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청년아카데미 공동체 지도력 훈련원 2기
- 하나님나라 * 공동체 * 제자도 -
▣ 공동체 지도력 훈련원은...
기독청년아카데미 학기별 강좌들과 연계하여 진행되는 집중 훈련과정입니다.
하나님나라와 공동체에 대한 소명과 도전이 심화된 청년들과 함께
보다 집중적으로 공부하며 ‘공동체 지도력’을 양성하는 훈련과정입니다.
공동체 성서읽기, 공동체 관계 및 지도력 훈련, 목회상담 등을 통해,
서로의 은사와 소명을 자각하고 이를 함께 공유하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소통하심을 통해 생성되는 ‘은사공동체’의 지체됨을 자각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역 현장에서 ‘상호 목회적 관계’를 구현할 수 있는 지도력을 훈련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영성과 제자도를 토대로 우리시대의 역사, 사상과 문명의 흐름을 공부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작동하는 세속적 가치질서의 우상적 작동을 분별하는 지혜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나라의 대안적 생활양식과 관계를 창출하고자 하는 소명 속에서 수행됩니다.
하나님나라 운동을 각자의 생활, 사역 현장에서 다양하게 생성시키고,
우리시대의 우상적 삶의 양식과 세속적 가치질서를 거스르는
대안적 공동체를 다양하게 창출해 갈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1. 졸업을 앞둔 기독학생들을 위한 선교적/공동체적 사회진출 운동
2. 하나님나라운동을 사회생활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생활양식과 관계를 생성하는
생활/사역 공동체 창출 운동
3. 선교단체 간사, 청년목회자, 청년 지도력들의 공동체 사역을 돕는 공동체 지도력 양성 운동
▣ 일시 : 07년 2월 14(수) 개강, 1년 과정
매주 수요일 저녁 7:00~10:30
▣ 장소 : 기독청년아카데미 세미나실 (지하철 혜화역 4호선 4번 출구)
▣ 강사 : 최철호 목사 (아름다운마을공동체, 기독청년아카데미 운영위원장)
▣ 등록 : 직장인 300,000원 (학생/간사 250,000원) / 국민 373701-04-067555 오세택
계좌입금 후 게시판(전화)로 연락주시면 등록 완료됩니다. 인원제한 있음. 꼭 사전등록해 주세요.
▣ 문의 : 764-4116 / 김준열 간사 010-3014-7910 http://lordyear.cyworld.com
▣ 주요 교육 내용
성서와 공동체 |
세미나 주제 |
교 재 |
영성 ․ 삶 ․ 제자도 |
공동체 성서읽기 (요한복음/로마서) *
공동체 관계훈련
*
생활 나눔 상호목회
*
밥상공동체
*
목회상담 |
하나님나라 복음 역사 |
통전적 선교 르네 빠딜라 / 나눔사 |
제자입니까 후안까를로스 오르티즈/두란노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 로날더 사이더 / IVP
기도 리차드 포스터 / 두란노 영적 성장의 길 고든 맥도널드 / 두란노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고든 맥도널드 / IVP 모든 것을 새롭게 헨리 나우엔 / 두란노 현대인을 위한 생활영성 폴 스티븐슨 / IVP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 한길사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폴 사르트르 / 한마당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 돌베개 나무야 나무야 신영복 / 돌베개 더불어숲 신영복 / 돌베개
대천덕 자서전 대천덕 / 홍성사 문익환 평전 김형수 / 실천문학사 나를 따르라 본회퍼 / 기독교서회 옥중서간 본 회퍼 / 기독교서회 중력과 은총 시몬느 베이유 / 사회평론 |
신학의 역사 A. 맥그라스 / 지와 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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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상/문명의 흐름과 전환
동북아 사상의 영감과 논리
세계관적 성찰 |
논술과 철학 강의 김용옥 / 통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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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굴뚝 청소부 이진경 / 새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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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기능 화이트헤드 / 통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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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의 철학 이정우 / 철학아카데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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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 돌베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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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공동체 지도력 |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도르트 죌레 / 