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 해당되는 글 7건

  1. 2014.08.02 고통당하는 자들로 하여금 더 부르짖게 하라
  2. 2011.11.04 레13:38-46 부정하며 하나님의 공동체에 들어갈 수 없는 나병환자와 같은 우리를 만져주시고 치유하여 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생명의삶
  3. 2011.09.01 마23:1-7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하나님께만 전인격을 드리고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골방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찾아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식하도록 연습하자. #생명의삶
  4. 2011.08.19 마15:16-23 어린아이들을 그 자체로 공동체에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대하자. 온전함이란 완벽함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전적으로' 개방하는 것이다. 나의 시간과 물질은 나누자. #생명의삶
  5. 2011.08.13 마16:21-28 '이 때부터'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는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인내와 배려를 보게된다. 사단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한다. 오늘 하루 나의 미래와 존재감보다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 공동체와 사역에 더욱 집중하자. #생명의삶
  6. 2011.08.05 마4:1-12 헤롯은 올바른 대상을 두려워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진리를 두려워하지 못했기에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다. 진리의 말씀을 두려워할 때 담대하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이다. #생명의삶
  7. 2011.07.31 마12:38-5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

최근 욥기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고난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 스스로가 큰 고난을 겪어본 일이 없다고 생각이 된 터에 여러 글을 통해서 나의 묵상은 상당히 개념적이고 추상적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최근 총리후보자의 발언으로 이슈가 된 고난을 통과한 공동체의 운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개념정리가 필요하겠다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중 페북을 통해 한 분이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글을 보고 검색하던 중 블로그에서 발견하게 된 글이다.

전체 내용이 중요하지만 눈에 들어온 문장들을 파란색으로 표시해본다.

읽고 나서 느끼게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과 고난을 이해할 수 있으며, 삶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과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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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yijaeju/220035070879

고난과 하나님의 전능 리뷰


기독교 신학의 최우선 과제는 부조리한 고통과 악의 문제에 직면하여 기독교화 된 형이상학이나 형이상학화된 신학을 구성하는 것에 있지 않으며, 형이상학적 질문의 방향을 따라 악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해명이나 형이상학을 통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을 해체시켜 그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고통의 희생자들이 그들의 고통을 더 크게 부르짖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전능과 고난의 극복 (정리)

전능하신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대한 그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힘을 행사하며 자신의 고유한 힘을 사랑 안에서 드러낸다.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드러나며 하나님의 전능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스스로 참여하는 사랑의 전능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사랑의 하나님이며, 타자를 위해 스스로를 고난 속에 던져 놓는 하나님의 사랑은 전능하다.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서 하나님의 전능과 사랑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약하기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기에 고난에 참여하며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인간과 피조세계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며, 이를 자신의 고난으로 짊어짐으로써 사랑의 힘을 드러낸다. 이 역사의 질곡 속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무력함을 통해서 힘들의 갈등을 품고 극복하는, 하나님의 고유한 아가페의 힘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전능이야말로 고난당하는 자가 고통의 현실 속에 주저앉지 않고 고통의 틈새로 비춰오는 새로운 현실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고통에 참여할 뿐 아니라 고통당하는 인간 자신을 끌어안고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의 아픔에 동참함으로써 불가능을 넘어서는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며, 이러한 사랑의 전능 안에서 고난당하는 자가 고통을 딛고 일어설 힘의 원천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 안에서 나의 고난에 함께하신다면, 나는 고난 중에 결코 홀로 버려진 존재가 아니다. 나의 슬픔과 아픔이 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다. 이 사실은 나를 해방시켜 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연대할 힘을 제공한다. 하나님은 피조물과의 자유로운 사귐을 위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전능을 포기하는 전능을 보이시며 사랑을 자신의 고유한 본성으로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 고난 속으로 들어오시며, 고난가운데서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의 창조적 구원적 힘에 대한 신앙은 고난의 흔적을 몸에 지니면서 그럼에도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삶과 용기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신앙은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12:10) 이는 하나님의 전능을 통해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짊어질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고난과 신학

고통의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더 이상 악의 본질과 원인을 형이상학적으로 물을 것이 아니라, 고통의 극복과 그것의 가능성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감 으로써 율법적, 종교적으로 이해되었던 인과적 연결고리를 해체해버렸다. 또한 그는 고통의 종교적 원인을 밝히려고 하기보다는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그를 치유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은 세계의 원인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다가오셨다.

우리는 고통과 악의 문제를 직면하여 기존의 형이상학적 신학과는 정반대로 미래적 가능성으로 하나님을 묻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때 미래적 가능성으로 희망되는 하나님의 힘은 현재의 모든 파괴적인 것을 극복하는 힘, 사망에서 생명의 충만으로 창조하는 힘이다. 고통의 현실 속에 있는 자에게는 이 하나님은 여전히 힘없는 존재로 경험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무력함을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경험한다면, 함께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미래적 힘의 선취로 이해한다면, 고통당하는 자는 현실의 부조리에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 희망에 하나님과 동참하게 될 것이다. 이 자는 고통과 악의 파멸적인 힘에 짓눌린 삶의 암흑 속에서도 일어설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시적 무력함과 가능적 전능을 연결시켜 주는 메타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현실의 틈새를 꿰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가능적 미래의 빛에서만 우리는 전능한 하나님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힘은 현실 속에서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 받는 사랑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사랑은 미래적 가능성 안에서 고난당하는 자를 일으키실 창조와 구원의 힘으로 희망된다.

