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처음 만나면 예의를 갖추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다.

친근해지면서 함부로 대하게 된다.

이유는 자기 자신을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대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허물과 약점을 못 덮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도 못 덮는다.

 

건강한 자기 사랑은 이웃사랑의 토대이고 가족 사람의 기초이다.

건강한 자기 사랑은 소극적 차원과 적극적 차원 두 가지가 있는데,

 

소극적 차원은 자기 자신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 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 화내고 성질내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70%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고

나머지 30% 자녀나 아내에게 하는 것이다.

자기가 용서 받고 용납 받는 경험을 많이 받아 봐야

다른 사람도 많이 덮어 줄 수 있다.

따라서 사죄의 은혜, 복음적 사랑을 느껴 봐야 한다.

많이 받아봐야 한다.

 

적극적 차원은 자신의 장점을 기뻐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장점을 스스로 알고 기뻐 할 줄 알아야 한다.

은사에 대해 행복감을 젖을 수 있어야 한다.

열등감이 있으면 칭찬 받지 못한다.

누군가 칭찬해주면 아니예요 라고 말하며 변명할 필요가 없다.

옷이 이쁘다고 칭찬해주면 이거 2500원짜리예요 하고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칭창받으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이것은 그것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고

호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뿐이다.

 


 

사람을 보고 잘생겼다고 좋아하지 말라.

잘생겨서 좋아하는 것은 아직 안친하다는 증거이다.

안 친하니까 잘생겨서 좋아하는 것이다.

외모가 좋다는 것은 고체적인 아름다움인데,

이것만으로는 인생이 행복하지 않다.

외모가 중요하지 않지만 인상은 상당히 중요하다.

인상은 기체적인 아름다움이다. 밝은 사람이랑 결혼하라.

10년 뒤가 아름다워질 사람이랑 결혼하라.

분위기가 아름다운 사람이란

차갑지 않고 따뜻한 사람,

어둡지 않고 밝은 사람,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운 사람이다.

 

사랑한다고 모두 결혼하는 것은 아니다.

백날 사랑해도 결혼 할 수 없다.

결혼하는 것은 고백하는 것, 그리고 반응을 얻는 과정이다.

고백을 연습하라.

용기 있는 자가 미녀/미남을 얻는다.

고백이란 언어 가운데 담긴 사랑이다.

고백 없는 사랑은 비 없는 구름 같다.

 

고백할 때는 사랑고백을 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75%가 거절당한다.

고마움에 대한 고백을 먼저 하라.

칭찬하고 고마워 하고 세워주고 격려하라.

즐겁게 해주고 유쾌하게 하라.

그 사람이 기분 좋을 때 앞에 나타나 있는 것만으로도

그사람이 자기를 좋아하게 할 수 있다. ^^

사람은 누구가 자기를 칭찬해주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한다.

잠시 다른 사람에게 갔다가도

인정받았던 사람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

 


 

"사람은 칭찬받고 인정받지 못하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몇 안되는 동물 중 하나다"

 

칭찬과 인정이 얼마나 중요한가!

바뀌지 않는 부모님, 교수님, 선생님을 더 칭찬하고 인정해드리라.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으로 격력하고 인정해 드려라.

그리하면 우리는 변화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칭찬과 인정을 알라.

 


 

 

용기란 상대방 앞에서 나 자신이 되기를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잘 하려고,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아라.

'나'보다 못한 사람만 아니면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진정한 나의 모습이면 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하나님 안에서의 변화된 모습이란,

우리가 모세나 다윗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가능성들을 최대한 실현한 모습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사실 자신에게 가장 가혹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기가 가장 어렵다.

자신을 포기하고 싶을 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이 가능성을 보시고 사랑해 주신다.

하나님 사랑으로 사랑하라.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도 반응을 살피지 말라.

내 사랑의 대가로 반응이 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라.

반응을 점검하며 사랑하면 사랑과 봉사의 진정성을 잃는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사랑하라.

