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뭔지 아세요? 용서하는 겁니다"

영화는 마지막 즈음에서 이성호의 입을 통해 명품대사 한 마디를 뱉어냅니다. "죽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뭔지 알아요? 용서하는 겁니다. 용서하는 데는 너무 오랜 고통의 시간이 걸리거든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란 대체 어떤 것들일까요? 모든 걸 주며 사랑한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것? 애지중지 키운 자식이 살해된 것? 그도 아니면 경제를 살리겠다는 한마디에 혹해 찍어줬더니 되레 목구멍에 거미줄 치게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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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어떤 책에서 읽었던 용서에 대한 이런 문구가 생각난다. "용서를 할 때는 이미 용서한 잘못뿐만 아니라, 용서 자체도 잊혀져야 한다.". 당신은 이 같은 용서를 해 본적이 있는가? 그런대 생각해 보니 이성호는 누군가에게 사죄를 받아 본적이 없다. 결국 용서를 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진심으로 사죄하지 않는 인간들의 어리석은 속마음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 말부터 먼저 하는 것이 우선인 것 같다. 영화 속의 이성호와 같은 아픔을 이해하고, 당신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본 적이 있는가? 생각해보면 용서가 어려운 것은 진심으로 사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만큼 우리는 사죄에 인색하게 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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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20세기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H. 카(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 3장 ‘역사와 과학과 도덕’에서 역사·과학 그리고 도덕을 구분하며 그 구분의 타당성과 한계를 논한다(<역사란 무엇인가?>, 길현모 역,  81~84쪽).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는 종교와 도덕을 수렴하기보다는 사회과학을 수렴하는 공적인 객관담론을 지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역사가 종교와 도덕 쟁점을 내포하기 때문에 사회과학으로서의 역사가 자연과학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통해 그는 역사학의 사회과학적 입지를 굳게 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카는 성경의 신학적 역사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총론에서는 학문 활동과 기독교신앙의 공존가능성을 인정하는듯 하면서도 각론에서는 기독교신학과 역사학의 공존가능성에 심각한 회의를 표한다. 가령, 그는 천문학자의 학문은, 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한다고 믿는 신앙과 양립할 여지가 있으나 “자신의 백성을 도와주기 위하여 별과 유성의 궤도를 바꾸어버리는 변덕스런 신”(수 10장)을 믿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진지한 역사가들이 신이 역사 전체의 행로를 명령하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고 믿을 수는 있겠으나, 아말렉 족속의 도륙을 자행한다든지(출 17장; 삼상 15장) 여호수아 군대를 돕기 위해 낮 시간을 연장해주는 구약성서의 신(수 10장)을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카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인과적으로 규명하기 위하여 신을 원인자로 끌어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인간적 원인을 충분히 궁구하지 않고 역사적 사건의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에 신의 섭리를 끌어들이려는 입장을 지적 태만이라고 본다. 세속사나 인간세계의 드라마의 전개과정을 충분히 인간적 차원에서 규명한 후에야 더 넓은 사고(예를 들면 신의 섭리)를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탈신학적인 계몽주의적 역사이해에 대한 반론이 없지 않다. 러시아의 유신론적인 실존주의자인 니콜라이 베르자예프나 미국의 기독교윤리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나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마리탱 같은 저술가들은 역사의 자율적 지위는 인정하면서도 역사의 목적이나 목표는 역사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역사의 초월적인 기원과 지향을 승인한다. 반면에, 카는 역사의 초월적 기원과 지향성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는 역사의 의미와 중요성을 좌우하는 어떤 초월적인 힘-기독교의 신이건, 자연과학자들의 보이지 않는 신이건, 헤겔의 세계정신이건 간에-을 믿는다는 것은 진지한 역사의 입장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본다. 역사가란 자기 문제를 신의 조화력 같은 것에 의지하지 않고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역사란 조커 없이 노는 트럼프 놀이와 같다고 본다.

카의 이런 입장은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관을 펼치는 성경의 역사의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은 하나님 원인론으로 불릴 정도로 단일한 원칙을 갖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요즘 말로 말하자면 과도한 하나님 원인론적 축소주의에 기대어 역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주전 9세기 다윗-솔로몬 제국의 분열과 쇠락,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 멸망, 주전 6세기 남유다의 멸망, 바벨론 유수의 종료와 페르샤 제국의 흥기, 그리고 바벨론 귀환포로들의 중건 역사 등 모든 굵직굵직한 역사적 격변들을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의 빛으로 해석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중심으로 모든 이스라엘 안팎의 역사를 해석한다. 이스라엘 민족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는 이스라엘을 통치거점으로 삼아 온 세계로 확장되는 하나님나라의 건설이었다(사 9:6~7; 11:6~9; 출 19:5~6; 창 18:19). 하나님나라는 온 열방 백성이 하나님 영광을 인정함으로써, 스스로 무장해제하여 우애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통해 구현된다. 구약 예언자들은 공평과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세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세상을 가득 덮는 상황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현존이라고 보았다. 신구약 성경은 이 하나님나라의 목적과 의도의 빛 아래서 이스라엘 안팎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해석하고 있다.

물론 성경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님 원인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보통 역사가들이 추구하는 합리적·이성적·역사적 해석을 포기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현대 역사가들이 추적한 역사적 사건들의 배후원인들을 다 포괄하면서 그것들을 초월적 틀 안에 재배치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경의 역사해석은 카 역사관의 중요한 부분을 삭제하거나 배척하기보다는 그것 위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라는 역사철학적 요소를 추가한다고 보는 편이 더 객관적인 판단일 것이다. 이런 구약성경의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이 잘 드러난 곳이 구약의 다니엘서나 4세기 교부 성 오거스틴이 지은 <신의 도성>이다. 전자는 세계제국들의 흥망성쇠의 역사적 격변기에 이스라엘이 겪는 고난의 의미를 잘 포착하고 있고 후자는 로마제국이 고트족과 롬바르드족 등 게르만족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유린당하며 쇠망해가는 위기의 상황에서 기독교회의 종말론적인 위상, 초월적인 지평을 장엄하게 그려낸다. 이 두 책이 보통 역사가들이 추적하는 사건들의 인과관계 규명에 전혀 무관심한 것은 아니나,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더욱 부각시켜 나머지 인간적 요인들의 역할을 무색케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성경적 역사관은 헤로도투스나 투키디데스나 타키투스 등 흔히 말하는 세속적인 그리스 로마 역사가들의 역사관과 다르다. 그것은 역사주의적 인과 관계 규명에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라는 일견 형이상학적 준거에 과도하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가 이런 하나님 원인론적 설명이나 단일 원리중심의 역사해석에 대하여 반대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와 같은 법칙이나 사적 유물론과 같은 원리를 갖고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결정론적인 역사이해로 귀착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 초월적인 준거나 역사 내재적인 원칙에 호소한 역사해석이 원인단순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는 여기서 신학적 역사해석이나 칼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역사해석 둘 다와 거리를 두고 있다. 그에게는 ‘진보와 변화’만이 역사를 해석하는 틀이 될 뿐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 서 있는 역사가들이 역사라는 무대에서 하나님 원인론적 해석틀을 추방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카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 원인론에 대한 호소가 인간적 원인론들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가로막는 지적 태만과 정직하고 투명한 이성적 연구를 제어하는 교조적인 오만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의 역사관은 유신론적인 인격신을 역사의 주관자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된다. 신학적 입장을 견지한 그리스도인 역사가들이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을 아주 정치한 중간공리로 환원해 구사하지 않는다면 카가 만들어 놓은 역사학의 운동장에 참여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라고 고백하는 기독청년들이 세속학문에 대하여 느끼는 고뇌와 긴장이 있다. 기독청년 학자들은 인간 역사의 진행에는 역사 내재적인 인간세력들, 동기들, 이해관계들, 기타 우발적 요인들 외에 하나님의 목적과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적·변증적인 맥락에서 기독청년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라는 이 신학적 용어를 일반 역사학 용어들로 치환할 수 있는 길을 개발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관의 원형인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역사해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전 8세기 이스라엘과 유다의 예언자들의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

성경은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관을 가진 예언자들이나 서기관들, 제사장들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책이다. 성경은 온 세계 만민을 위한 메시아적 사명감을 의식하며 고난의 역사를 헤쳐나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명선언서(mission statement)다. 더 구체적으로 성경은 이스라엘의 존재이유, 구원과 심판, 갱신과 정화의 목적을 하나님 원인론적인 역사관을 취한다. 이런 하나님의 원인론적 역사관은 뉴톤적인 기계론적 우주관 아래서는 용납될 수 없을지 모르나 최근에는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뉴톤적인 근대물리학과 우주론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학문의 교도권을 내준 금세기에는 뉴톤적인 인과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불확실성의 영역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이나 사건 혹은 사태를 ‘확률’로 설명하는 최근세기의 양자역학, 불확정설 원리, 중층결정론(overdetermination) 등은 자기충족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질서 속에 하나님의 개입여지가 얼마든지 확보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기적이나 역사개입이 반드시 창조질서의 인과론적 질서를 손상시키지 않고도 일어날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추세가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을 시도하는 기독청년들의 학문적 분투에서 감당해야 할 짐을 가볍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기독청년들은 일반역사학의 준칙들을 다 섭렵하고 파악하되 사실진술, 인과관계의 규명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사건들을 예언자들처럼 하나님 원인론적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

주전 745년 경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41년 간의 통치와 남유다 왕 웃시야의 52년간의 통치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앗수르의 왕위에 등극하여 전무후무한 정복주의적 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주전 740년대 초반부터 북부 시리아 일대를 성공적으로 정복한 이 정복 군주는 이후 신속히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 쪽으로 기수를 돌렸다(사 10장,  왕하 18:33~35[참조: 사 14:13~14]). 예언자들은 팔레스타인 역사의 지평 위에 파괴적으로 육박하는 거대한 산사태와 같고 홍수와 같은 앗수르의 출현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 심판의 서곡임을 느꼈다. 앗수르 제국의 팔레스타인 침략과 정복으로 마침내 북이스라엘 왕국은 멸망당했고 남유다는 나라의 중축이 파쇄되는 치명상을 입었다. 아모스·호세아·이사야 그리고 미가가 이 잔혹한 앗수르 제국이 하나님의 백성을 징벌하는 대행자라고 선포했다. 예언자들은 그 앗수르 범람과 팽창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의 빛 아래서 앗수르의 침략을 파악한 것이다. 독일 구약학자 마틴 노트(Martin Noth)는 이러한 예언자들의 역사신학적인 모토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했다.

“예언자들은 그들의 동시대적 사건들을 보편적 관점으로 해석한 최초의 역사가들이었다. 그들은 과거를 뒤돌아보는 식으로 설명하지도 않았고, 미래 사건의 일반적 향방에 대해서 막연하게 예언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당대의 사건들 속에서 한 거룩한 계획이 작동하고 있음을 감지하였다.”(<The History of Israel>, Edinburgh: T&T Clark, 1958년, 256쪽)

이와 같이 8세기 예언자들이 세계사를 하나님의 심판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을 역사 속에서 선택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세계사적인 구원계획을 실현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시려고 이제까지 인도해오셨다”고 믿는 신앙고백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철두철미하게 언약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얼마나 신실하게 복무했는가에 따라 평가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닥친 민족적 멸망 재난은 이스라엘의 존재기반인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과 율법을 지키기 못한 불충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언자들은 사회과학적 인식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은 막연히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총칭적인 집단의 죄를 규탄하기보다는 국가 공동체의 운영에 결정적인 책임을 왕·귀족·고관들 그리고 지배계층의 죄악을 탄핵했으며 그들의 죄악이 국가멸망을 초래했다고 적시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지도층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적 요구(십계명과 기타 부대 율법)를 준행하지 못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양산하고 그들을 압제한 그 죄악이 국가멸망을 초래했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들은 국가 멸망의 책임을 강대국이나 외국 침략군의 공격에 돌리지 않았다. 공평과 정의의 원칙을 어기고 공동체 구성원들 중 약한 자들을 극도로 압제하여 공동체 소속감을 박탈해버린 잔혹한 지배계층과 중추적인 민족 구성원들에서 물었다. 이처럼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온 사회적·정치적 총체 부패의 우선적 책임을 이런 중상류층 이상 계약공동체 구성원들에게서 찾았다.

예언자들의 역사해석은 요즘 말로 말하면 사회과학적 분석과 인식 위에 바탕한 것이었다. 모든 예언자들의 심판 언어가 집중적으로 겨냥한 대상은 왕, 귀족들, 고관들, 지주들, 거짓 예언자들과 종교권력자들이었다. 그들이 지적한 죄는 아주 구체적이었다. 하나님의 기업으로 배분된 이스라엘 자유농민의 땅을 빼앗은 지주들의 출현과 이들의 토지독점, 이들의 불법을 눈감아 준 악한 재판관들의 타락한 재판, 이들의 악을 보고도 정의를 집행하지 못한 왕권, 이들의 죄악을 신의 이름으로 승인하고 축복해준 제사장들의 영적 무지몽매가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하나님의 추상같은 심판을 촉발시킨 죄악들이었다. 예언자들의 선포는 철저한 사회과학적 분석, 냉정하고도 정확한 국제정세 인식, 그리고 강하고 잔혹한 지배권력 엘리트 집단에 의해 생존권과 인권을 박탈당한 채 아우성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감과 체휼에 바탕하고 있었다.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은 누구에게나 설득력이 있는 객관적이고 공변된 학술담론의 품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예언자들의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 즉 신학적 역사해석의 구성요소들을 살펴보자.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관의 요소들

1. 신학적 역사관은 내인(內因) 중심의 역사해석학이다

에언자들의 신학적 역사관은 한 나라나 왕조의 몰락과 멸망을 외인론적으로가 아니라 내인론적으로 우선 해석하는 관점이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몰락이나 멸망은 우발적인 상황, 즉 때마다 일어난 강대국 혹은 패권주의적인 세계정복 전략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왕국 내에 누적된 불의·불법·반(反)공동체적 죄악이 임계점에 도달해서 생긴 모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고 해석했다. 유다나 이스라엘은 강대국이 와서 그것들을 각각 정복하기 전에 이미 계약공동체적인 결속감이 파괴되어 있었다. 지배층이 기층민중을 향해 이미 내부정복전쟁(계급적 계층적 압제와 수탈)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강대국이 와서 정복하기 전에 이미 급속한 공동체성의 해체를 겪고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은 주전 8세기나 주전 6세기경에 닥친 국가적 재난의 원인을 찾을 때 강대국의 출현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유다를 부패와 총체적인 공동체 해체를 초래한 중심적 지배계층의 죄악에서 찾았다. 이런 예언자적 역사관은 침략자인 이민족에 대한 증오심을 초극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도덕적 자학사관이 아니다. 이것은 엄정한 자기추궁적인 역사해석이다. 우리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일제에 의한 멸망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1811년 홍경래 농민반란, 1862년 진주민란, 1894년 갑오농민 혁명 등은 조선은 지배계층의 민중수탈과 압제로 그 자체로 존립할 수 없는 내부전쟁중인 나라였음을 보여주지 않는가? 기독청년들이 일제하 독립운동사를 연구할 때 조선 멸망의 원인을 이사야나 예레미야·아모스나 호세아처럼 추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신학적 역사관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제3자 활용을 적극적으로 승인한다

신학적 역사관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할 전혀 예기치 않는 제3자의 역할을 주목한다. 지배자의 정복전쟁이 다른 한편으로는 옛 제국의 포로민들에게는 희망과 해방의 거룩한 전쟁이 됨을 믿는다. 주전 6세기에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한 하나님의 새 언약 공동체는 페르시아의 전쟁승리로 이뤄졌다. 그 페르시아의 승리는 하나님의 행동이었다(사 44~45장).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에스라 느헤미야의 제한 자치가 이뤄진다. 어찌보면 악한 나라나 잔혹한 제국마저도 하나님 백성들을 위한 해방군의 역할을 떠맡는다.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볼 때 1945년 이후 미군은 바벨론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했으나 유다를 식민지화했던 페르시아 정도의 역할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남북 분단 체제는 페르시아 체제 아래서 메시아를 기다리던-다소 불완전하게 회복된-바벨론 귀환포로 공동체의 탄식을 누적시키는 시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역대기서와 에스라~느헤미야서는 귀환포로 공동체의 자기정체성 회복 투쟁을 자세히 보여준다. 바벨론 귀환포로들로 구성된 페르시아의 식민지 예후다(유다)는 식민지 백성으로 만족하지 않고,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는 구속사적 약속의 상속자로서의 자기이해를 구축해갔다. 우리 겨레가 언제까지 분단시대의 포로로 살 것인가? 기독청년들은 이런 성경적 패러다임에 입각해서 우리 겨레의 역사 속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궁구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3. 신학적 역사관은 심판을 넘어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의지를 긍정한다

신학적 역사관은 재난과 멸망 너머를 바라보는 희망의 역사관이다.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르면 앙시엥레짐의 해체는 새 언약 공동체가 출현할 기회를 제공한다. 식민주의 역사관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과 필연적 역할을 강조한다. 민족주의 역사관은 일제 식민지가 36년만에 끝난 것은 독립투쟁의 결과로 보면 민족주의적 역량결집에 최우선 관심을 보인다.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은 이런 하위적인 인간적 요인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강조한다. 기독청년은 민족의 강고한 독립투쟁만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고 그것을 추동하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의지 때문에 1945년 8·15해방이 일어났다고 본다. 이런 하나님 원인론적인 역사해석은 패배주의적·현실주의적·현실순응적 친일파들이나, 일본의 대동아 지배를 정당화하는 봉건질서에 굴복하여 친일활동을 한 이광수·최남선·윤치호(윤리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는다. 그들은 민족의 재난(일제 식민지) 너머에서 시작될 새 언약 공동체의 탄생을 믿지 못했다. 그들은 강대국이나 제국주의적인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군사력 물리적 힘의 시위에 기가 질려버렸다. 그들은 현실적인 군사적·경제적·정치적 힘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세계 역사 운행 법칙에 대한 신뢰를 결여하고 있었다. 친일파들은 일제강점기가 새로운 언약공동체의 해산을 위한 창조적 고통기요, 해체기라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예언자들의 역사관에 따르면 조선과 대한제국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다림줄에서 너무나 절망적으로 기울어져 위태롭게 된 건축물로서 창조적으로 파괴되었어야만 한 구조물이었다. 이 역사관에 따르면 한 나라와 왕조의 멸망은 낡고 모순에 찬 앙시엥레짐의 장엄한 멸망이며, 더 위대한 태양의 일출을 기대하는 낡아져버린 태양의 일몰이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긍정하고 더 나아가 패권주의적 국가들에 대한 궁극적 심판을 믿는다. 예언자들은 자신의 민족에 가해진 하나님의 심판의 가혹한 궤적들을 정직하게 대면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갖는 밝은 면을 강조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 심판의 불꽃에 의해 정련된 남은 자들이다(아모스·호세아·이사야·에스겔·예레미야 모든 예언자들의 마지막 언어는 희망). 이들은 재난의 의미를 아는 자들로서 바벨론 포로살이의 불가피성을 알 뿐만 아니라 고토로 돌아와 하나님의 구원사를 이어가야 할 사명감을 느끼는 자들이었다. 에스라 1장 1절은 예레미야의 예언 성취로서의 고토 귀환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포로 교포들 2~3세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정표 삼아 이스라엘 고토로 되돌아온다. 에스라·느헤미야 등은 바벨론에서 태어난 포로 2세들이다. 그들은 가나안 고토에 대한 생리적 결속감이나 정서적 유착의식이 없었으나 예레미야의 예언을 믿고 고토로 돌아와 그곳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구속사를 계승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난과 멸망의 의미를 아는 자들만이 멸망과 재난 너머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 남은 자들은 이상왕의 도래와 이상왕의 통치로 새롭게 개시되는 새 시대의 여명을 앞당겨 경험한 자들이다.

