 아파하는 것, 긍휼이 공의와 정의의 또다른 이름이다.

내 마음의 굳은 살을 베어내기를. 울음과 비명소리가 귀에 들려지기를. 눈물을 함께 흘리기를. 찾아가 안아줄 수 있기를.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일상 속에 예배를 심어라

암5:18-27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24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의 날을 자신들이 구원받고 대적들이 심판받는 날로 당연시했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은 당황스러운 날이다. 자신들의 죄가 심판받는 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심판이 사랑과 공의를 잃어버린 예배 때문이라고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는 이들을 끌려가게 하신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당연하게 생각하는 위험성을 지적하신다. 그러다 황당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황당할 수 밖에 없는 것과 꼭 같다. 하나님을, 구원을, 심판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말자. 구원과 은혜가 자동적으로 주어지리라, 심판이 응당 피해가리라 여기지 말자. 그러다가 황당한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이 황당한 심판이 주어지는 이유는 제사와 삶이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열심히 제사드리고 제물을 드리고 십일조를 드려도, 그 삶에 공의와 정의가 없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역겨워하신다. 무너진 삶, 공의와 정의를 회복해야 한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라'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 말씀에 적용하면 이렇다. 일상 속에 예배를 심어라.

이것은 묵상에도 적용된다. 묵상과 삶이 일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실 것이다. 일상 속에 묵상을 심어야 한다. 말씀묵상으로 만족할 수 없다. 여기에 안주하면 안 된다. 말씀실천이 살 길이다. 그것이 능력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삶의 예배자가 생명을 전합니다

암5:1-17
너희는 나를 찾으라(4,6,8)

살아있다 하나 죽은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애가를 부르십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살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공의와 정의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을 구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사와 예배 드리는 것은 좋습니다. 좋게 아름답게 거룩하게 드리려고 노력을 쏟는 것도 훌륭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 삶의 부조리와 죄를 지적하시는 추상같은 음성을, 이웃의 아픔을 호소하시는 하나님의 탄식을, 민족과 역사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예배만 관련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에게 공의와 정의가 공평하게 이루어지는 것과도 밀접한 연관이 됩니다. 가난하고 연약한 자를 압제하는 악을 멀리하고, 이들에게 이익이 공평하게 분배되도록 하는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찾을 뿐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일상의 예배자가 살아남습니다. 삶의 예배자가 생명을 전합니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예배자가 드려지는 예배

암4:4-13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6,8,9,10,11)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릴수록 죄가 사해지지 않고 더해졌다. 하나님의 기쁨이아니라 자신들이 기뻐하는대로 예배드렸기 때문이다. 이런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해 여러 재앙을 보냈으나 이들은 끝내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천지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심판을 행하기 위해 만남을 준비하라 명하신다.

변함없이 예배드린다. 정성을 다해 제사드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는다. 제물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예배자의 삶이 죄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예배자가 하나님께 드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를 원하신다. 마음, 정성, 힘, 뜻이 담긴 예배. 형제 화목의 예배. 신령과 진정의 예배.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예배. 믿음의 예배. 고아와 과부 구제의 예배.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으로 어린양을 찬양하는 예배. 우리 삶의 한 부분만을 원하시지 않는다. 통째를 원하신다. 예배자가 드려지는 예배를 기뻐하신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