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_구약'에 해당되는 글 617건

  1. 2014.08.01 욥기 19장13-29절
  2. 2014.07.31 욥기 19장
  3. 2014.07.30 욥기 18장
  4. 2014.07.29 욥기 17장
  5. 2014.07.29 욥기 16장
  6. 2014.07.10 욥기 1장
  7. 2014.06.23 다니엘9:1-19
  8. 2014.06.18 다니엘 3장

25절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27절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욥은 13-19절에서 주변의 모든 이들이 낯선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토로한다. 모든 이가 그를 멀리하고 떠났다는 것이다. 외로움과 버림받았다는 고통이 그의 마음을 힘들게 한 것이다. 재산을 잃은 것, 건강을 잃은 것도 큰 고통이겠으나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고통이 어쩌면 가장 큰 고통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절망과 고통의 상황 속에서 욥은 대속자(고엘)를 바라는 놀라운 희망을 붙든다. 그래서 지금은 낯선 사람들을 통해서 낯선 하나님이 되어버리신 그 분이 그 때는 낯선 하나님이 아니라 그분의 인정과 그분의 은혜를 입게 될 것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사람의 반응에 참 예민한 사람이다.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의 갈등을 너무나 불편해하는 편이다. 그것이 목회에서 장점일수도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직하게 가르쳐야 하는 점에서는 굉장한 약점이다. 때로는 함께 사역하는 이들이 낯선 사람들이 되어버리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며 하나님의 인정과 은혜를 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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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_구약/욥기2014. 7. 31. 23:30
6절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욥은 친구들의 말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욥의 허물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욥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후에 욥은 하나니께서는 마치 적이 된 것처럼 자신을 힘들게 함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자랑스럽게 여기던 온전한 사람이었던 욥. 인과응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고난.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아마도 한사람의 인생 속에 하나님의 선한 성품을 빚어가는 고난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6절 하나님이 나를 억울하게 하시고 자기 그물로 나를 에워싸신 줄을 알아야 할지니라

욥은 친구들의 말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친구들은 욥의 고난이 욥의 허물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욥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후에 욥은 하나니께서는 마치 적이 된 것처럼 자신을 힘들게 함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무한한 사랑과 자비로 품으신다. 그러나 잘못을 세미한 음성을 주시고는 양심으로 찔리게 하셔서 코너에 몰이놓고 항복을 받아내시는 집요한 하나님이심도 안다. 그 집요한 괴롭힘은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빚어내기 위함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랑스럽게 여기던 온전한 사람이었던 욥. 이제는 그 욥에게 적이 되어 공격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적하는(against) 것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마음은 여전히 자신을 위하고(for) 있음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욥의 고백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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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_구약/욥기2014. 7. 30. 21:56

2절 너희가 어느 때에 가서 말의 끝을 맺겠느냐

빌닷은 욥의 말을 들으면서 말이 끝나기 만을 기다린 것으로 보인다. 말을 들으면서 그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감하기보다 그 말을 어떻게 반박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상대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다. 나의 옳음을 주장하고 나의 논리가 더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에 충실한 모습이다. 나는 어떤가. 상대가 말할 때 그것을 잘 이해하려고 애쓰는가. 말하는 이면에 있는 마음과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쓰고 있는가. 이것이 진정한 대화이고 회의일 것이다.

21절 참으로 불의한 자의 집이 이러하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자의 처소도 이러하니라

5-21절에서 빌닷은 악인은 말 그대로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악인의 삶에서 빛은 사라지고 어두움이 찾아온다. 그물, 함정, 올무, 덫에 발이 걸린다. 그의 몸은 질병으로 약해진다. 이름도 사라지고 후손도 남지 않는다. 현재 욥의 상황과 어느정도 비슷한 것을 말한다. 결국 욥 너는 악인이기에 이런 어려움이 찾아온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쩌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자신이 믿는 바, 자신의 생각에 반대를 표시하는 자와 논쟁을 하다보면 어느새 사람은 없고 논리만 남게 되는 것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아내와 말다툼을 하면서 느끼게 된 것은, 사실은 아내와 내가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닌데 말다툼을 하다보면 서로가 어느새 양극단의 화신으로 그 편의 논리를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말할 때에 회의할 때에 다시한번 극단에 서지 않도록 주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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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_구약/욥기2014. 7. 29. 12:25

10절 너희 중에서 지혜자를 찾을 수 없느니라

 욥의 친구들은 지혜의 대표자들로서 욥에게 많은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욥은 지혜자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상대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 자가 주변에 없다는 토로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자는 많은 지식을 가진 자가 아니다. 지혜자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자의 삶 속에 있는 의로움을 발견할 수 있고, 그 사람의 마음에 있는 진실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이다. 더 나아가서 기존의 전통과 쳬계와 사상을 벗어나는 사건과 경험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볼 수 있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경험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범위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18절 나의 희망이 어디 있으며 나의 희망을 누가 보겠느냐

17장 곳곳에서 만나는 절망과 죽음의 이미지와 단어.

계획이 무너지고,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몸이 병들어 약해지고, 남들이 나를 비난하고 공격할 때

우리는 절망한다.

죽음을 생각한다.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지 않던가.