결론

이처럼 고대 이스라엘의 성경저자들은 인간의 결정 및 자연적 요소들 외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확보되는 공간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상식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이다. 하나님 원인론적인 역사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역사가 자연과학적 객관담론을 지향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역사는 차라리 이머징 처치·철학적 상상력에 터한 시와 영감어린 예술에 가깝다고 본다. 기독청년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의 빛 아래서 우리 겨레에 일어난 역사적 격변, 흥망성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조선 멸망, 기독교 복음 시작, 해방, 민족전쟁, 그리고 오랜 분단 시기로 이어지는 이 역사의 흐름에 작동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궁구해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어떤 역사적 과업에 충실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대의명분에 충실한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처럼 우리는 우리 시대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섬기다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존재다(행 13:36).

우리는 광복절을 맞으면서 다시 묻는다.  우리 겨레가 반세기가 넘는 분단체제를 유지하며 동족상잔의 긴장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데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있다고 믿을 수 있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체제의 존속에는 인간 내재적인 동기나 원인으로 귀속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분단시대를 사는 기독청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능동적으로 받들어 우리 겨레의 역사 속에 뿌리내린 이 근본모순을 초극하고 새로운 역사 창조의 주체가 될 것인가? 우리 겨레의 고통이자 원죄인 분단 시대는 단일민족이라는 신념을 조롱하고 남북한을 아예 다른 나라로 갈라버리시려는 하나님의 장기계획의 일부일까? 단일민족이라고 단일 민족국가를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이 세계에는 단일민족이지만 한 단일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흩어져 사는 족속들이 얼마나 많은가? 분단체제를 영속화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아니면 이 분단 체제의 존속 안에는 분단체제를 죄악된 역사, 하나님께 연단 받는 시기로 영접하고 새로운 화해와 일치의 대통일 시대를 열망하도록 갈증을 촉발시키려는 신적 의도가 작용하고 있을까? 우리는 위에서 내린 두 가지 시나리오 중 둘째 시나리오라고 믿어야 분단체제 청산의 능동적 노력을 경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대한 석명(釋眀)을 통하여 개인과 공동체는 자신의 미래를 기획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구체적인 역사 속에 성취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주관에 대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뜻하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숙명론적 결정주의로 퇴행하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역사변혁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희망의 역사관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원인론적인 역사이해는 실상 모든 인간적 차원의 사실이해와 사회과학적 인식의 엄정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입론가능한 입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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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생각해 보는 <복음과상황>의 길

다시 새해가 밝았다. <복음과상황>은 기독 청년이 직면한 ‘상황’을 ‘복음’의 눈으로 분석하고 재해석하여, 신앙 실천의 의지를 벼리도록 격려하는 잡지다. 복음은 바벨론 제국의 잔악한 세계 지배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이던 시대에,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달려오는 전령이 전하는 아름다운 소식,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소식이다(사 52:7). 복음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온갖 무질서와 혼돈처럼 보이는 이 세상이 하나님나라가 건설되어 가고 있는 토대라고 선포하는 메시지다. 복음서에 나오는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현장에서 이 복음은 가장 강렬하게 선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생생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명명백백하게 증시(證示)하는 계시 사건이다. 로마제국의 정치권력과 유다의 종교권력의 협잡 아래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은, 모든 불의한 권력 행사는 무효화되며 모든 부당한 재판은 뒤집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 준다. 나사렛 예수의 부활은 이 세상의 모든 강압적이고 불의한 권력 행위가 종국에 파탄하며 하나님나라와 의를 추구하다가 희생당한 모든 자들이 신원될 것을 믿는 대반전의 신앙을 가능케 한다. 요약하면 복음은 이 세상의 정부들과 위계 결사체들(군대·기업체·대학·종교집단 등)이 내린 모든 불의한 판결을 뒤집는 최후 권위다. <복음과상황>은 이 압도적인 하나님의 현실 초극적이고 세계 변혁적인 복음의 관점에서 현실 상황을 분석하고 재구성하려고 노력한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사태들을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지 않으면, 우리는 도덕적 무정부주의와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세계를 지배하는 열강의 주요 언론 매체나 불의한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는 신문만 읽으면 세상에는 강대국의 보무당당한 정복 전쟁과 수출용 다국적 기업들의 막힘없는 시장 지배만 영속할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감미로운 통치를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는 성도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목격하지도 못하며, 그런 의로운 성도들과의 신령한 교제에도 참여하지 못한 채, 악당들의 활동상을 소상하게 보도하는 신문만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세상적 힘의 질서에 순응적으로 변한다. 그들은 정제되지 않은 악당 기사, 뇌물 받아 부자 된 사람 이야기, 부동산 투기해서 돈 번 사람 이야기, 권력에 야합하여 이익을 누리는 목사들의 이야기를 읽고 분통을 터뜨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패배주의자가 되기 쉽다. 즉 세상은 힘과 권력을 가진 집단의 의지가 관철되는 현장일 뿐이라고 냉소적으로 판단해 버리기 쉬운 것이다. 도덕적 무정부 상황에서 회의하던 냉소주의자는 어느새 악착같은 이기주의자가 되고, 이 세계를 움직이는 기득권 질서의 일원으로 안착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냉소주의자에서 힘과 권력을 숭배하는 자가 되면 권력 의지를 갖게 되고, 이기고 빼앗고 움켜쥐려는 야수적 인격으로 바뀐다. 그 결과 이들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분노와 긍휼의 동선을 포착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역동적인 현존을 역사 속에서 감지하지도 믿지도 못한다. 무신론자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자기 몸을 맡기는 셈이다. 힘과 권력욕이 각축하는 세상에 참여하여 살아가는 과정은 마음이 강퍅해져 가는 과정이요, 하나님에 대한 감미로운 의존과 신뢰를 잊어 가는 과정이다.

이 흐름을 중단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역사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기를 내어 주는 예수 그리스도적 사랑 실천에 참여해야 한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하려는 삶을 벗어 버리고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과 봉사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다. 아무리 신앙심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실천적 순종이 없는 한 그 신념은 희석될 수밖에 없다. 겸손하신 하나님께 공명하는 유일한 길은, 깊은 고독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일상생활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다.

둘째,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들과 만나 서로 지지받고 격려받아야 한다. 이 성도의 통공은 통시적으로도 일어나야 하고 공시적으로도 일어나야 한다. 먼저 우리에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신 성도들의 발자취를 읽고 격려받아야 한다.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서로 둘러싸고 격려하는 운동장을 생각하면서 달려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성경 읽기와 신앙 인물들의 역사를 공부하는 길이다. 동시에 우리 시대에 믿음의 순전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형제자매들과의 교유를 통해 안위를 받고 격려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안고 십자가를 지는 성도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늘 확인해야 한다. 

불의한 힘과 권력자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기쁜 소식(사 52:7)에 근거하여 그것을 분석하는 훈련이 기독 청년들에게 요청된다. 이런 점에서 예언자 아모스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미시적 사태들을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복음의 거시적 관점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하여 동시대인들에게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답하려고 한 인물이었다.

<복음과상황>적 세상 읽기의 전범(典範), 아모스서

아모스는 분단 시대의 지성인이었으나 분단을 초극한 하나님나라의 시민이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두 왕실이 하나님의 백성을 갈랐으나,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통일이스라엘적 관점으로 자신의 분단 조국이 직면한 현실을 분석한 예언자였다. 그는 남유다 소재 드고아의 농민이었으나 북이스라엘의 벧엘로 올라가 불의한 종교와 정치권력의 야합을 규탄했다. 국제 정세를 분석했고 국제 관계의 정의와 불의를 논했다. 그는 법정의 부패와 악한 종교권력, 이들과 결탁한 폭압적인 정치권력의 실상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고, 가장 가난한 자들이 당하고 있던 비인간적 처우와 궁핍, 그들의 한숨을 숙지하고 있었다. 북이스라엘을 향해 쇄도하는 거대한 심판의 홍수를 한 세대 먼저 예견하고 그것으로부터 살아날 길을 제시했다.

아모스는 분명 풍요와 번영의 시기에 하나님이 보내실 가뭄과 궁핍을 예고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가장 기름진 목장도 가뭄에 타들어 갈 것을 경고했다. 그가 예고한 가뭄은 자연 순환의 일부로 경험되는 가뭄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갈 무서운 가뭄이었다. 그는 국제 정세 추이에 민감했고 국가 간에 벌어지는 전쟁, 조약 파괴, 그리고 전쟁을 통한 인신매매와 영토 침략을 비판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는 물론이며 인근 다섯 왕국의 대표적인 죄악들을 구체적으로 탄핵했다(다메섹[3~5절]; 블레셋[6~8절]; 두로[9~10절]; 에돔[11~12절]; 암몬[13~15절]; 모압[2:1~3]). 유다는 야훼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조상들이 섬긴 거짓 신들에 홀려 그릇된 길로 나갔다(2:4~5). 가장 늦게 언급되는 이스라엘이 부국강병이란 국가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국운 융성을 누리며 지은 죄는 가장 크고 심대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악은 가난한 동포들을 잔학하게 학대함으로써 언약 공동체를 파괴한 죄였다(2:6~16). 북이스라엘의 부유층은 의로운 사람을 돈 받고 팔고, 신발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다. 둘째, 성 문란과 음란 죄였다. 셋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을 거부한 거짓 종교에 집착한 죄악이었다. 신명기 법전에 의하면 아무리 가난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겉옷은 반드시 밤에는 돌려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것은 일교차가 심한 이스라엘 지역의 차가운 밤을 나기 위한 이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빚을 갚지 못한다고 전물로 압수한 겉옷을 제단 옆에 펴놓고 철야 기도를 드렸다. 넷째, 하나님의 구원사 망각 죄와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 상실 죄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을 얻게 하신 그 근본 은혜를 망각해 버렸다. 그들의 죄는 구원사 망각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필사적으로 저항한 죄였다. 나라의 영적 토대를 굳건하게 세워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일으키신 나실인에게 독한 포도주를 마시게 해 타락시키는 한편, 추상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의 입을 봉하려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특권적 선민의식으로 변질시켜 버린 나머지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3:1~2). 예언자 아모스는 야훼의 영으로 가득 차 당신백성의 죄악을 징치하려고 분연히 일어나신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대변하는 사나운 맹수처럼 심판 예언들을 분출했다(3:3~8).

예언자 아모스는 사마리아에서 자행된 불법과 잔학한 폭압 정치를 탄핵했다(3:9~15). 폭압 정치의 온상인 호화스러운 궁궐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거짓 종교들의 본거지인 벧엘 제단들은 동시에 초토화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아모스가 보기에 이런 사마리아의 부패와 가난한 자들의 억압 이면에는 사마리아 유한부인들의 망국적 유흥 문화가 있고(4:1~3), 북이스라엘의 거짓 종교가 있었다. 거짓 종교는 하나님의 정의(신적 친절)와 공평(부당한 권력자 억제와 견제)을 실천하는 데 무관심한 반면 맹목적인 기복 신앙을 고취하는 종교였다. 유력자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부추기고 눈감아 주는 종교였다. 지주들과 지배층 사람들은 가난한 동포들을 학대하고 억압한 죄를 가리기 위하여 거짓 종교에 더욱 매달렸다. 그 결과 이스라엘 농업은 재기 불능의 파산을 맞이할 것이며, 적군의 침략으로 사마리아는 유린될 것이고 나라의 기간요원들인 청년들은 대가 끊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할 수 없는 수준까지 강퍅해져 버리고(4:4~12), 이스라엘 왕국은 재기 불능의 몰락을 경험할 것이다(5:1~3).

이런 참혹하고 퇴로 없는 심판 신탁을 선포하는 중에서도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살아날 길을 제시한다(5:4~15). 거짓 종교의 상징 처소인 유명한 성소 순례를 즉각 중단하고 야훼 하나님 자신을 찾으라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6). 여기서 ‘야훼를 찾는 행위’는 소극적으로는 불의한 행동들을 즉각 중단하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즉 정의(신적 친절과 공동체적인 약자 돌봄)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잔학 행위를 그치며(7절),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다. 야훼를 찾는 길은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일을 즉시 그치는 것이다(12절). 적극적으로 야훼를 찾는 길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는 일”(15절)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공동체 전체의 안녕과 형제 부조적인 인애를 강조하는 예언자들과 올바른 재판관을 존중하는 행위다(10절).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야훼를 찾는 데 실패하고 멸망의 길을 자초했다. 이 몰락의 도상에서 하나님을 찾는 길은 양상을 약간 달리한다. 이 경우 야훼를 찾는 행위는 심판과 정화의 채찍으로 임하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공동체의 죄악을 지적하고 나라 전체의 살길을 제시하는 통렬한 예언자적인 탄핵을 받아들이는 것, 책망을 듣고 자복하여 죄악된 습속과 관행을 즉시 중단하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준비인 셈이다(5:16~24).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4절) 하는 일에 착수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면할 준비를 하는 길이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만날 준비를 하지 못하면 이스라엘은 다메섹 밖으로, 북방 먼 곳으로 유배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5:25~27). 

아모스가 보기에 지배층과 국가 지도층의 철저한 부패, 약한 동포를 억압한 죄는 사마리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죄악은 남유다의 시온에까지 전염되었다. 아모스는 남북 두 왕실 모두의 죄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탄핵했다. 멸망의 시각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실과 지배층은 죽음을 부르는 연회와 환각적인 유흥에 탐닉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연약한 백성들의 궁핍과 비참에 연대할 수 있는 공감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자들은 연약한 동포의 눈물과 한숨, 고통과 울부짖음을 듣고도 도저히 공감할 수 없고 같이 아파할 수도 없는 무감각한 자들이다. 그들은 권력의 술에 취해 있고 착취와 억압의 정치가 주는 혜택에 인이 박힌 자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의 호화로운 궁궐은 파괴되고, 큰 집들 작은 집들은 완전히 붕괴되고 거리는 살해당한 백성들의 시신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나라 전체의 파탄을 의미하는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를 운영할 기간요원들은 먼 북방 왕국으로 유배될 것이기 때문이다(6:1~14).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라 전체를 타격하는 대파국적 심판 전에 이스라엘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시기 위해 중보자 아모스의 중보기도를 유도하신다. 대파국적 심판을 철회할 명분을 스스로 찾으시기 위해 작은 심판들을 연쇄적으로 보내시겠다고 선포하신다. 먼저 농작물과 초장을 파괴하는 메뚜기 재앙(7:1~3)과 지진과 화산 활동을 암시하는 큰 불 재앙(바다를 삼키는 큰 불)(7:4~6)을 내리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아모스는 메뚜기 재앙과 큰 불 재앙을 통보받고는 간절하게 중보자적 탄원을 드린다. ‘야곱이 미약하여 그 심판을 견딜 수 없으니 심판 계획을 철회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2, 5절). 야훼 하나님은 두 번씩이나 중보자 아모스의 기도를 듣고 심판 계획을 철회하셨다. 이 예비적 심판 신탁들을 듣고 이스라엘은 응당 마음을 찢고 돌이켜야 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고 더욱 더 격렬하게 하나님의 예언에 저항했다. 그래서 셋째 재앙 예고인 다림줄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국 전체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에서 너무 크게 어긋나 자체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상황임을 밝히 드러내 주셨다(7:7~9).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북이스라엘은 자기갱신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총체적 저항으로 응답했다.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세와 왕실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의 예언에 저항하며 그를 마침내 고향 땅으로 추방해 버린다.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협박과 심판을 예언하며 생계를 유지하라고 조롱한 것이다(7:10~17). 아마샤와 여로보암은 아모스를, 협박과 심판예언을 남발하면서 금품을 갈취하던 예언자들 중 한 명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자 아모스는, 자신은 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땅과 재산이 있으며 진실로 자신을 격동시킨 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과 장악하심이라고 선포한다. 동시대의 예언자 미가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예언자가 아니고는 왕과 지주, 악한 제사장 체계를 향해 하나님의 전쟁과 분노를 대언하지 못한다(미 3:8). 

마침내 넷째 재앙인 여름 과일 한 광주리 예언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예고한다(8:1~13). ‘여름 과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카이츠는 ‘끝’을 의미하는 케츠의 유음이의어(類音異意語)다. 이 끝은 이스라엘 지배층의 몰락을 의미했다. 백주 대낮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 흑암 때문에 국제 정세와 시세의 향방을 몰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려는 젊은이들은 전곡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닐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예언자들은 이제 멸망을 앞둔 도성에서 종적을 감추어 버릴 것이다(8:11~13). 그래서 마침내 우상을 숭배하던 사마리아는 우상과 함께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모스가 받은 마지막 환상은 성전 문지방이 흔들리는 환상으로 북이스라엘 국가 종교가 파괴되고 왕국이 멸망당하는 환상이었다(9:1~10).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 성전 제단의 붕괴에서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나라, 하나님께서 그 임재를 철수해 버린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왕국이 무너진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궁전을 하늘에 세우사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을 직접 통치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인간 왕이 없던 출애굽 시절의 공동체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직접적 다스림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열국 중에 유배되어 흩어진 자들을 체질하여 남은 자들을 거두어 들이신 후에 새로운 이스라엘 역사를 시작하실 것이다. 만국 중에서 체질하고 정결케 하여 거두어 들인 이스라엘은 고토로 돌아와 다윗과 같은 성군의 통치 아래 다스림을 받을 것이다(9:11~14).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왕실의 멸망이 통일 군주 다윗의 나라 실현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 웃시야 왕 치하의 유다 왕국으로는 북이스라엘 동포들을 거룩하게 흡수통일할 수 없다고 보았다. 찢겨진 다윗의 천막이 회복되었을 때, 즉 공평과 정의의 다윗 통치를 실현하는 이상적인 왕실이 들어설 때에야 참다운 남북 동포들의 연합과 일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다윗의 천막은 현재로는 찢겨져 있어 북이스라엘 동포들을 품기가 어렵지만 하나님이 복구해 주신 다윗의 천막에서는 남북 동포들이 다윗 왕국적 기상을 회복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아모스는 북왕국이나 남왕국 모두의 창조적 재편을 통한 겨레의 일치, 즉 다윗 왕국적인 정의와 공평의 토대 위에서 일치와 연합을 희구했다.