상대방 보다 상대방 안에 있는 예수님을 먼저 사랑하라.

그러면 끝까지 사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면에서 자기 사랑을 방해하는 어두운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그 어두운 것 자체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은 답이 아닐 수 있다.

방에 불을 켜면 마치 어두움이 빛으로 바뀌는 듯 하다.

그렇지만 사실은 어두움이 없어지고 빛이 생긴다는

두가지의 독립적인 사실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와 마찬가지 원리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제거하고 싶은

그 부정적인 요소에 focus를 하는 것 보다,

우리가 개발하고 싶은 긍정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

답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어두움과 빛이 혼재하겠지만,

결국에는 빛이 어두움을 이긴다는 것이다.

 

 

 

written by 서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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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란노에서 발간하는 「목회와 신학」 2003년 3월호에서 추천한 도서 목록입니다. 


구약신학 

「20세기 구약신학의 주요 인물들」 벤 C. 올렌버거 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속사적 성경해석학」 베이커 엠마오 
「구약 성서 이해」 버나드 W. 앤더슨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 세계의 이해」 박준서 한들출판사 
「구약 이스라엘사」 김희보 총신대학교출판부 
「구약 정경 개론」 B. S. 차일즈 대한기독교서회 
「구약성경과 구약학」 박동현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구약성경신학」 월터 카이저 생명의말씀사 
「구약성서개론」 노만 가이슬러 엠마오 
「구약성서신학」 게르하르트 본 라트 분도출판사 
「구약성서신학」 발터 아이히로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롤랑 드 보 대한기독교서회 
「구약신학, 현대논쟁의 기본 이슈들」 게하르드 하젤 엠마오 
「구약신학」 존 H. 스택 솔로몬 
「구약신학」 폴 하우스 기독교문서선교회 
「구약신학의 과제 2」 룰프 크니림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신학의 요소」 클라우스 베스터만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의 기독론」 E. W. 헹스텐베르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의 메시야사상」 게라르드 반그로닝겐 기독교문서선교회 
「구약의 역사이해」 강사문 한국성서학연구소 
「구약총론」 글래슨 아쳐 기독교문서선교회 
「구약총론」 에드워드 영 개혁주의신행협회 
「모세오경의 문화적 배경」 허버트 리빙스톤 기독교문서선교회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그레엄 골즈워디 성서유니온 
「새로운 주경신학 연구」 월터 카이저 엠마오 
「성경신학」 게르할더스 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성경어휘와 그 의미」 모세 실바 성광문화사 
「신구약성서신학」 B. S. 차일즈 은성출판사 
「어떻게 시편을 읽을 것인가」 트렘퍼 롱맨 IVP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송제근 두란노 
「요단강에서 바벨론 물가까지」 김지찬 생명의말씀사 
「이스라엘의 역사」 존 브라이트 분도출판사 
「최신구약개론」 레이몬드 딜러드 & 트렘퍼 롱맨 크리챤다이제스트 
「하나님의 나라」 존 브라이트 컨콜디아사 


신약신학 

「공관복음서의 기원」 스톤하우스 성광문화사 
「누가행전」 하워드 마샬 엠마오 
「바울, 율법, 유대인」 E. P. 샌더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바울복음의 기원」 김세윤 엠마오 
「바울신학」 F. F. 브루스 기독교문서선교회 
「바울신학」 헤르만 리델보스 개혁주의신행협회 
「비유해석학」 크레그 블롬버그 생명의말씀사 
「사도 바울」 크리스천 베커 한국신학연구소 
「사도행전 비평사」 W. W. 가스끄 엠마오 
「성경해석학 개론 : 성경의미의 탐구」 월터 카이저 & 모세 실바 은성 
「신약사」 F. F. 브루스 기독교문서선교회 
「신약신학:현대논쟁의 기본 이슈들」 게하르드 하젤 엠마오 
「신약신학」 G. E. 래드 대한기독교서회 
「신약신학」 레온 모리스 기독교문서선교회 
「신약신학」 요아킴 예레미야스 새순출판사 
「신약신학」1, 2 레온하르트 고펠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신약의 기독록」 오스카 쿨만 나단 
「신약의 윤리적 비전」 리처드 헤이스 IVP 
「신약해석학」 하워드 마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요아킴 예레미아스 한국신학연구소 
「예수와 바울」 김세윤 두란노 
「예수와 하나님 나라」 G. R. 비슬리-머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예수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노만 페린 솔로몬 
「요한계시록 신학」 리처드 보쿰 한들 
「하나님 나라의 도래」 헤르만 리델보스 생명의말씀사 
「하나님나라 방정식」 존 팀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조직신학 

