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_구약/사무엘상'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6.06.17 삼상28:3-25
  2. 2016.06.16 삼상27:1-28:2
  3. 2016.06.09 사무엘상 23:15-29
  4. 2016.05.07 삼상4:1-11
  5. 2016.05.06 삼상3:1-21
  6. 2016.05.04 삼상2:11-21

다급할 때 나는 누구인가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15절)

사울은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오고, 사무엘도 죽고 없으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다급한 상황을 겪게 된다. 이런 위급하고 답답한 상황 가운데 사울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셨고 자신이 쫓아낸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다. 영적 하강의 최저점을 찍는 사건이다. 결국 사무엘의 영을 통해 전쟁의 패배와 자신의 죽음을 듣게 된다.

먼저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사무엘의 영이 진짜인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말한 그대로 되었다는 점에서 효력은 있지만 정당성을 가질수는 없다. 귀신이 죽은 자의 영이라는 귀신론이나 점 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집중해야 할 것은 사무엘의 영이 진짜인가 보다 사울이 영적으로 하강의 일로에 있다는 점이다.

다급한 상황 가운데 최악의 선택을 하는 사울의 모습은 여기 뿐이 아니다. 익숙한 데자뷰의 모습이다. 이전에 아말렉 군사가 가까이 왔을 때 사무엘이 오지 않고 백성들이 흩어지자 자신이 제사를 드린다. 하나님께 결정적으로 버림 받는다.

다급할 때 주의해야 한다. 다급할 때 선택하는 것이 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은 실수와 실패들이 모여 다급한 상황을 만들어내는지 모르겠다. 그러기 전 작은 것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연습이 중요하다. 아무도 보는 이 없을 때 나는 누구인가를 드런내다고 한다. 이것과 함께 다급할 때 나는 누구인가를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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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의 땅에서 살지라도

다윗은 두 얼굴의 사람이다. 26장에서 사울을 살려줄 때는 성자요 하나님의 때에 민감한 신앙인이다. 그러나 27장에서는 영락없는 현실적인 타산가요 거친 세파를 홀로 뚫고 가다가 크고 작은 작은 상처를 입으며 성장하는 야심적인 경세가다. 그는 절제된 신앙인이면서도 동시에 범람하는 욕망의 사람이었다. 하나님께 조심스럽게 묻는 사람이면서도 자신의 열정으로 앞서가는 사람이다. (김회권)

다윗은 원수의 땅, 블레셋 지역의 가드로 사울의 추격을 피해 망명한다. 약속의 땅이 아닌 낯선 땅, 비굴함을 삼켜야 하는 환경이다. 이스라엘의 적이긴하나 그술, 기르스, 아말렉 사람을 전멸시킨다. 또 아기스의 적을 공격한 것처럼 거짓말을 한다. 김회권의 말처럼 '구름 위를 걷는 영성가가 아니라 진토에 입술을 대고 살아가야 하는 피조물의 비릿한 궤적'을 보게 된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성경은 즉각적인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후에 성전을 지으려고 할 때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신다. 그가 흘린 피의 책임을 물으신다. 허용된다고 해서 칭송할만한 덕은 아니다.'

다윗의 행동을 평가하기에 앞서, 다윗은 다름아닌 나의 모습을 보게한다. 신앙인이면서도, 욕망에 사로잡히는 나 말이다. 이런 다윗이지만 믿음의 모델이 된다. 하나님의 마음의 합한 자라는 칭호를 얻는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이상이 아니다. 비릿함, 역겨움, 구차함이 뒤범벅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심을 어렴풋이 보게 된다.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이 중요한 이유이다.

그렇다고 타협과 이중성이 목표는 아니다. 이상을 향해 나가는 우리의 과정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상황과 나의 현실이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바라보며 한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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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first
기꺼이 2인자 되기

사무엘상 23:15-29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16절)

본문은 광야에서 사울의 추격과 포위라는 위기를 겪지만 극적인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드러낸다. 극한의 위기 속에서 극적 도움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향한 굳센 믿음을 갖게 하신다(김회권).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는 믿음을 위한 것이다. 또한 다윗이 사는 법을 함께하는 600명의 사람들이 보면서 하나님의 대의를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김회권).

그러나 오늘 유독 마음에 와닿는 것은 요나단의 모습이다. 다윗을 위로하는 요나단. 그의 사랑과 헌신이 눈물겹다. 특히 그는 다윗을 위로하되 힘있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였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강도가 약해질 수 있다. 인간의 믿음은 흔들린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힘있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도와야한다. 기도 가운데 부르짖도록, 예배에 힘쓰도록, 성령의 이끌림을 받도록.