아모스를 따라 우리 시대의 ‘복음’과 ‘상황’ 엮어 읽기

분단 의식을 극복하는 기독 청년

무엇보다도 아모스처럼 ‘복음’으로 ‘상황’을 읽고 해석하는 기독 청년들은 겨레의 분단 시대에 살지만 분단 의식에 매이지 않는다. 분단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것을 초극하실 하나님의 위대한 은총의 햇살을 기대하며 그 햇살을 선취하여 겨레의 화해와 일치 역량을 비축하기 위해 애쓴다. 생물학적 민족주의의 명분만 갖고는 남북한 동포들의 연합과 일치는 어렵다. 정의와 공평이 작용한 결과, 창조되는 평화(사 32:16~17)만이 기독 청년이 추구하는 겨레의 일치와 화해다. 공평과 정의는 유력한 자, 기득권 가진 자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부당한 불법, 편법 이익을 스스로 거룩하게 도륙하여 이웃 사랑과 봉사에 바칠 때, 그 결과 억울하게 압제당한 가난한 이웃의 하소연이 소통될 때 일어난다. 분단 체제의 해소는 공평과 정의의 구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언자적 비통과 공감의 영성으로 연단된 기독 청년

아모스는 외견상 풍요와 국운 융성의 시대에 궁핍과 기근을, 공동체의 파괴를 간파했다. 아모스는 남유다의 웃시야 왕과 북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 2세 치세 동안에 혜성처럼 나타난 예언자다. 여로보암과 웃시야는 대규모 농지 개간과 확보, 농업 생산력 증가, 영토 확장, 국제 교역 증가, 국방력 강화, 장기간의 평화 내치(52년간 통치한 웃시야와 40여 년간 통치한 여로보암 2세) 등으로 일반 역사에서는 나름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역설적인 사실은 웃시야와 여로보암이라는 두 왕이 다스리던 그 시기가 주전 8세기의 가장 위대한 네 예언자 아모스·호세아·이사야·미가가 등장하여 지주와 권력 엘리트, 부패한 제사장 계층을 집중적으로 탄핵하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두 왕 모두 거대한 지주들의 출현을 방치했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애국심과 야훼 신앙의 기초단위인 자작·자영 소농들의 공동체를 급격하게 해체시켰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 모두에 ‘가난한 자들’이라고 하는 미증유의 사회현상이 나타났다. 그 가난한 자들은, 북이스라엘이 국제적으로 전개되는 경제 흐름에 적응하기 위하여 대규모 조방농업과 대지주제도를 도입했을 때 조상 전래의 땅을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한 이스라엘 동포들이었다. 이 가난한 자들의 농토 박탈은 성문의 법정을 통해 내려진 불의한 재판을 통해 이뤄졌고, 풍요의 우상을 섬기던 당시의 거짓 종교에 의해 옹호되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자영·자작 소농 해체는 야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위협했다. 아모스는 가난한 자들의 집단적 출현이 나라 전체가 멸망당할 망조라고 보았다. 아모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을 때 바로 북방 메소포타미아의 앗수르 제국에서는 신흥 정복 군주 디글랏빌레셀 3세가 남서진 정복을 위한 무장 행렬을 차비하고 있었다. 그는 단지 봄과 가을에 조공 물품을 약탈하러 가는 정도가 아니라 한 나라의 기간요원들을 뿌리째 포로로 잡아 가서 재기가 불능하게 한 새로운 정복 군주였다. 아모스는 이 사실을 보고 북이스라엘 처녀가 쓰러졌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 전통에 정통한 기독 청년

아모스는 모세 이래로 이스라엘에 계승되어 온 선택, 계약, 가나안 땅 기업 상속 등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대우는 공평과 인애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의 근거가 됨을 믿고 있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전통을 숙지한 사람, 하나님의 구원사를 윤리적·도덕적·정치사회적 책임감의 관점에서 소화한 사람들 중에 일어난다. 하나님의 구원, 즉 선택과 계약을 자기만족적인 구원 신앙으로 변질시킨 사람들은, 늘상 하나님의 임재를 주장하지만 실은 하나님과의 공감을 상실한 자들이다. 하나님께 속 깊이 공명한다는 말은 가난한 지체들의 아픔과 슬픔에 메아리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가장 비참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하여 많이 아는 자들, 하나님의 은총 햇살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들의 삶에 주목하는 사람들 중에서 예언자가 일어나고 나실인이 나온다. 예언자는 비통의 감수성이 고양된 사람이다. 기독 청년들이 힘없고 권력에서 가장 먼 자들, 가장 비참한 사람들의 아우성에 응답하려고 할 때, 예언자적 감수성에 공명할 수 있을 것이다.

중보자적 공감과 체휼의 기독 청년

아모스는 폭풍 같은 심판 언어를 분출한 활화산이었으나 그 중심에는 긍휼과 동정심이 불탔다. 아모스는 정작 하나님의 편이 되어 임박한 심판을 통고해 놓고는 이내 이스라엘 백성의 편이 되어 심판의 완화를 간청했다. 예언자는 한편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추상같은 분노에 동참하여 불 같은 신탁을 쏟아 내면서도 심판으로 짓이겨질 위기에 처한 동포들의 처지에 한없이 동정하며 체휼하는, 자기모순적인 감정에 시달린 자였다. 아모스는 결국 메뚜기 환상과 가뭄 환상으로 북이스라엘을 전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심판 말씀을 듣고 그 엄혹한 심판을 철회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아모스는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심판을 철회시킬 정도로 강력하게 중보했다. 실로 예언자적 기독 청년은 비판자와 탄핵자임을 넘어 동정심과 애휼이 넘치는 중보자다. 
 
국제적 불의와 국내적 불의를 관찰하고 탄핵하는 예언자적 기독 청년

예언자 아모스는 정의와 공평과 관련된 국제 정세와 국내 정세에 정통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인근 나라들의 죄악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분석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었다. 그는 제단과 성문의 법정에서 벌어지는 비리와 재판 부패, 뇌물 재판의 실태를 잘 알고 있었고, 민심을 시원하게 울려 주는 촌철살인의 민속학적 지혜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상류층 유흥 문화의 내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야훼의 날을 구원과 빛의 날이라고 기대하는 자들-의 그릇된 구원 전승 해석의 자기기만적 작태를 알고 있었다. 아모스는 악한 종교(값비싼 순례 종교, 성대한 절기와 축제 종교, 기름진 제사 종교,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만족적으로 해석하는 영적 청맹과니 종교)와 악한 정치(민중 압제적, 강대국 외교 동맹 의존적)의 동맹, 악한 법정과 악한 지주들의 동맹을 통찰할 수 있는 사회과학적 인식 능력을 구사했다. 
  
결론

아모스적 교양과 영성을 가진 기독 청년들은 새해에도 ‘복음’의 확신을 갖고 ‘상황’을 분석하고 돌파하는 일에 투신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케 하는 일들이 병발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에 정통한 이해를 구축하기 위해 성경을 제대로 읽고 해석하는 일에 계속 도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고취된 기독 청년들만이 ‘사회 지도층과 권력기관들의 허물을 감히 지적하고 규탄할 용기’를 구비할 수 있을 것이다(미 3:8). 하지만 기독 청년은 자신이 심판 언어의 궁극적 발화자가 아님을 인식하고, 심판 언어, 비판 언어를 분출함과 동시에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미약한 동포들에게 가해질 심판의 참상을 체휼하는 비통과 공감의 사람들이 되어 중보기도에 몰입해야 한다. 미약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독 청년들은 하나님나라의 평화 비전에 붙들려 분단 시대를 초극할 실천력을 비축해야 한다. 다윗의 찢어진 장막이 다시 기워져서 남북한 동포가 함께 공존공영할 수 있는, 그리하여 전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 운동을 주도하는 하나님 중심의 겨레 화해를 성취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할 것을 부탁한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세계는 지금 미국발 금융위기에 빠져 정신적 시계(視界)가 불확실한 밤바다에 표류하고 있다. 이 위기는 억제되지 않는 권력 엘리트들의 탐욕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가져다준 재앙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하나님의 진리를 크게 이탈한 고도의 자본주의적 소비 사회가 가져온 필연적 파탄이며 인류 역사를 주도하는 중심부 문명이 맞이한 막다른 골목이다. 소비주의 사회는 특정 계층의 인간들에게 욕망의 과도한 충족을 의미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의식주라는 기본적인 욕망의 부정과 비인간적 궁핍을 의미한다. 고도의 소비주의 사회는 자기부인의 문화와는 정반대로 질주하는 자기파멸적인 욕망의 과잉충족 사회다. 그것은 공동체 안의 가장 주변화되고 연약해진 구성원들의 눈물과 비통에 공감할 수 없는 사회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근심과 탄식을 자아내는 사회다. 그런 사회는 마음이 강퍅해져서 예언자의 목소리에 더 이상 응답할 수 없는 무감각한 파라오의 압제 체제이며, 급기야는 예언자적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사회다.
 

최근 우리는 자유 시민들의 정당한 목소리를 누르고 주변화된 자들의 생명 가치를 능멸하는 권력 중심부와 지배 문화의 강퍅함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본다. 그들은 유난히도 법과 질서를 강조하지만, 긍휼과 비통의 감수성, 체휼과 동정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월터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극단적인 욕망 충족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능력을 상실한 지배 문화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영적 감수성을 회복해 주는 한편, 왕권 의식으로 가득 찬 지배 문화에 의하여 억눌리고 무기력해진 변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새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희망을 고취시키는 책이다. 이 책은 중심과 주변을 나누고, 왕권 의식과 예언자적 상상력을 나누는 외견상의 이항대립 구도를 사용하지만, 실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도록 초청하는 나사렛 예수가 전한 복음의 원음(原音)을 아주 생생하게 재생하고 있다.
 

이 책은 1978년에 출판된 저자의 <예언자적 상상력> 개정·증보판이다. 2000년대 개정판은 20여 년 이상 성서연구 분야에서 일어난 변화를 반영하고 있으나 책의 중심 논지는 동일하다. 초판이나 개정판 둘 모두에서 브루그만은, 예언자를 단지 미래를 점치는 자라든가 사회 저항가가 아니라, 인간 정신을 획일화하고 노예화하는 전체주의에 대항하여 한 공동체의 근원적 변화를 촉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모두 일곱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모세, 예레미야, 제2이사야, 그리고 구약 예언자들의 총합이자 그 이상인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상상력과 목회를 감동적으로 분석한다. 모든 장이 설득력 넘치고 역동적인 어조와 문체로 채워져 있으나, 특히 5장과 6장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상상력과 목회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십자가 죽음의 대속적 차원만 알고 있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공관복음서의 예수상, 곧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면모를 입체적으로 재생해 준다. 때로는 과도한 단순화(왕정 체제와 모세 체제,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이분법적 구분)가 옥에 티처럼 보이기도 하나, 그것들이 이 책의 중심 논지를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의 순서를 따라 예언자적 상상력의 위력을 음미해 보고자 한다.
 

에언자적 상상력의 얼개와 메시지
 

제1장 ‘모세의 대안 공동체’에서 저자는, 오늘날 미국 교회의 정체성을 앗아 가는 미국의 소비주의를 히브리 노예들을 압제한 파라오의 억압 체제와 견준다. 미국의 자본주의 소비 문화에 교회가 순응하게 된 내적 원인은, 성서의 예언자 신앙 전통을 저버리고 그 결과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한 데 있다. 예언자는 한 사회의 지배 문화에 적응하고 동화되어 거룩성을 상실해 가는 교회를 경각시키는 사람이다. 예언자는 지배 문화의 의식과 인식에 맞설 수 있는 대안 의식과 인식을 끌어내고 키우고 발전시키는 예언자적 목회에 투신된 인물이다. 이 예언자적 대안 의식이 바로 예언자적 상상력이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지배 의식을 해체할 목적으로 현존하는 질서의 불법성을 드러내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신앙 공동체가 바라볼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고 선포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일을 한다. 저자는 모세가 바로 이런 예언자적 상상력을 구현한 구약성서의 첫 예언자라고 본다.
 

모세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내세워 파라오의 정적(靜的)인 승리주의와 억압과 착취 정치를 해체한다. 모세의 핵심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된다. “우리가 만일 가진 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질서만 강조하는 정적인 신을 따른다면 억압을 떨쳐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자유롭게 행하시는 하나님, 곧 기존 체제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그 체제를 반대하실 만큼 자유로운 분, 노예들의 탄식을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응답해 주실 만큼 자유로운 분, 제국이 정해 놓은 모든 신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이 사실은 사회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자유로운 새 하나님을 소개하거나 사회 해방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를 인간적인 정의의 정치와 결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처럼 파라오의 정적인 승리주의와 억압 체제에 대한 모세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비판과 활성화로 구성되어 있다. 출애굽기 1~12장에 걸쳐 전개되는 출애굽의 구원 이야기는 이집트 제국의 번영과 막강한 힘을 분쇄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의 드라마다. 파라오 체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탄원과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예언자적 긍휼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점이다(출 2:23~25).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미래를 제시함으로써 예언자적 활성화의 생생한 예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자유와 기존 질서를 해체하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
 

제2장 ‘왕권 의식과 대항 문화’에서 저자는, 모세의 대항 공동체 구축활동은 단순한 반체제적인 사회활동과는 구분된다고 말한다. 모세의 대안 의식, 곧 예언자적 상상력은 종교와 정치 사회적 기존 질서의 해체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이 대안 의식은 첫째, 체제 고착적인 질서의 신(神) 관념에 하나님의 자유라는 관념을 대립시킨다. 이집트의 신들에 의해 영원한 가치가 있다고 선포된 것들이 하나님의 자유 앞에 무력화된다. 둘째,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정의와 긍휼이라는 관념임을 역설한다. 노예와 산파들로 이루어진 소수자 집단이 하나님의 자유라는 관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집트의 정적인 승리주의 종교를 돌파할 수 있었다. 노예로 이루어진 소수자 집단이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주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것이 억압적인 상황에 저항하는 데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줄 사회적인 비전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파라오 체제와 모세의 갈등이 솔로몬적 왕정 체제와 그것에 대항하여 일어난 예언자들에 의해 재현되고 계승되었다고 본다. 브루그만은 솔로몬이 이룬 풍요와 번영은 일부분 억압적인 사회정책 때문이었다고 본다. 솔로몬의 풍요(왕상 4:20~23)는 억압의 정치(왕상 5:13~18; 9:15~22)가 가져다준 선물이요 하나님의 친근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내재적 종교(왕상 8:12~13)에 의해 뒷받침되었다는 것이다. 솔로몬 체제의 내재적 종교는 모세가 그토록 강조했던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접근성 사이에 마땅히 존재해야 할 긴장 관계를 해소해 버렸다. 하나님의 접근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하는 쪽을 택했던 모세의 종교와 하나님의 접근성을 강조한 솔로몬의 종교는 날카롭게 충돌하게 되었고, 이 충돌이 왕국 시대의 예언자 운동의 배경을 제공했다.
 

제3장 ‘예언자적 비판과 파토스의 포옹’에서 저자는, 예레미야를 모세적 의미의 예언자적 상상력을 구현한 예언자의 전범으로 파악한다. 예레미야는 애통의 시가를 통하여, 왕권 체제가 있는 힘을 다해 지켜 내려 했던 사회 세계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선포하고자 애썼다. 그의 예언자적 비판은 분노가 아니라 고뇌였다. 하지만 솔로몬 체제가 구현한 왕권 의식은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린 자들과 연약한 구성원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격정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왕권 의식에 대항하여 예언자적 상상력과 그것에 입각한 상하고 찢긴 공동체 구성원들의 아픔과 탄식을 체현했다. 그는 애통과 공감을 잃어버린 왕에 맞서서 모세적 대안 의식을 구현했다. 냉담한 풍요와 냉소적인 억압과 뻔뻔스런 종교에 맞서서 그는 애통과 격정, 공감과 체휼의 종교를 주창했다.
 

제4장 ‘예언자적 활성화와 경탄의 출현’에서 저자는, 예레미야의 사역이 단지 근원적 비판을 넘어 가장 대담하고 창조적인 희망을 선포한 목회였음을 역설한다. 앞서 말했듯이, 예언자적인 대안 공동체는 비판과 동시에 활성화를 기도(企圖)한다. 예레미야의 목회는 유다 공동체와 바빌론 포로 공동체에게 생생한 신앙과 생명력을 불어넣어, 파국적 멸망 너머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미래를 주목하도록 했다. 왕권 의식이 백성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향해 나가는 힘을 포기하고 닫힌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드는 반면에,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충만했던 예레미야의 목회 과제는 백성들로 하여금 역사 속에서 일하시며 마침내 새 일을 추진하시는 하나님을 앙망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기원전 587년에 유다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한 왕권 의식이 자신에게 아무런 자원도 남기지 않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예레미야는 왕권 의식을 지배했던 절망을 뚫고 하나님의 깊은 섭리 속으로 들어가 유다의 종말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을 통찰했다. 이 공공연한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희망의 근거는, 야웨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품으신 한결같은 질투였다. 이러한 질투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시고, 자신의 미래를 그들의 미래로 허락하셨다. 이 하나님의 질투에서 비롯된 새 일은 예언자들에게 경탄의 언어를 고취시켰다. 특히 제2이사야는 절망한 왕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예언자를 위한 경탄 언어의 대표적 전령이었다. 그는 예레미야 애가의 파토스와 욥의 분노를 알았고, 또 그것을 몸으로 체험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토스와 분노를 뛰어넘어 희망과 송영의 언어로 나아간다. 제2이사야의 시는 포로생활의 종식과 그 후에 벌어질 하나님의 새 역사를 다채로운 경탄의 이미지로 선포했다.
 

왕권 의식에 도전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제5장 ‘나사렛 예수의 비판과 파토스’는 이런 예레미야와 제2이사야 등의 예언자적 비판 목회가 어떻게 나사렛 예수에게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브루그만은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상상력이 어떻게 현실을 변혁하고 당대의 지배 문화였던 왕권 의식을 비판했는지를 자세히 논한다. 첫째, 예수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 의식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이 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 그리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와 기존 권력자들과의 껄끄러운 갈등은 모두 왕권 의식을 비판하는 대안 의식의 등장을 웅변한다. 둘째,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막 1:15; 눅 4:18~19)는 하나님의 친정통치 시대가 도래했음을 통고하는 한편, 당시의 지배 권력자들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냉혹한 비판을 함의한다.