한국신학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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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해방된 교회 하워드 스나이더 / IV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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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의 공동생활 본 회퍼 / 대한기독교서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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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 그 조용한 목회혁명 유진 피터슨 / 좋은 씨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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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공동체 생성과 연대를 통한 하나님나라운동 |
[169호 서평] 기독청년이여, 이 책 스무 권은 꼭 읽게나 | |
학복협 필독서 선정/ 기독학생들의 의식 폭 넓히는 계기 마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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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송(hizsong) [조회수 : 134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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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대학생은 책을 안 읽는다는 푸념이 여기저기서 나온다. 아닌게아니라 과거 대학생들이라면 쉽게 공유했을 법한 필독서 목록이 사라졌거나, 목록이 있다고 해도 영향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관심사와 경험의 폭이 파편적이다 보니 집단적 의식이나 세대의식에서 책이 차지하는 영역은 감소세로 돌아섰다. 대신 그들은 영화나 음악, 방송 등을 통해 이미지를 폭식하는 양상이 자주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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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12일 13:46:24 |
고전 다시읽기/노자 <도덕경>
최근 <왕의 남자>로 1천만관객을 돌파한 이준익 감독의 작품 가운데에 <황산벌>(2003)이 있다. 신라와 백제 사이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코미디물로 알려져 있지만, <왕의 남자>만큼이나 <황산벌>도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영화다. 나는 그 밑에 노자철학이 깔려있는 것으로 ‘읽었다.’ 노자의 눈으로 이 영화를 관찰할 때 주목할 부분은 계백과 그 주변인물들이다. 황산벌 결전에 앞서 계백(박중훈 분)은 처자식을 죽인다. 그가 가족을 죽이면서까지 얻고자한 것은 가문의 영예, 즉 ‘이름’이다. 한데 죽음을 앞둔 그의 처가 내뱉은 말, “호랭이는 가죽 땜시 죽고, 사람은 이름 땜시 죽어, 인간아!”라는 일갈은 이 영화의 주제를 잘 드러내준다. 이름·명예·충성 등 세속적 가치의 허망함과 그것에 집착하는 삶의 허무함이 그것이다. 그 곁에 노자가 앉아서 계백의 처를 응원한다. “이름과 몸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해?”(名與身孰親. <도덕경>, 제44장) 이 영화의 주제어는 단연 ‘거시기’다. ‘거시기’란 뭔가 특칭할 수 없는 것에 붙이는 전라도 사투리인데, 노자식으로 번역하면 ‘이름 지을 수 없는 그 무엇’, 즉 무명(無名)이다. <도덕경>에서 무명은 진리의 표상이다. “천지자연이 모두 이 무명에서 시작한다”(無名, 天地之始. 제1장)라거나, “진리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 진리가 깨어질 때에야 이름이 생겨난다.”(제32장)는 주장에서 그 뜻이 명료하다. 영화 속에서 신라군은 백제군의 암호로 오해한 이 ‘거시기’의 정체를 찾아서 온갖 해프닝을 벌인다. <황산벌>이 코믹영화로 여겨지는 부분이 여기다. 하지만 이 대목은 참된 진실은 말로 표현되지 않으며, 그 형언할 수 없는 무명의 세계를 개념, 즉 유명(有名)으로 포박하려는 시도는 허망한 것임을 일깨워주는 장치로 기능한다. 또 ‘거시기’는 ‘이름 없는 사람들’(민중)을 상징한다. ‘거시기’는 계백과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하는 ‘이름 없는 병사’(이문식 분)의 이름이기도 한 것이다. 최후에 다다른 계백은, “지금쯤 우리 엄니는 모 심느라고 고생하실 것인디”라며 한탄하는 ‘거시기’를 도망가도록 만든다. 계백은 말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뭔가 하나라도 남기고 죽어야 할 것인데, 나는 ‘거시기’ 자네를 남기겠네.” 처음엔 이름(有名)을 얻기 위해 처자식을 죽였던 계백이 끝내는 ‘거시기’, 즉 이름없음(無名)을 남기고 죽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황산벌>은 이름으로 상징되는 욕망에의 집착과 그로부터의 각성, 그리고 탈속의 행로를 그린 철학 영화다. 그렇다면 노자는 지금도 우리 곁에서 살아있다. 돈·지위·숫자에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를 키들거리며 조롱하고 있다. 등 뒤에 길게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말이다.