또한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도 자신이 다윗 다음이 될 것을 안다고 말한다. 2인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자신 뿐 아니라 자기 자녀가 앞서지 못하는 것을 못 견딘다. 질투와 시기에 사로잡혀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한다. 이 마음은 사무엘서의 주제 순종하는 왕과 연결지어 볼 때 결국은 자신이 하나님 되고자 하는 마음이다. 불순종과 반역의 마음이다. 기꺼이 하나님을 앞세우고 나는 철저히 2인자가 될 수 있는가. 기꺼이 다른 이를 섬기는 자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이 관건이다.

어제 나의 목회와 진로를 생각하며 불안해하였다. 다른 이들은 저마다 소신있게 믿음으로 앞서 가는데 나만 뒤쳐진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다른 이에게 하소연하고, 고민을 토로했지만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내에게 가장으로 본이 되지도 못했다. 오늘 말씀에 비춰보니 목회, 교회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2인자가 되는 것, 뒤쳐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질투와 시기의 마음이었다. 나의 연약함을 회개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다시 하나님을 앞세우고 나는 철저히 2인자로 머물기로 결정한다. 그분이 인도하실 것을 신뢰한다. 그리고 내가 섬겨야 할 성도들이 힘있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돕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다. 섬김, 그것은 의지적으로 2인자가 되는 것이다. 기쁘게 2인자로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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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하는 거룩한 삶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십니다

삼상4:1-11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2, 3절)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사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패배에 대한 표현이 묘하다.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했다. 블레셋에게 진 것이 아니라, 그들 앞에서 패했다. 하나님께서 패하게 하셨다는 점이 강조된다. 

그런데 장로들은 패배의 원인을 잘못 진단합니다. 언약궤가 없어서 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패배를 만회해야겠다는 생각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옵니다. 사실 아이성 전투 때처럼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습니다. 단지 광야 시절 언약궤를 앞세우고 승리를 거두었던 것을 기억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언약궤는 승리를 기계적으로 보장하는 실용적인 도구가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동식 통치 보좌'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거룩한 현존을 나타내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그렇지 않습니다. 그 언약궤를 운반하는 자들이 누구인가가 중요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전을 불결케하는 장본인들이었습니다.

나의 필요와 욕구로 하나님을 조종할 수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여부가 승패를 가름합니다. 거룩한 삶의 여부가 하나님의 임재를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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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의 사람

삼상3:1-21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9절)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 장면이다. 이 시대는 말씀과 이상이 희귀한 시대였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셨을수도 있고, 말씀을 듣고 전할 사람이 없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때에 하나님께서는 엘리가 아니라 사무엘을 부르신다.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7절) 처음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다가, 엘리의 도움으로 깨닫게 된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의 고백은 김구원 교수가 말한 순종하는 왕이라는 사무엘서의 메세지를 특징적으로 드러낸다. 듣는 것은 소리를 듣는 것과 함께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사무엘이 처음 들은 말씀은 엘리 가문의 심판이다.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을 심판한다. 기존의 것이 부패하고 죄악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하고 새로운 것이 출현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이상은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 새로운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운 사람(3절)'일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순종의 준비가 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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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하나님 앞에 서라

삼상 2:11-21
여호와 앞에서(18, 21절)

본문은 엘리의 아들들의 악행과 사무엘의 성장이 대조, 교차되는 말씀이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쁘며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제사의 규정을 지키지 않을 뿐더러 방자하게 행했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서 레위기를 묵상하였는데 이런 행동은 얼마나 참람한가. '신분은 제사장이지만, 실제는 폭군이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행실과도 관련이 있다. 구체적인 규정을 준수하는 것과도 연결된다. 이렇게 엘리 제사장 가문은 신뢰를 잃고 있다.

이에비해 사무엘은 신뢰를 얻어간다. 처음에는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지만 점점 여호와 앞에서 자라고 섬긴다. 하나님의 뜻을 이어갈 단독자로 세워져간다. 사무엘은 레위지파가 아니라 에브라임 지파로 이해되는데, 그럼에도 제사장의 임무를 수행해나가며 이스라엘의 영적지도자로 세워진다. 출신은 그렇지 않은데 제사장과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 키는 '여호와 앞에서'이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은혜를 구하는 것,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지는 것, 매년 절기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와 믿음을 보이는 것. 이런 자가 하나님께 신뢰를 얻는다. 공동체의 신뢰도 뒤따른다.

신분, 출신, 이전의 헌신과 인정이 나의 신앙을 보장하지 않는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를 통한 만남과 은혜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나의 삶과 행동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나의 믿음을 대변한다. 왕 같은 제사장이여. 직책과 명분에 기대지 말라.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오라. 예배로 하나님께 당신의 마음과 삶을 드리라. 그대, 하나님 앞에 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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