왕권 의식에 도전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그의 목회를 통해 실체화되었다. 예수의 근원적 비판을 대표하는 몇 가지 사역들을 살펴보자. 첫째, 예수의 용서 메시지와 용서 행위(막 2:1~11)는 현존하는 종교 체제의 중개 기능과 권위를 위협하는 행위였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예수가 위험을 자초하게 된 가장 근원적인 행동은 죄 용서였다. 둘째, 예수의 안식일 치유(막 2:23~28)는 안식일을 관장하고 거기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의 아성을 공격하는 행위였다. 당시 안식일은 사회의 안정을 나타내는 성스러운 표지였기 때문에 안식일 계명을 ‘위반’하는 일은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셋째, 버림받은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나누었던 예수의 밥상 교제는 사회의 근본 도덕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눔으로써 유지되던 종교 체제를 무력화 하는 일이었다. 넷째, 예수의 병자 치유와 귀신 축출은 인간을 병들게 하고 귀신 들리게 하는 극단 경험으로 몰아 가던 당시의 악마적인 사회 체제, 권력 관계의 실상을 폭로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사회가 불결하다고 판정한 사람들(막 7:24~30)과 죄인들(막 2:1~12), 하나님께 벌 받은 사람들(요 9:1)까지 하나님나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무한 자비의 과시였다. 다섯째, 당시 천대받던 여인들에 대한 나사렛 예수의 긍정과 존대는 성차별적 남성지배사회를 타격하는 사회 비판적인 자비의 실천이었다. 여섯째, 세금과 빚에 대한 예수의 담론(마 20:1~16)은 단순히 영적인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금과 십일조, 사용료, 소작료, 압류 처분으로 인한 재산 상실 등의 문제로 시달리던 갈릴리와 유대 농민들을 자유하게 하려는 예수의 정치적 해방 담론이었다. 마지막으로, 예수가 성전에 대해 보였던 태도(막 11:15~19; 요 2:18~22)는 가장 불길한 체제 전복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예수는 성전을 비판함으로써, 사실은 자기만족적이고 교조적인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성전체제주의자들의 선택 교리를 공격한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와 실천은 예언자적 긍휼에서 발원되었다. 긍휼은 비판의 근원적 형태이다. 예수의 긍휼은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공적인 사회 비판이었다. 예수는 이 아픔 속으로 뛰어들었고, 마침내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구현했다. 예수는 지배 문화가 거부한 사람들의 애통을 긍휼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냈으며, 이렇게 아픔을 구현하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권위는 지배 문화의 파멸적 종말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왕권 의식에 대한 결정적 비판이 된다. 브루그만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고매한 사람의 희생이라고 이해하는 자유주의도 거부하고 중보적인 속죄 죽음이라고만 말하는 보수주의도 거부한다. 오히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속에서 예언자적 비판의 궁극을 본다. 그 행위를 통해 예수는 죽음의 세상이 종말에 이르렀음을 선포하면서 죽음을 자신의 인격으로 끌어안는다. 예언자적 비판의 궁극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 끌어안으신 사건이다. 이러한 궁극적 비판은 의기양양한 분노로 가득 찬 비판이 아니라 격정과 긍휼로 이루어진 비판이다. 더 나아가, 예수의 수난 고지들과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한 말들은 지배 문화와 왕권 의식의 철옹성 같은 죽음의 질서를 궁극적으로 해체한다. 근원적 비판을 이루는 이 전승은 자기를 내어 주는 예수의 비움, 지배권을 포기함으로써 다스림, 그리고 자기비움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완성에 관해 말한다. 복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권력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비운 이 분은, 다른 누구도 엄두를 못 낼 권위를 가지고 인간다움을 허락하는 지고의 권력자이다. 이 자발적인 권력 포기를 통해 하나님께 절대적 순종을 드린 예수에 대한 십자가 처형은 신앙의 역사 속에 등장한 결정적인 사건이기는 해도 뜻밖의 사건은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 처형은 모세가 파라오와 맞서 싸운 이래로 예언자들이 겪어 온 고난과 희생의 총화이다. 모세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무기 삼아 억압의 정치에 맞서 싸웠으며, 이 모든 일이 그의 목회와 죽음에서 드러난다. 모세처럼 예수도 하나님을 포로로 삼은 종교에 대항해, 하나님의 자유 곧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고 죽음에 대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그 자유를 무기 삼아 싸웠고, 이 일 역시 그의 목회와 죽음에서 드러난다.

제6장 ‘나사렛 예수의 활성화와 경탄’에서 저자는,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사역의 궁극을 더 깊이 다룬다. 그 예언자적 사역의 궁극이란 단지 낡은 체제에 대한 그의 비판에 있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와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통해 새로운 인간적인 시작을 열었다는 데 있다. 나사렛 예수가 말과 행동, 특히 십자가 처형을 통해 왕권 의식을 해체하는 일을 했으며 또 그의 공동체를 향해 그러한 해체를 슬퍼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의 일에서 핵심은 해체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건설이었다. 이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활성화 사역이다. 첫째, 예수의 탄생은 새로운 사회 현실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활성화를 의미했다. 모든 옛 역사는 로마 제국 황제의 호적 포고령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예수가 창시한 새로운 역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작한다. 새 왕의 탄생은 하늘과 이 땅에서 전혀 다른 식으로 열리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표지이다. 이 새로운 시작은 옛 질서의 희생자들로부터 나온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늙은 여인(엘리사벳), 결백하지만 믿음으로 행한 젊은 여인(마리아), 말문이 막혀 버린 늙은 남자(사가랴), 그리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목자들) 가운데서 시작이 이루어진다. 둘째, 예수의 목회도 근원적인 시작을 열어 주는 활성화다. 예수의 탄생이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는 반면에, 예수의 사역은 그 희망의 가능성들을 절망의 세상 속에서 온전히 이룬다. 예수의 사역은 대부분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희생자들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셋째,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목회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었다.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구분이 무너지고 백지화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훨씬 더 근원적인 일이다. 치유하고 죄를 용서하는 일도 가치 있지만, 사람들을 병자와 죄인으로 만드는 조건들이 더 이상 통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더 큰 일이다. 특히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지복 선언이 근원적인 새로움의 결정체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새로운 미래로 향하게 하는 궁극적 활성화다. 부활은 지금까지 존재한 현실에 근거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전적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 행위다. 저자는 부활의 역사적 유일회성이라는 특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부활이 예전에 예언자들의 말에 의해 제시되었던 대안적 미래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세의 대안 공동체가 능력의 말씀으로 노예들을 해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미래를 선사받았듯이, 예수의 부활은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미래를 열어 주었다.
 

제7장 ‘목회의 실천에 관한 주’에서 저자는, 1~6장의 내용을 요약한 후에 예언자적 목회와 관련된 실천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브루그만은 예언자적 목회는 거창한 사회적 십자가 운동이라든가 의분을 쏟아 내는 비판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대안적 인식을 제시하는 목회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언자적 목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자기들에게 특별한 방식을 따라 행하는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대안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상에 대해, 그리고 어떤 상황에든 빛을 비출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취하는 태도와 자세, 해석학에 관심을 갖는다. 셋째,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애통과 탄식을 피력함으로써 무감각을 꿰뚫고 들어간다. 고통을 드러내어 함께 나누는 일은 고통의 현실을 가라앉게 만들고 죽음을 몰아내는 방법이 된다. 넷째, 예언자적 목회는 절망을 꿰뚫고 들어가서는 사람들이 새로운 미래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음을 믿고 그 미래를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확증해 주는 말과 몸짓과 행동만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가 있다.

마지막에 저자는, 이런 예언자적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 예언자적 상상력, 근원적 신앙은 인간이 쌓을 수 있는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예수의 관심이 하나님나라의 기쁨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예수는 이 기쁨을 약속했으며, 사람들을 이 기쁨으로 초청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미래를 기뻐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질서에 애통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이 애통이야말로, 하나님나라의 기쁨에 이르기 위한 형식적이고 외적인 요구사항이 아니라 유일한 문이자 통로가 된다.
 

끝으로 저자는,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애통과 희망이 지배 문화의 굴레를 깨뜨린다는 확신을 지닌 참된 신앙인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실천임을 강조하며, 결미에 목회의 실천 후기를 첨부한다. 슬픔과 희망을 품고서 저항과 대안을 이루는 일에 참여하는 구체적인 하위 공동체 몇 곳을 제시하고, 그들을 통해 예언자적인 상상력이 현장에서 실천되는 모습을 살펴본다.
 

예언자적 목회는 오늘도 가능하다
 

브루그만은 번영과 풍요를 구가하는 미국의 주류 사회를 흔들어 깨울 예언자적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적으로 주도적인 공동체와 갈등관계에 있는 하위 공동체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의 소비주의가 예언자적 담론과 행동을 촉발시키는 가장 주요한 환경이라고 말한다. 결국 예언자적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능력과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주류 문화에 창조적으로 대항하는 하위 공동체를 길러 내는 목회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파주의로 후퇴한 태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며, 또는 끝없이 저항과 비판을 제기하고 대결적인 ‘사회 행동’을 실천하는 삐딱한 공동체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배 문화가 이루어 놓은 모든 ‘가상현실’에 맞서는 생명과 희망의 공동체를 일구는 목회다.
 

이처럼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예언자가 먼 옛 과거에 속한 인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시대에 출현할 수 있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예언자의 서식지는, 고도의 자본주의적 소비주의 사회, 경쟁과 탐욕으로 인간의 정신을 마모시키는 도시의 소비문화에 의해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들의 누추한 삶의 자리다. 도시에 속한 교회가 바로 이 과도한 욕망 충족의 사회인 도시 문화를 해체하고 자애와 형제적 우애가 넘치는 사귐의 공동체를 이루는 예언자적 목회를 하기에 적합한 하위 공동체로 부름 받았다. 교회는 왕권 의식에 젖어 자신의 종말이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벳세다와 고라신과 가버나움 같은 도시 사회가 아니라, 가난하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애통하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위로를 경험하는 산상수훈 시민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브루그만은 무감각과 냉정함으로 강퍅하게 된 도시 문화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목회는,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비판과 활성화를 두 축으로 하는 예언자적 목회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예언자적 목회는, 기존 권력자들과 날카롭게 충돌하다가 감옥에 가고 이후 정치적 유명 인사가 되어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그런 목회가 아니라, 지배 문화의 변두리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애통과 체휼 목회를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죽을 때까지 비영웅적으로 감당하다가 남몰래 죽는 목회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교회가 참으로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가 보혈로 값 주고 사신 기업(基業)이라는 말이 아주 실감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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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연(外延)을 넓혀 가는 기독 청년들의 하나님나라 운동

복음주의적 기독 청년들의 사회 참여가 점차 그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공의 정치 실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성경적 토지 정의의 입법화, 공정 무역, 교회 갱신, 교육 개혁과 사교육 폐해 극복, 세상에 대한 기독교의 선한 영향력 확장 및 교회에 대한 자기비판적 담론형성을 위한 언론 운동, 기독교 윤리의 실천, 그리고 평신도들을 위한 각종 교육 프로그램 운영 등 열의와 진정성으로 가득 찬 기독 청년들의 사회적 활동은 한국 기독교의 앞날에 대해 밝은 전망을 갖게 한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의 주류 교회로부터 아직 두터운 지지와 환영을 받지는 못하지만 생각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이런 활동에 종사하는 청년들을 통합시키고 집중시키는 중심 주제는 하나님나라다. 여기서 하나님나라는 공간적 실체를 가리키기보다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자체를 의미한다. 하나님나라는 개인의 인격, 가정, 조직체, 국가, 국제 질서, 그리고 피조 세계 전체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관철되는 사건이요 상태다. 물론 하나님 통치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실현될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성취될 나라다. 그것은 죄악된 권력 집단들과 개인들의 집단적인 반대와 완강한 저항을 감수하면서도 소수의 남은 자들인 하나님 자녀들의 부단한 순종과 견결한 실천을 통해 완성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나라는, 특정한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건축되어져 가는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덧없는 ‘특정한’ 시대의 과업을 통해 건축되어져 간다.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보면, 어떤 시대는 하나님나라의 자유 가치를 실현하는 데, 또 다른 시대는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공평, 연대성과 평화를 실현하는 데 투신되었다. 어떤 민족은 하나님나라의 기초를 놓는 데, 어떤 민족은 하나님나라의 세계적 확장에 쓰임받았다. 이처럼 하나님나라는 하나님 당신의 고유한 과업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에게 공명하고 응답하는 사람들의 과업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고유하고 ‘절대 주권적인’ 통치 확장 행위이지만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위임된 과업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운동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붙잡힌 하나님 자녀들의 ‘응답적’인 운동이다. ‘운동’이라는 말 때문에 하나님나라가 인간 주도적인 기획 혹은 인간의 힘만으로 성취되는 특정한 역사 발전이나 정치․경제상의 진보를 의미하는 말로 오해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연코 그런 말이 아니다. ‘운동’이라는 개념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나라 ‘운동’의 의미와 그 성경적 기원
    
첫째, 창세기 1:2이 하나님의 창조 운동을 증언한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고 있었다’는 구절은 하나님의 세계 창조가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신이 주도한 ‘운행’의 산물임을 보여 준다. ‘운행하고 있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머라헤페트’는 ‘라하프’(rāḥaph)라는 동사의 능동분사형으로 지속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신(혹은 바람)이 지속적으로 흑암에 뒤덮인 바다를 향해 운동했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흑암의 원시 바다에 뒤덮여 있는 ‘땅’을 건져내기 위해 하나님의 신이 쉴 새 없이 운행했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기초가 될 마른 땅이 드러나도록 불어 대는 바람같은 야훼 하나님의 운행이, 바로 하나님나라 ‘운동’의 으뜸되는 신학적 근거다. 

둘째, 사도행전 2:1~4의 불같고 바람같은 성령의 강림이다. 성령의 불같고 바람같은 역동적 ‘운동’은 낱개의 개인들을 공동체로 변형시키는 운동이며, 하나님의 영에 100% 공명하고 공감하도록 결단케 하는 자복 운동이다. 바람같고 불같은 성령의 내습(來襲)을 경험한 개인들은 하나님나라 운동의 대의에 합류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게 된다. 

셋째, 히브리서 4:12~13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라는 구절이다. 하나님 말씀의 운동력은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까지 분석해 내고 폭로하는 신적 분석력이자, 자복시키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설복되고 감화되어 발생하는 활동이 바로 하나님나라 운동인 셈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신적 주도성 및 인간적 수동성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영과 말씀에 사로잡혀 파생되는 운동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지극히 순전한 복종을 바치는 운동이며, 자기 기득권(계급적․계층적․신분적 기득권)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추진하는 자기 부인 운동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의 보상은 하나님과의 생명 연합, 하나님 모방, 하나님 자녀들의 대가족 향유, 그리고 종말론적으로는 하나님나라의 상속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 청년들이 말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은 바로 이런 의미다. 
    
하나님나라는 성경의 중심 주제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종교 권력에게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배제된 성경 사상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득권자나 권력 체제를 향해 항구적인 자기 갱신과 자발적 변혁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개인들에게는 급진적 전향을 요구한다. 따라서 하나님나라라는 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에 살면서 고독을 느껴 보지 못하고 불안에 떨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경하고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다. 2000년 교회사를 보면, 이스라엘 본토에서 시작된 기독교 복음이 유럽 문명에 이식될 때 기독교 신은 본래의 체제 변혁적이고 급진적인 신선함을 잃고 기존 세계의 상류층 문화에 길들여진 채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하나님나라 복음은 제왕들과 영주들의 종교로 전락했고, 기독교회는 적어도 1500년 이상 세상 정치권력과 종교, 경제적 권력의 최상층부에 자리 잡은 사람들에 의해 대표되는 귀족들과 왕후들의 지배자 종교가 되어 버렸다.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이나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면 유럽 문명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얼마나 결정적으로 왜곡하고 변질시켰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거대한 대리석 석궁과 엄청난 크기의 돔(dome) 지붕과 화려한 고딕식 예배당이 기독교 문명의 가시적 기념물로 남겨지는 동안에, 하나님나라의 세계 변혁적이고 자아 갱신적인 에너지는 거대한 대리석 예배당과 그 안에서 벌어진 거창한 종교 제의들 안에서 소거되어 버렸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기독교 신앙이 거룩한 문화 창조의 에너지도 발출하기 전에 세속화의 위협 아래 굴러 떨어진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며,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묵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되는 나라다

하나님나라는 창세기 1~2장에서 그 첫 모습을 드러낸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나라의 기원과 토대를 말하고, 2장은 하나님나라의 역사적 지향을 부각시킨다.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최고 주재권을 가지신 왕만이 내리실 수 있는 명령(fiat)으로 세계를 창조하신다. 하나님의 세계 창조는 인간의 협조와 지지, 믿음과 순종의 매개없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도 의논하지 않고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자기만족적 자기평가를 일곱 차례나 반복하심으로써 이 세계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창조되었음을 인정하셨다. 화가가 자기 그림에 낙관을 찍듯이,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반복된 말로 자신의 창조물을  품평하신다.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애착과 무한 긍정을 표현하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창세기 1장에서 이 세계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의 자기만족, 자기 왕권의 과시요 확장임을 짐작할 수 있다.

후대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연 해설을 제공했다. 이사야에 따르면 하나님의 세계 창조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창조 세계에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하박국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인정하는 거룩한 교양이 온 피조 세계에 넘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강조한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보좌요 발등상이라는 말이 바로 온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 대상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온 세계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지식과 교양을 충만케 하는 사역인 것이다. 창세기 2장은 이 하나님나라가 인간의 순종과 믿음을 통해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릴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나라는 천상 영역, 이데아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대표로 하는 피조물의 세계 속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세계 통치에 결정적인 동반자인 ‘사람’이 등장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에 대한 피조물의 대표자인 사람의 순종과 응답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피조물인 인간의 믿음과 자발적 순종의 위치가 드러난다. 인류의 대표자인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순종이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는 사건이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롬 5:12~21). 결국 창세기 1~2장은 하나님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이 성취해 가는 하나님 스스로의 통치권 확장 활동이면서 동시에 피조물 인간의 응답을 요청하는 매우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과업임을 강조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고유 절대 주권과 권능으로 시작되고 세워지는 나라임과 동시에, 인간의 자발적인 순종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것이다(시 33편). 
   
창세기 1~2장에서 인간에게 위탁된 중심 활동은 다스리고 통치하고, 관리하고 지키는 행위다. 하나님나라와 인간에게 위임된 이러한 사명은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된다. 창조는 물과 땅이 뒤얽힌 혼돈(混沌)으로부터 경작지를 건져 내어 피조물들을 위한 생명의 왕국을 건설하는 행위였다. 하나님의 창조는 질서 부여 행위였으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세계의 기초를 하나님의 성품인 공평과 정의 위에 세우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물리적 환경의 창조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질서, 신적 친절과 공평(시 89:13~14)으로 운영되는 생명 공동체의 창조까지 포함하는 활동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 이후의 하나님나라의 행로는 아담 자손의 불순종과 저항으로 숱한 좌절과 퇴행을 겪었다. 구약성서의 첫 책인 창세기 3~11장의 인류 원 역사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 인간적 저항과 방해들로 점철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적 저항과 방해에 대하여 징벌과 심판으로 응답하셨다. 인간의 죄악을 징치하는 징벌 행위는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사람과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는 징벌과 심판만으로 관철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일부 인간을 먼저 선택하셔서 구원하는 구원사를 개시하심으로써 당신의 세계 통치를 이어가셨다. 죄와 불순종으로 부패하는 인간을 갱생시켜,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변혁시키기 위해 믿음의 사람들을 이 땅에 일으키셔서 세상에 파송하신 것이다. 아담-셋-에노스-노아-셈-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계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보여 주는 증거다. 또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율법을 받아 나라를 구성하고 사회를 이루도록 부름받은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세계 통치의 증거였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일으키신 예언자들은 인간 왕국들을 아우르시고 어거하시는 초월적인 세계 통치 지휘부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사 6:1~3; 렘 22:18~22; 암 3:7~8; 왕하 22; 시 103:19~22). 이스라엘 역사를 세계 만민의 역사와 결정적으로 구분 짓는 표지는 초월적인 하나님나라의 특명 전권대사로 활약한 이 예언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의 참된 왕이 인간 왕들이 아니라 천상 보좌에 앉아 세계를 통치하시는 야훼 하나님임을 결정적으로 증거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역사의 종점에 나사렛 예수가 등장했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구약 예언자들을 거쳐 독생 성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절정에 이르렀던 것이다. 구약 예언자들의 야훼의 말씀 대언은 창조 때 시작된 하나님나라 건설 과업을 계승하는 작업이었고,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된 하나님나라를 완성시키려는 활동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잠시간 혹은 부분적으로 대언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다. 창조적 권능을 내뿜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 순종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 전체는 태초부터 이 세계 속에 활동해 온 하나님나라의 총체적 면모를 일시에 계시했다. 나사렛 예수의 순종을 격려하고 돕는 성령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고갱이였다. 12사도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은 성령으로 추동된 자발적인 순종 운동이었다. 
   