「개혁주의 신론」 헤르만 바빙크 기독교문서선교회 
「교회란 무엇인가」 H. 큉 분도출판사 
「그리스도의 십자가」 존 스토트 IVP 
「기독교 강요」 칼빈 생명의 말씀사 
「나를 따르라」 디트리히 본회퍼 대한기독교서회 
「나와 너」 마르틴 부버 대한기독교서회 
「루터 선집」 마틴 루터 컨콜디아 
「세속도시」 하비 콕스 대한기독교서회 
「신앙과 정서」 조나단 에드워즈 지평서원 
「신의 도성」 어거스틴 크리스천다이제스트 
「조직신학」 벌코프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조직신학」 웨인 그루뎀 은성 
「조직신학」 찰스 하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조직신학」 폴 틸리히 한들출판사 
「존 머레이 선집」 존 머레이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칼빈주의 강연」 아브라함 카이퍼 크리스챤다이제스트 
「하나님을 아는 지식」 J. I. 패커 기독교문서선교회 
「하나님의 모략」 달라드 윌라드 복있는사람 
「하나님의 아들」 M. 헹엘 대한기독교출판사 
「하나님의 큰 일」 헤르만 바빙크 기독교문서선교회 
「해방신학」 G. 구티에레즈 미래사 
「희망의 신학」 J. 몰트만 현대사상사 


교회사 

「간추린 미국장로교회사」 제임스 스마일리 대한기독교서회 
「개신교역사와 신학」 박건택 개혁주의신행협회 
「교회사 100대 사건」 케네스 커티스외 생명의말씀사 
「기독교신앙과 역사이해」 로날드 H. 내쉬 성광문화사 
「기독교와 역사: 믿음과 이해」 로날드 H. 내쉬 기독교문서선교회 
「새롭게 조명한 초대교회의 역사」 J. 포스터 웨스트민스터출판사 
「세계교회사」(1~3) 이형기 한국장로교출판사 
「신학사」 벵트 헤그룬트 성광문화사 
「신학의 역사」 앨리스터 맥그레스 지와사랑 
「에큐메니칼 교회사3」 레이문트 콧체·베른트 묄러 한국신학연구소 
「역사와 진리」 폴 리쾨르 솔로몬 
「요세푸스」 클론 L. 로저스 엠마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유세비우스 팜필루스 은성 
「인물로 본 기독교회사」 존 우드브리지 횃불 
「종교개혁사」(Ⅰ,Ⅱ) 토마스 린제이 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부 
「종교개혁사」 오원 채드윅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 존 칼빈 솔로몬 
「중세교회사」 윌리암 R. 캐논 기독교문서선교회 
「중세교회사」 R. W. 서던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초대교회사」 헨리 채드윅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초대교회사」, 후스토 L. 곤잘레스 은성 
「중세교회사」, 
「현대교회사」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I.C. 헤네르 편 한국신학연구소 
「한국기독교회사」 민경배 연세대학교출판부 
「현대교회사」 J .H. 니콜스 기독교문서선교회 
「현대교회사 사상시리즈1/ 칼 바르트 엠마오 공동체, 국가와 교회」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브루스 셸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설교학 