기독교 신학은 신의 존재와 행위 속에서 진지하게 고난의 현실을 목도하며,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며, 동시에 새롭게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는 자리로 인식한다.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기독교 신앙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적 참여를 통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고난의 의미를 해석하는 분이 아니라 고난을 극복하게 하시며, 파괴적인 고난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고통과 악에 짓눌려 닫혀버린 삶의 철문을 파쇄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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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되는 나병과 피부병을 진단하는 것에 대한 본문이 나온다. 묵상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메세지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45,46절에 나병환자는 옷을 찢고 스스로를 부정하다 외치며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피해야했다. 우리는 육체적인 나병은 없을지라도 우리 모두 영적인 나병에 걸린자로 하나님의 임재에서 격리된 채 살아야했다. 그러나 우리를 만지시고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게 되었다. 주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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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여'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들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시면서,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한다고 하셨다. 말과 행위가 일치하지 못함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사역자와 설교자로 선 나는 나의 말과 행동이 일치되고 있는가?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행동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가? 요즘 내가 말하고 가르치는 것 중에서 내가 실천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전 시간과 새벽기도 이후 시간을 잘 활용하는 일이다. 스마트 폰을 가지고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묵상하며 독서하는 일에 시간을 늘려가야겠다.

5절.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또한 예수님께서는 5절에서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고 하셨다. 사람들의 눈에 띄고 인정받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있어야 하고 그것을 놓치는 순간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께만 전인격을 드리고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경건생활을 한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 골방이라는 시간과 공간을 찾아 하나님과 깊이 교제해야 한다. 사람 때문에 일하고 사람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는 훈련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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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을 받아주시고 예수님께 오게 하시면서 천국은 어린아이들의 것이라고 하셨다. 18장 3절에서 이미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다. 거기서는 어린아이의 어떤 특성이 언급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어린아이 자체를 받아주시고 용납하셨다. 독일성서공회 해설에 의하면 어린아이들도 공동체에 함께 속하므로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며 진지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고 나온다. 함께 사는 나의 자녀들도 받아주고 진지하게 대해주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오늘 하루 가까이 있는 나의 자녀들부터 용납하고 사랑으로 대해주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질문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십계명과 이웃사랑을 말씀하시면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것과 온전함을 같게 생각하셨다. 마찬가지로 독일성서공회 해설에(마5:24)는 온전함이란 "히브리어에서 무엇에 마음을 다 바치는 것, 분열되지 않은 마음으로 무엇을 하는 것 또는 어떤 일을 완전하게 처리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온전함이란 흠잡힐 데 없이 완벽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전적으로' 개방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 하루 온전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개방할 수 있을까? 마음, 시간, 돈, 관심, 사랑을 개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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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부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교회에 대한 약속을 주신 이후에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쉽게 이해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이어지는 베드로의 모습에도 나타나듯이 말이다. 인내하시고 배려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사단은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게 하는 존재이다.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보다 자신의 계획과 안정감과 미래에 집중하게 하는 것이다. 나 또한 목회를 하지만 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역사에 참여하기보다 또 이 안에서 나의 계획, 안정감, 미래에 대한 고민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자. 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자.
 예수님을 따르려거든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슴하신다. 처음에는 목숨을 잃는 것 같겠지만 결국에는 목숨을 찾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다시 갚아주신다는 의미일 것이다. 오늘 하루 나의 삶에서 나를 부인하고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나의 미래, 나의 감정, 나의 존재감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 나라로서의 교회 공동체와 사역에 더욱 집중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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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롯은 민중을 두려워하여 민중이 선지자로 여긴 요한을 죽이지 못하였다. 또한 옳은 말을 하는 세례요한 때문에 양심의 찔림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상황이 만들어지자 요한을 죽였다. 선지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못하였기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이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의 문제이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사람들과 그들의 반응이 두려운가? 
다시한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져야할 것이다. 
그럴 때 세례요한처럼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담대하게 진리의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헤롯은 올바른 대상을 두려워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진리를 두려워하지 못했기에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다. 진리의 말씀을 두려워할 때 담대하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게 될 것이다. #생명의삶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1. 믿음은 표적에서 말미암지 않는다.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와 태도이다. 
   사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요나의 표적은 십자가와 부활인데 이것은 표적 중의 표적이다.
   물론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그냥 허무한 죽음으로 보여졌겠지만..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표적 중의 표적이 나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주는 것이 멈치지 않고
   더 믿음 가운데 굳건히 서 나가기를 원한다.

2.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라야 예수님의 가족이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 원하나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은 쉽지 않아보인다.
하루하루 주어진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뭔가 하나님의 뜻을 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은 뭔가 일상과는 다른 특별한 것이어야 할까?
특별하고, 모험을 하고, 결단을 내리고,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상적이고, 반복적이며, 계속 이어가고,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일도 나의 자리에서 어떻게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루가 되기를 원한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