하나님나라는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 주도적인 나라다.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전하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이 이 세계를 다스린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사랑, 평화, 희락, 연대와 우정, 돌봄과 치유가 일어난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나라를 말할 때에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이어지는 부단하고 순전한 순종이 담보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말하려면 스스로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순종이 담보된 사람들의 입술에서 하나님나라가 선포될 때 그것은 자아 갱신적이고 세계 변혁적인 파급력이 발산되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철저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으로 주도되는 운동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화 감동과 말씀의 감화력으로 개인과 공동체를 추동시켜 하나님나라에 근사치적인 세계를 만들어 가는 운동이다. 한국교회의 영적 분투나 열심만으로는 하나님 통치를 매개할 수 없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약간 더 의로운, 약간 더 청빈한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하는 대중 계몽운동도 아니고 윤리 각성운동도 아니다. 그런 행동들도 의미 있기는 하나 성경적인 하나님나라 운동은 아니다. 이 말은 모든 점진적이고 상대적인 의미의 사회 개선 활동의 의의를 훼손하는 말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말의 의미를 너무 비근하게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이다.
 
하나님나라는 다양한 단위로 존재하며 역사 속에서 점진적이며 유기적으로 성장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피조물에게 나타나는 은총이다. 그것은 구원의 형태, 약속과 인도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종종 징벌, 정화적 심판, 그리고 쉼 없는 징계와 연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의 에덴동산은 물리적 인간세계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였다. 하나님나라는 먼저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된 자 거듭난 자, 믿는 자에게 영생으로 나타난다. 영생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으로서 의와 진리, 거룩함으로 거듭난 개인의 삶이다. 둘째, 하나님나라는 믿음의 가정에 나타난다. 셋째,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확대된 가족공동체나 교회 공동체에 나타난다. 넷째,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지배하는 국가 공동체다. 다섯째,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인애와 정의가 지배하는 국제 질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인애와 정의가 지배하는 피조물 전 생태계 공동체다(사 11, 65장).
    
따라서 하나님나라 운동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한 개인의 부단한 인격 갱신과 하나님나라의 질서에 근접하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중단없는 사회변혁 운동을 내포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감화 감동으로, 혹은 하나님의 강력한 부름에 응답한 개인들의 복음 영접과 회개 운동이다.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 모두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복음 선포를 통해 복음 영접과 회개를 동시에 요청했다. 개인의 믿음과 회개가 하나님나라 운동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나라의 질서에 편입되려면, 개인이 하나님나라의 도래의 현실성을 인정하고, 즉각 하나님 없이 살던 때의 삶을 전적으로 혁파하고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 없이 살던 때는 돈과 권력, 부동산과 동산, 인맥과 학맥, 종교적 열심과 세습적 상속 등이 구원과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세상적인 토대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다. 그래서 그것들을 버리고 나사렛 예수가 전파하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순복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을 믿고 회개한 시민들이 많아지면 사회구조적 변혁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로마제국의 콜로세움 검투사 경기장이 사라지는 역사가 이런 진실을 잘 예증한다.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은 주후 72년에 유대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초토화했던 베스피안 황제가 짓기 시작하여 400년 이상 로마제국의 대중오락장으로 성황을 누렸으나 주후 500년경에는 사실상 용도 폐기되었다(523년경 마지막 검투 경기 기록). 그렇게 된 이유는 로마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로 바뀌면서 검투사 경기가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의 원형경기장 2층의 베스피안 황제 유물 전시장에 걸린 해설문의 분석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 사회의 구조악을 해체하는 데 개인들의 자각적이고 의식 있는 조용한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일화다. 초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콜로세움 경기장 안 가기 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신앙 고백상과 가치 지향 자체가 잔인한 동물 학대, 전쟁 노예 학대, 잔악한 살인 경기와는 상극이었다. 기독 청년들 개개인의 사사로운 소비 행위, 내밀한 윤리․도덕적 결단 등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독교인들의 내밀하고도 자발적인 결단이 축적되어야 비로소 한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를 표방하는 문화가 생겨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력에 충실한 신앙생활만 해도 한국의 대중문화를 어느 정도 순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40여 일의 사순절 기간이나 종교개혁 주간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절제와 금욕을 실천한다면 그 기간 동안에는 영화사들이 자극적인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흥행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과도한 육류 소비가 줄어들 것이다. 이것을 통해 기독교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를 세상에 널리 공포할 수 있을 것이며, 절제와 겸손, 자비와 나눔의 기독교 문화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나라 운동은 개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사회 관습, 제도, 법, 그리고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성경적 진리와 일치시키는 사회구조를 만들어가는 운동이어야 한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한 사회의 운영 원리를 성서적 정의와 공평, 인애와 자비의 원칙에 수렴시키는 운동인 것이다. 가령 먼지가 가득 찬 체육관에서 성실하게 운동하는 개인을 생각해 보자. 성실하게 운동하는 것은 건강에 좋은 일이나 먼지가 가득 찬 체육관에서 막무가내로 성실하게 운동하면 할수록 건강에 해롭다. 먼지가 가득 찬 체육관 시설과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개인의 건강 증진은 어렵다. 한국사회가 부동산 투기로 재테크를 하거나 온갖 편법과 탈법, 위법과 불의로 토지를 매입하여 부를 구축하는 틀을 바꾸지 않고 개인의 양심만 세차게 담금질해서는 한계가 있다. 마약 밀수업 조직에 뛰어든 조직폭력배가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그 조직의 목표 자체가 반사회적이라면 그의 성실한 조직 생활은 반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나치 체제가 흉악무도한 악의 왕국이었기에 그의 지휘 계통에 따라 성실하게 공무를 수행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행동 자체가 악의 실행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듯이, 우리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의 구조적 악과 불의를 해소하지 않고는 개인의 윤리적 청정화만 강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 청년들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개인의 양심을 더럽히고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드는 사회 운영의 틀 즉 법, 제도, 관습, 심지어 가치관까지를 바꾸고자 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하나님나라 운동은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 환경을 지키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이 하나님나라 운동의 일환일 수가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부근의 한강 상류는 서울 시민이 식수를 채취하는 1급수 수원지다. 따라서 이곳의 농촌 마을은 농약 사용이 금지된 지역이다. 농약 대신에 오리가 물이 찬 논 사이를 오가면서 벌레를 잡아 병충해를 막고 있다. 그런데 인근 지방자치 단체들이을 탐낸 러브호텔 건축을 무분별하게 허가해 생활 폐수를 배출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정부가 시도하는 4대강 정비 계획에 따르면 이 유기농 지역도 인위적인 제방 구축 등의 이유로 시멘트 구조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소수의 생각 있는 시민들이 팔당 수원지를 보호하기 위해 관련 법규를 고치려고 하고, 수원지 파괴 오염 행위를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역부족이다. 이런 경우 기독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실로 다양하다. 해당 지자체장과 의회를 찾아가 항의하고 주의를 진작시키는 일, 관할 국회의원 사무실에 전화하고 관련 자료를 보내는 일, 이런 사회적 영향력이 큰 쟁점을 언론에 보도하는 일, 그리고 그 수원지를 보호하기 위해 도보로 순례하는 퍼포먼스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기독 청년들은 이런 사회적 활동의 신앙고백적 근거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생명 가치가 특정 사기업의 단기적 경제적 이익보다 훨씬 더 소중한 하나님나라의 본질적인 가치임을 믿고 생명의 강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특정 기업의 재개발 이익보다는 자국민의 생명권과 주거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공평과 정의에 보다 더 가까운 정부 정책이다. 용산 참사는 상대적으로 힘 약한 개인들을 희생시키고 기업이나 부동산 재개발 업자의 배타적 이익을 훨씬 우선시한 반기독교적인 정부가 일으킨 참사인 것이다.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추동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발적이고 자기희생적인 헌신 운동이다. 그것은 성령의 감화 감동을 덧입은 하나님 자녀들에게 위탁된 운동이다. 그것은 정치권력을 휘둘러 타인의 의지를 복속시키는 현실 정치 운동이 아니다. 유다의 예언자 예레미야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고도의 민중 자치적․ 자율적인 계약 공동체가 형성된다.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강제적 율법 준수를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은 인간의 어떤 시민적 법적 강제가 요구하는 것을 훨씬 초월하는 자기희생적인 봉사를 할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성령의 감화 감동에 사로잡힌 120문도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유재산을 팔아 가난한 형제자매들의 생존권을 옹호해 준다. 그 결과 아무도 핍절한 사람이 없는 공동체가 탄생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의 자발적이고 자원적인 물적 희사로 유지되는 공동체적인 삶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다. 한 지체가 다른 지체의 불편과 고통을 자동적으로 공감하고 체휼하는 완벽한 공동체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이상 사회의 표본이다.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의 삶이야말로 육법전서로 대표되는 법적 강제력으로 유지되는 세속 왕국을 거룩하게 해체하는 참 대안 사회, 곧 하나님나라라고 본 것이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은 바로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이고 자원적인 십자가 순종을 재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계명의 금지 조항이 요구하는 윤리적인 기대를 상회하는 사랑과 공의의 능력을 발휘한다(롬 13:8). 이처럼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한 기독 청년들의 삶은 하나님의 감미로운 생명력 넘치는 통치가 구현되는 현장이어야 한다. 약간 더 의로운 삶을 살아서는 다른 사람의 불의를 고칠 수도 없고, 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혁시킬 수도 없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 가신다는 말이 맞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율법 요구에 복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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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 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무신론의 두 전선

몇 해 전 옥스퍼드대학교의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쓴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이라는 책이 한국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진화생물학자인 그의 책은 초월적 인격신을 철저히 부정하고 조롱한다. 그는 서구 계몽주의의 무신론자들이 개진했던 논거들을 저널리즘적인 용어로 잘 정리했으나 아직까지 인류사에 정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 무신론을 간과하고 있다. 그 책에서 다룬 무신론보다 훨씬 더 해악스럽고 무서운 무신론을 소개하는 책이 있다. 성경이다.

성경에는 정말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고도 그 면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눈을 촉범한 자들에 대한 탄핵으로 가득 차 있다(사 3:8). 그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가족적 친연성(親緣性)을 느낀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경제적 악법들을 제정하고 집행하여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자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종교 권력자들이다. 오늘날 사회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 무신론자들은 하나님과 가족적인 친연성, 혹은 친족적인 유착을 느낀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교 권력, 정치권력, 그리고 부당하게 얻은 경제적 기득권을 휘두르는 자들이다. 그중에서도 성직자들은 직업적으로 가장 교묘하게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기 쉬운 자들이다.

구약성경에는 무신론 혹은 무신론자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창세기 20장에는 ‘그랄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11절). 이 말이 구약적 의미의 무신론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태도가 무신론이다.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과 지주들, 제사장과 예언자들은 스스로를 하나님과 아주 가깝다고 간주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으므로 무신론자들이었다(사 1:11~15; 29:13). 구약성경이 말하는 무신론은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상감이나 외경이 사라진 태도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구약의 무신론은 어떤 철학적 인지 행위라기보다는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고 악행을 범하는 도덕적 무감각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었다(시 14:1; 94:1~11). 신약성경에서 무신론자를 의미하는 단어 ‘아데오이’(ἄθεος)는 에베소서 2:12에 처음 나온다. 이 말은 인격적인 한 분 하나님 야훼를 모르고 사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대면한 무신론은 매우 현대적인 개념이다. 서구에서는 18세기부터 아브라함이 믿었던 유일 인격신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무신론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후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무신론의 논거들은 많으나 요약하면 다섯 가지 정도 된다. 첫째, 도덕적 무정부 상황이다. 악의 범람으로 좌절당하는 세계는 전능하면서도 선량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둘째, 일관성 없는 신의 계시들이다. 신의 대리자들이라고 하면서도 신의 이름으로 반문명적 전쟁을 일삼는 사태가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든다. 신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과 기독교 문명권의 악행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셋째, 신 관념의 심리학적 환원주의 혹은 인류학적 환원주의다. ‘신’은 인간의 유아기 의식에 생긴 강박관념이라고 보는 프로이트적 환원주의와 인간 의식의 소외 현상으로 생겨난 심리적 투사물이라고 보는 포이어바흐의 인류학적 환원주의다. 넷째, 신은 지배 집단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영속화하기 위해 만든 보조 정치경제학이라고 보는 사회학적 환원주의다. 마지막으로 진화론적 생명 창조 모델로 인해 생긴 신 무용론이다. 신 없이도 모든 생명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사종교적 우주 진화론이나 생명 진화론이다.  
   
오늘날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교회 내부로부터 자생하는, 즉 하나님의 친족권에서 발생하는 성경적인 의미의 무신론자들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근대 계몽주의 이후의 무신론자들의 이중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들의 도전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기독 청년들의 신앙을 근절시킬 수 없다. 오히려 이 무신론적인 도전에 응전하다보면 기독 청년들의 신앙은 깊어지고 성숙해질 수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서구 사회에서 만개한 계몽주의적 무신론의 쇄도에 대비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자생하는 더 치명적이고 해악스러운 무신론자들의 도전에도 응전해야 한다. 역사 속에는 이런 이중적인 위기에 처했던 무수한 신앙인들의 분투가 있다. 독일의 신학자요 목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의 신학

한국 기독 청년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본회퍼의 모습은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해서 처형당한 순교자의 그것이다. 그는 1933년에 정권을 잡고 독일 전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당 체제에 대해 협력적이거나 적어도 순응주의적인 독일 개신교의 대세에 크게 반발했고, 박해와 살해 위협 속에 살아가던 독일 거주 유대인들의 해외 도피를 돕기 위해 적극 활동했다. “미친 운전사가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운전사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나의 과제이다”라는 말은 우발적인 의기나 의협심에서 우러나온 생각이 아니라 그의 신학적 사유의 귀결이었다. 당시의 보통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주장하시기에 히틀러의 등장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루드비히 뮐러(Ludwig Müller) 감독이 중심이 된 ‘독일 기독교인 연맹’은 히틀러의 나치 이념을 찬양하는 치욕적인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스도는 히틀러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 (중략) 모든 민족에게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도 영원하고 특별한 종류의 법을 주셨다. 이 법은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와 그에 의해 이룩된 국가사회주의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중략) 독일 민족을 위한 시대는 히틀러 안에서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히틀러를 통해 참 도움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독일 기독교인 연맹’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어떤 우연도 일어나지 않기에 히틀러 체제를 하나님나라의 대행자라고 믿고 그것에 적응하려고 했다. 이러한 독일 개신교회의 대세에 거슬러 본회퍼는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했다. 본회퍼는 하나님은 역사 속에 들어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형이상학적 영역에 세워진 보좌에 앉아 역사를 감찰하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에 참여하여 고난을 자취하고 피해를 당하는 자리까지 내려오시는 참여적인 하나님이다. 그는 서구 계몽주의가 주창했던 무신론을 맞받아치는 성경적인 의미의 세속 신학, 즉 종교성 없이도 표현되는 기독교 신앙을 내세웠다. 본회퍼는 ‘하나님 없이(ohne), 하나님 앞에서(vor), 하나님과 더불어(mit)’ 사는 삶을 주창했다. 종교성 없는 기독교, 이원론의 호위를 받지 않고 전통적 기독교 유신론의 기득권 없이 세상 한복판에서 기독교 신앙을 그대로 실천해 내는 지극히 차안적(此岸的)인 기독교를 주창했다. 
    
이런 주장은 그의 생애 후기 즉, 그가 나치에 의해 투옥된 1943년 이후에 쓴 옥중서신들에서 단편적으로 개진한 사상이었기에 온전한 신학 담론으로 성숙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 신학은 1960년 미국의 ‘신 죽음의 신학’, ‘세속화 신학’의 원천으로 인용되거나 인증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크 엘룰 등을 비롯해 대부분의 본회퍼 연구가들은 ‘신 죽음의 신학’이나 ‘세속화 신학’이 본회퍼 신학의 본질을 왜곡했거나 과도하게 단순화했다고 비판한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과 관계없다는 주장, 하나님이 하나의 문화적 가공물이 되었다고 보는 입장은 그의 신학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본회퍼의 단편적 서신들을 통해 그가 내세운 종교성 없는 기독교에 대한 착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성 없는 기독교는 이 덧없는 세상을 떠나 저 영원한 천국으로 이동하는 구원을 약속하는 기독교가 아니라, 육신을 입고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초월적인 하나님을 모방해서 이 세속 사회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기독교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

첫째,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다. 1943~1944년의 옥중서신들에서 본회퍼는 성인이 된 세상에서 교회와 기독교가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한 질문들을 제기했다. 본회퍼는 테겔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을 때 신학과, 차안성과 구체적 행동의 관계를 급진적으로 탐구했다. 본회퍼는 1944년 4월 30일에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보낸 한 서신과 그 후에 쓴 서신들에서 종교성 없는 기독교를 개략적으로 기획했고 하나님에 대한 세상적인 신학 담론을 착상했다. 본회퍼에 따르면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이 세상 안에서만 의의가 있다. 그가 보기에는 ‘순전히 피안적인 하나님’은 오로지 제도권 종교의 본질적 요소일 뿐이었다. 그는 동시대의 기독교가 내면으로 침잠하는 기독교로 전락했고, 개인적 의식 영역으로 퇴각해 버려 형이상학으로 변질되었다고 진단했다. 또한 동료 죄수들 안에서 2차 세계대전이 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어떤 대단한 종교적 각성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며 자율적인 인간들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한계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기도마저도 하지 않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는 인간적인 약함과 죄가 만연한 상황에서 인간을 도우실 수 있는 초월적인 해결사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진단했다. 본회퍼는 인간이 처한 한계상황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자리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비판한다. 그런 하나님 개념은 어차피 세속화된 인간들에게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본 것이다. 세속화된 인간들에게는 심지어 죄와 죽음도 진정한 한계상황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을 본 것이다. 여기서 현대인들을 영적으로 기습하여 다시금 하나님께로 이끌어오기 위해서 오히려 종교성 없는 기독교가 출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난 1900년간 서구 역사에서 덧입힌 형이상학적인 규정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본회퍼가 종교를 부정적으로 본 이유는 바르트의 영향 때문이었다. 본회퍼는 종교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구원받으려는 인간의 욕망이 만든 인간 문명의 가공물이라고 규정했다. 종교는 이 세상을 덧없는 곳으로 간주하고 구원이란 더 실재적이고 영원한 형이상학적 영역으로 이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종교가 가장 강조하는 하나님 이미지는 전지전능한 해결사(Deus ex machina)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이용해서 인간에게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참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자기 개방, 말 걸어오심, 그리고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심에 대한 응답이다. 
   
이처럼 본회퍼는 인간 역사가 ‘작업가설로서의 하나님’을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즉 전통적 기독교 유신론이 말하는 하나님이 이제는 과학이나 정치학 심지어 도덕(종교와 철학)이 그 고유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요청했던 가정으로 더 이상 쓰임받을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 근심하는 영혼, 즉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종교적 권위들이 모든 권리를 주장했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대신 ‘궁극적인 정직’으로 살아가는 길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이제 철든 성인(成人)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성인’의 삶은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는 삶이다(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London, 1971], 362).
   