황산벌 ‘거시기’ 노자철학
<도덕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5백년 전쯤 살았다는 노담(老聃) 혹은 이름모를 어떤 ‘늙은이’가 자연으로 숨어들기 직전에 남겼다는 짧은 경구들로 이뤄진 책이다. 총 81개의 구절로 이뤄진 <도덕경>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은 도(道), 즉 진리의 존재론에 대한 논의들이, 뒷부분은 덕(德), 즉 도의 형성과 운용에 대한 지침들이 실려 있다. 다 합쳐야 기껏 5천자 남짓이니 책이라고 하기에도 쑥스러울 정도지만, 그것이 터뜨리는 폭발력은 대단하다. 노자는 그 첫 마디를 “진리라고 할 수 있다면 그건 참된 진리가 아니다. 이름을 붙일 수 있다면, 그건 제대로 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제1장)라고 전제하면서 시작한다. 진리는 말 너머에, 소유의 바깥에 있다, 그러니 말로 표현하기 시작하는 순간 진리는 사라진다는 뜻이 되겠다.
‘있음’은 ‘없음’ 위에 존재하는 것
하면, <도덕경> 속의 말들은 무엇인고? 이 질문에 노자는 비죽이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리리라. ‘그렇게나 말이다.’ 라면서. <도덕경>은 최치원이 자연 속으로 스며들기 직전, 가야산 홍류동에 벗어놓았다는 신발짝이요, 폐사지에 남아있는 부도탑과 같다. 진리를 얻은 한 인간이 자연으로 접어드는(물아일체) 최후의 순간, 인간세계에 남긴 ‘측은지심’의 흔적이라는 의미다. 말하자면 인위와 자연이 만나는 접점에 <도덕경>이 있다. 노자는 이 세계가 겹으로 이뤄져있음을 퉁겨준다. 눈에 보이는 현상계의 바탕에 ‘거시기’의 세계, 즉 ‘없음의 세계’(無)를 유념할 것을 촉구한다. 세계는 유명과 무명, 아름다움과 추함, 밝음과 어둠, 높음과 낮음, 나쁜 것과 착한 것 등등의 짝으로 이뤄져 있다. 아니 실은, ‘있음’이란 ‘없음’ 위에 존재하는 것임을, 남성은 여성의 배 속에서 나온 것임을, 또 어둠은 밝음의 바탕색임을, 그리고 강함은 약한 것이 굳어버린 찌꺼기임을 깨우치기를 바란다. 하여 그는 특별히 여리고 어린 것에, 어둡고 낮은 곳에 주목하길 주문한다. 물론 강하고 힘세며, 밝고 높은 곳이 ‘나쁘다’거나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우리네 ‘욕망의 문’(눈과 귀)이 남성과 강함, 높음과 햇살에 익숙해져 있기에, 그 바탕에 존재하는 ‘몰가치들’, 이를테면 여성과 연약함, 계곡과 어둠의 가치를 환기시키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균형 잡힌 온전한 삶을 재구성할 수 있겠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도덕경>의 공능은 ‘질문하기’ 또는 ‘낯설게 만들기’에 있다. 습관적으로 살아가는 지금 우리네 삶에 주름을 잡아, 상식의 바탕에 똬리를 튼 몰상식과, 질서라고 믿는 것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무질서, 사실의 근원에 존재하는 왜곡의 현장을 직대면하도록 이끈다. 질서·합리·상식이란 실은 무질서·비합리·몰상식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일엽편주에 불과하다는 ‘새로운’ 사실을 천둥처럼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니 <도덕경>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시다. 욕망과 바람에 휘둘려 눈을 주지 못했던, 일상의 비상한 기원을 통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데 <도덕경>은 산속으로 파고들지 않는다. (만일 불교의 거처가 깊은 산이요, 유교의 터전이 도회지란다면 노자가 머무는 곳은 비산비야의 근교다. 노자는 불교와 유교의 사이쯤에 위치한다. 근교에서 도회지를 향해 충고하는 것이 <도덕경>이다.) 노자는 결코 문명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는다. 다만 문명을 빗겨서 바라볼 때에야 삶의 진리를 제대로 알고 살아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에 따르면 낯설고 불편한 겹(무명/유명)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이 지도자 자격이 있다. 노자는 대중을 ‘겹의 진리’로 이끄는 지도자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도덕경> 후반부에는 특별히 ‘노자 정치학’이라고 할까, 혹은 ‘리더십 론’이라고 할 만한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다. 우리 귀에 익은 “큰 나라 다스림은 작은 물고기를 굽듯 조심스러이 해야 한다”든지, “나라는 작게, 백성은 적게”(小國寡民)와 같은 대목들이 거기 있다. 노자의 리더십은 이를테면 ‘쓰레받기’에 비유할 만하다. 지도자란 가장 낮은 곳에 거처하면서 힘들고 더러운 일을 도맡고, 억지로 일을 꾸미지 않으면서 묵묵히 제 일을 처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제일 밑바닥에 거처하는 ‘쓰레받기 리더십’은 실패는 제 자신 탓으로, 성공은 아랫사람들 덕택으로 돌리게 마련이다. 여기서 피어나는 꽃송이가 덕(德)이다. 묘한 것은 ‘덕은 억지로 하지 않는데도 안 되는 일이 없다’는 아이러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도자의 덕이 사람들을 따뜻하게 하고, 부끄럽게 하고, 또 분발하게도 만들기 때문이다. 이에 노자의 리더십을 한 마디로 압축한다면, ‘나를 숙이라’가 될 것이다.