「건축술로서의 강해설교」 김서택 홍성사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이레서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브라이언 채플 은성 
「목사님, 설교가 아주 신선해졌어요」 브루스 모힌니 베다니출판사 
「목사와 설교」 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김남준 두란노 
「성경신학적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레엄 골즈워디 성서유니온 
「성서의 문학 유형과 설교」 토마스 롱 대한기독교서회 
「언어의 직공이 되라」 김지찬 생명의말씀사 
「프리칭 예수」 칼스 L. 캠펠 기독교문서선교회 
「현대교회와 설교」 존 스토트 생명의샘 


목회상담학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닐 앤더슨 죠이선교회 
「당신의 과거와 화해하라」 H. 노먼 라이트 죠이선교회 
「목회상담과 상담목회」 오성춘 쿰란출판사 
「목회상담신론」 하워드 클라인벨 한국장로교출판사 
「목회상담학」 제이 E. 아담스 총신대학교출판부 
「상처 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두란노 
「상한 감정의 치유」 데이빗 A. 씨맨즈 두란노 
「신학과 목회상담」 드보라 벤 두젠 헌싱거 한국심리치료연구회 
「우울증상담」-기독교상담시리즈13 아치볼드 D. 하트 두란노 
「인간이해와 상담」 로렌스 J. 크렙 두란노 
「죄책감과 은혜」 폴 트루니에 IVP 
「크리스챤 카운슬링」 게리 콜린스 두란노 


선교학 

「21세기를 향한 한국선교의 비전」 정민영 외 IVP 
「교회는 당신의 생각보다 큽니다」 패트릭 존스톤 WEC출판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레슬리 뉴비긴 IVP 
「로잔, 세계 복음화 운동의 역사와 정신」 조종남 편저 IVP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찰스 벤 엔겐 두란노 
「문화 속의 종교」 유진 나이다 로고스 
「문화적 갈등과 사역」 셔우드 링엔펠터, 죠이선교회 마빈 메이어스 
「미션 퍼스펙티브」 랄프 윈터, 스티븐 호돈 예수전도단 
「변화하고 있는 선교」 데이비드 J. 보쉬 기독교문서선교회 
「선교사가 되려면」 오스왈드 스미스 생명의말씀사 
「선교사열전」 루스 터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선교사의 생활과 사역」 허버트 케인 두란노 
「선교신학의 성서적 기초」 허버트 케인 나단 
「선교와 문화인류학」 폴 G. 히버트 죠이선교회 
「선교학 개론」 J. H. 바빙크 성광출판사 
「선교현장 이야기」 레나 테일러 IVP 
「선교현장의 문화이해」 폴 G. 히버트 죠이선교회 
「세계 기도 정보」 패트릭 죤스톤 죠이선교회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 허버트 케인 죠이선교회 왜 되어야 하는가」 
「현대의 자비량 선교사들」 크리스티 윌슨 순출판사 
「화해의 아이」 돈 리챠드슨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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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 “잘되는 삶이란?”

 

[강연 발췌]

 

건강한 인생의 기술

건강한 인생을 찾는 그리스 사상에 대한 루카복음의 해답

2009년 09월 22일 (화) 00:47:38 배은주 기자  ejb63@hanmail.net

 

9월 20일, 서울 동성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안셀름 그륀 신부의 강연 2부
<건강한 인생의 기술 - 건강한 인생을 찾는 그리스 사상에 대한 루카복음의 해답>을 발췌해서 싣는다.
-편집자

 

 

   
▲동료 수도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안셀름 그륀 신부(사진/한상봉)

 

루카는 예수를 정의로운 사람으로 보여주었다. 마르코사가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를 백인대장의 말을 인용하여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루카는 예수를 ‘이 사람은 참으로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수 탄생 전 400년 전, 플라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도성에서 쫓겨나고 매질당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 교부학자들은 루카가 그리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의로운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예수의 정의로운 마음은 아무리 악한 사람도 미워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른다’며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기까지 한다. 