이와 같은 본회퍼의 ‘하나님 없는’ 삶에 대한 주창은 근대 계몽주의가 조성해 온 반기독교적인 무신론에 대한 신학적 고투가 담긴 응전이었다. 근대 서구의 무신론은 천상 세계의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이 이 세계에 대해 갖고 있다고 믿어진 기득권을 부정한 것이다. 칼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현대의 인문주의적․과학주의적 사고가 종합한 이런 무신론이 본회퍼에게서 전혀 다른 기독교적 응전을 받은 것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무신론은 도덕적 무정부주의나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다운 인간의 현실 참여적, 고난 자취적인 행동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는 영지주의적 현실도피의 구원 관념을 극복하고 이 세상을 가득 채울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위해 기독교인들이 짊어져야 할 성스러운 책임감을 부각시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입각해 실천의 의무를 제고시키는 실천 담론인 것이다. 본회퍼는 하늘로부터 땅으로, 저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초월로부터 내재로, 관념으로부터 현실로 ‘내려오셔서’ 초월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기독교인들이 철든 성인처럼 세상 경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는 모든 이원론적 종교를 폐기하고 인간의 성숙과 책임감을 강조하는 신학적 언명이었지, 하나님의 존재 폐기를 의도하거나 암시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책임을 방기한 채 아무런 행동이나 현실 참여도 없이 노예적 종교 근성으로 하나님만 의존하려는 신앙을 질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지 말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악으로 치닫는 세상과 대결하고 그런 세상을 변혁하는 데 앞장설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둘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은 이기적인 자아를 하나님의 심판과 다스림에 맡김으로써 이웃과 현실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 사는 삶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타자를 위한 삶, 현실 참여, 연대성의 경험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1928~1929년 미국 월가(Wall street)발 세계 금융 위기와 공황 앞에 아무런 신학적 분석과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 교회를 보고 본회퍼는 충격을 받았다. 세상의 필요에 무감각한 교회와 신학, 종교의 거적더미 아래 그리스도를 묻어놓은 교회를 보고 좌절했던 것이다. 그는 1930년 미국 뉴욕의 라인홀드 니버 밑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기 위해 유니온 신학교로 갔다가 흑인 친구 프랭크 피셔(Fisher)를 만나 신학적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을 한다. 그는 1년 정도 흑인 할렘가의 아비씨니언침례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이 과정에서 검은 그리스도가 열광적으로 전파되는 현장과 소수자들이 고통받는 불의한 현장을 목격했고, 교회가 참된 공동체의 평화를 창조하는 데 전혀 무기력하고 서툰 것에 실망했다. 그는 아래로부터, 압박당하는 자의 관점에서부터 사물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획득했다. 몇 마디 자구나 말에서 그치는 신학에서 현실에 상관성이 있는 실천적 신앙 사고로 급격하게 전향했다고 고백했다. 
   
그가 말하는 실천 지향적 기독교 신앙은 시민적 용기(Zivilcourage), 정직(Ehrlichkeit), 사회공동체의 희생자인 기층 민중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을 포함한다(Dietrich Bonhoeffer Werke, ed. Eberhard Bethge u.a., Kaiser[1986~1999], 8, 33~34). “행동 없는 기대와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관망은 결코 기독교 신앙의 태도가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경험들이 우선이 아니라 형제의 삶에서 일어난 경험들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한 행동과 연대로 이끈다.”

하나님과 더불어

셋째,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은 하나님의 성육신, 즉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공동체적 기독교인의 삶을 의미한다. 본회퍼 신학의 핵심은 땅에서 공생애를 펼치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세상이 화해한 곳이다. 본회퍼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그의 현존을 드러내시다가 인간의 폭력 사정권까지 들어오셔서 급기야 고난받는 하나님이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성육신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이상 어떤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과 세상을 별개의 영역으로 구분한 채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루터의 두 왕국론에 대한 암묵적인 공격이었던 셈이다. 그는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인 경건을 강조했고 그 경건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모방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세상 속에서의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인적 삶’을 강조해 천국과 세상의 이원론에 기반을 둔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기독교 문명권이 일으킨 두 차례 세계대전과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사건은 기독교가 외치는 형이상학적 영역의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무신론을 확산시켰다. 2차 세계대전이 몰고 온 이 신학적 대파국에 본회퍼는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담론으로 응전했다. 그는 신의 본질에 대한 규정에 치중한 재래의 서구 신학을 비판하고 신의 행동을 문제 삼았다. 신이란 누구인가가 아닌 어떤 행동이 신의 행동인가를 물었다. 그리고 타자 지향적인 삶, 고난을 자취하는 삶이 신의 행동이라는 답을 얻었다. 본회퍼는 타인을 위해 고난을 자취하는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모방하는 것이며 자아 초월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본회퍼는 영이신 하나님이 육체적 인간이 되어 오만한 무신론적 권력자들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자들의 대열에 끼어 참여한 것 자체가 형이상학적 신의 자기 초월로 보았다. 신의 ‘초월’은 세상과 자신을 무한하게 이격시키는 초월이 아니고, 무기력과 전능성이 은닉되고 유보된 채 악의 피해자들의 자리로 ‘내려서는’ 초월이다. 완전한 신이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  그것도 인간이 범한 악행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신의 자기 초월이다. 본회퍼는 재래적인 서구 신학의 파산을 초래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신(神) 다운 신이 없어진 시대, 신이 죽어 버린 시대, 무종교 시대, 무신론 시대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동안 서구 신학이 강조했던 전지전능하시며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많았던 그 신이 죽은 것이다.

본회퍼가 참 신이라고 고백한 신은 서구의 기독교 유신론이 주창해 온 신과는 달랐다. 로마가톨릭교회나 제도권 교회의 종교 권력을 갖고 세상을 구원하려고 했던 신과는 전혀 다른, 전능성이 유보되거나 억제되어 있는 무력한 신이었다. 사람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냄새나는 발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동정하기 위해 자기 몸을 구부린 겸손하신 신이었다. 본회퍼가 보기에 이 세속 사회로 초월하신 그 신은 종교 권력자들인 사제 집단이나 화려한 교세를 자랑하는 군중이나 건물 안에 현존하시지 않는다. 가장 비종교적인 인간의 실존 상황에 와 계신다. 제도 교회가 제공하는 구원은 꿈도 꾸지 못하는 죄인들, 매주 성전 출입을 통해 하나님의 일상적 축복도 누릴 수 없게 배제된 자들의 한복판에 와 있다. 예수가 창녀와 세리, 죄인들의 식탁에 내려온 것 자체가 재래적 구원의 길의 시효가 종료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퇴각해서는 안 되고 이 세상 안에서 행동할 의무를 지닌다. 기독교 신앙을 구성하는 두 요소는 정의의 실현과 신적 고난의 감수이기 때문이다(Edward Craig, Routel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835).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려면 무신론적인 세상의 손아귀 아래서 하나님이 겪고 있는 고난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하나님이 무신론적인 세상에서 모욕당하고 있다). 이 사상의 핵심은 동정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하나님만이 인간을 도우실 수 있다는 진리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능력을 갖지 못한 하나님이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더불어’의 신학은 더 이상 안셀름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이나 기독교 유신론을 의지하지 않는다. 계몽주의 이후의 현대적 무신론들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프란시스 쉐퍼나 존 스토트가 개진하는 기독교 변증의 관념론적인 정향도 초극할 수 있는 실천 담론이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앞에서 한가한 인문주의적‧과학주의적 무신론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의 친연성을 내세우는 지상의 권력자들과 그들의 동맹 세력인 오만한 무신론도 패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론

본회퍼 신학의 중심 주제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며 그 안에 정초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의 공동체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세상과 연대하도록 위탁된 공동체다. 본회퍼의 신학은 그 자체의 내성적(內省的)인 방향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설명할 때와 같이 군데군데에서 신비주의적 특징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실천의 고리를 상실하거나 놓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한복판에 현존하신다. 교회는 인간적 가능성이 부서지는 곳, 즉 한계상황에 서 있지 않고 마을 한가운데 있다”(Brief an Eberhard Bethge vom 30. April 1944 in Widerstand und Ergebung; [Gütersloher Verlagshaus, 1978], 135). 그래서 본회퍼는 종교적 방법으로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려는 재래식 변증을 버리고 인간과 세계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받아들인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우리는 성실할 수 없다”(1944년 7월 16일). 본회퍼는 이런 자신의 진술이 단순한 무신론 옹호 진술로 오해당하지 않도록 ‘신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의 예를 들어준다. “신은 자기를 이 세상에서부터 십자가로 추방한다. 신은 이 세계에서는 무력하고 약하다. 신은 무력하고 약한 변경에 스스로를 추방함으로써 자신이 구원할 인류와 함께 있고 인류를 도와준다. 그리스도가 그의 전능성이 아니라, 그의 연약하심과 고난받음을 통해 인류를 도와주신다는 진리가 마태복음 8:17에 아주 분명히 나타난다.”
 
본회퍼가 성숙한 세계를 받아들인 것은 동시대의 무신론적 정황에 동조하거나 동화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성인의 나이에 도달한 세계가 그 성숙에 걸맞게 그릇된 하나님 관념을 일소시키고 … 성서가 계시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그 관점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1944년 7월 16일). 이처럼 본회퍼는 이 세상에 ‘종교성 없는 기독교’의 도래를 착상하고 기획했으며 전통적인 유신론의 한계를 넘으려고 했다. 계몽주의적 무신론들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기독교 신앙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정초하려고 했다. 그가 비판한 종교는 이원론을 먹고사는 사제 계급, 종교 권력, 사회의 상부구조와 일체를 이루는 구원 판매소 같은 권력 집단이었다. 그 권력 집단으로서 종교는 분명히 순기능을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개인주의적 구원을 상품으로 팔아 천국에 안전한 처소를 마련하려는 투자자들을 모집하는 협잡 세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많은 현실 기구요 세력이었다. 그 종교는 항상 천국과 세상, 성과 속,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몽롱하고 애매한 형이상학적 신학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다.

본회퍼가 내세운 비종교화된 하나님은 세상 한복판에서 활동하고 계시며 사건들 속에 계시다. 본회퍼는 성인이 된 인간, 강하고 무종교적인 존재가 된 현대인을 일단 인정하면서 무신론적인 세계마저도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의 것이라고 보는 점에서 세상을 긍정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종교성 없이 세속적으로 하나님, 교회, 예배 혹은 기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기독교의 출현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신학 담론과 신앙 실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를 더 이상 구체적으로 보여 주지는 못했다.

본회퍼의 사상은 1924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의 기독교 문명권이 대파국을 맞이할 때 형성된 신학이었고, 우리 한국 기독 청년들이 볼 때는 아주 유럽적인 문제 의식에 응답한 신학이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계몽주의 단계에 접어들지 못한 종교적 기독교만으로도 기독교가 부흥하고 있다는 외양을 주는 사회다. 따라서 본회퍼의 문제의식을 곧장 한국교회 맥락에 도입하면 과도하게 앞서간다는 인상을 풍길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본회퍼의 신학에서는 한국의 복음주의적 기독 청년들이 보기에는 아쉬운 대목들도 발견된다. 첫째, 본회퍼의 신학에는 바울 서신의 대속론적 기독론이 현저하게 약화되어 있거나 주변화되어 있다. 또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하고 아울러 기독교적인 실존을 연대와 고통 참여 등 고도의 윤리적 명제로 정의함으로써 그런 기준에 미치지 못한 채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하는 절대적으로 연약한 많은 신자들의 자리를 없애는 것처럼 보인다. 공관복음서에는 제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귀신 들렸다가 나아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귀환형 신자들도 있지 않은가? 세상과의 연대를 이루지 못하고 그야말로 예수의 은혜에만 호소하고 의존하는 십자가상의 강도 같은 자들도 있다. 종교적 기독교가 가진 폐해를 지적하고 경계하되 종교의 폐기를 주창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본회퍼의 신학 담론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셋째, 교회와 세상의 관계성에 대한 규정이 더욱 엄밀하게 발전되지 못한 점, 즉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해야 할 과업만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바르트나 불트만의 초기 신학, 위기 신학자들이 그토록 강조했던,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결단해야 할 상황에 대한 분석이 미흡해 보인다는 점이다. ‘성년이 된 세상’이라는 개념도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인 착상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회퍼의 신학 담론은 한 시대의 중심적인 신앙 주제들을 갖고 분투하는 기독 청년들에게 아주 신선하고 생산적인 자극제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사랑의교회’의 천사들에게 보내는 편지-메가처치와 사랑의교회

 

*신광은 목사「메가처치논박」 저자, 열음터 교회 담임.

 

1. 들어가는 말

 

사랑의교회의 교회당 건축 문제 때문에 포럼이 열렸다. 일개 교회의 건축 문제 때문에 한국교회의 이목이 집중되는 포럼이 열리다니, 참 대단하다. 이것은 분명 사랑의교회가 한국 개신교회 내에서 가지는 상징성과 대표성 때문일 것이다. 우선 먼저 나는 사랑의교회가 지난 30여 년간 이러한 모습으로 한국 개신교회 내에서 자리매김해 온 점에 대해서 사랑의교회 모든 형제들과 옥한흠 목사님, 그리고 오정현 목사님께 경의를 표하고 싶다.

 

사랑의교회가 집을 짓는단다. 왜일까? 공간이 부족해서다. 사랑의교회는 여러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대지만 그건 화려한 수사일 뿐이다. 새 시대니, 역사적 사명이니, 땅 끝 선교니, 민족을 섬긴다느니 하는 것들은 미사여구일 뿐이고 설득력도 별로 없다. 사랑의교회가 건축을 하려는 가장 큰, 그리고 가장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절대적으로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도 사랑의교회의 형편을 조금 알고 있는데 사랑의교회는 정말 공간이 부족하다. 이 점에서 사랑의교회의 건축은 공간이 별로 부족하지도 않는데 턱없이 큰 교회당을 지어놓고 빈자리를 채우라며 교인들을 닦달하는 일부 몰지각한 교회의 경우와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사랑의교회는 정말 건물이 필요해서 - 물론 얼마나 크게 짓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 건축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2. 사랑의교회는 메가처치다.

 

내가 보기에 이번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는 이미 한국 교회에 만연해 있는, 그리고 온 세계에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번져가고 있는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관점으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메가처치 현상은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대단히 독특하고 새로운 현상이다. 2,000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한 번도 전례(前例)를 찾아볼 수 없었던,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며, 전혀 새로운 현상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메가처치 현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 새롭다는 말인가?


 

먼저 과거 어느 시대에도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지역교회, 곧 메가처치(Mega-Church)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현대의 메가처치의 특징은 과거와는 다르게 성장의 한계가 없다. 한 마디로 무한히 성장하는 교회다. 문제는 이러한 교회가 일반화되었으며, 모범적인 교회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큰 교회만이 아니라 작은 교회도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교회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무한 성장이 가능한 ‘상황’ 가운데 있으며, 무한 성장이 가능한 ‘조건’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수단’을 소유”하게 되었다. 때문에 모든 교회는 메가처치 DNA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약 5%내외의 메가처치와 거의95%에 달하는 잠재적 메가처치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로, 대부분의 교회와 목회자는 메가처치를 만드는 것을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구령의 사역이며, 세계 선교에 동참하는 일이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는 점이다. 메가처치가 성서적, 신학적,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도무지 메가처치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교회는 무한히 성장하는 것이 옳고 건강하다는 생각이 한국 교회를 사로잡고 말았다. 그래서 모든 교회가 끝도 없는 성장을 향해 줄달음질을 치고 있다. 잠재적 메가처치는 메가처치를 지향하고, 메가처치는 슈퍼 메가처치를 지향하고, 슈퍼 메가처치는 킹슈퍼 울트라짱 메가처치를 지향한다. 한도 끝도 없이 성장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 거의 미친 수준이다. 바로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무시무시한 광풍의 정체다.

 

사랑의교회측은 공간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교회당을 건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사랑의교회가 메가처치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왜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는가? 그만큼 교회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왜 건축을 하려는가? 더 크게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사랑의교회는 자그마치 45,000명이나 출석하는 슈퍼 메가처치가 되었다. 그런데 공간이 부족해서 더 성장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2,100억짜리 교회당을 지어 성장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킹슈퍼 울트라짱 메가처치가 되려고 한다. 이것이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의 본질이다.


3. 사랑의교회는 변질했는가?

 

교회당 신축을 계획하고 있는 사랑의교회가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혀 있다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옥한흠 목사님과 예전의 사랑의교회를 사랑하는 몇몇 분들은 사랑의교회가 최근 들어 변질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목숨을 걸고 사랑의교회에 제자 훈련을 정착시킴으로써 건강한 교회를 세워 놨는데 후임 목사님이 옥 목사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사랑의교회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최근 옥 목사님의 애매모호한 행보 때문에 이 주장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사실 두 목사님의 스타일이나 지향하는 방향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교회의 성장과 크기에 관한 관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옥 목사님은 맹목적 성장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에 비해 오 목사님은 옥 목사님보다는 교회의 성장과 크기에 대해서 더 우호적이고 관대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두 분의 사역 방향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동의하면서도 나는 옥한흠 목사님 역시 메가처치 현상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다른 모든 교회들처럼 사랑의교회도 처음부터 메가처치의 상황 가운데에 놓여 있었으며, 처음부터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혀 메가처치가 된 교회일 뿐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옥 목사님께서 의도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모든 과정은 옥 목사님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 문제는 옥 목사님이 메가처치 현상을 간과한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의 사랑의교회가 저토록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옥 목사님은 맹목적 성장주의에 대해서는 분명 비판적인 분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교회 성장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옥 목사님은 “양적 성장이 결코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고 단언한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본성상 겨자씨처럼, 혹은 누룩처럼 성장하고 확장된다는 것은 복음서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 ‘믿는 자의 수가 더 많아진다’고 했을 때 그것은 언제나 전체 교회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어느 한 개교회의 성장을 지시하지 않았다. 사실 신약교회에서는 ‘개교회’라는 말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가정 모임이든, 지역 모임이든 언제나 ‘교회’라고 불렀다. 지상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교회만이 존재했으며, 그 교회가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옥 목사님이 말하는 ‘양적 성장’은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 전체의 궁극적 승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물론 그러한 의미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개교회’의 양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양적 성장’이라는 말은 ‘부흥’이라는 말과는 사뭇 다르다. 통상 부흥이라는 말은 구원 받은 무리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는 것과 관계가 있다면 양적 성장이라는 말은 개교회 교인의 수적 증가와 관계가 있는 말이다. 부흥이라는 말이 다소 에큐메니칼한 표현이라면 양적 성장이라는 말은 다소 개교회주의적인 표현이라는 말이다. 즉 양적 성장이라는 말은 개교회가 성장을 위해서 각개전투를 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양적 성장이라는 말 자체는 개교회주의적 상황을 함축하고 있으며, 개교회의 성장을 항한 생존 경쟁을 긍정한다. 때문에 양적 성장은 질적 성장의 상대적 개념이 결코 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개교회주의와 저급한 성장경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언어적 장치일 뿐이다. 불행히도 옥 목사님은 바로 이러한 개교회의 양적 성장을 긍정하고 수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옥 목사님은 제자 훈련을 개별 교회의 성장 전략으로 소개하기까지 한다. 교회 성장에 대한 옥 목사님의 관점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질이 양을 결정하는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질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제자훈련이다. 즉 제자훈련이 교회의 체질을 건강하게 바꾸어 놓고, 체질이 바뀌면 교회는 자연적이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바로 옥 목사님의 교회성장 전략이다. 그는 말한다. “제자 훈련을 해보라. 교회 체질이 ……. 바뀌는 것을 2, 3년 안에 목격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개교회는 옥 목사님의 이러한 권유를 받고 제자 훈련을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 전략으로 이해하며 받아 들였다. 분명한 것은 성장의 약속이 없었다면 그토록 많은 교회와 목회자가 제자 훈련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일 옥 목사님의 사랑의교회 출석교인이 500명을 넘지 않았다면 제자 훈련은 결코 오늘날과 같이 크게 보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의 중요한 기여 중 하나는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유포시킨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이 바로 메가처치 현상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있는 핵심논리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건강하지 못한 개교회의 성장이 문제이지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이 논리는 다시 건강하지 못한 메가처치가 문제지 건강한 메가처치는 도리어 본받아야 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하지만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의 궁극적 승리의 약속으로부터 벗어나 개교회의 성장을 지향하고, 의욕하고, 추구하는 순간 이미 교회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옥 목사님은 깨닫지 못했다.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건강한 성장이라면 그것은 개교회의 성장이 아닐 것이며, 개교회의 성장이라면 그것은 건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은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이 가능할뿐더러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방법론까지 제공해 준 것이다. 즉 메가처치를 이룰 수단과 더불어 메가처치 현상을 아름답게 치장할 수 있는 화려한 장식품까지 제공해 준 것이다.