희망을 말하고 회복을 빨리 말하고 찾기 전에 좀더 욥과 함께 이 시간을 견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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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_구약/욥기2014. 7. 29. 12:17

1절 너희는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이로구나

5절 그래도 입으로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 근심을 풀었으리라

위로자는 상대를 강하게 하고 근심을 풀어주는 자이다. 위로의 자리에서 상대의 문제점을 찾아 고치려고 하기 보다는 상대의 입장에서 마음을 읽어주는 일일 중요하다.


6-14절 그가 나를 치고

'주께서 나를 ~하게 하시고'의 반복.

욥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괴롭게 하고 공격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도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하나님께 외치셨다.

실제는 사단이 그를 괴롭게 하였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용하셨다. 큰 틀에서 볼 때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시다. 최근 총리 후보자의 일제 침략은  하나님의 뜻이라 다른 발언이 논란이 되었는데 우리의 삶과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지점이다.


15-17절 내 손에는 포학이 없고 나의 기도는 정결하니라

욥은 여전히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죄가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하기는 쉽지 않다. 고문 속에서 결백을 주장하다가 고통을 못 이겨 죄을 지었다 말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과연 의롭다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친구의 공격이 있었는데 이 논리 앞에 누가 감히 의롭다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이가 없다.

여기에는 의로운 자의 고난이라는 상황을 극단으로 몰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이해가 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여러 고통을 경험하면서도 믿음에 붙어 있으려는 몸부림으로 보여진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기 원하고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을 결국에는 심판하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대가 묻어있다.


19절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데 계시니라

21절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6-14절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공격하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욥은 하나님만이 증인, 중보자, 중재자가 되어주실 수 있는 분임을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께 왜 나를 힘들게 하냐고 불평과 하소연을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분만이 나의 희망이라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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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_구약/욥기2014. 7. 10. 18:27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1, 8)였다. 그런 그에게 자녀와 소유의 복은 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단은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이런 복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저런 조건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조건과 이유를 제거해보자는 것이 사단의 의도이고, 그렇게되면 믿음은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 사단의 결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고난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조건이나 이유라고 할 수 있는 매개체가 다 제거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혹은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고 돌보신다고 느끼는 조건과 이유가 사라지는 때이다. 너무나 힘겨운 순간을 보내지만 결국 오직 하나님만을 직면하고 하나님 한분만이 나의 존재의 이유와 조건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빚어진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나요 라는 질문에 이전에는 이래서 저래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대답할 수 있다. 그러나 고난을 통과한 자는 대답이 달라질 것 같다. 왜 하나님을 사랑하냐구요? 그냥.
목회자로써 나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내면에는 목회에 있어서 성취감과 사람들의 인정을 매개체로 하나님을 대하고 있는 것을 끝임없이 발견하게 된다. 과연 나는 이런 까닭없이도 하나님을 믿고 사랑할 수 있을까? 앞으로 내가 만나게 될 고난은 이 질문을 던지며 나에게 찾아올 것 같다.

 

욥이...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1:20)

욥은 하루만에 자녀와 재산 즉 모든 것을 잃었다. 이 땅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충격과 상처를 한꺼번에 다 경험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너무나 기이하다. 그 상황에서 예배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말씀에 의하면 주시기도 하고 취하시기도 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가능하다. 욥은 사건 직후에 이렇게 할 수 있었지만 아마도 현실에서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될 때 신앙인의 삶도 정상궤도로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욥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의 경건한 삶의 습관이 그렇게 인도했을 것이다. 고난 중에도 이전에 해오던대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했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예배는 고난 중에서도 계속되어야 할 우리의 모습이다. 삶이 무너질 때 우리는 범죄와 원망을 저지르기 쉬운 상태가 된다. 그럴 때 범죄와 원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길이다. 평상시는 내가 예배를 붙들었다면 고난의 때는 예배가 나를 붙들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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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9:19)

다니엘은 말씀을 통해 심판의 날 수가 70년인 것을 깨달았다. 그것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하였다. 나의 기도는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지 돌아보게 한다. 또한 말씀에서 깨닫고 발견한 것이 나의 삶에 이 나라와 민족에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함을 깨닫는다.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이시며 자신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인자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계명을 지키지도 않았기에 결국 회복의 근거는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 자신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있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되시기 위해서 회복시키시기를 기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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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는 이미 성전중심의 신앙에서 토라중심의 신앙으로 바뀐 것을 전제하고 있다.

이제 경건이란 토라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배정훈, 109)


싸움의 본질은 신들의 싸움이다. 

토라에 대한 그들의 순종은 바로 신들의 신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들의 신앙고백은 입으로 나타나지 않고 토라의 계명을 목숨 걸고 지키는 순종에 있는 것이다.(배정훈, 115)


그리아니하실지라도.

위기로부터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위기 안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는 토라에 대한 순종으로 하나님에 대한 절대 신앙을 보인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배정훈 119)

여기에는 구약성서에서 인과응보를 통하여 형성된 하나님 이해의 절정을 드러낸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단순한 은혜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가처럼 보이며 인과응보는 하나님도 따라야 하는 원리로 이해되는 것이다.

시간이 가면서 이 사상이 하나님도 순종해야 하는 원리로 이해되었다.

인과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이고, 응보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하게 한다. 응보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기까지 욥기에서 하나님은 응보를 유보하신다(121)

신앙이란 철저히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유로 행하시는 것으로 남는 것이다(122)

예수께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것은 인과응보의 원리를 이 땅에서 죽음 너머까지 확장한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죽음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공의를 확신하면서 신앙을 위하여 죽기로 결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배정훈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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