예수 안에 정의의 관점은 모든 대립으로 나타난다. 그리스 사람들은 정신과 육체, 사랑과 미움 등 대립을 두고 두려워했다. 루카사가는 서로 반대되는 면을 보여준다. 서로 반대되는 것은 예수 안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루카에 따르면 사람은 훌륭한 존재지만 자기의 참된 물질에서 멀어졌다. 그래서 예수가 세상에 와야 했고 거기에서 신적 힘을 찾는다. 예수가 세상에 온 이유는 사람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다. 

   
 ▲안셀름 그륀 신부(사진/한상봉)

루카는 의사였다. 루카복음 전체는 치유하는 말씀이 들어있다. 예수는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 사랑의 본질에 따라 회복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 사람에게는 선한 사람의 이상이 있었다. 루카에 의해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는 나자렛 회당에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람을 치유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병, 앞을 못보는 사람, 중풍 등을 고쳐주었다. 

예수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일어나는 상처를 치유한다. 예수는 최초의 가정의사였다. 예수는 부모에게나 자녀에게 책임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치료함으로써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일어나는 어려운 일을 해결했다. 

예수는 잘되는, 성공하는 삶을 인도한다. 그리스철학은 이런 목적을 두고 있다. 바로 삶의 기술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는 삶을 위한 인도자라는 명칭을 썼다. 이것을 잘되는 삶을 위한 인도자라고 번역할 수 있다. 잘되는 삶을 몇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겠다. 

첫 번째, 내적인 원수와 화해하라


예수가 우리에게 남긴 비유를 인용할 수 있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협정을 청할 것이다”(루카14,31). 이것은 원수를 친구로 바꾸자는 것이다. 여기서 원수란 질투, 불안, 너무 예민함을 말한다.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문제와 싸울 때 반대하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더욱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하나의 예로 공포를 들 수 있는데, 공포와 싸우지 않고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공포가 나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가, 혹시 공포는 내 삶에서 기본적으로 틀린 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공포를 두고 배울 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내가 많은 권력을 주는 것이다. 공포가 생기는 목적은, 사람으로부터 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나를 보는 것이다. 공포와 좋은 관계를 맺어 하느님께로 가게 된다. 

두 번째, 죄의 관점이다.


우리는 너무 죄를 강조해 왔다. 죄부터 가르쳤다. 루카는 그렇지 않다. 좋은 사람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죄를 짓게 된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죄의 문제에 관해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부정한 종지기’를 예로 보여준다. 종지기는 채무자를 불러 그중 얼마를 탕감한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진 죄에 대해 모든 것을 내야하는 입장이 아니다. 하느님이 모두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 죄를 의식하면서 남과의 관계도 의식해야한다. 내가 죄를 졌고 남도 죄를 졌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남의 집에 들어갈 수 있고 나도 내 집에 들어갈 수가 있다. 양쪽에서 서로를 쳐다볼 수 있다.

현대 사람들은 죄에 대한 태도가 부족해 보인다. 독일의 유명한 한 사업가는, 매스콤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에 자살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사건을 생각하더라도, 한국에서도 치유가 부족한 것 같다. 
예수 안에서 죄의 문제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죄를 모른 체하거나 합리화시키는 게 아니라, 죄의 용서,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게 중요하다. 

세 번째, 재물과 세상과의 관계다.


루카는 복음에서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뿐 아니라 상인들과 땅주인들에게 글을 썼다. 그들이 직업을 그만 두고 재물을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루카는 재물의 이용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➀재산을 나누어라. 재산을 나누어 연대를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다. ➁재산이나 소유의 문제에서 내적으로 자유로워라. ➂세상의 재물을 다루는데 충실하라. 이 세상의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의 중심은 사람의 영혼이다. 재물에 대한 좋은 자세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살 때에 결정된다. 

마지막으로 삶을 위한 결정이다.