 

물론 나는 옥 목사님이 얼마나 치열하게 성서와 복음의 요구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의 사랑의교회의 명성과 지위를 가져다주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음도 인정한다. 또한 옥 목사님의 신앙 양심과 목회 철학은 사랑의교회가 맹목적 성장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늘 경계한 것도 사실이다. 이 점에서 과거의 사랑의교회는 확실히 지금의 사랑의교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문제를 바로잡는 데 있어서 옥 목사님은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 도리어 메가처치 현상을 부추기고 변호하는 역할만 했을 뿐이다. 나는 이 점에서 사랑의교회는 오 목사님의 부임과 함께 크게 변질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랑의교회는 처음부터 메가처치 현상 속에서 자란 메가처치일 뿐이다. 지금의 사랑의교회의 모습은 이미 과거의 사랑의교회의 모습 속에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서의 가르침은 명료하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7:1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4.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에 영향을 미친다.

 

1)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옥 목사님은 비록 존경할 만한 정직과 성실함으로 교회 갱신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했지만 메가처치 현상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치명적 오류를 저질렀다. 옥 목사님의 설명에 따르면 교회의 성장은 제자훈련을 통해서 자연스럽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교회 성장이 어느 선에서 멈춰야 할는지에 대해서 옥 목사님은 아무런 언질도 해주지 않았다. 성장만 말하고 성장의 한계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옥 목사님은 결국 무한성장을 향한 길을 스스로도 걸어가고 말았다. 

 

옥 목사님이 성장의 한계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야 말로 치명적인 오류라고 할 것인데, 이는 아마도 그가 교회의 크기를 교회의 본질과 무관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교회의 크기는 그저 가치중립적인 문제에 속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 크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중요한 것은 건강한 성장이지 성장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옥 목사님의 이론에 따르면 아무리 교회가 커도 교회의 크기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교회의 형태는 본질과 동일시할 수 없지만 분리될 수도 없다’고 한 한스 큉(Hans Küng)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크기는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 생명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성장의 한계를 갖는다. 성장의 한계가 없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다.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eider)의 ‘쥐와 코끼리의 유비’에서와 같이 쥐는 쥐의 적정 크기가 있고, 코끼리는 코끼리의 적정 크기가 있는 법이다. 종(種)마다, 개체마다 적정 크기가 다르기는 하겠지만 적정 크기가 있다는 점은 똑같다. 만일 교회가 생명체라면 다소 큰 교회, 다소 작은 교회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무한히 성장하는 메가처치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유기체(organic system)는 개체의 정상적 활동이 가능한 수준까지만 성장하고 그 이상은 성장하지 않는다. 만일 적정 크기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유기체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건강하지 못한 유기체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생명체요, 유기체로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음 두 가지 원리를 인정해야 한다. 첫째는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과 유기적으로 연관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교회의 정상적 기능을 위한 적정 크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한성장은 유기체(organic system)가 아니라 기계적 시스템(mechanical system)의 특성이다. 기계적 시스템의 경우에도 시스템의 안정화와 최적화라는 기준에 맞추어 크기와 시스템 내부의 속성 간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기계적 시스템의 경우 내부의 속성이 크기의 확장을 막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기계적 시스템은 크기의 확장을 위해서 내적 속성을 지속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계적 시스템의 경우는 내적 본성을 지속적인 변형시킴으로써 무한 성장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메가처치의 모습이기도 하다. 즉 메가처치는 교회의 내적 본질을 지속적으로 변질시키고, 희생시켜 감으로써 무한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2) 크기의 영성

 

교회의 크기는 결코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니다. 메가처치에서의 교회의 크기는 한 개인의 의지나 도덕성, 영성을 벗어나 버린다. 그것은 스스로의 구조와 질서,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교회가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거기에 구조와 조직, 질서가 새롭게 추가된다는 것, 그리고 교회가 커질 때 그러한 구조와 질서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지식이다. 교회가 새롭게 획득한 구조와 조직, 질서는 자체의 논리를 가지며,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무생물이고, 인격이 아니라고 만만히 보면 큰 코 다친다. 어떤 개인도 교회의 구조, 조직, 질서 등을 임의대로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현실은 그 반대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월터 윙크(Walter Wink)의 통찰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윙크는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교회의 천사들’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교회의 천사란 날개달린 수호천사가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실체로서의 교회의 실제적인 영성(spirituality)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천사는 교회의 물리적 외형 안에 존재하고 그것과 함께 존재하며, 또한 그 이면에 존재하는 교회의 내면성(interiority)”이라고 했다. 따라서 교회 건물의 크기나 가격, 회중둘 실, 예배 스타일, 권력 구조 등이 교회의 천사, 곧 교회의 영성을 결정하는 요인들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그는 사회 조직이나 구조, 질서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하나의 실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한 그에 따르면 “조직이나 국가에서 규모가 크다는 것은 권세와 가치의 증거다”라는 논리는 사탄의 지배체제의 중요한 가치관이라고 했다. 그런데 ‘큰 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은 정확히 메가처치를 옹호하는 논리가 아닌가. 만일 윙크의 말이 옳다면 메가처치의 천사는 교회의 천사가 사탄적으로 타락한 교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르바 던(Marva Dawn)도 비슷한 관점을 취한다. 그녀 역시 사회 조직과 구조, 질서 등이 발휘하는 강력한 힘을 ‘정사(principality)’와 ‘권세(power)’라는 성서적 용어로 설명하고자 했다. 정사와 권세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회적이고 실제적인 ‘힘’이다. 여기에는 돈, 권력, 인력, 미디어, 테크놀로지, 법과 같은 것들이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정사와 권세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대항하며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로막는 악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한 권세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의 권세는 ‘큼,’ ‘많음,’ ‘강함’이라는 세상 권세가 아니라 ‘작음,’ ‘적음,’ ‘약함’의 권세다. 불행히도 현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세보다는 세상의 권세를 택하고 말았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이러한 던의 주장은 메가처치 현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돈, 권력, 인력이 집중된 메가처치는 그 자체로 타락한 권세이다. 뿐만 아니라 생존 문제 앞에 굴복한 수많은 잠재적 메가처치 역시 세상 권세의 속박 아래 있는 교회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크기와 양이 영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인간이 거대하고 웅장한 것과 마주했을 때 본성적으로 누미노제(das Numinöse)라는 성스러운 감정을 느낀다고 했다. 이 때문에 고대 종교는 피라밋, 스핑크스, 대신전, 동상 등을 세워서 신성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와 비슷하게 반 델 레에우(Gerardus van der Leeuw)도 폴리네시아인들이 평균보다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사과나무를 가리켜 마나(mana) 나무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했다. 이때 마나는 신성한 기운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현대의 많은 크리스천들도 갑자기 크게 수가 불어난 교회를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는 교회’라고 불러준다. 불어난 거대한 교회당을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하고, 회중의 웅장한 회집 장면을 보고 성령의 터치를 경험한다고 고백한다. 여기에는 분명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크기와 숫자를 영성(spirituality)과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때의 영성은 이교적 영성이다. 크기의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과 반대되는 이교적 영성이다.

 

옥 목사님은 크기의 영성을 분별했어야 했다. 그래서 교회의 크기가 자신의 신학과 목회철학의 핵심 키워드인 ‘깨어난 평신도’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은 20세기에 큰 영향력을 미친 평신도 운동과 이를 가능케 한 평신도 신학에 기초해 있다. 평신도 신학의 요지는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용어의 폐기에 있다.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교회 내 2층 구조를 파기하고 만인제사장주의라는 종교개혁적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해 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크기는 불가피하게 교회 안에 대중이라는 평균인으로 들끓게 한다. 또한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담임목사에게로의 권력의 집중, 피라밋 구조로 서열화, 성직자 집단을 대체하는 전문가 엘리트 집단, 관료제, 효율적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등이 요구된다. 결국 메가처치는 군중을 이루는 평신도와 이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전문가 집단으로 이원화되고, 담임목사는 제왕의 자리로 추켜세우고야 만다. 따라서 메가처치 내에서 평신도 운동은 말뿐인 선전 구호로 전락하고 만다. 이 모든 것이 교회의 크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5. 문제의 뿌리는 빈약한 교회론에 있다.

 

옥 목사님이 교회의 크기 문제에 주목하지 못한 것은 큰 유감이나 이 책임을 옥 목사님 개인에게 돌릴 수는 없다. 문제의 뿌리는 옥 목사님도 잘 지적하셨듯이 개신교회의 빈약한 교회론으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옥 목사님은 빈약한 개신교 교회론을 수정하고자 참신한 시도를 하기는 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을 충분히 넘어서지 못한 것이 부족한 부분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1) 개인주의를 넘어서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는 “택자들의 총회”이다. 이러한 정의의 큰 약점은 교회를 개인의 집합으로 보는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 교회의 정의다. 보이는 교회는 ‘택자와 비택자의 혼재된 집단’이라고 해야 맞다. 이러한 교회관은 우리의 시선을 교회 자체보다는 교회 안의 개인에게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에릭 제이(Eric C. Jay)의 말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나 성령과 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개인들의 총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는 개인들의 집합 그 이상의 것이다. 개신교 교회론에 따르면 구원받은 개인들이 모여서 교회가 만들어 진다. 교회보다 개인이 먼저다. 그러나 교회는 개인이 침례/세례를 받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개인이 있기 전에 교회가 먼저 존재한다. 교회는 실체성이 있는 사회다. 

 

교회에 해당하는 에클레시아(ekklisia)는 상당한 정치성을 함축한 회중을 의미한다. 그래서 큉은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제의적이고 종교적인 집회가 아니라 정치적 집회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현저히 뚜렷한 정치성을 지니는 사회다. 로핑크(Rohfink)는 이러한 교회의 사회성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교회는 그 자체가 ‘사회’라야 하고, ‘대립 세계’라야 하며, 하나의 정책이라야 하고, 문화를 가져야 하며, 그 신앙으로부터 사회적이며 미학적인 형식들을 위한 새로운 척도들을 세상 안에 내어 놓아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 안의 개인들이 모여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해나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도리어 교회는 개인보다 선행하는 하나의 실체로서 이 실체가 자신의 전존재로서 기독교 신앙을 표현해 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구조, 질서, 조직, 그리고 크기가 어떠한 것인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헤베르 루(Hebert Roux)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적 관계와 접촉이 성립하기 너무 어려운 도시의 큰 소교구 대부분의 구조 자체의 완전한 변화 없이 실천적 실현이 나타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오늘날 큰 도시의 격렬하고 끔찍한 삶이 만들어 낸 익명과 고립 그리고 거리감, 사회적 조건의 차별 그리고 또 다른 요인들은 그 안에서 ‘공동의’ 삶이 유토피아인 큰 소교구의 실재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헛된 것으로 만든다. 교회는 적은 인원의 집단과 모임도 증가시키면서, 모든 위장된 정신주의의 정체를 폭로하면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현실 영역에 건립하면서,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사람들 각각의 특별한 상황과 필요를 알게 하는 조직 형태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직은 계시를 따르고 동행해야만 하는 것이지 조직이 계시를 선행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기독교 신앙에 합당한 자신의 구조와 조직, 질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메가처치의 태만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메가처치는 교인들에게는 신앙을 실천하라고 하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교인들에게는 제자의 길을 따르라고 요구하면서 자신은 제자의 길을 배반한다. 교인들에게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하면서 자신은 영광의 길을 추구한다. 마치 그 옛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말이다.

 

2) 성육신적 방법론

 

그런데도 메가처치는 도리어 스스로를 변호하며 이르기를, “메가처치는 선교와 구제에 특심이다. 교회가 클수록 선교 사업이나 구제사업에 더 왕성한 참여를 할 수 있다. 메가처치는 작은 교회가 가지고 있지 못한 큰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뻔뻔스럽고 가증한 자기 정당화에 불과하다. 이러한 메가처치의 주장의 이면에는 선교와 구제를 교회 내의 개인이나 부서의 활동으로 보거나, 혹은 교회의 여러 기능이나 활동 중 하나로 보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오해다. 선교와 구제는 교회 내 개인이나 부서가 하는 사역이기에 앞서 교회 그 자체가 하는 것이다. 또한 선교와 구제는 교회의 여러 활동 중 하나가 아니라 교회라는 사건 자체가 바로 선교와 구제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교회는 이미(already) 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또한 교회는 장차(not yet) 임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예표다. 스탠리 하워와스(Stanley Hauerwas)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다. 따라서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종말론적 실체를 자신의 존재(being)로 예시하는 공동체다. 이 책임은 교회 내 개별 신자에게 있기도 하지만 우선 교회 자체에게 있다. 따라서 교회는 자체의 구조와 조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반영해야 한다. 즉 교회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선교와 구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원리를 따르는 성육신적 공동체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는 것을 계시라 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가 완성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완성이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전달자(messenger)임과 동시에 그분 자신이 계시(message)라는 뜻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대로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 자체가 바로 온전한 계시가 주어진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마샬 맥루한(Marshal McLuhan)의 ‘미디어는 메시지(Medium is Message)’라는 유명한 테제에 가장 정확히 일치하는 사건이다. 즉 예수의 성육신은 단순히 계시의 매체(media)일 뿐만 아니라 계시 자체(message)이다. 그리고 바로 이 성육신의 모델이 교회와 신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교회와 신자는 바로 이러한 성육신적 원리를 따라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교회와 신자는 자신의 행동이나 말보다 앞서서 자신의 존재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은 신자나 교회 내 부서에게만 해당되는 원리가 아니라 교회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원리다. 때문에 교회는 복음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복음을 체현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의 구조와 조직, 질서를 통해서 선교와 구제를 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3) 선교를 다시 생각하다.

 

그렇다면 교회가 자신의 존재로 선교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교회는 자신의 구조와 존재로써 복음을 드러내야 한다. 복음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사건이다. 그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 부활이 바로 복음이다. 따라서 교회는 자신의 존재로써 자신을 비워 그리스도 사건을 온전히 증거하기를 힘써야 한다. 교회는 낮은 자로 오심,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심, 십자가의 길을 걸으심,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심, 부활하심 등의 그리스도 사건을 자신의 존재로 나타내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강단에서의 설교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의 사건을 체현하기를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라. 성장 경쟁에서 승리한 텐프로(10%) 메가처치는 무슨 수로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를 찬미할 수 있겠는가? 거대한 부를 소유한 메가처치는 무슨 수로 가난한 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겠는가? 막강한 권력을 소유한 메가처치는 무슨 수로 권력의 희생자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겠는가? 주변의 중소 교회를 먹어치우고 성장을 거둔 메가처치는 무슨 수로 십자가의 희생의 죽음을 나타내겠는가? 모든 교회가 개교회로 뿔뿔이 흩어져 성장을 위한 각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마당에 무슨 수로 메가처치는 막힌 담을 허무시고 만물을 하나로 통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겠는가? 2,100억짜리 교회당을 소유한 교회가 무슨 수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제자도를 전하겠는가? 소가 웃을 일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말한다. “너나 잘하세요.”

 

선교는 교회가 하는 어떤 활동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선교다. 수 천, 수 만 명의 선교사를 땅 끝까지 파송하는 것이 교회의 선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 세상을 섬기는 것이 바로 선교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를 교인들에게 내맡겨 버리기 전에 먼저 자신의 구조와 신학을 통해 세상을 섬겨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메가처치는 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는 말한다. 만일 교회의 구조가 이러한 세상을 섬기는 일을 방해한다면 그 구조는 “이단”이나 마찬가지라고.

 

4) 구제를 다시 생각하다.

 

구제도 마찬가지다. 많은 메가처치는 막대한 돈을 구제사업에 쓰고 있다며 자랑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더 많은 구제를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더 성장해야 한단다. 참으로 가당치 않은 소리다. 물론 그러한 구제라도 그것은 분명 값진 일이다. 그러나 교회가 자신의 직무를 유기한 채 그러한 구제를 한다면 그것은 구제의 세속화를 초래하며, 구제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회사업이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하고야 말 것이다. 따라서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헤베르 루가 말한 대로 구제는 교회의 한 가지 활동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연결된 것이라야 한다. 즉 교회가,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께 굴복될, 장차 올 세상의 예표라면 교회는 돈의 권세를 그리스도께 굴복시키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구제사업보다 선행해야 할 일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먼저 교회 안에서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소유권에 대한 개념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창조 사상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소유권 주장은 근본적으로 반역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소유는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와 함께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은 “돈의 절대 권력이 멈추고 맘몬의 힘이 빼앗김”을 당해야 한다. 돈의 권세는 실상 아무 것도 아니며,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데 어떠한 필연성도 없음을 교회는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도 더 많이 구제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스스로 맘몬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자백일 뿐이다. 돈의 권세가 결박을 당할 때 교회에서 재물로 형제를 돕는 코이노니아는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재산의 나눔은 교회가 하는 자선이나 구제‘사업’이 아니다. 교회가 다가올 새 창조의 예시임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교회의 생명과 본질에 관계되는 일이다. 이것이 참된 구제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교회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곧 자신의 구조와 조직,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가처치는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메가처치는 교회 내의 신자들에게 복음을 살라고 설교할 수 있을지 언정 결단코 자기 자신은 복음을 살아 낼 수 없다. 메가처치가 딛고 서 있는 기초는 교회의 크기와 본질이 무관하며, 교회의 활동(doing)과 존재(being)가 아무 상관도 없다는 정신주의와 관념론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메시지를 잘라 내려고 했던 영지주의와 다를 바 없다. 교회의 크기는 본질과 무관하지 않다. 행함(doing)이 존재됨(being)을 대체할 수 없다. 교회는 먼저 자신의 존재, 곧 구조와 조직, 신학을 통해서 복음을 체현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무척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요더(Joder)의 말대로 ‘효과’가 아니라 ‘신실함’으로 복음을 살아 내고자 노력한다면 결코 메가처치는 가능할 수 없음이 드러날 것이다.