높은 산을 보지 말고 발밑을 보라
▲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학 요컨대 <도덕경>은 낮은 곳에 거처하면서 ‘덕’을 닦아, 자연의 진리인 ‘도’로 나아가는 길을 밝힌 책이다. (옛날 판본 가운데는 후반부에 속하는 ‘덕경’을 전반부인 ‘도경’의 앞에 놓은 것들도 있는데, 이런 점에 주의한 편집이라고 하겠다.) 노자는 높은 산을 바라보는 데 이골 난 우리 눈길을 발밑으로 돌리길 권한다. 나아가 진리는 산 정상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곡과 강, 그리고 바다로 흘러드는 물의 흐름 속에 있음을 통찰하길 촉구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이 과연 정말 가치 있는 것인지를 자문하길 명한다.
부흥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대부흥의 현장을 방문하면서 자신이 느끼고 생각한 바를 적은 것들이다.
부흥...
97년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던 그리고 지금도 그것을 간절히 사모하게 하는 단어...
부흥에 대한 여러가지 인간적인 부작용과 폐단 때문에 조심스러워 하고 그러다가 많이 그것에 대한 마음을 잊고 있었다.
김우현이란 사람...
요새 참 나에게 생각 하게 하는 사람이다.
내가 갖고 있던 보물을 뺏긴 거 같아 얄밉다...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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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에는 하나님의 비밀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주권은 부흥과 함께 있다. - 알렉산더 화이트
형제여 충고하건대 '부흥'에 대해서 너무 많이 말하지 마시오.
당신이, 바로 그 부흥이라는 말의 의미를 퇴색시켜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 테오도르 카일러
부흥이란 하나님께서 측량 못할 사랑과 지혜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것이다. - 웨슬리 듀웰
불타는 가슴을 가진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사단의 견고한 진은 어떤 것에도 견디어 낼 수 있지만 불에는 견딜 수 없다. - 사무엘 채드윅
부흥이 무엇이냐는 김우현 감독의 질문에 기빠드 교수는
"부흥은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무엇이 부흥을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이 부흥을 위해 사람들과 방법조차 선택하시는 것이지요. 그리고 대부분의 부흥은 '기도라는 도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의 사람들조차 하나님이 선택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것 같지만, 그 열정조차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열심이 부흥을 이루는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에 어둠이 짙게 드리울 때 하나님은 늘 부흥을 통해 새로운 출구를 여셨습니다. 20세기 초에 그 시작은 웨일즈 에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동일한 어둠의 문제를 안고 신음하는 세계의 곳곳에 부흥의 불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20세기의 여명에 웨일즈(1904)에서 시작된 성령의 불길이 인도 카시아, 묵티(1905), LA 아주사 거리(1906), 한국 평양(1907), 중국 만주(1908) 그리고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인도네시아, 남미까지 번져간 것이다. 웨일즈는 마치 오병이어처럼 드려졌던 것이다.
이반 로버츠. 1904년 웨일즈 부흥의 통로.
'나를 굴복시켜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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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하나님의 부흥에 대한 열정을 회복시키소서.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 주위 사람들과 이 땅과 열방 가운데 임하기를 위해 하나님의 부흥을 간구하는 기도가 끊이지 않도록 나를 깨우소서.
기도의 영을 부으시고...
말씀의 영을 허락하소서...
하나님의 주권에 온전히 나를 복종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