그리스 신화에 갈림길에 선 헤라클레스가 있다. 때가 되면 삶의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결정해야 할 문제는 진복팔단에 나타난다. 루카복음에는 행복선언 네 가지와 불행에 관한 선언도 네 가지가 나온다. 삶과 예수를 따라야 하는 것을 결정할 때, 사람들이 삶이 어렵다고 한다.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권한다. “오늘은 내가 삶을 결정한다.” “삶을 내가 선택한다”라고. 좋은 길을 가더라도 여러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루카는 말한다. 

공자와 그리스 사람들, 그리고 예수에 따른 삶의 기술을 비교할 수 있으면 좋다. 같은 점을 알 수 있고, 그리스도교 사상과 반대되는 것도 찾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연결과 반대되는 점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 철학을 우선 인정하고 좋은 점을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풍부한 지혜를 찾을 수 있다. 십자가와 부활은 아무리 어려움이 있더라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무리 큰 어려움도 빛으로 변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는 사람의 가슴 속에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달라지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역사와 전통에서 나오는 지혜와 성경의 지혜가 합해져서 참된 기쁨을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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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름 그륀 신부,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의 팔정도(八正道): 여덟 가지 행복선언의 실존적 해석
-성 베네딕도 수도회 한국진출 100주년 기념 초청강연

 

 

2009년 09월 21일 (월) 17:00:06 배은주 기자  ejb63@hanmail.net

   
▲안셀름 그륀 신부(사진/배은주)

 

“하느님을 통해 좀 더 건강해지려하고, 윤택한 삶을 살려하고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는 식으로 하느님을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아래로부터의 영성>, <삶의 기술> 등을 집필한 성 베네딕도회 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의 말이다. 그는 20일, 서울 동성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예수의 산상설교로 알려진, 여덟 가지 행복선언은 성공적인 삶으로 가는 여덟 가지 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신자들은 시작 전부터 강당을 가득 채웠고, 그륀 신부는 따뜻한 영성으로 신자들을 감싸 안았다.

그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한국진출 10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 신자들과 경제인 등을 대상으로 대중강연을 하고 있다.

여기에 안셀름 그륀 신부의 강연 중 ‘예수의 팔정도-복된 생활로 이르는 길 : 여덟 가지 행복선언의 실존적 해석’을 요약 정리하여 강연초를 싣는다. 

예수의 팔정도(八正道)-복된 생활로 이르는 길 : 여덟 가지 행복선언의 실존적 해석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내가 아는 하느님은 너무나 크고 파악할 수 없는 분이다. 나는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도 적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이용하려 한다. 하느님을 통해 좀 더 건강해지려하고, 삶이 더 윤택해졌으면 하고,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하는 식으로 하느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놔두어라.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이다. 부나 재산에서부터 자유로운 내적 자세를 말한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놓쳐버린 것을 슬퍼해야만, 내가 지금 취한 것에 감사하며 살 수 있으며 행복에 이를 수 있다. 고통을 뚫고 나가야 자신의 영혼과 만날 수 있다. 이겨내지 못하면 연민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된다. 

행복하여라, 비폭력적인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폭력적으로 대한다. 자기 실수를 단죄하거나 고루하고 편협한 사람이 된다. 이런 편협함, 엄숙함의 근거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다. ‘비폭력적’이라는 말은 그리스말로 ‘온유함’이다. 독일어로는 ‘무엇을 모으다’를 뜻한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으고 허용함을 의미한다. 

내 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기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부만 떼어내어 인정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실재를 만났다고 할 수 없다. 반쪽으로만 만나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 부분만으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전적으로 만날 수 없다. 모든 것을 인정할 때 내 삶이 더 넓어지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을 차지할 것이다.

 

 

   
▲안셀름 그륀 신부(사진/배은주)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네 번째 행복선언에 대해 4세기경의 한 교부는 예수께서 그리스철학을 완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의로움’이 모든 덕행의 근거라고 말했다. 