6. 해법을 모색하며

 

1) 문제를 대하는 자세

 

자, 그렇다면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문제 해결에 앞서 먼저 우리는 이 문제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점에서 그런가? 일차적으로, 이 문제는 어느 한 개교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한국 개신교회에서 상징성과 대표성을 가지는 대단히 중요한 교회의 문제다. 그래서 사랑의교회가 어느 쪽으로 결정을 내리든 간에 그 결정은 한국 교회 전체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 의미 있는 결정이 될 것이다. 나아가 한국 교회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대한 결정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신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남의 교회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개교회주의적 태도나, 한 가지 해법만이 존재한다는 기술주의적 태도나, 일사천리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독단적 태도는 옳지 못한 자세다.

 

둘째로, 이 문제는 결코 사랑의교회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사랑의교회의 건축이 결국 사랑의교회가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혀 있는 교회임을 증명하는 슬픈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사랑의교회만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혔는가? 사랑의교회만 교회당을 짓겠다고 하는가? 작은 교회는 건축 마케팅을 하지 않는 줄 아는가? 사랑의교회를 비난하는 교회와 목회자는 의로운가? 물론 사랑의교회는 대표성과 상징성을 가진 교회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책임을 사랑의교회에만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 한국 교회 모두는 이 문제에 연루되어 있다. 정도만 다를 뿐 우리는 모두 공범임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간홌자는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기소하는 무리들처럼의 민재판식으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또 이 문제를 건축을 찬성하는 입장럼의 대하는 입장 간의 대결구도로 몰아가서도 안 될 것이고, 큰 교회와 작은 교회 간의 갈등 문제로 몰아가서도 안 될 것이며, 사랑의교회와 근 중소형 교회 간의 나와바리 다툼으로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이 문제를 대하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한국 교회 모두가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힌 범죄자임을 고백하는 자세라야 할 것이다.

 

셋째로, 이 문제는 어느 쪽으로 결정을 하든지 모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건축을 해도 문제요, 안 해도 문제다. 참으로 골치 아픈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간단하게 평가하고, 손쉽게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사랑의교회 측은 건축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밀어붙여서는 안 될 것이다. 반대로 재고를 요청하는 측에서도 대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무조건 건축만은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나는 감히 제안하는 바이다. 이번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를 시간을 두고 한국 교회 전체가 연합하여 지혜를 모아 해결해 나가면 어떻겠는가?


 

넷째로, 우리는 이번 사건이 한국 교회의, 나아가 개신교회 전체의 보다 근본적 오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옥 목사님께서 정확히 간파하셨듯이 교회론의 빈약함이라고 할 것이다. 옥 목사님은 이러한 개신교회의 근본적 오류에 대한 대안으로 제자훈련을 제시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그 대안은 충분치 못했음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의 경험을 발판 삼아 그의 성패를 정확히 평가하고, 보다 충분하고 철저한 대안이 무엇인지를 모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문제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풀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와 선조들이 저질러 왔던 근본적인 오류를 풀어내는 회개와 돌이킴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두 가지 선택 가능성

 

Alt. 1 : 건축을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사랑의교회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건축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가 전부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사랑의교회 입장에서는 건축을 하는 쪽이 하지 않는 쪽보다 훨씬 쉽고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만일 사랑의교회가 건축을 한다면 결국 사랑의교회는 메가처치 현상에 완전히 사로잡힌 교회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셈이 된다. 결국 사랑의교회는 무한성장을 향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교회요, 암세포와 같이 통제되지 않는 성장(uncontrolled growth) 때문에 스스로의 덩치를 주체할 줄 모르는 병든 메가처치임을 자인하게 된다. 나아가 사랑의교회는 이와 유사한 문제에 처한 교회들을 향해서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모범을 보임으로써 메가처치 전도사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교회는 더 이상 계속해서 한국 교회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사랑의교회는 한국에 있는 다른 많은 교회들 중에 메가처치 현상에 물든 ‘또 하나의 교회’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다른 면에서 사랑의교회는 주목을 끌 수는 있을 것이다. 예컨대, 신축한 교회당이 건축상을 받는다거나, 거대한 규모의 선교 및 구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거나, 멋들어지고 근사한 이벤트를 연다거나, 단기간 내에 빠른 성장을 보임으로써 성장 기록을 경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교회는 더 이상 건강한 교회의 모델로 자신을 내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아마도 2009년을 사랑의교회가 자신의 대표성을 상실한 해로 기록할 것이다. 사랑의교회의 건축을 두고 열린 이번 포럼의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의교회가 가지고 있는 대표성과 상징성을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는 역사의 준엄한 요구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교회는 고작 2,100억 원으로 자신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팔아먹으려고 하고 있다.

 

Alt. 2: 건축을 하지 않는다.

 

만일 사랑의교회가 건축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랑의교회가 건축을 하지 않는다면 사랑의교회는 분명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건축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오면서 가졌던 방향성이 흔들리게 될 것이고 이와 함께 목회자와 교인들이 혼란을 겪을 것은 뻔 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공간 부족의 문제를 다른 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다시 떠안게 될 것이다.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매 주 마다 몰려오는 거대한 규모의 교인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교회당 건축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사랑의교회는 이제 더 이상 교회 성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성장을 위해 매진하지 않는다면 메가처치인 사랑의교회는 이제부터 ‘뭘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교회의 건축 포기 결정은 한국 사회와 교회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역시 사랑의교회는 달라도 뭐가 달라’라는 칭송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메가처치 현상에 물든 한국 교회를 향해서 커다란 경종을 울릴 것이다. 물론 사랑의교회가 한국 교회에서 차지하는 상징성과 대표성은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건축을 포기하는 결정은 불러일으킬 편으로서는 상당한 희생일 수밖에 없으며 대단한 자기 부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기 아이다.


 

이번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랑의교회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분립 개척이나 교인들을 분산시키는 것, 또 건물 임대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분명 사랑의교회를 향한 애정의 표현이요, 참된 교회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의미 있고 나름대로 현실적인 제안이다. 나 역시도 사랑의교회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차라리 이러한 용기 있는 결정을 해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안은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교인들을 돌려보내거나 분산시키기, 혹은 분립 개척 등은 인위적으로 사랑의교회의 교인수를 줄여서 공간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인데, 나는 작은 교회 역시 잠재적 메가처치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에 사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또 건물 임대라는 제안 역시 답이 되지 못한다. 사랑의교회는 이미 충분히 많이 건물을 임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윤리적 성격의 해법은 결국 “왜 우리만 그래야 되는데?” 그리고 “대체 왜 그래야 하는데?”라는 물음에 답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결국 이 문제는 윤리적 문제가 아닌 신학적 문제인 것이다.


7. 제 3의 길 : 교회 일치 선언을 제안하다.

 

1) 메가처치 현상은 개교회주의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문제는 메가처치 현상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는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대한민국 모든 교회가 너나 할 것 없이 무한 성장을 향해 미친 듯이 줄달음질을 하고 있는 마당에 사랑의교회도 끼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메가처치 현상의 뿌리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교회 밖의 사회적 요인이고, 또 하나는 교회 내의 신학적 요인이다. 물론 둘 중에서 신학적 요인이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 가톨릭교회를 보라. 개신교회와 똑같은 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메가처치 현상을 비껴가고 있지 않는가. 이것은 분명 가톨릭 신학, 특별히 견고한 교회론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메가처치 현상을 가능케 한 것은 결국 개교회주의다. 교회의 일치 문제를 보이지 않는 교회에게로 투사해 버리고, 교회 간 연합은 거추장스러운 정치적 야합인양 여기는 풍조가 지난 500년간 개신교회를 휩쓸었다. 결국 남은 것은 모든 교회는 개교회로 존재한다는 개교회주의다. 개교회주의는 세속의 풍조를 막아내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어막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급격한 사회적 변동에 맞서 교회는 아무런 면역력도 갖추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세속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교회 안으로 밀어닥쳤다. 특별히 시장 자본주의의 논리가 교회를 범람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대한민국의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네온 십자가는 개교회주의가 만들어 놓은 한국 교회의 슬픈 초상이다. 1층 편의점, 2층 장로교회, 3층 감리교회, 그리고 지하는 침례교회. 주일 아침이면 교인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 오기 위해서 교회마다 봉고차를 운행하고 이웃 교회 교인들에게까지 소위 전도한답시고 영업의 손길을 뻗는 현실……. 대체 이게 뭔가? 넘치는 목사 후보생들이 아무렇게나 교회를 개척해 놓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개교회주의에 함몰된 교회는 스스로 면역력을 잃어버린 채 교회 밖에서부터 가해지는 세속의 조류에 힘없이 휩쓸리고 만 결과가 바로 메가처치 현상이 아닌가 말이다.


 

얼마 전 미국의 메가처치에서 꽤 오랫동안 원로목사측과 갈등하던 신임목사가 끝내 사임을 하고 근처에다 교회를 개척한 일이 있었다. 새로 개척한 교회는 그 전 교회로부터 차로 고작 6분 거리에 떨어져 있단다. 그런데 한국의 내로라하는 메가처치 목사들이 그러한 교회 분열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단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들인가? 책망은 못할망정 축하라니?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맞는가? 이것이 바울이 그토록 사모했던 그리스도의 몸이 맞느냐는 말이다. 왜 이와 같은 패역한 상황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냥 받아들이는가? 왜 주님 앞에서 이와 같은 패역무도한 죄악을 범하면서도 아무런 감각 없이 모든 상황들을 수용하고 마느냐는 말이다. 

 

메가처치 현상은 결국 개교회주의가 낳은 산물이다. 그리고 개교회주의는 우리와 선조들이 지난 500년간 저질러 온 근본적 오류의 산물이다. 근본적 오류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결국 교회의 일치야 말로 개교회주의를 치유하는 길이요, 메가처치 현상을 잠재울 수 있는 근본적인 해법이다. 물론 교회의 일치가 한국 교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니다.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거룩해져야 한다. 이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일치는 거룩을 향한 첫 걸음인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2) 교회는 하나다.

 

교회 분열과 그로 말미암은 개교회주의는 단순히 윤리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다. 교회가 증언하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시작했음을 증언하는 증인이다. 그리고 교회는 을 의 말 뿐만 아니라 을 의 그리를 통해서 도래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선교의 참된 의미다. 따라서 교회가 만일 을 의 그리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체현하지 못한다면 그의 말은 아무런 실효성도 없어지고 만다.

 

교회가 일치되지 못할 때 교회는 사랑을 증거하지 못하게 된다. 위대한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흔히 지상명령의 근거 구절이라고 알려져 있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새롭게 해석한다. 이 구절은 전도자나 선교사로 나가라는 명령이 아니라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제자를 삼는 방법은 산상설교에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르쳐 온전히 지키게” 하는 것이다. 산상설교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된다. 결국 우리가 지상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랑 계명과 다르지 않다. 요한에 따르면 토라를 대체할 만한 새 계명은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서로 사랑’이 제자됨의 표지가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요13:34-35] 또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고전13:2-3] 따라서 교회 일치에 실패하면 교회는 결코 사랑의 복음을 증거할 수 없다.

 

또 교회가 일치하지 못할 때 교회는 평화를 증거하지 못하게 된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 보내진 양에 비유하셨다. 이는 이리의 포악함에 반대되는 양의 온순함을 강조하시는 표현이다. 제자는 다툼과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 평화를 이루는 양으로 보냄을 받았다. 평화는 도래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대표적인 표징이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샬롬의 나라다.[미4:3] 교회는 그러한 샬롬의 나라를 자신의 존재로 드러내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분리되고 서로 타투고 이기기 위해서 경쟁하면서 평화의 복음을 전할 수는 없다. 사도는 경고한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

 

교회가 일치하지 못할 때 십자가의 복음은 왜곡된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께서 이루신 일의 핵심은 화목과 화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과 세상 간의 원수 관계를 화해시키셨고, 지상의 모든 막힌 담을 허물며 적대적 원수 관계들을 청산하셨다. 그리하여 가장 화해하기 어려웠던 이방인과 유대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건물로 이어지게 되었다.[엡2:14-22] 교회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화해의 역사가 온전히 드러나는 곳으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 통일”되는 곳이다.[엡1:10] 따라서 교회가 일치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아무런 화목도 이루지 못하며, 어떠한 막힌 담도 허물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불일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교회가 일치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선포될 수 없다. 사랑, 평화, 화목은 장차 도래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다. 교회는 지금 여기서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것이 교회가 받은 선교사명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랑, 평화, 화목이 왕노릇하는 공동체라야 한다. 모든 차별과 분리, 장벽이 철폐되는 혁명 공간이라야 한다. 이러한 혁명 공간인 교회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그래서 교회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초대교회는 이것을 실제로 실천했다. 그리고 모든 장벽이 완벽하게 허물어진 지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현시했다. 그리고 외인들은 교회에서 성취되는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화해와 화목을 충격으로 받아 들였다. 이방인들은 급진적 혁명 공간과 해방 공동체를 목격하면서 큰 혼란에 빠졌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될 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교회가 분리되고 일치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세상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할 것이며, 교회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은 아편으로 퇴락할 것이다. 

 

교회가 분열할 경우 교회는 더 이상 참 교회일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합당하게 증언할 수 없게 된다. 바울이 수석 사도 베드로를 호되게 면책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방인과의 식사의 자리에서 슬그머니 도피한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다시 가르는 분리의 행위였으며, 이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하는 배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갈2:14] 같은 이유로 그는 고린도교회의 분열사태에 대해서 그토록 통탄해 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의 분열은 십자가에 대한 배신 행위요 반복음적 행위다.[고전 1~2장]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가 여전히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담대하게 권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세계교회는 하나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키프피아누스(Cyprianus)가 순결주의자 노바티아누스(Novatianus)와 결국 갈라선 이유도 교회의 일치를 포기하는 행위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지는 행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개교회주의로 뿔뿔히 갈라져 서로 경합하고 다투는 한국 교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한국 교회는 스스로 참 교회가 아님을 자신의 전 존재로 떠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3) 어떻게 일치를 이룰 것인가?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의 근원은 메가처치 현상이요, 메가처치 현상의 근원은 개교회주의요, 개교회주의의 근원은 교회의 불일치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은 교회 일치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 일을 이룰 것인가?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물론 이 일은 쉽지 않다. 불가능해 보인다. 꿈꾸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는 주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일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더 이상 지금의 상황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교단 및 교회의 분리, 개교회주의, 메가처치 현상 등을 비판 없이 수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의 패역한 상황에 대해서 분노하고, 비난하며, 결연히 저항(protest)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개신교(protestant)의 정신이다. 

 

셋째로 나는 이 지면을 빌어 한국 교회가 교회 일치 선언을 할 것을 감히 제안하고자 한다. 선언은 어디까지나 말일 뿐이다. 하지만 선언이 충분히 진지하고, 충분히 엄숙하다면 개교회 성장의 추구가 아닌 전체 교회의 성장의 추구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의 물꼬가 트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일에 사랑의교회와 포럼 주최자들이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

 

넷째로 선언에 걸맞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을 제안하고 모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단을 초월한 열린 대화, 성장 경쟁의 종식, 상호 부조 등과 같은 구체적 풀뿌리 에큐케니컬 운동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사랑의교회는 건축에 힘을 쏟는 대신 인근 사방 수 백 미터 내에 있는 교회들과 함께 성장 경쟁을 종식할 것을 선언하고, 그들과 대화하고, 연대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를 통해서 강남땅에 하나님의 샬롬이 임하고, 그리스도의 화해가 임할 수 있는 보다 실제적인 일들을 함께 구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합 모임에서 사랑의교회는 단 하나의 교회로 자신의 위치를 낮추는 일을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일치의 원리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와 만나게 된다. 과연 무정부상태나 다름 없는 지금의 한국 교회가 아무런 구심점 없이 교회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 과연 개신교회는 바티칸 없이 어떻게 보편교회(Catholic Church)의 일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바티칸의 품에 안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정 메가처치가 바티칸을 대신 할 수도 없고, 또 바티칸을 대체할 만한 기구를 새로 결성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W.C.C.로 바티칸을 대신하는 것은 어떨까? 새로 연합기구를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인 듯하다. 한국 교회는 교회 일치를 위해서 일찍부터 많은 수고를 해 온 W.C.C.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협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한국 교회가 필요한 교회 일치는 어떠한 식의 정치적 연합도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일치와 연합뿐이라는 것이다.


 

성령으로 하나 된다는 뜻은 무엇일까? 나는 고린도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자 바울이 제시한 십자가의 연합 전략을 한국 교회가 깊이 묵상하게 되기를 바란다. 고린도교회에는 최소한 네 개의 파벌이 있었다. 아마도 가장 큰 파벌은 바울파였을 것이다. 바울파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유대인 중심의 베드로파였다. 그리고 철학적이고 지적인 성향의 아볼로파와 원리주의적 성향의 그리스도파가 비주류로 자리 잡고 있었다. 바울은 이들 네 파벌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고 있다고 준엄하게 꾸짖은 뒤 네 개의 파벌이 스스로의 정체성의 근거로 붙들고 있는 자랑거리들을 향해 무차별 융단폭격을 가한다. 베드로파가 자랑하는 표적과 능력,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자랑하는 말과 지식, 그리고 문벌이나 지혜 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지를 격하게 성토한다. 그런 다음 가장 초라하고 부끄럽고 작고 약한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참 능력임을 선포한다. 바울은 심지어 자신을 동조하는 파벌을 포함하여 네 개의 파벌 모두를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함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이루고자 했다. 그는 정치적 연합이 아니라 십자가 중심의 연합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렇다. 진정한 교회의 일치는 자신의 강함과 자랑거리를 수치거리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가운데 은총을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야 말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가장 건강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사랑의교회가 자랑하는 제자 훈련조차 한국 교회에 많은 유익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는 자랑거리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옥한흠 목사의 인격과 덕성도 마찬가지고, 소위 사랑의교회라는 브랜드 가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랑의교회가 짓게 될 2,100억 짜리 교회당은 십자가 앞에서 가장 부끄러운 괴물로 드러날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든 자랑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나누는 서슬 퍼런 칼과 창에 불과하다. 따라서 크기를 자랑 삼았던 메가처치는 자신의 크기를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교회는 그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많은 구제와 선교를 행한 것으로 자랑했던 교회, 순수한 교리를 자랑했던 교회, 설교를 자랑했던 교회,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던 교회, 특별히 담임목사를 자랑하는 이 시대의 허다한 교회들은 그 모든 자랑거리를 내려놓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치유되고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8. 마치는 글

 

솔직히 나는 이러한 제안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일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뜬금없는 제안에 어리둥절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메가처치 현상을 치유하는 길은 이것뿐이라고 믿기에 감히 이러한 제안을 해본다.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힌 한국 교회는 순전히 덩치만 남아 있는 형국이다. 그 안에 진리도 없고, 복음도 없다. 이는 교회 스스로가 진리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고, 스스로가 복음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없는 곳에 성령이 없으며, 성령이 계시지 않는 곳에 더 이상 교회는 지속될 수 없다. 다만 종교만이 남아 한 두 세대를 이어갈 뿐이다. 아직 남아 있는 거대한 덩치가 하나님의 역사를 증명하는 듯 하지만 실상 이는 허수요, 허상이요, 허세일 뿐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실감하기 위해서 교회의 덩치를 더 크게 키우는 일은 바닷물로 목을 축이려는 가련한 시도일 뿐이다. 한국 교회는 한때는 크게 부흥했지만 성령께서 떠나간 뒤 급속하게 쇠락해 버렸던 역사 속의 허다한 교회를 살펴 자신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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