의롭다는 것은 내 자신의 본질을 정당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무절제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완전하고 완벽하기를 바라고 언제나 성공하기 바란다. 자기만의 상을 가진 사람은 본질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에서 ‘우울함’은 자기 자신의 무절제함에 대해 영혼이 외치는 절규라고 한다. 

올바르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의로움이다. 의로움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교육이나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불의하고 부당한 것에 정치적인 의로움으로 자신을 투신해야 한다. 사회의 의로운 구조를 위해, 정당한 분배와 기회균등, 정당한 임금 등을 위해 투신해야 한다. 성서는 의로움을 위해 씨 뿌리는 사람은 평화를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의 없이는 세상에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가정, 회사, 사회 전 세계에 적용된다. 내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도 얘기하고 있지만, 사회와 온 세계에 대한 참여도 말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자비를 위해 우는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얻을 것이다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지키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 경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비가 필요하다. 그래야 다른 사람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성서에 자비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 나온다. 히브리어로 자비는 ‘어머니의 자궁’을 말하는데, 엄마는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돌본다. 만약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롭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평가하게 된다.

심리학에서 모든 사람 안에 ‘상처받은 아이’ 혹은 ‘버림받은 아이’가 있다고 말하는데, 종종 이 ‘상처받고 버림받은 아이’가 다른 사람을 상처주거나 버리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자기가 치유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자비롭다는 것은 상처받고 버림받은 아이를 따뜻하게 다루는 것이다. 잘 다루면 하느님같은 아이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롭듯이 너희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비로운 자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지 알게 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여섯 번째 행복선언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보는 존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스어의 하느님은 ‘바라보다’에서 왔다. 그리스인들은 피조물을, 인간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하느님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보는 것, 내 자신을 보는 것, 하느님을 보는 것, 모든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보는 것을 뜻한다.  

독일어의 하느님은 ‘부르다’, ‘불려지다’에서 왔는데, 사람이 곤경에 처해서 구해달라고 하느님을 외칠 때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깨끗한 마음은 하느님을 보는데 첫 번째 조건이다. 실수가 없거나 완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저의가 없는 것, 부수적인 의도가 없는 것을 말한다. 맑은 눈, 온 세상을 환히 비추는 깨끗한 눈에 대해 예수도 말씀하셨다. 반면 무엇인가 소유하려는 눈, 탐욕스러운 눈, 상처 주는 눈이 있다. 부수적인 의도가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이 깨끗한 눈을 본다. 노인들에게서도 평화로운 눈을 보게 된다. 

예수는 요한복음에서 ‘너희들은 너희들에게 한 내 말로 인해 깨끗하다.’고 했다. 예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느끼도록 말한 것이다.

만약 도덕적인 설교로 많은 이들을 비난하게 되면 내가 더러운 사람이 아닐까, 더럽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 이야기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불만이 있는 경우를 느낄 수 있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의 감정을 정화시켜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섞여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을 순화시키고 진정시키는 방법으로 기도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순수함, 깨끗함, 티없음이 있다. 마리아는 하나의 상징이다. 구원된 사람이라는 상징이다. 동정마리아 탄신대축일에 읽는 에페소서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씀이 있다. 낙관적인 표현이다. 우리의 단점과 잘못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내면의 맑고 순수한 핵심을 발견할 때, 자기 자신의 정체성, 신원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나쁘다고 하면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순수함’이란 주제를 선호했고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연결했다. 그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 말했다. 예수님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고 선사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구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 딸이라 불릴 것이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리스말로 평화는 ‘이레네’인데, ‘조화로운 음악’을 말한다. 평화를 이룩한다는 것은 불협화음 등 모든 음이 함께 울리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어로 평화는 ‘샬롬’으로 ‘온전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평화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접합하는 것, 연결하는 것이다. 

라틴어로 평화는 ‘팍스’인데 ‘토의하다’, ‘상의하다’에서 왔다. 평화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화를 통해 다른 이들의 가치를 듣고 공통의 토대를 발견한다. 

자기 안에 평화를 이루는 사람만이 주변에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자기가 분열된 경우 주변 역시 분열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어떤 사제가 평화에 대해 말하면서 사제 본인은 일그러져 있다면, 그 공동체는 그렇게 분열되고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과 평화를 이루고 다른 사람, 세상과 평화를 이루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여기에 깊은 지혜가 들어있다.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고통이나 어려움이 있는 현실 속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적대적인 것도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다가가게 한다. 질병이나 불행, 좌절감 등도 우리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알게 된다. 

그때 그곳에서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다른 사람의 비난이나 단죄,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완전함을 느끼고 어느 누구도 상처주지 못한다. 그곳에서 우리가 만들어 낸 상이 깨지고 비로소 본원적이며 진실하게 되며, 하느님 상이 드러나게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순수하고 맑은 존재로 있게 된다. 이렇게 하느님의 신비가 머무는 그곳에서 집에 있는 듯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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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핵심「삶의 기술」2 / 안셀름 그륀

    행복의 핵심 "행복의 핵심은, 네가 지금의 너 자신이기를 원하는 것이다"(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젊은 시절 나는 유명한 사람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처럼 학식이 풍부하고 명철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유명한 테너 프리츠 분더리히처럼 멋지게 노래 부르는 것이 꿈이었다. 물론 이제는 나도 안다. 오직 별을 따려고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지탱해 주는 기반을 잃고 만다는 것을. 그러나 본받고 싶은 우상이 있다는 것 역시 우리 인생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살아가는 동안 우상은 바뀌게 마련인데, 그 또한 당연하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상황이나 인생의 목적도 변하고 그에 따라 우상도 달라지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우상 때문에 삶은 자극을 받는다. 우상들은 언제나 '나'를 연구하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내면 깊숙이 들어가도록 도와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직 그들에게만 사로잡혀 있다면, 나는 결코 '나' 자신에 만족할 수 없게 된다. 현재 나는 '지금의 나'에 대해 감사한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또는 에르하르트 케스트너처럼 그렇게 멋진 말을 할 수 있으면 좋 겠다' 또는 '대화할 때 나도 누군가처럼 그렇게 명쾌한 답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의식하게 되면 나는 '내 곁에' 머물고자 노력하 고, "나는 나다. 지금의 나로도 충분하다. 나는 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곤 한다. 그리하여 나 자신과 완전히 화합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능력을 감사히 받아들이면서 내 한계까지 인정하게 되면, 나는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나는 '지금' 행복하고 '지금 이대로' 좋은 것이다. 지금 앉아서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면서 삶을 느끼고 오직 하나뿐인 나를 느낀다. 또 삶과 행복의 맛을 즐긴다. 그 어떤 것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스스로를 채근하지 않는다. 나는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있는 그대로의 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보호받고 하느님이 조건없이 받아 주시는 나다. 내 안에 평화가 있다.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다. Buch der Lebenskunst 「삶의 기술」 안셀름 그륀 지음/ 안톤 리히테나우어 엮음/ 이온화 옮김/ 분도출판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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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살아라”(톨스토이)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레오 톨스토이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이처럼 간단하다.

그리고 그의 말은 옳다.

기쁨과 마찬가지로 행복도 노력 하는 대로 얻어 지는 것만은 아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은 삶에 헌신해야 한다.

행복이란 충족된 삶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을 깨워 열정적으로 살면, 나는 활기 속에서 행복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행복은 삶과 마찬가지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흐른다.

삶은 어두운 계곡을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폭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픔 속에도 삶은 흐르고 있다.

이웃을 위해 나를 개방하는 아픔 안에도,

그들과 나누는 기쁨 안에도,

정상에 오르기 위해 감내하는 노력 안에도,

바다를 헤엄치는 긴장감 안에도 삶과 행복은 흐르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삶의 도처에서 행복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삶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할수록 행복 역시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살고 있는 사람, 활동하고 있는 사람, 모든 감각을 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행복은 찾아온다.

 

 

- 안셀름 그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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